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도시 전체에 걸쳐서 역사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안성이었다.
길가에 서 있는 사소한 돌덩어리든 이름 없는 건물이든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안성의 도심 여행은 오늘도 계속된다.
첫 번째는 안성1동 주민센터.
등본 뗄 것도 아닌데 안성까지 와서 갑자기 주민센터를 언급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건축물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이 건물의 외형이 범상치 않음을 바로 느낄 수 있다.
낙원역사공원 바로 맞은 편에 안성 1동 주민센터가 있다.
붉은 벽돌과 붉은 기와 지붕으로 이루어진 서양식 스타일의 안성1동 주민센터는 자그만치
1928년에 지어진 (구)안성군청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일제강점기까지 상업도시로 번성했던
안성의 행정 시설은 예전엔 안성의 옛 관아 터에 자리했다. 지금은 안성초등학교가 들어선
자리로 옮겼다가 1920년대에 다시 이 자리에 지어졌다고 한다.
해방 후 1966년까지 군청사로 쓰이다가 다른 자리로 이전 후 안성읍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현재의 동사무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명칭은 달라졌지만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관공서로 이용되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평면구성과 입면처리 등 당시의 건축적 특징과 특히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관공서 건물이 보존상태가
훌륭하기에 현재는 등록문화재로도 지정된 곳이다. 건물 자체도 특이하고 그 역사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건물을 현재도 관공서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안성이 가진 문화적 자산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성이 가진 매력은 시내 뒤편에 위치한 한 성당으로 이어진다.
바로 구포동 성당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안성성당이다.
지금까지 미륵불과 석탑, 당간지주 등 불교 위주의 문화재만 계속 답사를 다녔는데 안성에는 과연
불교 유적 밖에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성에는 유명한 성지와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성당 등 천주교와 관련된 역사의 흔적도 진하게 남아있다.
깔끔한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너른 마당이 보인다.
그 옆에는 안성성당의 백주년을 기념하며 새롭게 건립된 '착한 의견의 모친 성당'이라 하는
초현대적 건물이 나타난다. 그 바로 정면을 보면 로마네스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안성성당이 있다.
안성 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죽산, 미리내 등지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는 등 박해를 많이 받았지만
꾸준히 신자 수가 증가하던 도시였다. 그래서 자연스레 성당의 필요성은 날로 증가했고, 결국 1901년 프랑스 신부
꽁베르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
처음엔 군수를 지낸 백씨의 집을 사서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다가 1922년 지금의 성당을 짓게 되었다.
목재와 기와는 보개면에 있던 동안강당을 헐어서 활용했고, 다른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해 오기도 하는 등
성당을 짓기 위한 노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옥의 재료인 목조기둥, 서까래, 기와 등을 가지고 성당을 지었으니 정면은 평범한 성당의 외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측면을 돌아본다면 우리나라 한옥의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옥과 양옥의 절충적 형태를
지닌 독특한 형태의 성당인 것이다.
성당의 측면을 보면 아랫지붕이 윗지붕을 받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안을 들여다 보면 내부는 2층 건물이 아니라 단층 건물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주로 우리나라 사찰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형태를 보여준다.
성당 주위를 따라서 성모상과 예수의 고난이 조각되어 있는 부조가 쭉 이어지는 산책길로 조성 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성당을 측면과 후면을 제대로 감상해 본다.
처음에 정면을 봤을 때 일반적인 성당의 양식을 가지고 있어서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로마네스크 건물에 한옥 기와라니... 전혀 생각도 못한 문화의 결합을 이 건물에서 엿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전주의 경기전과 맞은 편의 전동성당에서 느꼈던 감동을 안성성당에서 또 한번 받게 되었다.
본성전의 정원을 거닐다 보니 낯선 이방인의 흉상이 눈에 띈다. 바로 성당을 건립한 초대 신부 꽁베르의 상이다.
그는 안성의 천주교 교세 확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분이다.
현재 안성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유명한 작물인 포도를 한국땅에 처음으로 가져와 성당 앞마당에 심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포도 재배 역사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현재도 안성 서운면 일대에 가보면 마을 전체가 포도밭이
펼쳐지는 광경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꽁베르 신부의 말년은 비극으로 흘러갔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면서
결국 옥사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도 그가 남긴 여러 성과들은 지금도 안성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안성 시내를 다니며 수많은 문화재들과 아름다운 성당까지 보고 나니 배꼽시계는 때를 맞춰 배가 허기짐을 알리고 있다.
안성 전역에 걸쳐 수많은 맛집들이 있지만 아침에 한국인의 소울푸드 국밥을 먹은 만큼 점심엔 왠지 색다른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비록 안성에는 아웃백같은 페밀리 레스토랑은 없을지 몰라도 30년의 내공을 지닌 추억의 경양식 맛집이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이름도 정겨운 마로니에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레스토랑이다.
여길 가려면 자연스레 안성 중앙시장을 거쳐 가야한다.
안성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대구, 전주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장으로 손꼽혔다.
상업활동이 왕성해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의 배경과 남사당패의 본고장으로 유명한 안성장은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경부선 철도가 안성을 비켜 평택으로 거쳐간 게 주된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안성의 수많은 무형,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보존된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현재는 중앙시장과 안성맞춤 시장이 아케이드로 연결되어 있어서 비가 오는 날에도 편리하게 쇼핑을 즐길 수 있고,
주차 시설도 비교적 충실하게 갖춰졌다.
안성의 대표 특산물인 배, 포도, 한우, 쌀 등은 물론 다양한 볼거리가 시장 전체에 두루 퍼져 있었다.
시장 상인들과 주민들의 정다운 모습들과 그 속에서 안성만의 새로운 특색을 만들려고 하는 노력들이 엿보인다.
안성에서 활기찬 모습을 보고 싶다면 감히 시장을 추천한다. 시장을 둘러보며 길을 내려와서 옆 골목으로 조금
꺾으면 예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마로니에의 간판이 보인다.
이제 2층에 올라가 마로니에의 유명한 경양식을 한번 맛보도록 하자. 가게 분위기는 나의 예상대로 시간이 80년대에서
멈춘 듯한 풍경이었다. 안성 일대의 어린이들이 가족과 함께 외식하러 오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이용되는 듯했다.
레스토랑 주인의 정다운 모습과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돈가스와 오므라이스 세트를 주문해서
먹어보니 베이커드 빈이 들어간 평범한 경양식 돈가스였지만 기본에 충실했고, 예전의 추억을 떠올릴 만한 맛이었다.
안성의 도심을 한나절 돌아보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간 여행을 알차게 즐겼다.
비록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앞으로 안성시에서 스토리를 엮어서 게스트 하우스 등의 숙박시설과 체험시설을 알차게
갖춰 놓는다면 관광도시로서의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본다. 이제 하룻밤 푹 쉬고 다음 여행지로의 여정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