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의 금강경 핵심 강좌 제8회 ( 제7.무득무설분 )<얻은 바도 설한 바도 없다> >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참다운 성품은, 참다운 진리는 본래 텅 비어서 일체 상과 일체 법이 없다. 맑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며 아무런 할 말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고받을 일인들 있을 수 있겠는가. 묵묵히 앉아나 있을 수밖에. 본래 이와 같은 이치라면 무엇이 깨달음이며 무엇이 설법이란 말인가.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은 무위법에서 온갖 차별과 분별들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차별과 분별들은 그 근본이 무위법임을 알아야 하리라.
제7.무득무설분(제칠 깨침과 설법이 없음)
<얻은 바도 없고 설한 바도 없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
유소설법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得阿褥多羅三邈三菩提耶. 如來
有所說法耶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는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수보리언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무유정법여래가설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褥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이라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고, 또한 여래께서 설한 단정적인 법도 없습니다.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법은 모두 얻을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그것은 모든 성현들이 다 무위법 속에서 차이가 있는 까닭입니다.”
第七 無得無說分
제칠 무득무설분
第七 無得無說分 (三, 斷無相云何得說疑)
제칠 무득무설분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아 如來가 有所說法耶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 유소설법야
須菩提가 言하사대 如我解佛所說義컨댄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수보리 언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이다
역무유정법여래가설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所以者가 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이다
소이자 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第七 無得無說分
제칠 무득무설분
그 다음,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인데,
저는 이 대목을 늘 그렇게 말합니다. 부처님에게는 재산이 있는데, 그 재산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무득(無得), 얻을·득자. 부처님이 얻은 게 뭐냐? 깨달음이죠.
부처님은 명예도 얻었고, 자식도 얻었고 그렇습니다. 하 좋은 왕궁도 얻었었어요.
그렇지만 그거는 관심없고, 부처님이 실질적으로 얻었다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죠!
그리고 또 그 깨달음에 의해서 부처님은 설법하신 것, 저 팔만대장경, 설법하신 것이 부처님의 큰~ 재산이야. 그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부처님의 재산은 두 가지가 있다.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의한 진리의 가르침, 이게 이제 득(得)과 설(說)인데, 부처님은 득(得)도 없고, 설(說)도 없다. 그 뜻이죠.
무득무설(無得無說).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아 如來가 有所說法耶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 유소설법야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말하자면 보리수 밑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는가?
분명히 얻었어요. 납월 8일 말하자면 보리수 밑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잖아요. 그 깨달음에 의해서 무궁무진한 설법이 나온거야. 그래서
如來가 有所說法耶아
여래 유소설법야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그랬어요.
부처님이 사실은 자기는 흐뭇하실거야.
깨달음과 그~ 많은 사람들에 진리의 가르침을 편 것, 이걸 중생의 어떤 그 감정을 좀 개입시켜서 이해하기로 하면 부처님은 너무 흐뭇하실 거야. 그래서 이 두 가지를 물은 거야.
그러니까 수보리가 말한 거야. 그다음에는,
부처님은 은근하게 이 두 가지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늘 자랑스럽고 마음 든든하게 이렇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건 순전히 중생 감정을 개입시켜서 하는 소리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그런데 수보리는 엉뚱하게도,
須菩提가 言하사대 如我解佛所說義컨댄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수보리 언 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이다
역무유정법여래가설
須菩提가 言하사대
수보리 언
수보리가 사뢰되
如我解佛所說義컨댄
여아해불소설의
내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유명한 그 금강경의 말씀이죠.
무유정법(無有定法), 요 넉자만 하더라도 사실 우리는 금강경을 만난 그런 그 보람은 이 넉자에 다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사실.
하아~! 천하의 아주 명언이죠. 천하의 제일가는 진리라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무유정법(無有定法)’!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이름을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가 없다!
요렇게 이제 한 문장으로 두고 새길 때는 그렇게 나눠서 새겨야 돼요.
그러나 ‘무유정법’이란 말 딱 떼놓고 그냥 그것만 가지고 써먹어도 실컷 써먹고도 남습니다. 너무 좋은 말씀이니까.
그러고, 그럼 깨달음은 얻은 거 아닙니까? 당신이 얻으신 깨달음이야.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이다
역무유정법여래가설
또한 고정된 법이 있어서 여래께서 가히 설하신 것은 없습니다.
무유(無有), 없다, 이 말이죠.
이게 수보리 입에서 나온 거야!
부처님 입에서 나온 게 아니고, 그렇지만 수보리도 이게 부처님 재산을 가지고 하는 소리니까 ‘여아해불소설의(如我解佛所說義)컨댄’, 이런 단서를 붙였어요. 이 금강경을 자~꾸 읽고 음미하고 살펴보고 하다보면은 고 속에 어떤 마음의 흐름들, 감정의 흐름들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냥 볼 때는 몰라도.
그러니 천 번 읽은 거 하고, 천 한번 읽은 거 하고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그래 부처님 평소에 설하신 것을 내가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 한번 대답을 해야 된다. 자기
그 견해는 못된다는 뜻이죠. 자기견해는 아직 못돼.
‘그렇지만 부처님께 나는 뭐 많~이 들었고, 난 또 기억력도 좋고.’ 그러니까 수보리가 ‘내가 그동안 부처님인데(께) 공부한 것에 견주어서 한번 정리해서 설명한다면은[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역무유정법여래가설(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이다
그랬습니다. 이게 수보리 입에서 나왔네요.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何以故오
하이고
何以故(하이고) 如來所說法(여래소설법)은, 왜 그런고 하면은[何以故(하이고)], 왜냐하면,
스님들은 말할 때, ‘왜?’ ‘왜냐하면’‘왜냐하면’부터, 말을 해놓고 ‘왜냐하면’ 해야 할 텐데 ‘왜냐하면’부터 이야기, 서두를 ‘왜냐하면’부터 해놓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게. 말 습관이 잘못돼 가지고. 설명을 주욱 해놓고 그걸 이해를 못하면 그때 ‘왜냐하면’해야 돼.
그래놓고 이제 설명이야.
왜냐하면은,
如來所說法은
여래소설법
如來所說法(여래소설법)은 皆不可取(개불가취)며, 여래께서 설하신 바 법[如來所說法(여래소설법)]은,
하! 훌륭한 법이죠. 정말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하는 그런 법입니다.
皆不可取며
개불가취
그러나 다 그것이 취할 것이 아니며
不可說이며
불가설
불가설이야. 뭐라고 설명할 이야기꺼리도 아니다, 이 말입니다.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비법 비비법
법이 아니야. 비법도 아니야.
그래 이게 이제 ‘즉비(卽非)’의 관점에서, 정견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의 실상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이게.
보통 우리 감정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있어요. 또 이야기도 많아. 부처님이 말씀하신 하~ 진리도 많아. 율법도 많아. 그 율법대로 지켜야 돼. 뭐 저기 그 해 그림자가 이 저 손가락 마디 하나만 지나가도 그 사시 넘었다고 공양 못해.
소금도 이게 썩는 것도 아니고 변하는 것도 아니지마는 묵혀서 내일 먹을 수가 없어. 소금을 탁발해 와도 다 먹어야 돼, 그날. 음식을 남기면 안 되니까. 그런 식으로 철두철미하게 이 법규를 세워놓고 초기에는 그래 살았거든요.
그래서 비구들이
‘소금은 그건 내뒀다 내일 먹어도 되도록 그렇게 우리가 하자’, ‘무슨 그런 소리가 있나, 하루 얻어 온 거는 하루 다 소비해야 된다고 되어 있는데’, 이래 가지고 그냥 박이 터지도록 싸우고 막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아 머언 저기 저 시내까지 그날 하필이면 밥이 없어가지고 조금 멀리까지 탁발해서 돌아오니까 사시, 그 해 그림자가 손가락 마디 한 마디 지나가버렸어. 먼데서 갔다 와놓으니까 배는 고프고 음식은 있고, 놔두면 금방 이제 변할 거고. 이걸 먹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시간은 사시 지나버렸고.
그걸 가지고 또 먹어야 되느니 말아야 되느니 시시비비를 아주 그렇게 했다는 거 아닙니까.
요즘 스님들은 전부 소견이 툭 터져가지고 그런 거 전혀 관심 없어요. 전혀 관심 없어. 뭐 비시식(非時食)주3)도 아무 문제 없어. 전부 아주 대승학인이 돼 가지고, (일동 웃음) 아주 초탈해버린 학인이 돼 버려가지고 비시식(非時食)도 그냥 뭐 사정없이 먹어 치워. (하하하... 웃으심)
어떻게 이해해야 될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다 초탈한 경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법이에요. 그런 소중한 법임에도 불구하고,
‘즉비(卽非)의 논리’, ‘곧 아니다’, ‘법은 곧 법이 아니다’,
‘법이라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다시 법을 보라’그런 뜻에서 이게
如來所說法(여래소설법)은 皆不可取(개불가취)며 不可說(불가설)이며 非法(비법)이며 非非法(비비법)이니 ,
所以者가 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이다
소이자 하 일체현성 개이무위법 이유차별
그랬어요.
여기 ‘차별’부터 이제 이야기하면은 ‘차별’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뭐 교리행장도 되고, 십이분교도 되고 온갖 이런 그 교리상의 교법 상의 내용들이 ‘차별법’입니다. ‘차별법’이에요. 그런데 그게 어디에서 나요?
예를 들어서 화엄경 같은 데에는 이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이렇게 해서 52단계가 주욱 나열 돼 있고, 그 안에도 들어가서 낱낱이 들어가가지고 또 뭐 무수한 그저 법이 또 시설이 되고.
또 그 후대의 사람들이 또 이 금강경을 가지고 뭐 십칠 단의(斷疑)라고 해가지고 17가지의 어떤 그 의심을 끊어가는 그런 점차다, 또 그렇게 파악해가지고 또 그걸 가지고 시설을 해놓은 사람들도 있고. 온갖 그런 그 교상차별이 전개가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에게 그게 있었나요? 없어.
기독교인에게는 그런 게 하~나도 없어. 아니, 불교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런 법이 없어. 본래 무법이야. 무위법, 이걸로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마라. 무법이라 그래 그냥. 본래 무법이야. 그런데 온갖 차별 법을 만들어 놓은 거지.
방편 상 그렇게 가설해 본 거예요. 그러니까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는 숱~한 눈이 있는 그물을 온 우주 법계에다 다 쳐.
그러면 그 중에 고기가 한 마리, 두 마리 걸리기 시작하는 거야.
고기가 한 마리 걸린다고 해서 그물 눈 하나만 가지고 딱 이렇게 해놔 두면 그게 그물이 됩니까? 그 그물에 와서 걸릴 고기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하나만 딱 가지고.
그러나 고기는 또 한 눈에 걸리지 다른 눈에 그렇게 걸리는 게 아니야. 그런 이치라 이 불법이.
불필요한 그런 그 법을 무법에서, 무위법에서 그런 차별 법을 전개한 이유가 어디있냐 이거야. 그런 차별 속에서 한 마리 두 마리 고기가 중생이라고 하는 고기가 걸려드는 경우가 있어. 천 개의 그물을 쳐놓고 거기서 한 마리만 건져도, 한 마리만 건져도 그것은 말하자면은 천 개의 그물을 만든 값을 하는 거예요.
저는 뭐 법공양 같은 것을 할 때 무작위로 막 줍니다. 인연만 닿으면 막 줘버려.
만권을 예를 들어서 법공양을 했어. 그 중에 한 사람이 감동 받으면 만 권 법공양하는 가치 그 속에 있다 이거야. 만권 법공양한 가치, 거기 한 사람만 감동을 받으면 충분히 있다 이 말이여. 그런 생각해요. 그런 생각을 하고 부처님은 그래요.
저~ 척박한 모래밭에도 씨를 막 뿌려라. 자갈밭에도 막 뿌려라. 심지어 바위 있는데도 막 뿌려라. 저~기 바위 같은데 뭐 아무리 오래 둬봐야 거기에 싹이 날 것 같지 않은 그런 바위위에도 막 뿌려라 그냥. 그럼 거기도 언젠간 먼지가 쌓이고 비가 와가지고 거기도 싹이 자라, 식물의 싹이 자라는 그런 그 기회가 온다.
그러면 거기에 뿌려놓은 씨앗이 싹을 틔운다.
그런데 하물며 그런 아주 문전옥답같은 그런 비옥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법공양을 한다면은 그건 뭐 말할 것도 없이 아주 쑤욱 쑤욱 아주 불심이 자랄 것 아니냐!
이게 이제 본래 부처님 마음이라. 부처님은 그랬었어요.
어떤 누구도 배격하는 경우가 없죠.
그래서 대승경전에 보면은 뭐 무슨 뭐 가루라, 아수라, 긴나라, 마후라가 이런 대중들이 무수히 등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잠깐 쉬었다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