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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예화
▣보기만 해도 달아나
기성자는 임금의 명령으로 싸움닭을 조련시키고 있었는데 한 열흘쯤 지났을까 임금이 그에게 물었다.
"조련을 시작 한지 한 열흘쯤 지난 듯싶은데 그만하면 싸움을 붙여볼 만하지 않겠나?"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은 한창 사나운 때라 자기의 기운만 믿고 한껏 허세만 부립니다."
그로부터 또 열흘이 지난 뒤 임금이 다시 물었다.
"자, 이제는 된 듯싶은데."
"아직도 안 됩니다. 지금은 다른 닭의 그림자만 보아도 다짜고짜 달려듭니다."
그로부터 또 열흘이 지난 뒤 임금이 물었다.
"지금은 되겠는가?"
"안 됩니다. 지금은 자기보다 큰 닭만 보면 시기를 하고 화를 납니다.
다시 또 열흘이 지난 뒤 임금이 또 기성자에게 물었다.
"이제는 되겠는가?"
"예, 아직 완전하지는 않사오나 그런대로 된 듯싶습니다. 맞서서 싸우려고 달겨들고 오더라도 태연하게 흔들림이 없는 것이 꼭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덕을 갖추어서 다른 닭이 감히 덤벼들지도 아니하고 보기만 해도 달아나 버립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행복을 주었다면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의 백열전구 발명 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그 자리에는 후버 대통령을 비롯하여 각계의 귀빈들이 참석하였다.
이윽고 저녁때가 되자 에디슨이 그의 조수에게 말했다.
"천천히 발전기를 돌리게나."
이윽고 에디슨이 일어나 스위치를 넣자 순간 수백 개의 백열전구가 켜지면서 기념식 장 안이 대낮처럼 환해지고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후버 대통령의 인사말이 있었다.
"에디슨씨는 미국의 자랑입니다. 그가 세계에서 어둠을 몰아내었고 우리는 모두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에디슨 씨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에디슨은 일어나서 답례를 하였다.
"제가 한 일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행복을 가져다주었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의 건강은 좋지 못하였고 그로부터 2년 후에 84세의 나이로 죽었다.
에디슨은 미국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고 나이 22세 때 인쇄기를 발명하여 특허를 따내 그 특허료 4만 달러를 자본으로 하여 발명회사를 만들어 대 발명가로서의 대도를 걷기 시작하였다.
영사기, 축전지, 전기철도, 축음기, 송화기 등 1300여 가지를 발명한 에디슨에게 성공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상상력과 희망 그리고 일하고 싶다는 의지입니다.
▣ 그 후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바텐은 젊은 시절 집권 세력에게 밀려나 생활의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한번은 그가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돈이 없어서 싸구려 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에 깨고 보니 밤새 구두를 도둑맞아 구두가 없어졌다.
마르티는 너무도 화가 나서 여관의 주인을 불러내서 한껏 화풀이를 하였다.
"아니 도대체 누가 내 구두를 가져갔단 말이오. 주인이 책임을 지시오. 동전 하나도 내게는 없단 말이오."
주인은 그렇게 화를 내는 마르티를 바라보더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구두 한 켤레를 내어주고는 교회에 함께 가 줄 것을 당부하였다.
마르티는 교회에 마지 못해 갔다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장애인을 보고는 그의 삶 자체가 변화되었다.
"저기 저 사람은 두 발이 모두 없어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 없는 사람이건만 어떻게 저리도 맑은 모습일 수 있을까? 나는 두 다리가 아닌 신발만을 잃어버리고서도 남에게 화를 내고 원망만을 하지 않았던가!"
아르티는 그 후로 조그만 것 하나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에 봉사하며 존경받는 정치가가 되었다.
▣ 우리들의 연주회
한 천재 음악가가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를 열었다.
연주 회를 갖고 휴식 시간에 잠시 오르간 뒤에서 쉬려고 할 때 한 노인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음악가를 보고 말했다.
"우리들의 연주회는 성공적이로군요."
이 천재 음악가는 의아해하며 말했다.
"오르간을 연주한 사람은 나인데 어째서 우리들의 연주회란 말입니까?"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나는 뒤에서 파이프에 바람 넣는 일을 열심히 했답니다."
그러나 음악가는 듣는 척도 아니하고 다시 연주회가 계속되자 오르간 앞에 앉았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오르간의 건반을 눌렸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관객들이 웅성거리자 다시 손가락에 힘을 주어 건반을 눌렀으나 마찬가지였다. 음악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오르간 뒷쪽을 보니 노인이 담배만 피운 채 쉬고 있었다. 그때서야 음악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노인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들의 연주회를 멋있게 성공적으로 끝냅시다.“
▣저는 정신 병자가 아닙니다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는 어렸을 때는 난폭한 행동을 한 적도 없었고 항상 많은 친구들과 잘 어울렸으며 국민학교 때는 공부도 잘하고 의욕적인 어린이였다.
그런 그가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수학 성적이 나빠 낙제를 했으며 그다지 성적이 좋지 못했다. 결국 중학교 3학년 때는 전학을 당하고 퇴학을 당하는 등 그다지 학교 성적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유태인을 박해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런 그가 총통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정신병원을 시찰키로 하였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모든 입원 환자들이 한곳에 모여 히틀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틀러가 병원에 도착하자 모두가 경례를 붙였다.
"하일 히틀러"
그런데 단 한 사람만이 경례를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였다.
그러자 히틀러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왜 나에게 경례를 하지 않나?"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각하, 저는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저는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입니다.
▣ 권력을 확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처녀 시절에 무척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그녀가 생활하는 데는 여러 가지 금해야 할 사항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 심장에 안 좋다는 이유로 홍차를 마실 수 없었으며, 정부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를 싣는 '타임지' 또한 읽을 수가 없었다.
1838년 6월 28일, 그녀의 나이 만 19세가 되던 해에 화려한 왕위식이 거행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빅토리아 여왕은 시녀에게 명하였다.
"럼주를 넣은 홍차 한 잔과 타임지를 가지고 오너라."
여왕의 첫 명령은 어김없이 시행되었다.
홍차와 타임지를 바라보고 잠시 미소를 띤 여왕은 다시 명령하였다.
"이제는 되었으니 다시 치우도록 하여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에 여왕은 자신의 여왕으로서의 권력이 어떤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 시험해본 것일 뿐이라고. 빅토리아 여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엄한 교육을 받은 때문인지 모든 생활과 정치에 있어 매사에 빈틈이 없고 열심이었다고 한다.
▣어느 친구에 우정의 선물
어느 이름난 도둑이 죽음을 앞에 두고 역시 도둑인 친구에게 유언을 하였다.
"내가 그동안 도둑질을 하면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자네가 항상 내 곁에서 많은 도움을 주어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내가 이제 죽음을 앞두고 무슨 욕심이 있겠나. 죽으면 그만이지. 내가 자네에게 보석 반지 하나를 줄 테니 자네에 대한 나의 우정으로 생각하고 받아주게나. 그리고 그 반지를 볼 때마다 나를 기억해 주게나."
친구의 유언을 듣고 있던 친구가 보석 이야기에 그만 정신이 번쩍나서 말했다.
"자네가 그동안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네. 아무렴 그 반지를 볼 때마다 자네를 생각하겠네. 그런데 그 반지는 어디에 있는가?"
죽음을 앞둔 친구가 숨쉬기가 힘 들자 어렵게 말을 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없다네. 건넛마을 최부자 집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장롱 서랍 안쪽에 들어있다네. 내가 전에 가지러 들어갔다가 못 훔치고 그냥 나왔지 뭔가. 그러니 자네가 훔쳐서 가지게나."
유언을 듣고 있던 친구가 기가 막혀 말했다.
"사양하겠네. 죽어서라도 힘 있으면 자네나 훔치게나."
▣공부를 한 후에는 아무 일이나
슈바이처는 독일 알자스의 카이저스 베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철학박사. 신학박사. 의학박사가 되어 1913년 학생 시절 헌신의 결의를 실현하기 위해 적도 아프리카에 가서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1952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으며 그의 저서 <문학 철학> <나의 생활과 사상>도 유명하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가봉병원을 세울 때 일이다.
처음에 그는 직접 벽돌을 찍고 나무를 베고 다듬는 등 모든 잡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런데 그 모습을 한 흑인 청년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서 있자 슈바이처가 그 흑인 청년에게 말했다.
"그냥 서 있지 말고 나와 함께 일합시다."
그러자 흑인 청년이 대답했다.
"나는 공부를 한 사람이라 그런 노동은 하지 않습니다."
슈바이처가 청년에게 말했다.
"나도 학생 때는 그런 말을 했지만 공부를 많이 한 후에는 아무 일이나 한다오."
이렇게 슈바이처가 가봉병원을 세우고 흑인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펴고 바쁜 나날을 보낼 때, 1952년 노벨평화상의 시상자로 수상식에 참석하여 달라는 통지를 받았을 때, 그는 자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헤아릴 수 없이 병원의 많은 일거리를 두고 훈장을 받으러 갈 시간을 어떻게 낼 수 있겠는가."
▣있던 돈에서 한 푼도 축나지 않았네
뒤마는 프랑스 낭만파의 극작가이자 소설가로 91편의 희곡과 250편의 소설을 남겼다.「몽테 크리스트백작」「삼총사」등 장편의 역작을 쉴새없이 쓴 대작가이다.
그 시대 하루 3프랑이면 한 가족이 생활할 수 있었는데 문호 뒤마의 연수입은 80만 프랑이었다.
뒤마는 수입에 못지않게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며 씀씀이가 몹시 컸을 뿐 아니라 또한 대단한 엽색가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홀몸으로 파리에 건너가 왕후 못지않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지만 만년에는 몇 푼의 돈밖에는 남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한 친구가 말했다.
"자네는 그 많은 돈을 벌고서도 결국 만년에는 금화 한 닢과 잔돈 몇 푼밖에 남지 않았구만."
그러자 뒤마는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50년 전에 파리에 건너올 때 가지고 있던 돈에서 한 푼도 축나지 않았네."
50년을 그 많은 돈을 실컷 쓰고 놀았어도 50년 전의 돈과 똑같으니 낭비가 심하지 않다고 하였던가.
▣스탈린이 후계자에게 준 처방
스탈린은 구소련의 수상 겸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다.
스탈린이 그의 정권이 끝나갈 무렵 그의 후계자로 후르시초프를 생각하고 그를 불러들였다.
"내가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자네를 나의 후계자로 지명하기를 결심했소."
"저를 후계자로 지명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정권을 잡고 정치를 하다 보면 처음에는 모두 자네를 추종하고 아부를 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뒤에서 비판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간부들에게는 신뢰를 잃고 곤경에 빠질 날이 올걸세. 그러한 경우를 대비해서 내가 처방을 가르쳐 주겠네."
그리고 스탈린은 봉투 두 개를 꺼내었다.
"처방을 적은 봉투이니 지하 금고 속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자네가 위기에 처하거든 하나씩 꺼내 읽어보게."
그리고 얼마 후 후르시초프는 정권을 잡게 되었고, 얼마간은 잠잠하였으나 스탈린의 말대로 첫 번째 위기를 맞게 되자 지하 금고의 첫 봉투를 꺼내어 읽어보았다.
"내가 해 온 정책을 비판하고 나쁜 놈이라고 하시오."
후르시초프는 곧 스탈린 비판정책을 펴서 첫 번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두 번째 위기를 맞게 되어 또다시 봉투를 열어보았다.
"곧바로 당신도 두 개의 봉투를 작성하시오."
후르시초프의 정권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과연 스탈린다운 처방이었다고나 할까.
▣돈이 한 푼도 없을 때에는
「들장미」「마왕」등 특히 가곡에 뛰어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슈베르트는 20세 경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너무도 가정생활이 빈곤하여 소학교의 강사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슈베르트는 나날을 검소하게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그가 종종 돈이 한 푼도 없을 때에는 바지를 뒤집어서 창밖에 걸어두곤 하였다.
"나는 외출을 하지 못합니다. 호주머니가 텅 비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하는 뜻이었단다.
슈베르트와 진정한 우정으로 맺어진 희극작가 바우엘룬펠트가 있있다.
어느 날 그에게 약간의 돈이 생겨 해질녁쯤 되어 쾨룬트나톨 극장 옆의 다방에서 밀크커피 한잔과 크루아상 빵 6개를 먹고 있는데 슈베르트가 들어왔다.
슈베르트 역시 커피 한잔과 크루아상 빵 6개를 먹었다.
바우엘룬펠트가 놀란 듯 쳐다보고 있자 슈베르트가 말했다.
"사실은 나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네. 놀랬나?"
바우엘른펠트는 슈베르트에게 손을 내밀면서 위로하듯 말하였다.
"아니라네, 실은 나도 마찬가지라네."
"응? 자네도?"
두 사람은 서로의 가난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한때 슈베르트가 마이엘호파와 함께 살고 있을 때 그는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한시까지 작곡을 계속하면서도 그 동안에 아무것도 먹지 아니하고 고작 서너 개 피의 담배를 피우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조선조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안변 설봉산 밑의 토굴에서 도를 닦고 있는 무학대사를 만났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대사는 꼭 생김새가 돼지 같구려."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대왕께서는 꼭 부처 같이 생겼습니다."
태조는 못마땅한 듯
"나는 대사에게 꼭 돼지같이 생겼다고 했거늘, 대사는 어찌하여 나를 부처 같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무학대사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무학대사는 고려말에서 조선조에 걸쳐 명성이 높았던 고승으로 이름은 자초(自超)였고, 이태조의 스승으로 조선조 건국에 기여한바 크다.
▣그래 나도 다시 지작하는 거야
영국의 비평가이자 역사가인 토마스 칼라일은 대단한 악필이었다.
스코틀랜드 어느 인쇄소의 문선공이 칼라일의 원고를 맡아 작업을 하면서 어찌나 어려움을 겪었던지 칼라일의 원고만 보아도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에서 문선공을 구한다고 하기에 이 문선공은 그 인쇄소를 그만두고 자리를 옮겼다. 막상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려고 원고를 받아 본 순간 그 문선공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쿠! 맙소사. 이 사람의 원고가 꼴도 보기 싫어서 런던까지 도망 왔더니 또 이놈의 원고가 있다니."
어느 날 칼라일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프랑스 혁명사>를 탈고한 후 이웃에 사는 그의 친구인 스튜어트 밀을 만나 원고를 보여주며 말했다.
"내가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원고라네. 자네가 한 번 읽어주었으면 좋겠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던 그가 창백한 얼굴로 칼라일을 찾아왔다.
"자네의 원고를 그만 나의 하녀가 난로에 불을 지피기 위해 난로 속에 넣어 버렸다네. 정말 할 말이 없구만." 칼라일은 친구의 말을 듣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2년 동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원고가 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칼라일은 정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석공이 작은 벽돌을 하나씩 쌓아서 높고 긴 벽을 쌓는 것을 보는 순간 새로운 용기가 솟아났다.
"그래 나도 다시 시작하는 거야. 예전에도 한 페이지부터 시작하지 않았던가." 그는 그 즉시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하였고 처음에 쓴 원고보다 더 잘 쓰기 위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심혈을 기울이며 썼다고 한다.
▣일 년 전에 맡겨둔 각본이
영국의 모파상이라고 불리는 모음도 젊었을 때는 그의 소설이 팔리지 않아 애를 많이 먹은 일이 있었다.
모음이 작가 생활을 시작한 11년간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하든 영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결의로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런던의 한 극장이 연극을 무대에 올려 공연만 했다 하면 꼭 실패를 하자 그 다음 작품을 신중하게 검토하던 중 잠시 무대에 올릴만한 작품을 찾고 있었다.
그 극장의 연극 연출가가 책상 서랍을 뒤져보니 모옴이 일 년 전에 맡겨둔 <프레드릭 부인>이란 각본이 눈에 보였다. 대단한 작품은 아니나 무대 위에서 몇 주는 공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무대에서 공연하였는데 뜻밖에도 대성공을 거두어 런던 전 지역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후 모옴에게 각본을 써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모옴은 그동안 써두었던 원고를 내주었는데, 모음의 작품은 공연마다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모음은 영국 극단 최고의 인기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경제적 어려움도 해결되었다. 모옴은 오후 한 시 이후에는 머리가 둔해지기 때문에 절대로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던킨도넛의 창업자인 윌리엄 로젠버그는 고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1916년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는 14세 되던 해에 '경제 대공황'을 맞아 가난과 맞설 수밖 에 없었습니다. 1주일에 겨우 20달러씩 벌어 부모님을 모시고 힘들게 생활했던 그였지만,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생활은 빠짐없이 했습니다.
21세 되던 해에 작은 회사의 지배인이 된 그는 30세에 '모빌런치 서비스'라는 회사를 차리게 됐고, 사업이 날로 번창하여 도넛과 커피만을 주종으로 하는 가게를 전국 곳곳에 개업하게 됐습니다.
이렇듯 성공을 거듭한 노젠버그는 72세 생일 축하 파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몹시 어둡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동행자가 되셔서 늘 함께 짐을 져 주셨고 그분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며 지금까지 실로 많은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지식' 보다는 '태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로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 청년들이여, 한번 승부를 걸어보시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미노 피자의 창업주인 톰 모너건은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 미시간 주의 한 고아원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될 무렵 한 가정으로 입양되었지만, 학교에서 여러 번 사고를 치는 바람에 결국 퇴학 처분을 받고 맙니다.
쓸쓸하게 교문을 나서는 톰 모노건의 머리에 고아원 시절에 자기를 많이 사랑하고 지도해 주시던 한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절대로 버리시지 않는단다. 그러니 낙망하지 말고 큰 별을 따도록 노력해 보아라."
그 선생님은 고아요, 문제아였던 톰에게 인생의 희망을 심어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퇴학당한 톰은 선생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새롭게 용기를 내어 피자 가게에 취직했습니다.
우선 밀가루 반죽법부터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배웠는지 숙달된 뒤에는 피자 한 판을 11초 만에 반죽하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오늘날 전 세계에 8,000여 개의 체인점을 갖고 있는 성공한 기업 도미노 피자의 창업주가 되었습니다.
톰 모노건은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들이여, 그대의 생애를 하나님께 맡기고 한번 크게 승부를 걸어보십시오.“
▣기도의 계단으로 오른 한 영화감독
영국의 영화감독 중에 J.A. 랭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출근할 때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꼭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는데, 스스로 그것을 '기도의 계단'이라고 불렀습니다.
한 계단씩 올라가며 집중적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의 계단으로 출근하여 사무실에 앉으면 그날 일이 잘 풀리곤 했습니다.
그는 저녁에 퇴근할 때도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오래가다 보니 그는 정상을 차지하는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었습니다.
[출처] 좋은예화: 아름다운예화 재편(25)|작성자 선한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