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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 7:7~12
제목: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 기독교는 우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며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하나님은 단순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전에 여러 번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 내용을 아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단순하시고 선하심이 더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하시기 때문에 복잡 미묘하거나 콤플렉스가 없으시고 쿨(cool)하며 나이스(nice) 하십니다. 이단과 신비주의, 또는 율법적인 종교는 하나님을 복잡하고 구차한 분으로 설명하는데요. 심지어는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려 치료한 후 대가(代價)를 얻어내는 놀부처럼 묘사하기까지 합니다. 새벽기도를 며칠 간 해야만 기도응답을 받고 일요일에 사고가 난 사람은 주일 겸 안식일인 일요일에 주일성수를 안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거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등, 치졸하고 미신적인 종교적 상상력으로 교인들을 겁박하고 복음과 구원에서 멀어지는 종교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신비주의자의 사고방식으로 명칭은 주일이지만 실제로는 안식일인 일요일에 이동을 하거나 쇼핑을 하면 사고가 나고 저주를 받는다면, 왜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과 불신자들은 일요일에 여행을 하고 심지어는 죄를 지어도 불행이 오지 않는 것입니까? 종교적 충성심으로 새벽기도를 가다가 교회 도착 전 교통사고가 나는 신자는 왜 사고가 납니까? 이 사고에 대해서 신비주의자는 이렇게 합리화 하겠지요: 새벽기도라는 축복의 장소에 오는 것을 귀신이 방해했다. 뭐 그런 식으로 종교 소설을 쓰면서 미신을 믿듯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정신 좀 차리도록 하나님은 마태복음 7장을 읽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7장을 읽으면 인간의 종교성과 미신적 본능이 결국에는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탈을 쓴 세상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마:7:22~23을 읽으면 확실합니다.
마7: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마7:22의 거짓 선지자들은 분명히 세상 신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귀신을 쫓을 때도 분명히 세상 신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쫓았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이 그들을 무시하고 모르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라고 호칭을 하십니까? 마7:11에 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을 잘못 이해하고 인간의 감정과 종교성에 기초하여 미신적으로 기독교를 믿으면 사실상 세상 종교를 믿은 것과 동일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을 모르면 미신으로 기독교를 믿습니다. 다시 복습합니다. ‘비공유적’이라는 다소 어려운 말은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독, 불, 무(독립성∙불변성∙무한성)이고요. 무한성은 완, 영, 광, 단(완전성∙영원성∙광대성∙단순성)입니다. 이건 항상 기억하셔야 해요.
● 신비주의에서는 ‘종교의 영’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런 용어는 없고요. ‘종교심’∙‘종교성’(행17:22)이라는 용어는 나옵니다.
(개역개정)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개역한글)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
이 종교성은 상당히 중립적인 단어인데요. KJV는 이 단어를 실질적이며 부정적으로 잘 묘사했습니다: 미신적인(superstitious).
(NIV) Paul then stood up in the meeting of the Areopagus and said: "Men of Athens! I see that in every way you are very religious. (KJV) Then Paul stood in the midst of Mars' hill, and said, Ye men of Athens, I perceive that in all things ye are too superstitious. |
KJV는 부정적인 의미의 부사 too를 붙여 미신적인(superstitiou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세상 종교나 미신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유대교는 기독교 신앙이 아닌 유대인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의 안식일 개념을 기독교의 주일에 적용하는 교회나 목사들이 꽤 있습니다. 안식일로 주일성수를 왜곡하면 집에서 먼 거리의 교회로 차량 이동하면 안 됩니다. 주일 날 쌀이 떨어지고 음식물이 떨어져도 굶어야 합니다. 종교성은 미신으로서 참된 기독교 신앙을 방해하는 독소와 가라지가 됩니다. 기독교인 중에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승산이 없는 일에 미신적 종교심으로 중보 기도의 위력을 믿고 합심 기도의 능력을 믿고 무모히 뛰어들었다가 실패하는 분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미리미리 낌새가 안 좋을 때 혈압약∙당뇨약 등 치료제를 복용하면 호미로 막을 것을요. 치료의 타이밍을 놓친 후 가래로 막고 포클레인으로 막습니다. 세속 종교성에 기초하여, 믿음에 의지하고 종교에 의지하고 (신비한 능력에 의지하면 질병이 치유된다고) 잘못 생각하다가, 중병에 걸리고 반신불수가 되어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불행의 늪에 빠진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사업이나 경영에서 잘못된 종교적 편향과 미신적 근거로 판단하면 잘 망합니다. 정신병이나 우울증도 초기에 잘 진료를 받고 치료제를 복용하면 빨리 낫거나 중증으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일반은총 밖에 받지 못한 불신자는 과학적∙합리적으로 대처하여 쉽게 끝내는 일을 종교중독에 빠진 이상한 기독교인은 멀리 돌아 험하고 복잡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기독교 성도는 특별은총까지 받은 자로서 더욱 지혜로워야 하는데요. 그렇지 못하고 정신분열을 귀신이 드러난 현상으로 오해하고, 귀신을 쫓고 합심 기도만 한다면, D 급이었던 경증 정신병자가 완전 A 급 중증 정신질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 아래 성경 본문에서 매우 무서운 어조로 그런 신비주의자와 종교중독자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인 독불무(완영광단) 용어를 설령 모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공유적’이라는 말은 쉬운 말로 ‘상대적’인 것이고요. 사람에게도 조금은 하나님과 비슷하게 나타나는 속성입니다. 예를 들면 미천한 인간이나 심지어는 도둑이나 창녀도 자신의 자식은 사랑합니다. 이 경우의 자식 ‘사랑’이 공유적 속성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공유적 속성이 나옵니다. 오늘 묵상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위 말씀에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은 공유적 속성이고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은 비공유적 속성입니다. 성도들의 진실한 기도를 듣고 최선의 응답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가능한 절대적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일그러진 욕망이 개입된 경우도 있고 남의 것을 빼앗아 지 자식에게만 좋은 것을 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SKY 캐슬이나 펜트하우스 같은 것을 보면 그런 내용 많이 나오는데요. 그러나 어쨌든 세상의 연약하고 미천하고 악한 부모일지라도 그 자식에게만은 사랑과 공급을 해줍니다. 그건 분명하기 때문에 주님도 하나님의 사랑과 공급을 말씀하실 때 위 구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부모도 부모일진대 하나님을 그런 부모만도 못한 이기적이고 복잡한 분으로 왜곡하는 이단, 신비주의자와 율법주의자들은 죽어서 갈 곳이 딱 한군데입니다. 그곳은 주님께 버림받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마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은 떠나가라!’는 예문에 나오는 그 ‘떠나가라!’의 명령 대상이 되는 것이 종교성 = 미신(superstition)의 최후입니다. 악한 영을 쫓는다는 자가 악한 일을 하는, 마치 영화 무간도의 유덕화 같은 존재가 미신 전파자들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들은 악한 일을 했습니다.
…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
영어 성경도 마7:22의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은 자들을 ‘악한 일을 하는 자’(마7:23)로 번역했습니다.
(NIV) Then I will tell them plainly, 'I never knew you. Away from me, you evildoers!' (KJV) And then will I profess unto them, I never knew you: depart from me, ye that work iniquity. |
NIV는 주님께서 분명하게, 솔직하게(plainly) 말씀하신다고 번역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귀신을 쫓는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는 자(evildoer)가 있습니다. 무간도의 유덕화는 표면상 경찰관이지만 그의 출신성분과 내면의 정체성은 범죄자였습니다. 그가 경찰 노릇을 하는 것은 불법과 범죄를 잘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행17:22에 사용된 단어 종교성(religion)과 미신(superstition)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종교심을 가진 분들은 칭의의 결과인 성화를 하지 못하고, 표면의 선함과 다르게 은밀하게 죄악을 행합니다(work iniquity). KJV 번역에서 쓴 단어 iniquity(이니쿼티)는 사소한 죄를 넘어선 ‘사악한’ 죄를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공언(公言)을 하신 겁니다(profess). 이러한 참담하고 치명적인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7장을 두루두루 잘 읽고 정확히 왜곡 없이 이해해야만 합니다.
● 오늘의 본문과 그리고 아래에 연관되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마7: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연약하고 어리석은 육신의 부모일지라도 그분들이 우리에게 사랑과 공급을 해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자라나고 살았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급은 그 육신의 부모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선하고 풍성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성∙미신으로 똘똘 뭉친 이단과 신비주의가 왜곡시킨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완전히 파괴해야 합니다. 그것도 진정한 회개의 한 부분입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이단 교주나 신비주의자들은 포로로 잡은 교인들에게는 병원을 의지하지 말고 믿음으로 헌신 헌금을 하고 신유를 받으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교회의 재산을 횡령하고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몰래 병원에도 다닙니다. 자신이 안 하는 것을 남에게는 강요하는 경향이 사기와 위선입니다. 기독교가 늦게 들어온 한국에서는 목사의 부인인 사모를 준(準)성직자로 간주하는 관행이 팽배해 있는데, 이 잘못된 관행에 대한 개선이 필요합니다. 우체부의 부인이 남편과 함께 우편배달을 해야 하고 소방관의 부인이 남편과 함께 화마(火魔)와 싸워야 합니까? 종교심과 미신을 버리고 목사의 부인을 합당하게 합리적으로 바라보아 주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을 남에게도 해보라 하고,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미신과 달리 공평하고 합리적인 복음입니다.
마7: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
묵상자가 솔직히(plainly) 공언한다면(profess) 정상적이고 건강한 교리를 전하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훨씬 넓습니다. 이찬수 목사님 정도 외에는 좋은 교회를 찾기가 힘이 들어서 거기에만 교인들이 몰린다고 할 정도입니다. 순진한 일반 평신도는 이상한 교회에 낚이기가 너무 쉬운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좋은 교회를 찾기는 어렵고 그저 이단이나 신비주의의 영향을 안 받은 평범한 교회라도 발견하면 다행이라는 어떤 목사님의 고백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마7: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요즘에는 목사 되기가 너무 쉽습니다. 군소교단과 무인가 신학교의 문이 넓게 환하게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우습게 보는 말단 공무원만 해도 육체의 건강, 정신과 인격의 상태, 범죄경력 등을 다 검증하고 임용됩니다. 한국의 대형 교단 중 하나인 곳에는 편목자가 꽤 많고 그들 중 일부는 고등학교 졸업장 미제출제자도 있다고 합니다. 대형교단이 이 정도면 군소교단들은 오죽이나 혼탁하겠습니까? 반면에, 위 15~20절에 나오는 성령의 선한 열매가 나오는 목사님이나 성경교사를 만나는 것이 현실에서는 매우 어렵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평신도들도 각자도생을 위하여 성경만 열심히 읽는 것 외에 건전한 교리와 신학서적도 틈틈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7:15~20과 같은 분별의 능력이 조금은 더 생길 겁니다.
● 무거운 이야기에서 상쾌한 말씀으로 제목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참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분명히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요.
마7: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지만 때로는 자녀가 불편해 하는 징계도 주실 수가 있습니다. 좋은 징계를 주시는 겁니다.
히12: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하나님은 결손가정의 주정뱅이 아비가 아니십니다.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되, 그 좋은 것에는 사랑의 징계도 있습니다. 기복종교는 사랑의 징계를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미신과 율법폐기론으로 탈선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징계(주시는 좋은 것)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받게 합니다.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께 늘 좋은 것을 공급 받습니다. 우리가 혹시 탈선할 때 주시는 사랑의 징계도 결국에는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것까지도 이해하고 인정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축복이 이 묵상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초신자나 바쁘신 분들은 위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됩니다.
다양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석의 내용도 아래에 올립니다.
네, 본문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 마 7:9-11
이 귀절들에 있어서 예수님의 강이유 논법이 다시 보인다. 죄인인 너희도 자식의 청구를 들어주거든 선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니 아버지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 사49:15; 시27:10 참조. 좋은 것.- 이것은 영적인 것들이니 곧, 셩령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성령님이 주시는 것들인데 그것이 물질일 수도 있고 물질 아닌 다른 것들일 수도 있다. 누가 복음에서는 간절한 기도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였는데 이와 동일한 내용 있는 말씀이다.(눅11:13)
====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칼빈은 이 말씀이먼저 말씀(7-11)과는 연락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바로 윗말씀과 어떤 관계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 귀절의 우리말 번역은 너무 의역이 되어 있다. 이 말씀의 원문을 글자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고 할 것인데 이것은 두 가지로 적극성을 가지는 도덕률이다. (1) 인본주의에서는 기소불욕을 물시어인하라(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도 행치 말아라)라고 하여 겨우 악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을 정도이지만 여기서는 자기에게 좋은 것을 남에게도 하라고 하였으니 적극적 도덕이다. (2) 이것은 남들이 나에게 선으로 갚아줄 줄 미리 생각하고 행하라는 말이 아니고 남들이야 네게 그렇게 행하건 아니 행하건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행해야 될 것을 가르친다. 눅6:30-26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그 뜻이다. 이것은 사랑의 정신으로 선을 행함이니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롬13:8-10). 세간에는 고래로 이와 비슷한 말들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소극적인 것이었을 뿐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장코뱅 강이유는 강하지만 부드러운, 그런 정도의 뜻 같습니다. 그러나 국어사전 등에 명확히 나오는 것은 없네요.
@노베 찾아보니 안 나오네요.
<매튜 헨리 주석>. 기도의 교훈(마태복음 7:7-11)
우리 주님께서는 6장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바르게 향하면 보상을 받게 되는 명령된 의무로서의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 특히 때로 우리의 육신과 혈기를 거스리기도 하는 그의 교훈들을 순종하려고 하는 도덕적인 힘(윤리감)을 얻기 위한 지정된 수단으로서의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Ⅰ. 여기에 있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7절)는 세 단어는 동일한 목적으로 사용된 교훈이다. 즉 이 말은 같은 뜻을 가진 말로서, "기도하라, 자주 기도하되 신실하고 진지하게 기도하라,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기도의 내용을 의식하면서 계속 기도를 하라. 무시로 기도하되 열심히 기도하라. 거지가 동냥을 구하듯이 구하라." 풍성한 은혜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그들 스스로가 거지의 직업을 택하여 구걸 행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직업이 성공하는 데 지름길이 되는 직업임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다.
"구하라, 너의 부족함과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나타내 보아라. 그의 약속을 따라 너희들의 쓸 것과 소용되는 것을 그에게 고하라.
여행자가 길을 물어보듯이 구하라. 기도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겔 36:37). 잃어버렸던 귀중품을 찾듯이, 상인이 값진 진주를 찾듯이 찾으라. 기도함으로써 찾으라(단 9:3). 집에 들어가려는 자가 문을 두드리듯이 두드리라."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허용될 것이며, 그의 사랑과 은혜, 천국에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죄는 우리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문을 닫고 빗장을 찔러 놓았다. 우리는 "주여, 주여, 열어 주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며(계 3:20; 아 5:2), 우리가 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허락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거지에게 허용하지 않는 은혜인 것이다.
찾는 것과 문을 두드리는 것은 구하고 기도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1. 우리는 "구할 뿐만 아니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므로써 기도를 뒷받침해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지정된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가 "구할 것"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 과수원지기는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에 대해 일년간을 연장하면서 주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두루 파겠나이다"
를 덧붙여 말하고 있다(눅 13:7, 8). 하나님은 성경을 연구하고 지혜의 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 은혜와 지식을 주신다. 또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자에게는 죄를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2. 우리는 "구할 뿐만 아니라 문을 두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문 앞에 와서 끈질기게 "구해야"만 하며, 또한 기도할 뿐만 아니라 간청하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 부지런히 "찾고," 계속적으로 문을 두드리고, 기도하거나 수단을 강구하는 데 오래 참아야 하며, 끝까지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Ⅱ.여기에는 부가된 약속이 있다. 유리들이 기도할 때 온 노력을 기울였다면 노력한 그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마음을 찾으시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는 너에게 평화의 해답을 주실 것이다." 교훈은 삼중적(threefold)으로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인데 이것은 "교훈에 교훈"을 더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은 육중적(sixfold)으로서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약속에 약속"을 더하고 있다. 왜냐하면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약속"은 정확하게 "교훈"에 답하기 위해 기록되어 있다(7절). 하나님은 그를 섬기는 자들을 만나실 것이다. 즉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빌려주거나 파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주시는" 것이다. 선물보다 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네가 무엇을 기도하든지 약속을 따라 "구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이 네게 적당하다고만 생각하신다면 너희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도록 "주실 것이다." "구하는"것이 곧 받는 것이다. "네가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않거나 올바르게 구하지 않음이라." 구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가질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그때에 너희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를 찾으시며," 그분을 찾기만 한다면 풍성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자비와 은혜의 문은 원수나 방해자를 못 들어오도록 단단히 잠가두는 것처럼 닫혀 있지 않고 친구나 자녀들에게 하는 것처럼 너희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문 앞에 서 있는가? 만일 네가 친구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또는 언제든지 제출할 수 있는 약속의 표를 믿음의 손에 가지고 있다면,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아무런 염려도 하지 말라. 한 번 두드려 열리지 않으면 기도함으로 계속 두드리라. 친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그에게 무례한 짓이 된다면 그대로 가버리라. 그가 늦어질지라도 계속 기다리라."
2. 약속이 중복되어 있다(8절). 목적은 동일하지만 조금 첨가되어 있다.
(1) 이 약속은 올바르게 기도하는 모든 자에게 적용된다. "내 제자인 너희들만이 기도한 것을 응답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니,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녀노소, 빈부귀천, 계급 학식의 여부를 가릴 것 없이 그들이 믿음으로 나아온다면 다같이 은혜의 보좌에로 영접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2) 이 약속이 중복 기록된 것은 그 주어지는 것을 한 몫에 종합하기 위한 것인데, 현재시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 약속이 미래에 대한 약속 이상의 것임을 나타낸다. "구하는 자마다 앞으로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현재도 얻게 된다. 우리는 실제로 그 약속을 적용시키고
유효하게 하실 것을 믿음으로써 신실하신 약속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며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실상 현재의 소유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능동적인 신자는 즉시 시작하여 약속된 축복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우리가 약속을 따라 소망 중에 가진 것은 손에 가진 것처럼 확실하며, 따라서 유쾌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다"(시 108:7, 8). 모든 것이 내 것이며, 단지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믿음만으로도 나는 그렇게 되어질 수가 있다. 조건적인 하사금은 그 조건을 이행할 때에만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도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간구에 대한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는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3. 이 말씀은 이 세상의 부모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본능적으로 타고난 성품, 즉 자녀들이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려는 천성과 비교하여 그 유사점을 들어 설명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까다롭거나 기분이
언짢지만 않다면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다라 하면 돌을 주겠느냐?"(9,10절)고 말씀하신 후 계속하여 추론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자라도, 너희 자녀들의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겠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자녀들의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겠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1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1) 우리의 간구와 기대를 "지도하기"위한 목적,
[1] 우리는 어린 자녀와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존경과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어떤 자녀가 부족한 것이나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서 불만을 털어놓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나의 주님!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새롭고 싱싱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자기의 쓸 것을 공급해 주십사하고 기도해야 한다.
[2] 우리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맡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 지를 알지 못하지만(전 6:12),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일임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여기에서 어린 자식은 그의 아버지에게 꼭 필요한 "떡"과 건강에 도움이 되신 "생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어린 자식이 어리석게도 "돌"이나 "뱀," 또는 아직 덜 익은 과일이나 장난하기 위하여 예리한 칼을 달라고 졸라댄다면 그 아버지가 아무리 친절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가졌을 때 오히려 우리를 손상시키고 해를 끼치는 것들을 터무니없이 요구할 때가 있다. 그는 이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구하여도 주시지 않는다. 사랑함으로 거절하는 것은 성을 내면서 주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낫다. 만일 우리가 원했던 것을 모두 가졌다면 이것에 앞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방치되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한 이교도 쥬베날(Juve-nal)의 시에 의하여 잘 표현되어 있다(Sat. 10).
네 모든 운명을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맡겨라.
그들로 하여금 너를 위해 경영하게 하고, 그것을 주께 하라.
그들의 뛰어난 지혜가 네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나니,
그들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은 탁월하시도다.
아 ! 우리는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다, 그 반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신의 완고한 욕망이 이끄는 대로 동반자를 구하고, 결혼을 갈망하고 그리고 또 상속자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 만이 우리의 장래의 자손들과 아내가 누구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
Permittes ipsis expendere numinibus, quid
Conveniat nobis, rebusque sit utile nostris,
Nam pro jucundis aptissima quaeque dabunt
Carior est illis homo, quam sibi: nos animorum
Impulsu, et caeca, magnaque cupidine ducti,
Conjugium petimus, partumque uxoris: at illis
Notum est, qui pueri, qualisque fulura sit uxor.
(2) 우리의 간구와 기대를 "격려"하기 위한 목적.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거절되거나 그 결과로 말미암아 실망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또한 "떡" 대신에
이를 상하게 할 "돌"을 가지거나(아무리 튼튼한 틀 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생선" 대신에 독침으로 깨무는 "뱀"을 가지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실로 그것을 두려워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형벌하시지 않고 더 좋은 대우를 해 주실 것이다. 세상은 종종 "떡 대신에 돌"을, "생선 대신에 뱀"을 주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와 같이 하시지 않는다. 아니, 우리는 아버지가 어린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듯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부모의 마음속에 그들 자녀들의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자비로운 성벽을 부여하셨다. 아무리 의무감이 희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마치 그것이 본능인 것처럼 변함없이 베풀어진다. 일찍이 부모와 그의 법적인 자녀와의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반드시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은 솔로몬 시대에 비합법적인 경우(역주:해산한 여인과 어린 아이, 왕상 3:16-18)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2] 하나님은 그가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확실히 나타내시며,
우리를 그 자녀로 삼으신다. 우리가 자녀들을 보살피고 도와주기 위하여 자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그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도와주려고 하실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는 것이다. 부모들이 가진 사랑과 자비는 자연에서가 아니라 자연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한히 큰 것이라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위해 염려하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아버지가 자녀를 염려하는 것과 같으며(시 103:13), 아니 그보다 일반적으로 더 다정한 어머니가 염려하는 것과 같다(사 66:13; 49:14, 15).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자비, 선하심이 이 세상의 그 어떤 부모들의 그것보다도 더 탁월하시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실은 "하물며"라는 말로 입증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부모들보다 무한히 탁월하시다는 확고부동한 진리에 근거되어 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을 초월하신다."
우리의 육신적인 부모들은 우리를 돌보신다. 또한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보살핀다. 하물며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돌보지 않으시겠는가! 이 세상의 부모들은
본래적으로 악하며,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속했던 선한 성품을 상실하였고, 짓궂음과 부정한 타락성을 가진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며," 때를 따라 적절하게 "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내 부모들은 버렸으나 그는 영접하시기 때문이다(시 27:10).
첫째, 하나님은 더 많이 알고 계신다. 부모는 가끔 어리석게도 분별없이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히 현명하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바라는 것, 또한 우리에게 적절한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신다.
둘째, 하나님은 더 친절하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애로운 부모들의 모든 애정을 한 그릇에 담아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긍휼"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마치 촛불과 태양, 한 방울의 물과 대양(大洋)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보다도 더 풍성하게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시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히 사랑하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대했던 것과 같이 불효한 자녀나
방탕한 아들에게까지 극진한 사랑을 베풀거늘 하물며,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이 잠잠하시겠느냐?
@장코뱅 아주 깁니다. 이 정도면 주석이 아니라 강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미신적 오해를 불식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이신 것을 알게 하는 좋은 복음의 묵상입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할 때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큰 축복이라는 것을 더 깨닫습니다.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하기 때문이며,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당연히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계속 구해야 하겠습니다.
7장의 본문 이하의 말씀이 본문과 연속되고 있네요.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다가오나 노략질하는 이리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분별하라.
위 내용을 종합해보겠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께 구하면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니 안심하고 계속해서 구하라. 그런데 너희가 남을 대접하는 만큼 너희도 대접을 받을 거라는 걸 알아야 한다.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험난하여 찾는 자가 적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많은 자들이 넓은 길로 가려고 한다. 이때에 거짓 선지자를 삼가야 한다. 그들의 특성은 노략질하는 이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가 지지도 못하는 짐을 억지로 지우며
행하지도 않으면서 하게 함으로써 자유를 박탈하고 너희를 종으로 삼는다. 그들은 유대인의 선생들이 아닌가. 나 예수는 너희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이다. 내 말을 듣고 내게 와서 배우면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할 것이다.
요약과 추가적인 설명 감사합니다.
종교성이 미신적인 것, 신비주의와 같은 의미라는 설명이 좋네요. 귀신을 쫓는다고 했지만 불법을 행한 악한 자로 판명을 받은 자들이 주님의 저주를 받고 쫓겨나는 설명을 통해서 미신과 과열된 종교성에 기독교인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악한 자들이 위에서 언급한 거짓 선지자들과도 연결되는 것을 알겠습니다.
깊은 이해와 분별에 감사합니다.
좋은 댓글에 매우 공감하며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