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가게
배정행
흰 머리가 많이 자라 나오지 않았는데 염색하러 갈 때가 있다. 염색이 목적이 아니라 수다 떨 상대가 필요할 날 염색방을 찾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하루 일정이 텅 비어 있을 때, 갑자기 물밀 듯 밀려오는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서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하는 날이 있다 . 그런 날 찾게 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단골 염색방이다.
요일마다 빠짐없이 문화 강좌 수업과 취미 생활로 일정을 빡빡하게 잡아놓은 이유도 이런 아침의 우울감을 없애기 위해서다. 날이 어두워졌을 때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찾아오는 쓸쓸한 감정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아침에 느끼는 외로움이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면 쉬게 되는 수업이 생기다 보니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아침이 종종 생긴다.
하루쯤 푹 쉬어야지 하고 여유를 가지려고 애써 보지만 마음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하루라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 아플 것만 같은 게 마음의 병인지 성격 탓인지 모르겠다. 친구들에게 연락해 본다. 하지만, 요즘 할 일 없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은 아픈 사람밖에 없다는 말에 걸맞게 약속 없이 집에 있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 여기저기 단체 카톡방을 기웃거려도 보지만 별다른 이슈가 없어 보이는 한가한 오전, 갑자기 단골 염색방 생각이 난다.
남산동에 있는 천연 염색방에 다닌 지 벌써 15년이 다 되어간다. 흰 머리가 생기기 전부터 멋내기용으로 염색하기도 했다. 천연 염색 재인 헤나로 염색하면 머리카락에 힘이 생기고 윤기가 난다기에 두 달에 한 번꼴로 헤나 염색을 하러 다녔다. 그런 나의 단골 염색방에도 최근 들어 발길을 끊어버리게 된 일이 생겼다. 염색 재료에 새로운 바람이 분 것이다. 머릴 감기만 하면 염색이 되는 획기적인 샴푸가 나오면서 집에서 쉽게 염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과의 갈변 현상을 연구하여 카이스트 교수가 만든 샴푸라 한다. 친구한테서 그런 정보를 듣고부터는 줄곧 그 샴푸로 머리를 감으면서 동시에 염색도 하게 되었다.
만날 사람도 없고, 갈 데도 없는 날 아침, 그 염색방이 생각났다. 새로 나온 샴푸 때문에 손님이 끊긴다면 그 가게는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가게를 잘 유지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곳에 오랫동안 드나들면서 말 상대가 되어주어, 서로의 집안일이나 가족 구성원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한 번 가면 세 시간 이상 걸리는 일이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원장이 여느 때처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유 없이 울적한 날엔 그런 환대에도 감동하기 마련이다. 단골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느낌이리라. 그동안 왜 그렇게 뜸했었냐고 물어보길래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샴푸만 하면 염색되는 게 있잖아요. 그걸로 버텼어요. 바쁠 땐 간편한 게 좋더라고요.”
핑계 대듯이 말하니 원장이 내 머리카락을 들춰보면서 말했다.
“이런, 머릿결이 푸석푸석한 게 윤기가 하나도 없네요. 헤나로 염색할 땐 머리카락이 반짝반짝하더니.”
장사치들이 자기네들에게 유리해지도록 하는 말이려니 하고 웃어 넘기려다 거울을 보았다. 왠지 원장 말대로 머리카락이 예전만 못해 보였고 염색도 군데군데 덜 됐는지 얼룩덜룩해 보였다. 집에서 볼 때보다 더 분명하게 머릿결이 거칠어진 것 같았다. 염색이 완벽하게 되지 않은 게 샴푸로 하는 염색의 단점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머릿결이 윤기를 잃어버린 줄은 몰랐다.
“그 염색 샴푸가 건강에도 좋지 않대요. 암 발생시키는 성분이 들어 있다고 TV에서 말하던데요. 좀 귀찮더라도 헤나로 염색하세요.”
나도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FDA 승인을 받은 것이고 카이스트 박사가 발명한 샴푸라 해서 믿고 쓰는 중이었다. 헤나도 오래 쓰면 얼굴까지 검어진다고 대중 매체에서 한참 동안 떠들어 댔었다. 그런 말에 현혹돼서 애용하던 제품을 바로 끊어버리지 않는 게 내 성격인지라 소문을 믿지 않고 꾸준히 사용했다. 그런 꾸준함 덕분에 곱슬머리인 내 머리카락을 퍼석거리지 않게 유지해 올 수 있었는데 이젠 간편함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머릿결을 망치고 만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원장은 아침마다 손자 밥 해먹이러 다니던 때가 좋았단다. 이제 커서 할머니 손길이 필요하지 않게 되자 며느리가 오지 말라고 한다고 말할 때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나도 뭐 그런 며느리가 있냐며 같이 흉을 보기도 했다. 나의 근황을 물어보기에 작은딸이 올 여름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얘기해 주었다. 나이가 찼는데 결혼 얘기가 없어 걱정된다고 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는지 잘 됐다고 하면서 본인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렇게 수다 떨다 보니 세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점심으로 원장이 싸 온 도시락을 같이 먹었다. 그곳에 가면 늘 밥을 같이 먹게 된다. 어떨 땐 내가 빵을 사서 들고 갈 때도 있다. 단골 가게는 마치 내 이웃 같기도 하고 외로운 마음이 들 때 찾아가기도 하는 친구 집 같기도 하다. 늘 문을 열고 있으니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어서 어떨 땐 친구 집보다 낫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엔 프렌차이즈가 많아서 단골 가게를 찾아가도 주인이 직접 경영을 하지 않는 데가 대다수다. 그런 집에 가면 아르바이트 점원이나 매니저가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주지 않아서 허전하고 단골 맛도 나지 않는다. 예전처럼 주인이 환대해 주는 가게가 많지 않아서 아쉽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내가 쓸쓸할 때 찾아갔다가, 실컷 수다 떨고 나서 위로 받아 환해진 얼굴로 나올 수 있는 단골 가게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 덕분에 이 외로운 세상을 살아갈 힘도 몇 배 더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지 않겠는가.
첫댓글 대면 대화방은 중년즈음이 되면 삶의 필수 요소라 봅니다. 사우나, 미용실, 노래교실, 댄스교실, 파 골프, 요가, 걷기 등등 많습니다. 중년이후의 삶을 좀더 유연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죠. 특히 가사관련 수다는 많은 정보도 교환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