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이의 도보여행] 서울 한양도성 걷기 ③
정도전의 눈으로 한양을 내려 보다
[출처] 월간산 512호 2012. 6월호
[글] 윤문기 (사)한국의 길과 문화 사무처장ㆍ발견이의 도보여행 운영자
창의문~북악산~숙정문~혜화문 4.7㎞
1. 순성놀이의 즐거움
2. 1구간(숭례문~정동거리~인왕산~창의문)
3. 2구간(창의문~북악산~숙정문~혜화문)
4. 3구간(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
5. 4구간(광희문~남산~숭례문)
6. 서울성곽 주변의 걷기명소들(부암동과 성북동)
▲ 한양을 도성으로 천거했던 정도전은 600년 후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창의문... 인조반정의 분기점을 넘던 역사의 장소
구간의 시작점인 창의문(彰義門)으로 가려면 그 앞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를 나와 청와대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무궁화동산을 지나 20분 만에 창의문에 도착할 수 있다.
▲ 1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도심에 묻혀 있다 보면 이런 운치는 까맣게 잊고 만다.
2 튼튼하기 그지없는 서울성곽! 왜 이런 단단한 성곽을 두고 조선의 임금들은 그리 쉽게 몽진을 결정했을까.
의(義)를 밝힌다는 뜻을 가진 창의문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광해군을 용상(龍床)에서 끌어내렸던 인조반정이다. 반정 때 쿠데타군이 문을 부수고 도성에 난입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 문이 뚫리지 않았다면 인조의 잘못된 외교적 판단으로 인해 촉발된 정묘호란과 병자혼란 같은 큰 난리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 있어 ‘만약에 그랬다면’이라는 표현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지만 인조반정의 공신 52명이 적힌 편액을 문루에 달고 있는 창의문을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의 역할은 너무나 크고 넓다.
인조반정 당시의 공신 이름이 적힌 검은 현판이 걸린 문루에는 최근 들어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적외선 감지기를 설치했다. 문루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려 할 때마다 인상이 찌푸려지는 경고음을 뿜어내므로 밖에서 고개를 숙여야 이 편액을 볼 수 있다.
▲ 1 인조반정 당시 반란군이 문을 부수고 도성으로 난입했다는 창의문에서 이번 코스를 시작한다.
2 북악산 성곽길은 신분증을 제시하고 문화유산탐방 표찰을 받아야 입장할 수 있다.
이곳에 사람의 출입을 막는 것은 창의문이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 있는 사소문(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중에서 유일하게 정면 4칸과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문루가 옛것 그대로 남아 있다. 창의문 바깥으로 향하면 부암동길을 지나 ‘비밀의 정원’이라 일컬어지는 백사실계곡도 갈 수 있다. 백사실계곡은 이 연재 마지막 번외 편에 잠시 소개하도록 하고 본래 갈 길인 북악산 성곽을 안내한다.
창의문 오른쪽 계단을 올라 창의문안내소를 지나면 정상까지 계단으로 이어진 북악산 성곽구간이다. 북악산 지역은 1968년 1월 21일에 있었던 1·21사태 이후 일반인 출입이 통제된 금단의 땅이었다. 그러다 2007년 4월 5일 식목일을 맞아 성곽길을 따라 걷는 길이 전면 개방되면서 도성에서 가장 수려한 산수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창의문안내소에 신분증을 제시하고 신원조회를 거친 후 탐방표찰을 받아야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조금은 까다로운 단계를 거쳐야 한다.
또한 초소나 경비시설이 사진에 찍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곳곳에서 이에 대한 제지를 받을 수 있으니 주의하자. 서슬 퍼런 경계의 눈빛을 뚫고 내딛는 걸음임에도 눈에 박히는 풍광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홍제천 물길에서 솟기 시작한 인왕산 능선이 넘실대며 봉긋 솟은 모습과 그 정상에서 구불거리며 타고 내리는 서울성곽. 여기에 멀리 북한산 연봉이 말떼가 질주하듯 출렁거리며 보현봉을 향해 달려간다. 이 광경을 햇빛 좋은 날 바라보면 서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계단으로만 이어진 길이지만 지루할 틈 없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자연풍경은 외국의 유명 관광지조차 부럽지 않다. 서울 한양도성을 순성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산세와 지세, 그리고 그에 걸맞은 생태조건은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간과할 뿐, 마치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 서울 성곽길 2구간
백악마루 ~ 숙정문... 남주작, 북현무, 우백호의 우뚝 선 모습 장대하도다!
돌고래쉼터를 지나 백악마루에 오르면 비로소 경복궁 일대와 광화문이 한눈에 조망된다. N타워를 촛대처럼 꽂은 남산이 생크림 케이크처럼 봉긋 솟았고, 그 너머 불의 기운이 뜨겁게 흘러넘친다는 관악산이 활활 불타오르는 형상으로 서울의 경계를 화기로 둘렀다. 도미노의 블록처럼 네모나게 솟아난 빌딩들은 주저앉는 방법을 찾지 못해 할 수 없이 서 있는 사람마냥 피곤해 보인다.
쉼터로 조성된 청운대를 지나면 잠시 성곽 바깥쪽으로 넘어서 길을 걷게 된다. 여기서는 성곽의 체성 부분에 해당하는 곳들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다. 각 시대별 축조방법도 확연히 드러난다. 높다란 성벽을 끼고 걸으며 ‘이렇게 튼튼한 성곽을 지어두고 왜 전쟁만 나면 임금은 서둘러 몽진을 떠났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 조선왕실이 사랑했던 소나무가 걷는 내내 곳곳에서 걷는 이들을 반긴다.
길을 좀더 걷다 다시 성곽 안으로 들어오면 곧 왼쪽으로 ‘곡장’이라는 곳으로 갔다 올 수 있다고 방향 이정표가 가리킨다.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곡장에서만 볼 수 있는 수려한 풍광이 백악마루의 그것보다 한 수 위이므로 꼭 가보도록 한다. 곡장이란 성을 방어하기 위해 바깥으로 돌출시켜서 만든 성곽으로 둥그런 곡선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곡장(曲墻) 혹은 곡성(曲城)이라고 부르고, 네모나게 각을 이룬 것은 치성(雉城)이라 한다.
곡장을 지난 이후로는 완만한 내리막을 이룬다. 내리막 역시 계단이 많은 편이므로 무릎이 좋지 않은 이는 스틱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곡장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 한양도성의 북쪽 대문인 숙정문(肅靖門) 문루로 들어서게 된다. 숙정문이 대문이기는 하지만 산 속에 있는 탓에 실질적인 문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고, 음양오행에 따른 전각과 문의 배치에 따라 지어진 상징적인 문이었다.
숙정문은 음의 기운이 강해 이 문을 열어놓으면 장안 부녀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문을 닫아두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다 가뭄이 들면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으며, 비가 너무 많이 내리면 숙정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지금 숙정문 문루에서 바라보는 북악스카이웨이 방면의 풍만한 숲은 한동안 눈길을 잡아 끈 채 놓아주질 않는다. 풍요로운 숲 안에 섬처럼 떠 있는 삼청각과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은 전통 건축 양식이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 혜화문의 홍예.
주변에 새가 많아서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봉황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숙정문 ~ 와룡공원 ~ 혜화문... 아, 아파라! 석축 사이에 낀 성돌들
다시 성곽을 따라 도성 안쪽을 걸으면 말바위쉼터를 지나고 곧바로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에서 받았던 탐방 표찰을 반납한다. 이곳에 식수대와 화장실 등이 있으므로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10분 정도 더 걸으면 성곽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나무계단이 있다. 성곽길을 계속 이으려면 와룡공원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오래전부터 방향 안내판이 이상하게 서 있어서 헷갈리기 쉽다. 일단 나무데크 계단을 이용해 성곽 밖으로 나와 걷는다.
지금부터 10분간 걸을 성곽길은 서울 한양도성 전 구간을 통틀어 가장 운치 있는 길이다. 인위적인 느낌 없이 온전히 숲속으로 난 흙길에서 성벽을 길벗 삼아 걷는 이 잠시 동안의 낭만은 느릿느릿 팔자걸음으로 즐겨도 좋을 것이다. 성북동에서 서울성곽을 끼고 조성된 와룡공원을 만나면 성곽 탐방로는 다시 성곽 안쪽으로 들어와서 이어진다.
▲ 1 서울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 산 속에 있던 탓에 정상적인 문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2 숙정문에서 바라본 북악스카이웨이 방면의 봄 풍경.
3 북한산 연봉의 위용을 바라보며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4 와룡공원은 수수꽃다리를 비롯해 철쭉, 연산홍 등 다양한 관목과 활엽수가 있어 늘 싱그러움이 넘친다.
와룡공원에서 바라보는 성북동은 남향의 부촌과 북향의 빈촌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북향의 경우 성곽에 가까이 기대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바짝 다가와 있고, 부유한 마을은 멀리 아득하게 자기들만의 영토를 지킨다. 수수꽃다리가 만개하는 계절에 걸으면 더욱 좋을 와룡공원의 끝은 서로 원조임을 주장하는 왕돈가스집들이 경쟁하는 곳이다. 진짜 원조인 금왕돈가스는 성북동 수현산방 부근으로 이미 오래전에 이사 갔고, 그 아류들이 원조를 자처하고 있다.
아무튼 가야 할 방향은 서울왕돈가스 오른쪽 골목이다. 이 길로 접어들어 오른쪽을 보면 학교 담장 밑 석축 기단으로 서울성곽의 성돌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중히 보존해야 할 문화재가 이리 함부로 쓰였다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혜화문까지 가는 내내 이러한 현상은 목격된다. 심지어 혜화문 부근의 서울시장 공관도 여러 논란 속에 서울성곽 위에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공관 이전을 추진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맞지 않아 조금씩 연기되고 있다. 이 코스의 종착점인 혜화문은 높다란 석축의 서울시장 공관 옆에 자리한다. 다음호에는 혜화문을 출발해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을 거쳐 광희문까지 닿는 길을 소개하겠다.
▲ 서울 성곽길을 가며 바라본 남산 방면의 서울.
경복궁의 건물배치도 한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