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以生其心)>
<금강경>에 나오는 말이다.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라는 말이다.
‘머문다’는 말은 마음이 간다, 집착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집착을 하지 말고 좋은 마음을 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 안에 티끌만큼이라도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마음이나 선행에 대한 보상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以生其心)이라 할 수 없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나와 너, 있고 없고, 높고 낮고, 잘나고 못나고, 좋고 싫음 등 2분법적 이해관계나 감정 따위를 개입시키지 말고, 아무 마음 내지 말고, 무심하게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무위행(無爲行)을 지향하라는 말이다.
「불법(佛法)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 있다. 어리석음이 없으면 깨달을 것도 없고 깨달을 사람도 없으며, 또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을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은데 어찌 할까. 지혜로운 것이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제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러니 불법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딴 데서 구하지 말고 오직 자기 마음을 잘 관해 보란 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각기 제 몸이 살고 있는 그 주소를 자기 마음의 거주지로 안다.
그러나 불법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야말로 자기 마음의주소지인데, 그 주소를 몰라 마음 가는 것이 일정치가 않다. 중생의 마음은 흐르고 흘러 한 순간 사이에도 천변만화를 하고 있다. 산으로 갔다, 들로 갔다, 고향으로 갔다, 타향으로 갔다, 음식점으로 갔다, 극장으로 갔다, 천당으로 갔다, 지옥으로 갔다, 잠시도 쉴 사이 없이 돌아다닌다.
밖에 나오면 집 걱정, 집에 들어오면 바깥걱정에 한시도 다리 뻗고 편안히 앉아 쉴 곳이 없다.
참으로 이 마음의 신세야말로 가련하고 불안하다. 이게 중생의 처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신세를 타령하면서 불안, 공포, 전율, 저주를 느끼다가, 고독, 비관, 타락, 악의를 탄식하다가 마침내 삼독심(三毒心)이 불길이 일어나면 온갖 일을 저질러서 속이고 속고, 음해하고 그러다가 살인, 강도, 절도, 강간, 약탈 등 무시무시한 업(業)을 짓는다.
이렇게 해서 사회는 날로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사람은 짐승처럼 변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게 된다. 이게 사바세계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이를 위해 가르쳐 주신 것이 부처님의 자비심이요, 천경(千經) 만론(萬論)의 뜻이다.
그러면 이 병을 어떻게 해서 치료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한 마음이 인연 따라 유랑한다. 그러므로 원래의 주소지를 찾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본내면목(本來面目)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부처나 조사(祖師) 스님들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의 자리이다. 불자여, 이 마음을 버리고 다시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찾겠는가.」 ― 무비스님
그래서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께서 <금강경>의 이 구절에서 깨침을 얻었다는 것이다.
혜능 대사의 아버지는 말단 관리였다. 모종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영남(오늘날의 중국 광동지방)의 신주(薪州)로 좌천됐다. 신주에 와서는 성곽의 초소를 지키는 미관말직이었다. 여기서 나은 늦둥이가 혜능이었다. 그래서 이곳이 혜능의 고향이 된 것이다. 불행히도 아버지가 일찍 죽음을 맞이해 혜능은 전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땔 나무를 해다 파는 나무꾼이 돼, 어머니와 더불어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 혜능은 어떤 선비 댁에 나무를 가져다 팔고 값을 받은 뒤 문을 나서다가 그 집 선비가 읽는 경전 구절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말고 마음을 내어라[응무소주 이생기심(不應所住而生起心)]」
여기서 혜능은 언뜻 스치는 글귀에 깨친바가 있어, 그 게 무슨 경이냐고 여쭈었다. 무식하지만 순수한 그의 심성은 열려 있었다. 다행히 주인 선비는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금강경>이라고, 그리고 황매현 동쪽 빙모산(憑母山)의 오조 홍인(弘忍, 601~674) 선사가 늘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라고 강조하는 바라고 했다.
혜능은 황매산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노모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저런 사정을 안 선비는 은전 일 백 냥을 마련해 주면서 노모의 생계를 해결하라고 하고, 어서 오조 홍인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라고 격려해주었다.
이에 호북성 황매현(黃梅縣)에 있는 오조사(五祖寺)로 5조 홍인 선사를 찾아가서 오조당 선방 안에 앉았다. 남루한 남방 옷을 입은 청년이 무릎을 꿇고 있는데, 키는 보통보다 작았고, 달걀형의 얼굴은 햇볕에 많이 타 있었으며, 눈자위가 움푹 튀어 나왔고, 광대뼈는 밑으로 축 처진 전형적인 남방 사람이었다. 속세에서는 나무꾼으로 살았다고 한다. 양 손 여러 곳에 거친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런 혜능을 바라보던 반대편 노승은 실눈을 가느다랗게 치켜뜨고 무거운 입을 뗐다.
“그대는 어디 사는 누구인가?”
“영남(嶺南)의 백성입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오직 부처가 되기 위해 왔습니다.”
이에 홍인이 말했다.
“그대는 남방 출신의 오랑캐여서 불성이 없거늘 어떻게 부처가 되려고 하는가?” 라고 찔렀다.
그 당시 남방(오날의 중국 廣東 부근)은 비문명지어서 오랑캐 지역으로 천시했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간간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런 말을 들으면 대개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러나 이 단구의 청년은 아랑곳 않고 고개를 쳐든다. 그리고 노승의 눈을 무심히 쳐다보며, 어눌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에겐 남북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불성엔 남북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아무튼 순간 홍인은 눈을 크게 뜨고 이 무지렁이를 지긋이 쳐다봤다. 불성이나 수행과는 도무지 거리가 멀 것 같은 청년이다. 하지만 웬만해선 되돌아가지 않을 당돌함이 그의 전신에 배어 있었다. 또한 불성의 근본이 평등하다는 반격에 홍인은 비범한 인재임을 알아챘다.
그래서 노승은 더 이야기 하려다 멈추고 청년에게 한 마디 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너는 방앗간에 가서 일이나 해라”
혹시 대중들의 시기로 자칫 목숨을 잃을까 염려해, 가장 고되고 후미진 방앗간에 혼자서 방아 찧는 일을 하라고 했다. 허나 스승과 제자의 마음은 이미 하나였기에 방앗간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법을 성숙시킬 최고의 장소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홍인 선사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내 선법(禪法)을 물려주려고 한다. 누구라도 좋으니 자기가 깨달은 심경(心境)을
게송으로 읊어봐라. 선(禪)의 진수를 깨달은 사람에게 내 선법(禪法)을 물려주겠다.”
당시 홍인의 제자들은 700여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선뜻 게송을 읊으러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제자 중에 신수(神秀)라는 손꼽히는 학승이 있었다. 그는 학문에도 정통해 스승의 대리를 맡기도 하는 덕망 높은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상좌승인 신수가 짐을 지게 됐다. 그리하여 신수는 자기가 깨친 심경을 노래로 읊어, 스승이 지나다니는 복도에 붙여놓았다.
신시보리수(身是菩堤樹) - 몸은 보리(菩堤)라는 나무요,
김여명경대(心如明鏡台) - 마음은 맑은 거울의 받침대로다.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 언제나 부지런히 닦고 닦아서
막사야진애(莫使惹塵埃) - 먼지가 끼지 않게 해야 하겠다.
몸은 득도한 보리수와 같고 마음은 깨끗해서 맑은 거울과 같으므로 언제나 더러워지지 않도록 닦고 닦아서 번뇌의 먼지와 티끌이 끼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수의 게송을 본 홍인 선사의 제자들은 저마다 그를 찬양했다. 그러나 선사 홍인은 다른 생각을 했다.
“신수의 노래는 진실을 표현한 듯하나 아직 선(禪)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그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제자들에게 신수의 게송을 외우라고 했다. 후미진 곳에서 방아를 찧던 혜능의 귀에도 지나가는 학인들이 이 게송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혜능은 한 번 듣는 순간 그것이 견성에 이르지 못한 자가 지은 게송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방앗간에 있는 동안 이미 선(禪)의 대의를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도 한 수 읊으려고 했으나 글자를 몰라 적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날 밤에, 자기의 심경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쓰게 해서 벽에 붙였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 보리는 원래 나무가 아니요,
명경역비대(明鏡亦非台) - 밝은 거울 역시 있을 수 없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본래 아무것도 없으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 어디서 먼지를 닦겠는가.
깨달음(菩提)이라는 나무도 없고, 밝은 거울 같은 것도 없으며, 본래 아무것도 없는 [공(空)인] 것이다.
(공이니) 먼지가 묻을 데도 없으니 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신수가 읊은 것은, 몸이 보리수이니 잘 가꾸자. 마음이 거울이니 잘 닦자. 그리하여 성불하자, 그런 뜻이다.
그러나 혜능이 읊은 내용은 달랐다. 나무의 어디에 보리(菩提)가 있으며, 거울 어디에 마음이 있어 닦는다 말인가. 나무, 거울, 그것들은 모두 객(客)일진대, 어찌 객(客)에게서 내 마음을 찾아, 털고 닦는다 말인가, 그런 말이다. 선의 진면목은 원래 자기 마음 안에 있는 법이다[본래면목(本來面目)].
이 게송을 본 홍인 선사의 문하생들은 깜짝 놀랐다. 선의 절대성을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자성(自性)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신수가 지었다는 게송은 자성에 실체가 있는 듯이 돼있고, 부지런히 닦듯이 점수(漸修)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헤능이 지었다는 게송은 자성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돈오(頓悟)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두 게송에서 이미 북종선과 남종선이 갈리지는 실마리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신수는 상좌승이었다. 모두가 당연히 신수가 의발을 받으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홍인 선사는 혜능의 게송을 보고 말했다.
"아직도 부족하다"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혹시나 시기를 해서 그를 해치려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이 두 게송에서 알 수 있듯이 신수의 북종선은 수행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점오(漸悟:서서히 깨친다)라 히겠고, 혜능의 남종선을 돈오(頓悟:단박에 깨친다)'라 히겠다.
신수는 몸과 마음을 대응시키고, 미망과 오도를 적대시하고, 먼지와 불식을 구별하는 상대적인 인식(分別心)을
보였다. 그러나 혜능은 보다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 ‘본래 아무것도 없다(本來無一物)’라고 공(空)의 경지를
보였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순수한 인간성의 원점에서의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신수는 경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혜능은 나무꾼에 일자무식, 불문에 들어와서는 8개월 동안
방아만 찧은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불성(佛性)의 깨침은 지식과 달리 지력(智力)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온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고 실천해야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느 날 홍인 선사는 방앗간을 찾았다. 등에 돌을 지고 방아를 찧고 있는 제자에게 말했다.
“도를 구하는 사람은 법을 위해 몸을 잊는 것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이 말로 스승의 숨은 정을 드러내고, 자팡이로 방아를 세 번 치고 나가버렸다. 삼경에 오조당(五祖堂)을 찾아오라는 뜻이었다. 혜능은 삼경이 돼서 오조당을 찾아가 홍인 선사를 참예했다. 오조는 대중이 볼까봐 가사로 문을 가리고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해 주었다. 강설을 듣던 중 「마땅히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不應所住而生起心)]라는 구절에서 대오했다. 그 때 혜능은 24세였다.
오조는 혜능이 본성을 깨쳤음을 알고 의발을 전하면서 말했다.
“이제 너를 육조로 삼겠노라. 그러니 스스로 잘 호렴하고 널리 중생을 제도해 앞으로도 선법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
바로 선종의 제6대 조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홍인을 처음 만나 ‘불성무남북(佛性無南北)’으로 선문답을 하고 방아를 찧은 지 8개월이었다. 심지어 그는 삭발 수계식도 하지 않은 행자(行者)에 불과했다. 아직 정식 스님도 아니었던 것이다. 완전히 파격적인 전승이었다. 그만큼 홍인이나 혜능은 통념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