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중앙아메리카 중부
면적 : 13만 1812㎢
인구 : 507만 명(2000)
인구밀도 : 41.8명/㎢(2000)
수도 : 마나구아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에스파냐어
통화 : 코로도바 오로(C$)
환율 : 12.67 C$ = 1달러(2000.10)
1인당 국민총생산 : 370달러(1998)
본문
면적 13만 1812㎢. 인구 507만 명(2000). 인구밀도 41.8명/㎢(2000). 정식명칭은 니카라과 공화국으로서 수도는 마나구아이고, 공용어로 에스파냐어을 사용한다. 북쪽으로 온두라스, 남쪽으로 코스타리카와 국경을 접한다. 국명은 니카라과호(湖) 호반에 살던 인디언 부족의 추장(酋長) 니카라오(Nicarao)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 자연
니카라과는 해안 및 남서부의 니카라과호 주변의 평야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산지가 발달하였으나, 지리적으로는 4지역으로 대별할 수 있다. ① 태평양 연안에는 화산성 산지와 구릉지가 좁게 이어지며, 산크리스토발(1,745m), 큰셉시온(1,610m), 모모톰보(1,280m) 등 화산이 배열된다. 기후가 좋고 토지도 비옥하다. ② 그 안쪽은 폰세카만(灣)에서 마나과호(湖)·니카라과호를 거쳐 산후안강(江) 부근에 이르는 지구대(地溝帶)로, 남동부는 코스타리카 북부 저지(低地)로 이어진다. 바람의 그늘이 되어 강수량이 적다.
③ 국토의 중앙부는 온두라스에서 산후안강 부근까지 이어지는 고지대(高地帶)로 북부는 표고 2,000m에 달하는 이사베야산맥과 넓은 고원 등으로 되어 있고, 남쪽으로 가면서 좁아진다. 능선 부근과 동사면(東斜面)은 비가 많고 산림이 무성하며, 많은 하천들이 발원(發源)한다. ④ 카리브해(海) 연안은 모스키토 저지로 불리는 저지대로, 그 면적은 국토의 약 반을 차지하며, 온두라스와의 국경을 이루는 코코강(세고비아강), 코스타리카와의 국경의 산후안강 외에 많은 하천이 흐른다. 북동풍이 탁월하여 열대다우지를 이루고, 특히 해안 부근은 저습(低濕)한 밀림지대(密林地帶)로 모스키토(모기라는 뜻)라는 지명 그대로이며 뚜렷한 건기(乾期)가 없다. 전국 평균기온은 24℃, 습도는 85%이며, 우기는 5~11월, 건기는 12~4월이다.
2. 주민
니카라과는 총인구의 약 77%가 에스파냐계(系) 백인과 원주민 인디오와의 혼혈족인 메스티소이고, 그밖에 백인 10%, 흑인 9%, 인디오 5%의 순으로 되어 있다. 총인구의 70%가 기후가 온화하고 개발이 진척된 서부에 살고, 따라서 호안저지(湖岸低地)를 중심으로 한 산록·고원에 수도 마나과를 비롯한 레온·그라나다 등 도시와 촌락이 집중되어 있다. 공용어는 에스파냐어(語)이고, 그밖에 수모미스키토(Sumo Miskito)어와 대서양 연안에서 영어가 사용된다. 종교는 국민의 94%가 가톨릭교도, 3%가 신교도이다.
3. 역사
1502년에 콜럼버스는 니카라과의 동해안을 발견하였고 이를 에스파냐의 영토로 삼았다. 이후 페드라리아 다빌라가 최초로 식민지 정부의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전제적인 착취와 탄압, 가톨릭교회의 무자비한 종교정책 등이 자행되었다. 1821년 과거 정복자들의 후손들이 에스파냐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이래로 토지와 무역정책을 둘러싸고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1855년에는 미국인 노예상인 W.워커가 대통령을 자칭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엽부터 미국은 자국의 영향력을 보장하기 위하여 수차례에 걸친 무력 개입을 자행하였다. 1927∼1934년에 장군 산디노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 세력들은 이러한 외세의 개입에 대항하였으나 결국 역부족으로 패배하였다. 1936년 국가방위군장관인 A.소모사 가르시아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약 40여 년간 족벌지배체제를 유지하였다. 1961년에 산디노의 전통을 계승하여 결성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이 소모사 독재체제에 대한 무장 저항운동을 시작하였다.
1978년 반정부계 신문 《라 프레사》의 편집장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가 암살되면서 대중운동이 비등하였고, 1979년 무장투쟁과 도시의 대중봉기를 결합한 FSLN의 주도 아래 니카라과혁명은 성공하였다. 그러나 산디니스타 좌익정부를 위협해온 미국은 지속적인 개입정책으로 혁명정부의 안정화를 효과적으로 저지해왔고, 1990년 2월 선거에서는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의 미망인 비올레타 바리오스 데 차모로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이 승리하였다.
4. 정치
1979년에 들어선 니카라과의 혁명정부는 산디니스타 혁명을 혼합경제, 민족단합에 기초한 민중적·민주주의적·반제국주의적 혁명으로 규정하고 무엇보다 국가주권의 보호와 국가재건을 강조하였다. 혁명정부는 정치적으로는 다원주의적 경쟁을 허용하여 야당의 자유로운 조직과 활동을 보장하였고, 경제적으로는 국가부문과 사적 부문을 동시에 용인하는 혼합경제체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건설 작업은 미국의 지속적인 탈안정화정책으로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콘트라 반군의 국경 침입, 국내 교란 등으로 예산의 25∼40% 가량이 군비에 지출될 수밖에 없었는데, 사회주의권과 유럽 서방국(특히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혁명 10년간 국민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10년에 이르는 전쟁과 경제적 피폐 때문에 대중들은 1990년에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등에 의한 국제 감시 아래 실시된 선거에서 산디니스타 좌익정부에 대한 지지를 상당수 철회하였고, 이 결과 미국이 지지하는 우파 야당세력이 중심이 차모로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후 콘트라 반군이 무장 해제·해체 완료를 선언하고 산디니스타 인민군이 8만 명에서 1만 5000명으로 삭감되면서 내전은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1995년 7월, 1987년의 산디니스타 헌법을 민주적 자유헌법으로 개정하였고. 1996년 10월 20일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동맹(AL)의 아르놀도 알레만이 당선되었다. 2000년 1월 헌법개정안이 가결되었고 2001년 11월 4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당인 자유헌법당(LCP)의 엔리케 볼라뇨스가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의 후보인 전 대통령 오르테가를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는 10년간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원조 혜택을 누렸고, 소련과 쿠바와 같은 사회주의권과도 각종 관계를 맺으면서 연대를 강화해왔다. 차모로 정권은 미국과의 관계를 수복하여 전방위 외교를 전개하였고 아르놀도 알레만 정권도 차모로 정권의 외교노선을 계승하였다. 2001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엔리케 볼라뇨스은 친미노선의 시장경제론자이다.
니카라과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으로 임기 5년이며 연속 재선은 금지된다. 의회는 일원제로 임기 5년의 의원 93명으로 이루어진다. 병역은 징병제였으나 차모로 정권 때 폐지되었고 1999년 현재 병력은 총 1만 7000명이다.
5. 경제
니카라과는 농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전형적인 후진경제국이다. 서부에서는 농지개발이 진척되어 고원지대와 산록에서는 커피·사탕수수·옥수수·두류(豆類)·밀 등이 생산되고, 저지에서는 주로 면화·쌀이 생산되고 있다. 수출 농산물외 주종은 면화·커피·사탕수수이다. 동부의 해안 지대에는 미국자본과 흑인노동력에 의해 경영되는 대규모 바나나 농원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토지 이용률이 낮다.
환금작물의 재배가 성한 반면, 식량은 상당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니카라과 북동부의 촌탈레스평원을 중심으로 목축업이 성하여 중미 제1의 목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생육(生肉) 수출이 많다. 공업은 식품가공업·섬유공업 등이 주종을 이루나 산업화의 수준은 낮은 편이다. 부분적으로 석유정제업·화학제품·선박 건조 등의 업종도 발전하고 있다. 광산자원은 풍부한 편이나 주로 귀금속을 중심으로 채취가 이뤄지고 있다. 산디니스타 좌익정부시절에 단행된 농지개혁과 경제 국유화정책으로(민중소유부문은 약 40%) 사회주의적 색채가 가미되었으나 경제적 후진성으로 소생산자의 비중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1990년 4월에 발족한 차모로 정권은 경제재건을 위하여 경제안정, 구조조정, 채무삭감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강구하였고 그 결과 경제성장률이 1992년 플러스로 변하였으며 1997년에는 5.5%를 기록하였다. 1994년 6월에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의 확대 구조조정 융자가 실시되었다가 이후 각종 조건의 불이행으로 중단되었으며, 알레만 정권이 세제개혁과 국립은행의 민영화를 단행함으로써 1998년 3월 재개되었다. 1998년 10월 허리케인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국제적 지원을 받고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 1999년 실질 경제성장률은 7.0%를 기록하였다.
무역에서는 1998년 수출이 8억 달러, 수입이 16억 45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커피, 새우, 쇠고기, 가재, 수입품은 건설자재, 식료품, 가정용품, 원유이고 주요 무역 상대국은 미국·독일·코스타리카·엘살바도르·과테말라·파나마·베네수엘라 등이다. 도로 총연장 1만 7594km 중 포장도로는 10% 미만이고 팬아메리칸하이웨이가 국토를 세로로 관통하고 있다. 1999년 현재 공항은 182개가 있다.
6. 사회
니카라과의 초등교육은 무상 의무교육제(12년)로 되어 있으나 15세 이상 국민의 34.3%(1995)가 문맹이다. 산디니스타 정부의 문맹퇴치 프로그램으로 문맹률이 상당히 낮아졌지만 정규교육의 혜택은 여전히 상류층에 국한되었다. 대학은 4개뿐이다. 신문사 6개사, TV채널은 8개, 라디오방송국은 45개국이 있다.
인구의 94%가 가톨릭교도이고, 카리브 해안지대에 신교도들이 일부 살고 있다. 2000년 인구증가율은 2.2%, 출생률은 1,000명당 28.26명, 사망률은 4.9명, 영아사망률은 34.79명이다. 평균수명은 68.74세로 남자는 66.81세, 여자는 70.77세이다.
7. 문화
니카라과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모더니즘의 기수라 일컬어지는 시인 루벤 다리오를 낳았다. 산디니스타 혁명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작가로는 시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소설가 세르히오 라미레스 등이 있다. 니카라과 문화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니카라과인(人)의 주류를 이루며 태평양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문화는 토착인디언과 16세기 스페인 정착자들의 문화가 혼합된 형태로서 많은 도시들이 강한 프랑스풍을 나타내고 가톨릭이 지배적이다. 반면에 애틀랜타 해안 쪽의 문화는 영국인이 19세기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기 때문에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신교(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이 강하다.
그러나 니카라과인의 대부분은 가톨릭을 믿으며 각시(市)에는 그들만의 수호 성인이 있으며 몇 개 마을끼리 성인을 공유하기도 한다. 주민들은 성인에게 선물을 바치며 치료, 풍년, 결혼 등을 기원한다. 또한 연중 각 성인을 기리는 축제(fiesta)가 열리는데 그 가운데 12월 8일에 절정을 이루는 라 퓨리시마(La Purisima)가 가장 중요하다. 축제는 성인의 동상이 도시로 들어오는 퍼레이드로 시작되고 춤과 노래, 연극, 의식 등으로 이어지며, 어두워지면 사방에서 축포와 불꽃을 터뜨리고 모든 사람들은 밤늦도록 먹고 마시며 즐긴다. 니카라과 국민은 야구를 매우 좋아한다.
9. 대한관계
니카라과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 한국과는 1962년 1월 26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63년 6월 공관을 설치하였으며 2001년 현재는 주코스타리카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 1995년 6월 20일에는 주한 니카라과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90년 8월 주멕시코 대사 이복형이 관계정상화 교섭 및 신임장 제정을 위해 방문하였고, 1997년 1월 특사 박찬종이 니카라과를 방문하였다. 니카라과에서는 1990년 11월 대통령 특사 몬테알레그레(Montealegre), 1995년 8월 외무차관 호세 팔라이스(Jose Pallais), 1995년 11월 니카라과 중앙은행장 호세 에베노르(Jose Evenor), 2000년 5월 대통령 아르놀도 알레만 등이 방한하였고 2001년 6월에는 2001년 11월 대통령으로 선출된 여당 대통령 후보 엔리케 볼라뇨스가 방문하였다.
양국은 1968년 문화협정, 1995년 사증면제협정, 2000년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였다. 2000년 대한(對韓) 수입은 5만 1500달러, 대한 수출은 140달러이며 섬유류, 기계류, 차량 등을 수입하고, 메리야스 편물 등을 수출하고 있다. 북한과는 1963년 6월 5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1995년 6월 공관을 폐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