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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음악의 당면과제
제 1 절 복음주의와 음악목회
한국교회를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교회라고 단언 해도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음악의 당면과제 중 복음주의와 음악목회에 대한 논의는 이와 같은 전제에서 시작 되어져야 한다. 복음주의 교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나름대로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복음주의와 음악목회”에 대한 논의를 할려고 하는 것은 복음주의 교회가 갖는 음악적인 특색과 대학의 교회 내지 종교 음악과에서 지향하는 교회음악의 특색 사이에는 서로가 납득하지 못하고 용납 할 수 없어서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엄청난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 주의의 시각에서 보는 교회음악이란 어떤 것인지를 이해 할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주의와 음악목회”라는 주제는 현 한국교회 음악계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이다.
1.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복음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신학자가 아닌 교회음악인인 필자가 이야기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복음주의"란 말의 참뜻은 역사를 통하여 많이 변질 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종교개혁때의 모든 개신교는 "복음주의자"들이었다. 독일 루터교회는 아직도 복음주의란 말을 그들 교파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복음주의"라는 말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는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란 의미로, 즉 "자유주의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널리 사용 되고 있다.
"복음주의"란 말을 Random Hous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① 복음서와 복음서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사람들,
② 성경, 그 중에서도 신약의 가르침과 권위를 강조하는 기독교에 속한
사람들로 교회의 제도적 권위를 반대하고, 그리스도께서 대속물로
죽으셨다는 확신을 가질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극단
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③ 회개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용서)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중생의 경험)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18, 19세기의 개신교회
운동을 고수하는 사람들,
④ 이러한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등이다.
1976년 Jimmy Carter가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고 선거를 한주 앞둔 10월 25일자 Newsweek에서는 “Born Again(중생)”이란 글자와 함께 Carter를 표지에 실리면서, “1976년은 복음주의자들의 해”라는 제목으로 복음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복음주의는 기독교에 완전히 심취되었을 때 얻어지는 신앙의 한 종파
를 말한다. 복음주의의 본질과 양상은 교회와, 교단과,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모든 복음주의자들은 소위 “거듭났다”
라든가 “중생했다”라 고 말하는 개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경험을
강조하는데에는 일치한다.
복음적(evangelical)란 말은 희랍어 euangelion에서 유래 되었는데,
그 뜻은 “좋은 소식”이란 의미이고, 이 “좋은 소식” 은 설교를 통하
여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고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믿고, 그 일을 위
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다른 교파의 교인들과는 달리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기 전에 모든 사람은 반드시 중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개신교인들로써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있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의 유일한
기반을 성경에 두는 것을 강조하고, 사회윤리보다는 개인의 윤리(도덕성)
를 강조하고, 자기들 교회만이 유일하고 참된 초대교회 의 계승자들이라고
생각 한다.”
다음해인 1977년 12월 26일자 Time에서도 복음주의에 관한 특집이 있었는데 그것도 Newsweek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 기본적으로 모든일에 성경의 권위를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기독교의 정통교리에 밀착되어 있는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자기자신을 완전히 내어주고 살아야 한다고 믿으며, 또한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고, 중생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복음주의라는 희랍말의 의미가 그러하듯, 모든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웃에게 전해야 한다고 믿고 있고, 실제로 오늘날 이들은 다른 어느때 보다 더욱 열성적으로 이 일을 행하고 있다.”
비록 時事誌 이긴 하나 이상의 두 잡지에서 정의 내린것으로 우리는 복음주의가 무엇인지 대략은 알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말 한다면 복음주의는 16세기 Zwingli, Luther, Calvin, Cranmer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의 생각이었고, 그 종교개혁가들의 사상을 이어오는 사람들이 바로 복음주의자들인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권위와 전통보다 상위에 있다고 보았다. 즉 교회 신부들이 죄를 용서해 주기 때문에 의로움을 얻는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종교개혁가들은 교회란 “은혜의 도구 또는 은혜의 전달자”이지 “은혜를 베푸는 자”는 아니라고 주장 했다. 그들은 또한 목사(pastor)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섬기는 사람(minister)이지 죄를 용서하고,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만드는 사제(priest)가 아니라고 보았다. 교회의 목회도 한사람으로 부터 오는 교권제도의 계급조직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지교회의 회원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고 주장 했다. 그리하여 복음주의자들은 17, 18세기의 이단적인 계몽주의(enlightenment)에도, 그리고 19세기의 현대주의(modernism)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자들은 Bible Conference, 성경학교 등을 설립하여, 성경의 무오설을 믿지 않는 NCC와 WCC의 대칭적인 조직으로 World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 과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조직하여, 대규모의 부흥집회와 출판, 방송선교, 선교사 파송등을 통해서 현대주의자들의 운동에 강력히 맞서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복음주의의 특색을 간략히 말한다면;
1. 뜨겁게 믿는것을 강조
2. 중생의 교리 강조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4. 구원의 확신
5. 개인의 윤리와 종교와의 밀접한 관계
6.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
7. 강력한 사명의식
8. 만인 사제설의 개혁교회 교리의 강력한 실천
그리고 여기에다 필자가 첨부 하고 싶은것은:
9. 복음주의 교회는 대체로 사회의 소위 엘릿뜨나 지식층 보다는
대부분 서민적 이고 대중적인 사람들이 주로 많이 모인 교회라
는 점이다. 엘릿뜨와 지식인들은 항상 그 시대의 첨단문화, 즉
계몽주의, 자유주의, 해방신학 등에 흥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
이다.
이상과 같은 특성에 의하여 한국 교회를 평가 해 볼 때 어떤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이고, 어떤 교회가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 교회인지 대략 판단 할 수 있다. 교회가 복음주의이냐, 자유주의이냐, 아니면 두개의 절충주의 교회이냐에 따라서 교회음악의 방향과 위치, 그리고 교회음악의 취향이 달라지게 된다. 이 말을 역으로 말하면, 나의 교회음악에 대한 방향과 위치, 그리고 취향에 따라 내가 자유주의자 또는 현대주의자인지, 아니면 복음주의자인지, 그것도 아니면 절충주의자인지를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에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신학적인 두개의 상반되는 위치에서 오늘날 상호 보완적인 위치로 변해 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음악의 위치도 상호 보완적인 위치로 지향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2. 모든 인간은 미적 존재: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1-4)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물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면서 만족과 자부심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며칠동안 창조를 계속하신 다음 마지막 날에는 인간을 만드셨다.
“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 직이는 모든 생물을 정복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것을 보시니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27-28, 31a)”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다고 했다. 그말은 인간에게도 창조의 능력을 주셨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지으신 모든것을 보시니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다. 그것은 심미안이 뛰어난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창조물이 자신의 미적 가치관에 만족을 주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모든 아름다운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도 아름다운 것을 창조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만족 할 수 있는 미적 존재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고 즐기고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요, 본능이다. 이 본능 때문에 음악을 공부하지 않은 아마츄어 대중들도 음악을 만들고 부르고 즐기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대중들이 음악을 즐기고 만들어 내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주적인 본능이 있기 때문이 다.
음악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임에 틀림이 없고, 그러기에 음악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라고 말한 Luther의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예술적 기능의 선물을 하나님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누구에게든지 무차별하게 나누어 주셨다고 Calvin은 말 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동은혜(common grace)이기 때문이다. Calvin은 죄인이 오히려 자기가 받아야 할 것 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을 더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하나님의 자녀들 보다도 죄인들에게 더 밝게 비친다"고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음악보다 대중음악을 더 좋아하는 것을 보고 Calvin 이 한 말이 아닌가 싶다.
일반적으로 대중음악은 쉽고 단순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중음악을 쉽게 좋아 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언덕과 산이 있으면 돌아가 듯이 대중은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은 피하고 쉬운것을 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Calvin이 시편가를 만들 때 "쉽고 단순한 음악"을 강조 했고, 따라서 대중음악을 시편가의 선율로 삼았던 것이다. 선율이 너무 단순하여 시편가를 작곡한 Louis Bourgeois가 자신이 만든 시편가에 장식음을 넣고 대선율을 만들었을 때, Calvin은 대노하여 그를 체포하여 형무소에 집어 넣었다가 나중에는 국외로 추방 시킨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교회음악이 예술음악으로 변하는데 엄격히 반대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위에서 복음주의 특성을 나열 하면서 마지막으로 덧 붙여 말한 "복음주의 교회 교인들은 대체로 엘리트나 지식층이 아니라 대부분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사람들"이라고 정의한 것과 일치하는 결론이다. Calvin을 비롯한 복음주의 교회는 지극히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것을 선호하였다.
종교개혁가들은 Luther를 제외하고는 Zwingli를 비롯하여 Calvin 등 모두 聖像파괴자들이 었다. 그들은 교회의 예술품을 파괴하였다. 조각품들을 파괴한것은 물론이려니와, 아름답고 찬란한 스테인드 글라스도 때려 부수고, 심지어는 교회의 오르간도 부셨다. 조각품들은 우상이라고 파괴하였고, 스테인드글라스는 아름답고 현란한 색깔이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게 만들어 그 아름다움에 빠지는 동안 교인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통로를 차단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르간의 아름답고 장엄하고 웅장한 소리도 하나님과 조용히 기도로 대화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 음악이 교인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예배에서 오르간은 필요없다고 판단하여 부수었다. 종교 개혁가들에게는 이러한 모든 예술은 귀족적인 것이요 따라서 서민들에게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하여는 복음이 대중화 해야하고, 서민화 해야한다는 사실이 성서적이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오르간을 부순다든가 또는 대중이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대중음악을 택하기로 한 결정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개혁가들을 그 시작부터 반심미주의자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 할런지 모르나 적어도 소수의 엘리트와 귀족과 지식인들만이 즐길 수 있는 예술은 지양 하였음을 알수 있다. 그 사람들은 “ 창조적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무시해 왔다고 볼수 있다.
오늘의 복음주의자들은 종교개혁가들의 정신을 철저히 따르려고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복음주의 교회의 음악적 특성은 거의가 쉽고, 서민적이고, 대중적이어서 음악적인 질과 수준이 비교적 낮은 것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현대 음악가들은 종교 개혁가들을 비판하여 "그들은 음악에 무식하고 반예술적인 사람들"이라고 까지 혹평한다.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음악을 좋아하는 복음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심미적 가치기준이 저속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미적 표준에서 볼 때 수준이 낮은 음악을 많이 부른다는 말이다. 질이 낮은 음악을 가지고 아무리 선한 일을 위하여 사용한다 해도 그 음악이 훌륭한 음악으로 되지는 않는다. 한국 목사들의 음악적인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당면한 문제중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교회의 열성있는 사람들일수록 그들이 사용하는 음악은 천박한 음악이 많다. 이것이 복음주의 교회음악의 부인할 수 없는 실체이다. 복음주의 교회 목사들은 교회예배에서 사용하는 음악이 높은 예술음악이 되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사 자신들도 음악의 질(guality)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Zwingli와 Calvin은 음악목회자들의 지탄을 받을 큰 과오를 저지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의 교인들은 대부분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악보를 못 읽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교인들의 대부분이 악보를 읽지 못하는데 500여년 전의 교인들이 어떠했겠는가는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그런데 반하여 당시의 귀족과 궁궐에서는 음악가를 고용하여 작곡 혹은 연주 활동을 펴 왔기 때문에 상류사회의 음악은 엄청나게 세련된 예술 음악이었고 그런 음악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알수도, 할수도 없는 음악들이었다. 오늘 우리가 음악사에서 대하는 이 시대의 음악은 모두 소수 엘리트만의 상류사회 음악이지 대중들이 즐기는 음악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궁중 아악과 백성들의 속악이 따로 있었던 것과도 같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음악이 지식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었다면 그것은 모든 교인을 위한것이 아니라 소수 엘리트들 만을 위한 것이 되고, 따라서 그러한 음악은 교회음악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도록 하는것이 복음주의의 원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대중적인 음악이라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Zwingli와 Calvin이 왜 위대한 클래식 음악을 교회에서 축출 했는지는 이해가 된다. 이와같은 복음주의자들의 생각은 오늘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복음주의자들이 쉬운 대중음악을 그들의 교회음악으로 택한 것은 성서적으로도 옳은 판단이었다고 본다. 예수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그를 따르던 제자와 군중들은 무식한 대중이었지 귀족과 지식층과 엘리트는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과 무식한 백성들에게 복음과 진리를 가르치시면서 철학적인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늘 알아듣기 쉽게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것 보다 설교를 듣는것을 더 좋아 한다. 성경은 2000년전의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의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지만, 설교는 2000년전의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 맞추어 재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우선 알아 듣기 쉬워서도 설교를 더 좋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찬송은 늘 오늘의 상황을 노래하고, 그것도 오늘 나의 절실한 형편을 노래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다른 어떤 노래보다 복음찬송을 더 좋아하게 된다. Isaac Watts도 당시의 시편가를 부르지 않았다. 그가 시편가를 부르지 않았던 이유는 그 시편가가 너무 오래된 낡은 노래여서 자기에게 아무런 감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Watts는 시편을 그 시대의 현대말로 바꾸어 새로 써서 오늘의 찬송가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시편이 현대시로 바뀌었을 때 그 의미가 강해지고 그 뜻이 더욱 강열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어 그의 찬송은 교회에서 쉽게 대중화 되었던 것이다. 이제 20세기의 복음주의자들은 200년전 Issac Watts와 Charles Wesley의 찬송을 오늘의 찬송가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그들의 복음찬송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3. 복음가는 부정한 것인가?
복음가(Gospel song)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복음가를 부정하게까지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악기가 기타라든가, 드럼이라든가, 전자 오르간 이라든가 하는, 주로 나이트 클럽에서 많이 사용되는 악기를 쓰기 때문이다. 이들 악기가 나이트 클럽과 같은 부정한 곳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그런 악기들을 반주로 하여 연주되는 음악 또한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고정관념에는 큰 잘못이 없다.
음악을 포함한 모든 문화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의 삶의 형태이다. 모든 악기와 음악과 문화는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 부정한 악기와 음악, 부정한 문화가 될 수도 있고, 이미 부정한 것도 사실이다.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들이 젊은 사람들의 복음가를 거부하는 것도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악기가 전술한 대로 부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런 악기로 반주되는 음악도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H.Richard Niebuhr가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문화적 그리스도도 아니요, 반문화적 그리스도도 아니다.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문화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했듯이 비록 사람이 죄인일지라도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새사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문화속에 또는 음악속에 들어오면 그 문화와 그 음악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변화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서 외국의 선교지역에서 까지 라틴어로 예배를 드리게 한 것이라든가 영국교회와 미국교회가 문화의 바탕이 다른 피선교 지역에서 미국의 복음찬송을 사용한 것은 잘못이다. 이와 꼭 같은 이유로 젊은 살람들의 문화속에서 생성되었고, 젊은 사람들의 문화속에서 애창되는 복음가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되었고 십자가 앞에 바쳐진 음악이라고 한다면 그와같은 음악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음악이요, 이를 죄악시 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 한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의 음악으로,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의 음악으로, 각 민족은 제 민족의 음악으로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 복음가를 부르고 교회음악의 토착화를 주장하는 것도 정당한 것이라고 본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성스럽거나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 음악이 성스럽다거나 불경스럽다고 하는 것은 음악이 갖는 가사에 달려있고, 또 그 음악이 사용되어 온 용도에 따라서 사람이 갖는 선입견과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지 성스러운 음악이 따로 있고, 불경한 노래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음악을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연주자의 성스러운 연주에 의하여 성스러운 음악이 되는 것이다. 그 음악이 영적이냐, 세속적이냐 하는 문제도 연주자가 그 음악을 영적으로 연주 하느냐 세속적으로 연주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음악자체가 영적이고 세속적인 것은 아니다. 음악은 중성이다. 따라서 영적인 가사의 음악도 연주자에 의하여 얼마든지 세속적으로 연주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가를 죄악시 하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란 것을 재 확인 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복음찬송가의 몇개가 좋기 때문에 “복음찬송가는 다 좋다”라든가 몇개가 나쁘니 “복음찬송가는 모두 나쁘다”라는 논리를 떠나서 하는 말 임을 확실히 해 둔다.
4. 교회음악에 대한 편견을 버리자
한국 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편견이 아주 심한 것 같다. 몇해전 패티 킴과 이미자에게 세종문화 회관을 대여 했다고 해서 모 작곡가와 모 평론가가 세종문화회관의 운영위원직을 사표낸 사실이 바로 우리의 극단적인 편견의 일면을 나타낸다고 본다. 세종문화 회관은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민을 위한 회관이다. 시민 다수의 혜택을 무시하고 소수 클래식 엘릿뜨만을 위하여 대중에게 향한 세종회관의 문을 꽁꽁 걸어 잠거야 한다는 주장은 일반 시민의 편에서 볼 때는 엄청난 편견이다. 이와같은 편견으로 인해 학교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아니면 절대로 가르치지 말아야 하고, 학생들이 혹시 대중가요를 부르면 큰일이라도 난것처럼 죄악시 하게 된다. 그리고 음악교사는 학생들게 명곡만을 불러야 한다고 강조 한다.
요즈음에는 교회음악가 중에서도 교회에서는 코랄과 같은 “좋은” 찬송을 불러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코랄은 좋은 가사와 좋은 음악으로 되어 있어 수백년이 지나도 오늘까지 계속해서 불려지는 찬송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찬송가 중에도 좋은 가사는 얼마든지 있고, 코랄도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수도 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몇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남아 있는 소수의 코랄도 사람들은 부르기를 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코랄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 애창되는 많은 복음찬송가가 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분량이 사라질 것이고 그런 중에서도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와 같이 몇개는 남아서 후세의 찬송가에 들어갈 것도 분명히 있으리라고 본다. Isaac Watts나 Charles Wesley는 생전에 수백개의 찬송가를 썼으나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불과 몇개 밖에 안된다. 그들의 찬송은 영구하지 못했다. 사라진 찬송이 모두 복음찬송이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찬송과 코랄이 모두 훌륭한 찬송이니 수백 수천개의 찬송을 지금도 불러야 한다고 교인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Watts와 Wesley의 찬송이 그 시대에는 많이 불려 졌지만 지금도 그 모든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주장 할 수는 없다. 그 중에 몇개만 남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다. 그들의 노래가 거의 다 사라지고 몇개 밖에 남은것이 없으니 그들의 노래는 모두 유행가요 가치없는 것이라고 말 할 수는 더욱 없다. 오래 된 노래가 사라지는 것은 복음가나 코랄이나 다 마찬가지 이다.
특별히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쉽게 스며들수 있어야 하고, 또 마음속으로 부터 쉽게 흘러 나올수 있는 음악이라야 한다. 코랄의 멜로디를 어거지로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다. 코랄은 서양, 특히 독일인의 가치관으로 볼 때 좋은 찬송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한국사람의 노래도 아니오, 이 시대에 유행되는 대중음악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코랄은 우리에게 시대성과 민족성이 없는 노래인데, 이러한 코랄을 한국교회에서 불러야만 좋은 예배, 아름다운 예배를 드릴수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국 교회음악을 크게 오도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음악에 관해서 편견을 갖게 된 것은 학교의 음악교육이 편파적이 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교육자들은 이러한 생각을 시정하기 위하여 Tanglewood Symposium에서 발표한 선언문의 2번에서 “ 우리의 음악교육은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음악과, 모든 양식의 음악, 모든 형식의 음악, 그리고 다른 문화권의 모든 음악을 교육과정에 포함 하여야 한다. 음악의 레퍼토리는 10대에서 유행되는 대중음악과 아방가드(avant-garde) 음악, 미국 민요, 다른 문화권의 음악 등을 포함한 다양하고 풍부한 오늘의 음악으로 크게 확장 되어야 한다”고 했다. Aaron Copland는 "오늘날 클래식 음악에 대한 편견이 다른 모든 음악에 대한 차별로 나타 났다" 고 말 하면서 "우리 학교에서 다른 음악에 대한 이와 같은 차별 대우는 소수의 음악전문가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음악만을 학교 음악수업에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용납 할 수 없다"고 말 하였던 것이다.
5. 교회의 음악과 학교의 음악간의 갈등관계
필자를 포함한 우리 음악 목회자들은 매주일 교회와 학교를 다 경험하였고 또 현재 경험 하고 있을 것이다. 학교에 가면 우리는 예술음악 세계에서 Palestrina, Lasso, Vivaldi, Bach, Handel, Haydn, Mozart, Beethoven, Schubert, Schumann, Chopin, Listz, Brahms, Bruckner 등의 음악을 배우고, 합창시간에는 oratorio, cantata, motet, anthem, chorale 등의 진지하고 거룩한 음악만을 연주 하지만, 주일날 교회에 가서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회에서 복음찬송과 복음가를 부른다든가, 또는 대중적인 합창, 음악성이 결여된 효과적인 anthem, 민요적인 음악등을 골라서 노래하게 된다. 학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회음악의 세계, 즉 예술음악의 세계와, 교회에서 추구하는 실제적인 교회음악의 세계, 즉 교회 대중음악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어쩔수 없이 긴장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때로는 정신분열증에 빠질 우려까지도 없지 않은 현실이다.
교회의 음악과 학교의 음악 사이에서 긴장관계가 고조 되는 것은 교회음악 전문인인 교수와 학생의 교회음악에 대한 이해와 목사들을 비롯한 교회 평신도 구룹의 교회음악에 대한 이해 사이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음악대학 교수들은 교회에서 요즘 특별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불려지고 있는 복음가(gospel song)를 죄악시 내지는 백안시 하고 있는 반면, 복음주의 교회의 대표적인 부흥목사 Billy Graham같은 이는 gospel music을 Billy Graham Crusade의 절대적인 음악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모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갈등을 가질수 밖에 없다.
필자는 이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오래도록 고민과 사색을 해 보았고, 연구도 했으며, New York에 있는 Riverside Church의 오르가니스트인 John Walker와 장시간 토론도 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ospel song에 대한 나의 편견은 대단히 심하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지금도 교인들과 함께 복음가(gospel song) 부르는 것을 꺼려하고, 또 부를 마음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음악을 한국의 교회음악과에서는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 언급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음악은 전통적인 클래식 예술음악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필자에게는 전통 서양 클래식 예술음악과 교회음악을 애호하고 복음가(gospel song)는 무시하는 편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의 이러한 편견은 한국 전통음악, 즉 국악에도 마찬가지 이다. 서양 예술음악은 아주 좋아 하면서도, 우리 국악은 많은 경우 좋아하지 못하면서 듣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6. 전통적으로 찬송가는 대중음악이었다.
찬송가는 모든 교인들을 위한 음악이다. 따라서 찬송가는 서민화 되어야 하고 대중화 되어야 한다. 만약 찬송가가 서민화 되지 못하고 대중화 되지 못한다면 그 찬송은 불려지지 않게 될 것이다. 불려지지 않으면 그 노래는 찬송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찬송가와 대중음악은 밀접한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불가분의 관계에도 있다고 본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찬송가가 모두 대중적인 음악이었다는 것을 다음의 간단한 설명에서 확인 해 볼 수 있다.
(1) 시편은 성전음악이면서 세속음악
희브리 사람들이 제사에서 부른 노래는 시편이었다. 제4장 제2절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그들은 음악을 대단히 중요시 하였고, 음악은 그들의 예배와 생활에서 확고 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감사절과 같은 축제 때, 또는 결혼식과 같은 기쁜 잔치에, 그리고 그들이 갖는 의식에서 늘 노래를 불렀다. 신앙이 좋은 히브리 사람들은 회당이나 성전에서 많이 불러서 잘 아는 시편 노래를 들에서 양을 칠 때나 또는 일을 할 때 자연스럽게 불렀을 것이다. 5세기의 위대한 성경학자요 주교였던 Theodore가 모든 사람이 성경을 잘 모르면서도 시편을 외우는 사람이 많았고, 그러기 때문에 집에서, 길에서, 혹은 장터에서 시편을 반복해서 외워 불렀다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성전 밖에서 부른 노래와 성전 안에서 부른 노래는 같은 노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전음악이 세속음악이 되고, 세속음악이 성전음악이였던 셈이다. 따라서 그들이 부른 시편은 성전음악이면서 동시에 세속음악이었던 것이다.
(2) 기독교 찬송의 시작은 대중음악
기독교에서 부른 노래 중에서 비 성서적인 가사로 된것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찬송가 이다. 초대 교인들은 성만찬을 행할 때, 사람에 의하여 쓰여진 찬송시를 그 시대의 대중음악의 선율에 붙여 노래로 불렀다. 찬송가사를 누구나 쓸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오늘날의 복음 찬송가에 문제가 많듯 찬송가는 처음 시작 될 때 부터 문제가 많았었다. 이처럼 아무나 찬송가사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찬송가는 자연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감상적일 수 있었으며, 더 큰 문제는 기독교의 교리에서 벗어나 이교도적인 요소마저 쉽게 침투 될 수 있었다. 찬송가사의 내용이 노래를 부르는 교인들에게 쉽게 이해 되었고, 선율로는 그 시대의 대중적인 팝(pop) 스타일의 음악 또는 민요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복음가가 교인 특히 젊은이에게 쉽게 확산 되듯, 이교도적인 내용의 찬송가는 초대교회에서 쉽게 교인들에게 확산 되었던 것이다. 2세기 그노시스 이단운동과 3세기의 아리안 이단 운동이 모두 찬송가의 힘을 빌어서 크게 확산 되었던 것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이교도들의 확산을 막고 그들의 교리와 싸우기 위하여 성 에프라엠(St. Ephraem)과 성 힐라리(St. Hilary)가 기독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찬송가를 만들어 교인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Ephraem의 찬송가는 그런대로 성공 하였으나 Hillary의 찬송가는 실패 하였다. 그 실패의 원인이 Hillary의 찬송은 대중적이지 못 했고, 따라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찬송가는 대중음악이지 예술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교회에서는 361년 라오디케아 공의회에서 찬송가를 교회 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을 전면 금지 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성 암브로스는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를 찬송가를 통하여 전파할 수 있도록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 하고, 이교도들과 싸울 목적으로 찬송가를 만들어 자신이 주교로 있었던 밀라노의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교회에서 까지도 자신의 찬송가를 예배에서 부르는 것을 허용 하였다. 이와 같은 Ambrose의 찬송은 성공적이었고, 많은 교인들이 애창 하였다. Ambrose는 그 시대에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대중음악의 선율에 새 가사를 붙여 찬송가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결국 Ambrose의 찬송은 8세기 까지 모든 찬송가의 표본이 되어 왔고, 9세기 까지 찬송가의 사용을 엄격히 저지해 왔던 로마를 제외한 구라파의 모든 교회와 수도원에서 그의 찬송가가 불려 졌기 때문에 오늘 Ambrose를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Ambrose가 주교로 있었던 북부 이태리와 특별히 시인들의 활동과 영향력이 컸던 불란서 지방에서는 예배에서 찬송가의 사용이 급격히 확장 되었었다. 찬송가의 사용을 교회의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금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찬송가가 그들의 예배에 침투되는 것을 결국 막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 오늘날 복음찬송가에 대한 반대의 여론이 그렇게 높아도 한국 교회에서 복음찬송가를 막지 못할 뿐만아니라 또 실상 많이 불려지고 있는 것도 꼭같은 상황과 꼭 같은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찬송가에 대한 시비는 오늘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찬송가의 시작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종교개혁 당시의 코랄과 시편가도 대중음악
Luther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교인 가창운동을 벌렸다. 교인들이 노래를 부르지 못함으로 예배에 참석은 하나 방관자로 남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Luther는 교인들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귀한 은총의 선물을 마귀들에게 몽땅 빼앗길수는 없다"고 말 하면서 평신도들의 찬송가 가창운동을 적극 지지 하였고, 평생동안 이 신조를 지키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썼다. Luther는 이를 위하여 시편을 운율가사로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운율 찬송시는 그 시의 운율에 맞는 대중음악을 선택하여 거기에 맞추어 부르게 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contrafactum의 관습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것이 독일의 chorale이다. 오늘 우리가 잘 부르고 있는 passion chorale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도 당시의 사랑노래였던 대중가요의 선율을 그대로 가져와서 contrafactum하여 교회에서 불러 오던 것을 Bach가 자신의 수난곡에서 자주 사용하여 오늘의 유명한 수난 찬송가(passion chorale)가 된 것이다.
또 다른 종교 개혁자 John Calvin은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는 반드시 성경에서 나온 시편가만을 불러야 한다"고 하면서 성경에 나오지 않은 가사로 된 찬송가는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Theodore de Baze 같은 시인을 시켜 시편을 번역 하게 하였고, Louis Bourdeois에게 작곡을 맡겨 제네바 시편가집(The Genevan Psalter)를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Bourdeois가 이 시편가를 작곡 할때 그 시대의 샹송의 멜로디를 많이 채택하여 사용 하였고, plain chant의 멜로디와 기타 옛날 선율에 번역된 가사를 붙여 시편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번역된 시편가사는 본래의 불규칙적 산문형 시편을 규칙적인 운율로 된 유절시편 가사로 바꾸어 놓은 것이 되어서 이는 마치 오늘날의 찬송가와 같은 형식의 시편이 되었다.
Luther와 Calvin이 모두 코랄과 시편가의 멜로디를 구태여 대중음악에서 택한 것은, 그들이 "복음의 대중화"를 부르짖은 것과 일맥 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복음을 대중화 하기 위하여 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고 출판하여, 평교인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마찬 가지로 평신도들이 자유로히 하나님께 자신의 찬양을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는 찬양도 "대중화"가 이루어 져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코랄과 시편가는 그 시대의 대중음악이었다. 대중음악은 시대가 지나면 그 유행도 지나가 버리는 법이다. 오늘 세계의 교회에서 (일부 특수한 교회 제외) 시편가와 코랄을 부르지 않는 것은 이들 음악이 이미 시대의 유행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4) 복음찬송가(gospel hymns) 와 복음가 (gospel songs)
이상에서 처럼 교회의 노래는 희브리 시대 부터, 기독교의 찬송가가 시작 될 때와 그리고 종교개혁 당시의 새로운 찬송가가 시작될 때, 모두 대중음악을 그 소재로 하였던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기독교 찬송가의 역사요 전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전통은 종교개혁 당시 Luther와 Calvin에 의하여 "복음의 대중화"를 주장 하면서 더욱 강조 되었고, 이들의 주장은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더욱 강력하게 실천 되었다. 따라서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과 함께 일어난 복음찬송가(gospel hymns)는 그 당시 미국의 대중음악에서 많이 사용해 온 점 4분 음표의 반복된 리듬 꼴, 또는 점 8분 음표의 반복된 리듬 꼴을 많이 사용 하고 있다. 멜로디는 대중적인 것을 사용하고, 화성도 간단한 화성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노래가 미국의 경건주의자들이 사용한 표준 찬송가 였다.
이러한 복음찬송가는 20세기에 들어 오면서 미국에서는 자취를 감춘듯 하더니 1960년대 초부터, 중생을 경험한 기독교인 대중가수들이 자신들의 음악으로 찬양을 드리면서 다시 생겨나기 시작 하였다. 이렇게 생겨난 새로운 양식의 복음가 (gospel songs)를 미국에서는 folk songs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노래를 가지고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를 folk service 또는 folk mass라고 부른다. 이들이 부르는 gospel songs을 folk songs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말의 민요라는 말의 뜻 보다 대중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대중음악이란 뜻이 더 강하다. 우리나 라에서는 이들 음악도 모두 복음가라고 부른다. 이와같이 60년대 부터 시작된 복음가들도 그 이름이 말 하듯 대중가요에서 비롯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복음찬송가를 지나치게 애창한 나머지 주일 낮 예배에서도 온통 복음찬송가만 부르고, 이런 교회 일수록 전통적인 찬송가(hymns)는 거의 부르지 않는다. 그런 반면에 교회음악 전문인들은 복음 찬송가를 무시하고, 경시하며, 사람에 따라서는 죄악시 내지는 백안시까지 하여 복음찬송가 부르는 것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 또 우리는 갈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희브리인들의 시편 찬송이나, Ambrose의 찬송가나, Luther의 코랄이나, Calvin의 시편가 등 모든 노래는 성경과 교리에 근거하여 쓰여진 것들이다. 그러나 복음찬송가는 보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가사로 되어 있고, 가사의 내용에 있어서도 신학적인 내용이 심오하지 못하고 시적인 수준도 낮은 경우가 많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복음찬송가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노래라는데서 많은 사람들로 부터 백안시 당하고 있다. 음악적으로도 복음찬송가는 음악이 너무 단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박할 뿐만 아니라 예술성이 결여 되었다는 데서 음악 전문가들로 부터 거부 당해 왔다.
단순한 선율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단순한 선율이 오히려 종교적이고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심령을 들어 올리는데 더 큰 역할을 할 수도 있으면서, 동시에 시편가 선율 처럼 너무 단순해서 부르는 사람들의 흥미를 잃게 하고, 따라서 오늘 많은 시편가들이 사라진 원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코랄도 단순한 선율로 되어 있다. 그러나 Bach와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에 의하여 코랄이 예술음악화 되었기 때문에 음악 전문가들이 아직도 코랄을 애호하고 있고 반면에 평신도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어 찬송가에서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음악과 예술음악에는 양자 모두 단점과 결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7. 교회음악은 기능음악인가? 예술음악인가?
교회음악은 엄밀히 말해서 기능음악이지 예술음악은 아니다. 어떤 음악이 훌륭한 교회음악이고, 어떤 음악이 훌륭하지 못한 교회음악이냐의 판단은 그것이 얼마나 교회음악으로서의 기능을 다 하느냐에 의해서 평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음악은 결코 자유로운 예술 (free art) 음악이 아니고, 십자가에 바쳐진 음악이요, 하나님께 헌신하는 노래요, 교회를 경건하게 하는 음악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음악이 자유로운 표현의 예술음악을 전적으로 부인 한다든가 또는 교회음악이 궁극적으로는 예술음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온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아름다움도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진리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못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음악만이 하나님으로 부터 왔고, 복음찬송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강조 해야 할 점은 아름다운 예술음악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것 처럼 음악가에게는 아름답지 못하게 느껴지는 복음찬송가도 역시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로부터 20세기 까지 사용해 온 교회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순전히 기능적인 역할을 해 온 교회음악이다. 예술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그레고리안 성가는 교회예배에서 지금까지 그 기능을 충실히 해 왔기 때문에 아주 훌륭한 교회음악이라고 평가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기능음악이자 예술음악으로 볼 수 있는 모텟(motet)과 미사곡을 예배에서 사용하여 교회음악이 기능 음악인 동시에 예술음악임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작곡가들은 교회음악의 기능적인 역할을 무시하고 순전히 자신의 예술적인 기능만을 마음껏 펴 보기 위하여 free art의 수단으로 교회음악을 사용한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Bach가 B minor Mass를, 그리고 Beethoven이 Solemn Mass를 작곡 연주 하였을 때 그것은 예배를 위한 기능음악의 범주를 초월하여 예술음악의 활동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러한 음악을 연주회에서는 연주해도 미사에서 미사곡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 음악의 한계는 명확히 구분지어 졌다. 다시 말하면 가장 좋은 교회음악은 얼마나 그 기능을 충실히 잘 하느냐에 따라 평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찬송가가 좋은 교회음악 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것이 교회에서 목적하는 바의 기능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해 내느냐에 따라 평가 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와 같은 가치관에서 복음찬송을 평가 한다면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아주 훌륭한 교회음악이라고 평가 할런지 모른다. 실제로 모든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복음찬송을 애호하고 있고, 애호하는 이유는 그들 나름대로 복음찬송이 교회복음화와 부흥에 큰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8. 문화가 음악을 생산해 냄
세계의 모든 문화는 그 자신의 예술적 언어와 표현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음악도 민족 음악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문화가 음악을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 문화권에서 한국인만이 갖는 교회음악을 창조해 내지 못했다. 영국의 찬송, 독일의 찬송, 불란서 또는 스위스의 찬송을 받아 들이고 그것이 곧 교회음악의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고유문화와 단절해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상이지 한국인 대중의 생각은 아니다. 교회음악을 이런 사람들이 이끌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찬송가는 대개 2백 내지 3백년전 어떤것은 5백년전의 노래이지 오늘의 우리 한국문화에서 생산된 노래가 아니기 때문아다.
New York에는 성 토마스(St. Thomas)라고 하는 성공회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그 이름이 그러하듯이 Bach가 봉사한 독일 Leipzig의 St. Thomas교회와 꼭 같이 choir school을 두어 어린이 합창단을 양성하고 choir school에 다니는 소년들이 soprano와 alto를 노래하는 전통적인 합창단을 가지고 있다. 성 토마스 교회는 아주 클래식한 음악만을 연주하는 교회로도 유명하다. Riverside Church의 오르가니스트로 있는 John Walker와의 대담에서 그는 이 교회를 가리켜 "골동품 음악만 연주하는 교회"라고 말해서 필자는 대단히 놀란적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곰곰히 다시 생각하면서 John Walker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골동품은 골동품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다. 그러나 골동품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쓰레기 통에나 버려야할 낡아빠진 물건 밖에 되지 못한다. 시골에 가면 아직도 골동품이 될 수 있는 물건이 너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시골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골동품이 아니오 생활 필수품이고, 그 물건은 그리 값지거나 비싼 물건이 아니다. 다만 자기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실용품에 불과 한 것이다. 실용품은 실용적인 가치에 의하여 값이 매겨지고, 실용성이 있기 때문에 모든 대중이 소유할 수 있으리 만치 대중화 되어 있는 물건이다.
실용성이 큰 물건은 항상 대중화 되기 마련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화가 발달하고 기계문명이 발달 하면서 실용성 있었던 것이 실용성을 잃게 되고, 따라서 생산이 중단되어 물건이 희귀해지고, 그리하여 이 물건이 서울에 와서 골동품 가게에 진열 되기만 하면 그것은 엄청난 값으로 둔갑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물건이 시골에서는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해 실용성이 떨어짐에 따라 아무데나 내 팽개쳐 버리는 물건이 될 수 있지만 골동품으로 선반위에 진열하게 되면, 그 물건의 실용가치와 본래의 기능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바라보고 관상 할 수 있는 예술품이 되고 만다. 음악도 어느면에서 이와 꼭 같은 것이라고 본다.
독일교회의 코랄도, 그리고 칼빈교회의 시편가도, 그 당시에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잘 불렀던 실용적인 대중음악이었다. 그러나 2-3백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러한 노래는 시대성과 문화성, 현실성, 실용성, 대중성을 상실하여 더 이상 불려지지 않아서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노래는 불과 몇개의 코랄과 그보다 훨씬 적은 숫자의 시편가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 몇개 안되는 음악은 정말 귀중한 골동품이다. 오늘 우리가 이들 골동품을 볼 때 그것이 그 시대의 대중음악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골동품 이기 때문에 귀중한 음악이요, 오래된 음악이기 때문에 클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용품은 무식하고, 교육정도가 낮더라도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지만 클래식과 골동품은 나이가 든 사람, 교육정도가 높은 사람, 심미안이 있는 사람 등 극히 제한된 소수만이 필요로 할 뿐이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gospel songs을 전혀 무시하고 클래식만을 연주하는 자유주의 교회, 지성적(intellectual)인 교회, 에큐메니칼한 교회에는 젊은이들이 없고 나이든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교회가 젊은이들의 노래를 빼앗아 간다면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지 않는가?”하고 자문한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 하게 된 것은 젊은이들의 노래인 gospel song을 허용하는 복음주의 교회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 들 뿐만 아니라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유주의 교회는 해마다 그 교인수가 감소 하는데 비하여 복음주의 교회의 교인수는 해마다 크게 증가하는 것이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고 본다.
우리는 독일의 코랄과 영국의 찬송 또는 앵글리칸 챈트를 이상적인 찬송으로 여기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Bach의 수난곡을 흔하게 연주하지 못하지만, 독일, 영국, 불란서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수난절만 되면 여기 저기에서 쉽게 수난곡을 들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독일과 영국의 교회에는 대부분 찬양대가 없이 오르가니스트 혼자서 음악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수난곡을 연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단지 예술 활동에만 사용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것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복음 찬송과 같은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은 교인들의 심령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하지만 클래식 음악은 교인들의 심령의 불을 오히려 꺼서 교회를 냉각화하는 것이라면 지나친 생각일지? 이상적인 예술음악을 연주하는 교회에는 젊은이들이 없고, 팝송을 부르는 곳에는 왜 많이 모여들까? 교회음악을 하는 우리들이 서양교회의 클래식 음악만을 따라 가다가 혹시 한국교회도 냉각되고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교인수는 줄어들지 않을런지?
필자는 이것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교회음악인들은 쉽게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즉 수난곡과 같은 예술음악을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하다가 그만 목적이 예술 그 자체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의 목적이 예술에 있기 때문에 수난곡을 구태여 교회에서 연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매주일 찬양대에서 봉사할 필요마져 없다. 그들에겐 그 연주가 음악목회자의 사명감을 가지고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 아니라 연주활동이요 예술활동이기 때문이다.
9. 음악목회를 해야 한다.
이미 말 한것 처럼, 복음주의자들의 음악적 특성은 거의가 쉽고, 현대의 대중음악을 좋아하여 음악적인 수준과 질이 낮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자유주의 또는 진보주의 교회에서는 클래식하고 아카데믹하면서 예술성이 높은 음악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서민들이 대중음악을 좋아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클래식 음악과 예술음악은 지식층과 엘릿뜨 등 소수만이 이해하고 애호할 수 있는 음악이다. 복음이 많은 대중에게 선포되기 위해서는 교회는 불가불 서민화 되어야 하고 대중화 되어야 한다. 따라서 복음주의 교회에서 교회음악의 대중화 내지 서민화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본다. 음악목회자가 어떤류의 음악을 선택 하느냐 하는 것은 그 교회의 담임목사의 목회방향을 따라야 할 일이겠으나 주어진 범위와 한도 내에서 음악목회자는 복음의 대중화를 위하여 교회음악의 대중화를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교인들의 취미를 의식해서 교회음악이 저질화 되는 것은 반드시 방지해야 겠다. 그렇다고 소수의 엘리트와 교회내에서 발언권과 영향력이 큰 지식층만을 위하여 예술성이 높은 클래식 음악만 고집해서 교회의 냉각화와 교인들과 음악 목회자가 괴리되는 현상도 방지해야 한다. 적절한 균형을 유지 하는 일이 중요하다.
찬양대가 부르는 노래는 교인들의 마음속에 늘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음악목회를 해야 한다. 음악목회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루는 것이고, 또 음악목회는 교인들의 호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이상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고집을 부리는 것은 음악목회라기 보다는 예술활동 또는 연주활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위에서 필자는 "문화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내의 사람들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 했다. 따라서 사람이 모여서 형성한 교회는 나름대로 그 문화가 있고, 그 문화는 교회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예를 들면 새문안 교회의 문화가 다르고 충현교회의 문화가 다르다. 더구나 한국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인 대학교회는 일반 서민교회의 문화와는 엄청나게 다르다. 그러기에 대학교회의 교회음악 문화를 일반 서민교회에 그대로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필자는 새문안교회에서 7년간 봉사하는 동안 새문안의 음악문화를 변화시켰고, 그러면서 새로운 음악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그 후 찬양감독으로 충현교회에 처음 왔을 때 필자가 받은 문화충격(culture shock)은 대단히 컸었다. 그러나 필자는 충현교회에서 또 다시 새로운 교회음악 문화를 형성해 나갈 것이고, 충현교회는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교회음악 문화로 변화해 갈 것이다. 복음이 사람을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것 처럼, 음악목회자는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그곳의 교회음악문화를 변화시켜 가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가야 한다고 생각 한다.
10. 교인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음악으로 음악목회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누가 알겠읍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 대고 말하는 셈 입니다... 만일 내가 이상한 언어로 기도 한다면 기도하는 것은 내 심령 뿐이고 내 이상은 작용하지 않습니다... 나는 심령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읍니다. 나는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읍니다...”(고전 14:9-15)
이상의 사도바울의 말에서 하나의 진리를 발견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쉽게 이해 하여 알아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연주하라는 것이다. 쉽게 이해되고 알아 듣게 하기 위해서는 심령으로도 노래해야 되지만, 이성으로도 노래해야 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방언을 예로 들었기 때문에 이성을 강조했지만 음악목회자의 경우는 오히려 이성만으로 노래하고 심령으로는 노래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연주하는 음악이 예술음악일수록, 우리는 이성으로 연주할려고 한다. 반면에 음악의 예술성이 떨어 질수록 예술적인 연주를 포기하고 영적인 연주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쉽고 단순한 노래 일수록 교인들의 심령을 고양시키는데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이야기 한 대로, 이성으로도 노래하고, 심령으로도 노래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 하면 우리의 음악목회는 예술성과 영성이 동시에 강조 되어야 하고 그 둘은 항상 균형을 이룰 수 있어 야 한다. 어느 한 편만으로 치우친다면 이상적인 음악목회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 논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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