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베소서 5장 15-21절
제목 :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3)
오늘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시리즈 세 번째 설교입니다. 5장 1-2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1-2절에서는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 3-14절에서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을 하나님을 본받는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이제 15-21절에서 바울이 제시하는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을 본받는 방법은 ‘지혜있는 자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여러 번 언급했지만, 15절을 보시면,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우리의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결코 신앙심이 좋아진다는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빠지지 않고, 성경책을 많이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을 하나님을 본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우리가 이 말씀들을 가지고 삶에 적용할 때 삶에서 실제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의 행동인가를 고민하셔야 하는데 가만보면 적용이 ‘말씀을 더 읽겠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겠다’ 이런 식의 적용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적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적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삶의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라”고 강하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을 본받는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지혜 있는 자 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 있는 자 같이 행동하는 것일까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어떻게 살 것인가?
첫째로 지혜 있는 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그 답을 “세월을 아끼”는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아끼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악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창6:5-6절을 보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하나님이 보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다는 표현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때가 악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죄악이 가득함으로 하나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십니까?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7절) 마치 더러운 마당을 물로 청소하듯이, 하나님은 더러운 죄악이 가득한 인간세상을 물로 쓸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가 잘 아는 노아의 홍수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는 말은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가까웠으니 지혜롭게 시간을 잘 살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라는 것이 바로 16절에서 바울이 제시하는 ‘하나님을 본받는’ 첫 번째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간을 아끼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리더십 전문가들에 의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의미없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들을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로 한번 구분해 보십시오. 그러면 또 그 일들을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과 급하지 않은 일로 나눠 보십시오. 그러면 크게 네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들,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중요하지는 않은 일들, 마지막으로 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입니다. 이중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위에 있는 일들 즉, 급하고 중요한 일들과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먼저 처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대부분의 시간을 중요하지 않은데 급하게 다가오는 일들을 처리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면 정작 진짜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함으로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시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50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시간 대신에 돈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면 위에서 언급한 매트릭스가 확 바뀌는 겁니다. 돈을 벌기 위해 긴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무엇인가, 돈을 벌기위해 긴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들이 무엇인가....이렇게 기준이 바뀌어 버리면 그 속에서 다뤄지는 내용들이 확 바뀌게 됩니다.
그 말은, 결국 우리가 세월을 아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가치는 무엇이냐는 겁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 이겁니다. 바울이 왜 세월을 아끼라고 하면서 때가 악하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월을 아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판의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을 하실까요?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지혜 있는 자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다같이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2)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둘째로, 지혜 있는 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주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의 뜻을 위해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하면 기뻐하시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오늘 본문과 아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본문입니다. 마 25:1-13절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가 바로 5, 2, 1달란트 받은 종의 비유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지혜있는 자와 미련한 자가 각각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5, 2, 1달란트 받은 종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5, 2달란트 받은 종들은 각각 주인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가서 두 배의 이윤을 남겨 주인에게 돌려줍니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서 받은 것을 그대로 다시 돌려주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4-25)
그러자 그 주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마 25:26-27) 무슨 말입니까? 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잘 알았느냐? 그러면 그 뜻대로 행동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입니다.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하지만 그 뜻대로 행동하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1달란트 받은 종을 앞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은 종류의 사람으로 취급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종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 번째 지혜 있는 자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다같이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3) 무엇에 의해 살 것인가?
지혜 있는 자의 세 번째 모습은 무엇에 의해 살 것인가를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에 의해’라는 말은 ‘무엇이 우리를 지배하게 할 것인가’ 또는 ‘우리가 무엇에 이끌려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무엇에 의해 살아야 합니까? 네, 성령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7절에서 말하는 주의 뜻이라는 겁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우리가 어디서 성령을 또 받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은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인격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려고 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주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면 됩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신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온전히 우리를 지배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상태를 가리켜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들은 성령 대신에 무엇을 우리 안에 가득 채웁니까? 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대표적인 예를 ‘술’로 제시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인사불성이 되어 자기가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술에 만취하게 되면 사람이 술을 먹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먹는 상황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본문을 가지고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 마시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네,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부부끼리 맥주 한 잔 마시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딤전 5:23절을 보면 바울은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마셔보라고 권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술의 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그래서 조금씩 마시려고 했지만 결국은 술에 취해서 곤죽이 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모습을 비교하면서 술에 취해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성령에 취해서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혹시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까지 술을 끊지 못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서 술을 끊고 그 대신에 성령에 의해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꼭 술만이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술 대신에 돈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성공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행복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 의해 우리가 살 것인가? 그것이 성령이 아닌 그 무엇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에 의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19-21절에서 성령 충만한 자의 모습을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성령 충만한 자는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19절입니다. 둘째, 성령 충만한 자는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20절입니다. 셋째, 성령 충만한 자는 피차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21절입니다.
22-33절에서 바울은 이 피차 복종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부부관계를 듭니다. 또 6장에서는 부모와 자녀 간에 피차 복종하는 법과 주인과 종 사이에 피차 복종하는 법에 대해 제시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 있는 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까? 첫째,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을 아끼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셋째, 무엇에 의해 살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술이나 다른 그 어떤 것이라도 성령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성령님의 자리에 다른 그 무엇을 놓는다면 우리는 미련한 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삶 속에 귀한 은혜와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