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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감사(데살로니가전서 5:16~18)
출애굽기 23:16에는 ‘맥추절을 지키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맥추절’에서 ‘맥’은 보리 ‘맥’자입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보리 농사를 짓습니다. 따라서 맥추절은 보리를 수확하고 그 수확에 대해서 감사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신앙인은 맥추절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대해서 마땅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다.’ 항상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받은 교육의 수준을 뛰어넘는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또 탈무드에는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은 금은보화를 가진 사람보다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마지막으로 탈무드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행복은 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행복하고자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지 그 마음에 늘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라는 마음의 상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첫 걸음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는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범사’라는 단어는 영어로 ‘in all everything’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범사’라는 표현에 대해서 각 영어 번역본 마다 그 표현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모든 번역본을 총 망라해본 결과 ‘범사’라는 단어의 의미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모든 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모든 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오용합니다. 사람들은 자꾸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려고 합니다. 최근에 저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분도 어김없이 자신이 계시를 받았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저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보다 그렇게 쉽게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꾸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남발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서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조차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잘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사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잘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이 땅에 내셨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내셔서 이 땅에 존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즉 우리의 존재 자체를 감사하는 ‘존재론적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감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삶 자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그것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인간의 삶을 ‘피투된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즉, 인간의 삶이 이 세상에 던져졌다는 것이지요. 피투된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가 살아가는 나라, 부모, 살아가는 환경 등등을 선택하거나 의도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보니 한국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보니 특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적에 인간은 이러한 피투성을 깨닫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의도한 인생이 아닌데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이것은 ‘모순’입니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은 삶에 대한 책임이라는 모순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그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내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론적인 감사’입니다. “내가 왜 이 특정한 시대와 장소, 환경에 던져졌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이 땅에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우리의 삶을 긍정할 때,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게 됩니다.
존재론적으로 인생에 대해서 긍정하면서 감사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존재론적인 감사는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감사의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바로 부정, 원망, 불평, 비교, 미움, 분노와 같은 것들입니다. 존재론적인 감사가 우리 마음에 없을 때 우리는 우리 삶 그 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전직 주한일본대사 ‘무토 마사토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올 초에 이임하고 나서 본국에 돌아가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한국인도 아니면서 이런 책을 쓴 이 사람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종종 우리 주변에는 이 사람처럼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헬조선’이라는 최근에 유행하는 단어가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부터 비롯한 단어입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거야!” 그리고 이렇게 삶의 환경을 비관하는 사람들은 종종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시골교회에서 목회 할 때,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귀한 인생인데, 어찌 저리 쉽게 포기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는 자살을 큰 죄악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자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있어서인지 어떤 분은 성경책과 십자가를 품에 안은 채로 자살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한 분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고 거절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인 것입니다. 존재론적인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에 대한 긍정과 감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생은 실패했으니 다음 생에 만나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음 생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단 한번 뿐인 삶을 망치는 선택입니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더 나아가 분노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분노하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낳는 결과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는 비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주 타인과 나의 삶을 비교합니다.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감사할 수 없게 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이 없자 아침 6시에 노동시장에 나가 많은 사람들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고용했습니다.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자 많은 사람들이 신나서 일을 하러 갔습니다. 다음으로 9시에 갔더니 여전히 일할 사람들이 있어 주인은 또 품꾼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습니다. 12시에도 마찬가지로 주인은 많은 품꾼들을 고용해서 자신의 농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3시에도 마찬가지로 주인은 품꾼들을 고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5시에도 주인은 많은 품꾼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일이 저녁 6시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약속한 대로 모든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 씩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침 6시, 9시, 12시, 3시에 온 품꾼들이 화를 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일한 시간과 비교를 해보니 5시에 온 사람들은 터무니 없이 적은 시간을 일했는데, 똑같은 돈을 받아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품꾼들은 주인에게 대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앞서 너희들을 데려올 때, 한 데나리온씩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데려왔다.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나는 약속대로 했을 뿐이다.” 실직자였던 사람들을 주인이 데려온 것은 주인이 전적으로 품꾼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품꾼들은 자신이 받은 은혜는 잊고 비교에 빠져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타인과 비교할 때 우리는 감사하지 않고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타인 삶과 비교할 때, 그 결과는 원망과 불평입니다.
그렇다면 원망과 불평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원망에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고, 불평에는 없는 것입니다. 불평은 어떤 상황에든지 불평하는 것입니다. 불평에 습관이 들어 있는 사람은 어딜 가서든지 불평을 합니다. 왜냐하면 불평은 일종의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다르게 원망에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망의 대표주자는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고되게 노동을 하며 성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음을 도저히 그냥 보고 계실 수 가 없어서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의 40년간의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 갈 거리를 40년 동안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방황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우리는 이집트에서 고기를 먹었다’고 과거를 미화하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주시고, 물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면 줄 수록 더 달라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만함을 참을 수가 없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을 광야 생활에 비유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도 혹시 삶이라는 광야를 지나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감사한다면 행복하고 평안한 삶이 보장될 것이지만 불평한다면 그 끝을 보나마나 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인생 광야 길에서 끊임없이 불평만 한다면 우리 삶의 종국은 비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에서 더 나아간 것을 ‘분노’ 또는 ‘르상티망’이라고 합니다. 지난 달 6월 8일 부산 양산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섯자녀와 노모를 모시고 사는 행복한 가장이 열심히 아파트 도색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벽에 매달려서 일을 하니 힘이 들어서 핸드폰으로 노래를 켜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일을 하는데, 근처에 있던 한 남자가 이 음악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남자는 평소에 삶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했었던 지라 이 가장의 흥겨운 노래 소리를 듣기 싫어했고, 결국 이 가장을 아파트 벽면에 지탱하고 있던 밧줄을 끊는 이해될 수 없는 행동을 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가장은 아파트 12층에서 떨어져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일곱 식구를 책임지는 가정이 속절없이 죽고 만 것입니다. 범인은 자신의 분노,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안 풀리는지에 대한 화로 인해서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입니다.
6월 13일에는 연세대학교에서 한 대학원생이 논문을 지도하며 잘못을 지적한 지도교수의 연구실에 사제 폭탄을 만들어서 갖다 놓는 바람에 교수가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6월 17일에는 충주에서 고장난 인터넷을 조금 늦게 수리했다고 자녀가 셋인 인터넷 수리기사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범인은 자신의 삶이 잘 되지 않는다고 비관하고, 분노를 품은 나머지 인터넷 수리기사를 무참히 살해하고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깊은 분노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때, 우리 마음의 분노가 사라집니다.
주한 미국 상공회의소에서 제프리 존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십수년 동안 한국 사람들과 생활해 보니, 한국 사람들은 배고픈 것은 잘 참으면서도 남이 잘 되서 배 아픈 것은 못 참더라구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꾸 타인과 자신을 비교를 하면서 그 마음에 분노를 쌓습니다.
이와 같은 비교로 인한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상황을 긍정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황과 삶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에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체제에 순응하는 것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변혁하시고, 우리의 삶을 변혁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을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과 상황을 개혁하십니다.
올해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유럽과 미국, 그리고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 기념 학술제가 계획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던 개혁의 진정한 의미는 개혁의 주체는 하나님과 성서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모토로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오직 하나님의 말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내세운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주실 수 있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삶의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늘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변화와 변혁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멀린 캐러더스라는 미국의 목사가 쓴 ‘감옥 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의 목회 철학은 바로 ‘범사에 감사’입니다. 이 목사님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멀린 목사님에게는 심한 편두통이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이분이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에게 왜 편두통을 주셨습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너는 편두통에 대해서 감사한적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멀린 목사님은 ‘아니 주님, 어떻게 편두통에 대해서 감사합니까’라고 여쭈어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도 감사해보아라’고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멀린 목사님은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에게 편두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안 주시고 나에게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달을 기도하니, 편두통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 여든이 넘으셨지만 멀린 목사님은 그 일 이후로 자신에게 다시는 편두통이 생기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변화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개혁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내가 철저히 감사해 본적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감사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국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나에게 주신 부모님에 대해서 감사하기 시작하면 나에게 부모님이 가장 큰 복이 될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서, 내가 처한 환경과 시대에 대해서 감사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지역과 시대, 환경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감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최대치로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감사하며,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존재론적으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축복의 길로 바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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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군인 화이팅!^^
화이팅입니다~
영규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지 새벽마다 늘 영규를 위해서 기도 하고 있단다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ㅎ
저도 기도 많이하겠습니다!!
개혁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 절대적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존재, 나의 삶,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