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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Henri Emile Benoit Matisse
(1869년 12월 31일 - 1954년 11월 03일 사망 )
프랑스 출신의 20세기 야수파 화가
피아노 레슨
중앙에서 왼편은 시원스럽게 열어젖힌 커다란 창이 있고, 오른편은 뒤쪽에서 높은 걸상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앞 쪽의 메트로놈의 박자에 맞춰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 보고 있다. 왼편 아래쪽에는 테라코타의 여인 조각상이 앉아 있다.
하얀 깃털
1917년에 시작되는 마티스의 지중해 시대는 양광(陽光)과 미녀, 그리고 꽃에 둘러 싸인 행복한 기간이었다. 이 모델 앙트와네트가 쓰고 있는 모자는 마티스 자신이 밀짚 모자에 깃털과 리본을 핀으로 꽂아 만든 것으로, 그것을 중심으로 가벼운 선의 아라베스크가 그림 전체에 행복감을 덮어씌우고 있다.
찬장
마티스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지만 또한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찬장 위에 커다란 넥타이 모양으로 접힌 테이블 클로드가 바둑판무늬로 장식되고, 그 위에는 역시 무늬 모양의 배가 하나 놓이고, 그 옆에는 네 개의 배를 담은 비딱하게 놓여 불안한 모양의 접시가 화면 전체를 흔들고 있다. 칼의 손잡이는 찬장에서 바깥으로 나와 조금만 건드리면 떨어질 것 같다. 칼이 놓인 방향 때문에 찬장의 바닥은 역투시법에 의한 화면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배치된 정물을 이렇게 마음대로 변모시켜 자기 감흥을 표현하는 마티스의 정물화에 대한 생각을 잘 알게 하여 주고 있다.
王의 슬픔
마티스의 만년의 작업 중에 그의 색채적 천재성을 자유 분방한 감각과 함께 발휘하게 하여 준 것이 <색종이 그림> 시리즈다. 그는 이전부터 유화 제작의 준비 단계에서 포름이나 색을 연구하기 위하여 색종이를 잘라 붙여 보는 일을 해왔으나, 1941년에 큰 병을 앓으면서 침대 위에서 붓 대신 가위를 들고 많은 걸작을 남기게 되었다. 이 작품은 농후한 설화를 아라베스크적 색과 형의 드라마로 꾸민 실로 감탄할 걸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보라색의 드레스
마티스가 만년에 집념적으로 다루던 주제들이 온 화면이 강한 생명력에 넘치는 리듬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꽃과 화려한 미녀, 그리고 오달리스크 등 즐겨 택해 온 제재들을, 직선과 곡선, 점들을 익히 써온 아름다운 색들에 의하여 한 화면 속에 총합적으로 다루어, 한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검은 배경의 독서하는 여인
1914년경부터 마티스가 종종 써오던 검정색이, 이 작품에 와서 가장 풍부하게 검정색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화면 전체를 검정색으로, 꽉 채우고 여기 저기에 필요로 하는 형태와 색을 알맞게 배분하여 정말 격조 있는 회화적 효과를 이루는데 성공하고 있다.
생굴이 있는 정물
1940년 마티스는 71세의 고령이었고, 봄에 잠깐 파리에 머물렀다가 나치스의 프랑스 침공으로 니스로 내려가 정착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제작 시간을 줄여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의 작품은 대작을 피하고, 화면은 점점 더 음악적 하모니를 기조로 한 상태가 된다. 전작<음악>에서도 그랬지만, 개개의 사물을 취급하는 방법이나, 색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하모니는 음악적인 울림을 이루고 있다.
정물
'내가 화면에 놓는 모든 색조로부터, 마치 음악의 화음과도 같은, 색의 살아 있는 화음이 연주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한 마티스의 말이 이 작품에서 말 그대로 실현된 듯한 느낌이다.
달팽이
1940년대부터 계속해 온 그의 색종이 그림은 기존의 오브제를 화면에 도입한 꼴라쥬와는 다른 단색 괏슈를 칠한 종이에서 스스로의 이미지를 오려내어 그것을 풀로 붙여 구성하는 형식이다.
당초 이 <달팽이>는 '현실에 뿌리박은 추상적 패널'이라고 이름 붙여 있었다.
화실의 裸婦
1898년에서 99년에 걸쳐 파리에는 새로운 미래적 조형에 열을 띤 젊은 화가들이 아카데미즘에서 근대 회화에로의 최초의 돌파구로서, 인상파적인 화풍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거기에서 각자 자기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마티스는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리더격으로, 런던으로 신혼 여행차 건너가서 터너를 연구하고, 시냑의 논문 '들라크로아에서 신인상파주의까지'를 읽는 등, 색채의 실험을 거듭했다. 이 작품도 당시의 프레 포비즘에 속하는 것으로서, 나부의 거의 빨간 색채와 그 배경의 강렬한 초록의 대조에 의하여, 점묘풍의 화면을 이루고 있다. 전체의 화면은 격렬한 터치로 되고, 순수한 색채에 의존한 화면 구성을 하려는 마티스의 시도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라 할 것이다.
豪奢
마티스에 있어서 포비즘의 시기는 1905년 부터 8년까지의 짧은 기간동안이었고, 그 이후 차츰 '균형과 순수함과 그리고 조용함'의 예술로 전환되어 간다. 그 무렵의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의 진정제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예술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의 '화가 노트'에 적고 있다. 이 작품은 수채화의 담채(淡彩)처럼 미완성으로 느껴질 정도로 엷게 처리되어 있다. 색채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억제되어 있고, 그 대신 마티스는 자연계의 속에서 나부가 나타내는 움직임을, 한순간 사이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곡선 속에 포착하려 하고 있다. 이 작품에 있어 그는 색채보다 극히 단순하게 데포르메된 데생에 의하여 한순간의 자연과 인간과의 상관 관계를 생명있는 영원성에 부각하려 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 상태가 빚는 약동감이 화면을 흐르고 있다.
드랑의 초상
마티스가 드랑을 최초로 알게 된 것은 국립 미술 학교를 그만두고 그가 서른 살이 되던 해(1899년)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나가면서였다. 1905년 여름을 스페인의 국경지대의 지중해안에 있는 어촌 코리우르에서 함께 지내면서 포비즘의 꽃을 피우고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들은 거기서 서로의 초상도 그렸는데, 마티스는 이 작품에서 드랑을 젊고 생기 넘치는 동료로 표현하였다. 이 초상에서 그는 그늘 부분에도 어두운 색을 넣지 않고 동일 색가(色價)의 대립되는 색을 놓아, 사물의 명암이 아닌, 색과 색의 관계를 형성하는 색채적 구성으로서의 색면으로 표현했다. 배경의 색도 이등분되어, 그것은 주황, 노랑, 빨강의 주제가 가지고 있는 색과의 대비적 효과로서의 보색 관계를 형성하려는 것이다.
Portrait of Andre Derain, 1905
自畵像
1899년에 스승 모로가 죽고, 그 다음 해에 미술 학교를 그만 두고 카리에르의 화숙 (畵塾)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드랑과 비에트와 가까워진다. 그리고 화상 보라르로부터 세잔의 작품 <세 浴女>를 사서 간직한 것도 이때이다. 이 작품은 그 다음 해 그가 31살이 되던 해의 작품으로, 정기(精氣)가 넘치는 자화상이다. 명쾌한 필치와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 명암의 적절한 배분 등 종래의 고전에서 배운 화법에서 차츰 탈피하고, 단순하고 명쾌한 색면에 의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등 마티스의 조형적 의지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납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얼굴의 처리는 코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 명암의 표현 의도에서가 아니라, 색채 그 자체의 가치를 발현한 듯 하다. 상체의 하얀 셔츠 위에 여러 가지 색 터치를 한 것은 색채 그 자체의 언어를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窓
1905년 여름, 드랑과 함께 스페인의 국경 근처에 있는 지중해안의 마을 코리우르에 체재하면서 마티스는 그의 작품상에 큰 비약을 가져온다. 이 작품도 그 무렵의 점묘적 분할주의의 수법으로 그린 <호사 정숙쾌락>에 이어 제작한 그의 포비즘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에 속한다. 신인상파적인 영향에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순수한 원색을 대담한 터치에 의하여 시원스럽게 화면을 처리하고 있다. 색채는 자연 속의 대상 고유의 색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화면 안에서 완벽한 조화의 실현을 위하여 재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포비즘을 실현한 색채 해방, 색채 독립인 것이다. 여러 색채에 의한 화면 구성은 필연적으로 사물을 평면화하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 있어 화면 아래쪽 중앙에 있는 화분과 꽃은 무늬처럼 평면화하고, 창밖의 경치도 모두 그런 효과로 그려지게 되었다.
마르케의 초상
마티스의 최초의 마르케와의 만남은 1892 년 10월, 장식 미술 학교의 야간 클라스에 서였다. 그후 모로의 교실을 목표로 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함께 배우며, 그 우정은 두터워졌다. 마르케는 마티스와 함께 1905년에 처음으로 열렸던 포비즘 전에 출품했으나, 후에는 새로운 인상파풍의 화가로서 단순한 풍경을 그리는 화가로 안정된다. 색채의 발루르에 예민한 감각을 나타 낸 마르케는 온건한 성격으로서, 마티스의 한 동반자였다. 이 작품이 주는 느낌은 배경의 분할된 빨강과 보라색, 그리고 얼굴에 여러 가지 색면으로 표현된 점은 포비즘적인 수법이지만, 색조는 마치 친구 마르케의 성격을 나타내려는 듯이 안정되고 있다. 빨강에서 보라까지의 색채의 해조(諧調)는 강한 대립보다는 무리없는 조화로 느껴진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
마티스는 1905년 <모자를 쓴 여인>과 <창> 을 살롱 도똔느에 출품하고, 이어서 이 작품은 그 전시 기간 중에 그렸다. 출품했던 작품들은 색채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발적이고 다채로운 초기의 포비즘적 경향인데, 이로써 당시 포비스트들이 살롱에 첫인정을 받는 기회도 주어졌다. 그러나 이 작품은, 상당히 억제된 수법으로 화면을 구축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를 교묘한 밸런스에 의하여 구사한 이 작품에 있어서, 마티스는 그가 단지 감각적인 색채가 아니라, 색채에 의하여 건실한 화면을 구성하는 화가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색채의 단순하고 평탄한 색면에 얼굴은 중앙의 녹색 가르마를 중심으로 양쪽을 구분하고, 경쾌한 터치에 의하여 단숨에 완성한 듯한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마닐라 쇼올을 걸친 마티스 부인
마티스는 1906년경부터 몇 번에 걸친 아프리카 여행에서 아라베스크 무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차츰 그의 내면 속에 근동취미(近東趣味)의 엑조티시즘을 크게 자극하였고, 그것이 곧 색채의 단순화를 통하여 장식성(裝飾性)을 달성하게 된다. 이 작품도 그러한 장식적인 무늬의 호화로운 쇼올을 화면 중앙에 클로즈업시키고, 단순한 배경 처리를 했다.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색채가 마티스의 손에서는 놀랄 만큼 맑은 해조(諧調)를 가진 울림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그는 색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색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표현에 쓸모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선입견을 갖지 않고 색을 캔버스에 놓아 간다.' 마티스 부인의 그림자가 벽 위에 얼마나 맑은 청색으로 놓이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온 화면을 얼마나 투명하게, 화려하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둑
이 작품에서 마티스가 얼마나 대상이 가진 고유의 형이나 색에서 해방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어느 쪽에서 밝은 빛이 비치고, 또 어는 쪽이 그늘져 있는지, 사물의 묘사를 위한 명암에는 관심이 없고, 화면 자체의 구성상 필요로 하는 명암만 있을 뿐이다. 둑 위에 있는 나무들이 물에 비쳤지만, 비친 나무나 하늘이 더 짙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 색면 하나하나는 그 자체가 평면으로 장식되어, 풍경의 현실이 전연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밝고 축축하게 젖은 듯한 색들이 서로 어울려 그 자체적인 뉘앙스가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현실과는 다른 훨씬 처량하고 맑은 공기와 화려한 정경을 느끼게 하고, 그리하여 그것은 화면 독자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이르고 있다. 대상에 충실한 색이 아니라 화가가 필요로 하는 언어로서의 색을 대담하게 구사하고 있다.
이본느 란베르 양
마티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입체파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색감에 있어서도 그의 화려하고 유려 하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금붕어 어항>에서 설명했듯이 당시의 입체파의 영향을 그 나름대로 받아 들인 결과일 것이다. 1908년 전후의 피카소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피카소가 인물의 얼굴을 무수히 강한 선으로 분해하여 재구성한데 대하여, 마티스의 경우 이 작품에서 선을 흐르는 빛의 율동으로 쓰고 있다. 날카로운 쇠붙이로 긁어낸 둥근선은 원을 그리며 운동하고, 볼륨의 표현과는 관계 없이 그것은 모델의 젊고 우아함을 강조하는 선으로서, 그녀의 둘레를 흐르고 있는 음향적인 빛과 공기를 눈에 보이는 것처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다. 마티에르 효과에 있어서도 날카롭게 긁어 낸 자국이 금관악기의 화음을 느끼듯 시원스럽다.
室內, 금붕어 어항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부터 마티스의 화면에는, 검정이나 짙은 회색의 무채색이 도입되고 있다. 무채색과 유채색의 적적한 배색에서 화면을 보다 품위있게, 때로는 고전적으로 이끌어감을 느낄 수 있고, 특히 이 작품에 있어서는 당시의 화단으로부터 그 나름대로 받아들여진 입체파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즉, 실내의 구도를 보면 원근법적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벽이나 창문, 테이블 등의 시점을 약간 어긋나게 함으로써 화면의 분위기를 이상하게 부유성(浮遊性)을 강조한 듯하다. 1914년 가을, 마티스는 코리우르에 체재하면서 종합적 큐비즘 시대의 팡 그리스와 친교를 맺었는데, 그와 열렬한 회화론을 주고받았던 영향으로 느껴진다. 마티스는 금붕어 어항을 자주 그렸는데,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로, 창밖의 풍경과 연결시켜 화면 깊숙이 시선을 끌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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