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쇠 부지땡이
아빠는 이리 철도청에서 평생 엔지니어로 일을 하셨지만 우리 집은 논농사가 많았고 농사를 즐겨하셨던 엄마 덕분에 나는 맏딸로서 일찍부터 부엌일을 시작하였다.
가마솥에 밥을 짓거나 고구마를 찔 때 엄마는 자주 맏이인 나를 불러서 아궁이에 불을 때게 만들었다. 아궁이에 마른 볏짚을 조금씩 넣어서 불을 꺼트리지 않고 밥물이나 고구마물이 솥단지 아래로 넘칠 때 까지 불을 땐다. 밥의 구수한 냄새나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엄마의 지시대로 부지땡이로 잿불을 뒤지다가 짚 몇 줌을 더 넣어 마지막 불이 화끈하게 타게 해주면 밥 짓기나 고구마 삶기가 끝이 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은 엄마가 꿈자리가 사납다며 부엌에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논에 일을 하려 가셨다. 오후 서너 시경, 마른 짚들을 묶어서 부엌 구석에 쌓아두고 나니 갑자기 밥을 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충 물을 맞추고 불을 때는데 고래가 막혀서인지, 바람이 거꾸로 불어서인지 연기가 나가지 않고 거꾸로 들어왔다. 부엌 안이 매캐한 연기로 자욱해서 캑캑거리다 부지땡이를 들고 뒤 안으로 나왔다. 당시 쥐고 있었던 나무 부지땡이 끝이 불에 타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숨을 몰아쉬며 눈을 비비다가 나 자신도 모르게 그만 담장 위 이엉에 불을 붙였다. 눈을 뜨고 보니 이엉에 붙은 불이 작은 소쿠리만큼 타고 있었다. 놀란 나머지, 부지깽이로 이엉을 두드려서 불을 끌 생각을 하지 못하고 부엌에서 한 바가지 물을 퍼가지고 나오니 불이 곧 지붕으로 올라갈 심산이었다. 혼비백산해진 나는 하얗게 질려서 “불이야!” 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발만 굴렀다. 그 때 마침 두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서 지게로 짊어지고 가던 앞집 춘자 언니가 불이 난 것을 보고 담장 아래 멈추어 섰다. 그 순간, 뒤 집의 정자 언니가 일을 보려고 안방 문을 열고 마루로 나왔다가 우리 집 담장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맨발로 뛰쳐나오며 “불이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잽싸게 춘자 언니가 나르던 물동이의 물을 쏟아 부어서 불을 껐다.
앞집과 뒷집 언니들 덕분에 초가삼간이 화재를 모면하고 진정 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언니들 이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는 죄인처럼 작은 목소리로 ‘부지땡이에 불이 붙은 줄 몰랐다’고 고백하였다. 언니들은 집이 다 탈수 있었는데 신이 도와주셔서 정말로 운 좋게 화재를 면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다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허물어진 담이었다.
정자 언니가 물 두 동이를 부어서 불을 끄고 있을 때 “불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웃 아저씨가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다며 쇠스랑으로 집으로 이어진 쪽의 담을 허물어 버린 것이었다. 아저씨가 담을 허물어서 불똥이 지붕으로 옮겨 붙지 않게 해준 것은 고마운데 무너진 담 때문에 야단맞을 생각을 하니 오금이 저렸다. 미리 논에 가서 이실직고를 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는데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신 부모님께서 허둥지둥 달려 오셨다.
엄마는 꿈자리가 사나웠다는 말을 반복하시며 액땜을 하셨다고 하였다.
꿈인즉슨 시냇가로 빨래를 하러 갔는데 분홍저고리를 빨다가 놓쳐서 저고리가 둥둥 떠내려갔다는 것이다. 저고리를 잡으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물살이 거세져서 도로 나와서 “ 내 저고리, 내 저고리” 라고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르다가 꿈에서 깼다는 것이다.
아빠는 불이 나게 된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신 뒤, 부엌에서 나올 때, ‘부지땡이를 항상 살피라’고 주의를 주셨다.
다음 날 퇴근하고 돌아오시는 아빠의 손에 쇠 부지땡이가 들려 있었다. 아빠의 쇠 부지땡이는 서너 개의 철근 토막을 용접해서 지팡이처럼 길게 만들어 졌고 손잡이 부분이 적당이 구부려져서 쥐기가 편하였다.
아빠는 나무 부지땡이를 사용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셔서 다음 날 바로 철근 토막을 손수 용접해서 쇠 부지땡이를 만들어 오신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졸업하고 고향을 떠날 때 까지 나는 그 쇠 부지땡이로 불을 땠다.
4학년 겨울방학 때 새집으로 이사를 가서 부엌 아궁이가 4개로 늘어나자 아빠는 쇠 부지땡이를 하나 더 만들어 오셨다.
볏짚으로 밥을 지을 경우, 하루에 한 번은 재를 퍼주어야 한다. 그러나 재를 퍼내는 일이 귀찮으면 쇠 부지땡이로 재를 마구 두드려 엷게 펴서 그 위에 불을 지피기도 하였다. 아무리 재를 두드려서 바닥에 얇게 펴도 재가 아궁이에 가득 차면 고래 속으로 밀려들어가서 고래가 막히게 되므로 이틀에 한 번은 꼭 퍼내야 했다. 아무리 게을러도 이삼일에 한 번은 당그레로 재를 긁어서 재 소쿠리에 담아 잿간에 쌓아야 했다. 재를 퍼낼 때,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은 난감하였다.
여름에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는 일은 고역 중에 고역이었다. 되도록 불을 멀리 하는 것이 상수이므로 아궁이로부터 멀찍이 앉아서 긴 부지땡이로 짚을 밀어 넣으며 불을 조절하였다. 겨울에는 방에 앉아 있는 것보다 아궁이 앞에 있는 것이 따스하고 푸근해서 생각 없이 불을 때다가 밥을 태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수년 전, 비자 문제로 인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은거하는 심정으로 고향 집에 머물렀다. 사람을 피하고 구석방에 둥지를 틀고 있을 때 아빠는 마루 끝에 있는 쇼파에 앉아서 먼 하늘을 바라보시다가 심심하면 나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아빠가 한 마디씩 해주는 말이 나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다.
“소신껏 산 사람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문이 닫히면 열릴 때 까지 기다리면 된다.”
딸을 인정해주는 아빠의 마음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결에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의 소신은 무엇이었어요?”
“내 소신? 하하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는데 약속대로 살았지. 열심히 살아서 후회가 없다.”
아빠는 세 가지 소신을 가지고 사셨다고 하셨다.
첫째는 공부를 하지 못 한 것에 대한 아픔이었다.
할머니의 반대로 진학을 포기하면서 정식으로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아빠는 혼자 공부하기로 다짐을 하였고 평생 동안 당신의 결심대로 노력하며 사셨다.
우리 집에는 아빠가 강습소에 가서 좋은 성적으로 수료하면서 받은 상장이 수두룩하였다. 아빠가 세례를 받은 후부터 365일 가정예배서를 보내드렸는데 설교집이 동화책처럼 재미있다고 말씀하셨다. 말년에 몸을 가누시기 힘들었을 때조차도 아빠는 독서를 즐겨하셨다.
아빠가 위대한 학자나 위대한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공부하며 자기 성찰을 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빠가 소신대로 사셨다는 것을 백퍼센트 긍정한다.
둘째는 가난한 집 아이, 가난한 집 자식으로 천대와 멸시를 받은 것에 대한 아픔이었다.
아빠는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과 사회를 증오하며 투쟁하는 것으로 인생을 보내시는 것보다 주변의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며 도우며 사시기로 결심하였다고 하셨다. 그리고 소신대로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어울려서 평범하지만 비범한 삶을 사셨다.
명절마다 가난한 집에 쌀을 보내주셨고 특별히 어려운 집에 대해서는 따로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우리 동네 천덕꾸러기 이었던 “하나님”을 아빠는 각별하게 예우하셨다. 열 명의 자녀를 잃은 가난한 어머니,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불행한 그의 아픔과 슬픔을 잘 이해하였던 아빠는 그 분을 존귀하게 여기셨고 그 분을 물심양면으로 돌봐 주셨다.
아빠는 직장에서 일용직을 비공개로 채용할 때 마다 가난한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싶어서 주변의 가난한 여러 이웃들을 소개해 주었고 한 번도 소개비를 받지 않으셨다. 그 사실을 동네 어른이 선물을 사가지고 집에 와서 말해서야 알았다.
셋째는 아빠의 양심과 탐욕과 관련되어 있다.
십대 후반에 이리 철도청에 일용잡부로 취업하신 후, 국가의 자원을 몰래 훔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일터에서 아빠는 비난과 조소를 받으시면서 평생 깨끗하게 살기로 다짐하셨고 진실로 그렇게 사셨다.
해방 직후, 한국전쟁 직후, 사람들이 도적질하고 노름하고 사기 치는 일로 패가망신하는 일을 많이 지켜보기도 하셨지만 아빠는 노력하지 않고 나라의 것이나 이웃의 것을 훔치는 일 자체를 불의하고 악하다고 생각하셨다. 이리 역전 광장 옆의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석탄과 자재들을 ‘먼저 팔아먹는 사람이 임자’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밤에 트럭을 대놓고 훔쳐다 팔 때 아빠는 그들에게 놀림 받으면서도 자기 소신을 지켰다.
40 평생을 한 직장, 한 자리에서 일했지만 진급이 되지 않아서 항상 낮은 자리에 계셨다. 아빠는 낮은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굳이 뇌물을 써서 인사닦이를 하지 않으시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묵묵히 감수를 하시며 자기의 임무를 다하셨다.
아빠는 은퇴 후에 돈 쓰는 일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이웃동네 사람들과 술자리를 할 때도, 마을 사람들을 모시고 축제에 참석하실 때도, 모처럼 친구들과 만나 한 잔 나누실 때도 아빠는 돈을 내는 것을 즐거워 하셨다. 친구나 이웃들이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돈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밥도 꼭 사주었다는 이야기를 하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직장 후배 되시는 어른에게 들었다.
아빠는 자신이 신의 도움으로 사리사욕 없이 깨끗하게 잘 살았다고 하셨다. 큰 부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굶주리는 이웃들을 배려하였고, 돈을 꾸러 오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며 잘 살았다는 놀라운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아빠의 소박하고 단순한 삶, 겸손하고 근면한 삶을 알지만 일부러 돌직구를 날렸다.
“아빠 제가 어렸을 때 쇠 부지땡이 만들어 오셨는데 그건 무엇이지요?”
“쇠 부지땡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철근 조각 몇 개로 만들었지. 이눔아! 그것은 훔친 것이 아니여. 쓰레기통을 뒤져서 찾아낸 거지.”
거의 반백년 전의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나도 놀랍지만 아빠의 기억도 놀라웠다. 아빠는 그 때, 그냥 쇠 부지땡이를 만든 것이 아니었고 그것이 자기의 소신을 깨는 것이 아닌가를 깊이 생각하셨던 것이다.
순간 나는 나의 소신이 아빠의 빵틀에서 나온 포장이 다른 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빠의 소박한 소신을 나는 거창한 신학적 용어로 포장했을 뿐 아빠의 소신과 나의 소신은 다름이 없었다.
부엌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부지땡이가 사라진 시대이다.
아빠는 낮은 자리에서 작은 자로 크리스천의 삶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름답게 사셨다. 아빠는 가셨지만 쇠 부지땡이와 함께 내 가슴에서 살아 계신다.
2020.8.17.월
우담초라하니 / 원고지 30.8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