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한라산이요, 한라산은 곧 제주다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의 한라산 등산사
1935년 이즈미 세이치씨가 촬영한 산촌사람.
1935~36년 한라산 동계 초등반 때 포터로 고용된 사람이다.
제주는 한라산이요, 한라산은 곧 제주다. 한라산 등반은 여권과 비자만 없을 뿐, 해외(海外)등반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육지
산 1회 등반 비용은 적게는 다섯 번, 많게는 열 번의 한라산 등반비용과 같다. 그럼에도 한라산에
한 번도 오르지 않은 육지 산악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미 한라산을 올랐거나 오르고자 하는
이들이 알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미미한 편이다.
이 한국등산사 초록은 6·25 이후 60년대 산악운동사이지만, 제주편은 제주를 알고 한라산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먼저 1950년대 이전인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의 개괄적 등산사를 약술하고,
50~60년대 등산사를 기술하고자 한다. 시대적 상황을 배제하거나 기간에 얽매어 등산사의 앞과 뒤를
떼어내고 가운데 토막만 작성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에서다. 다른 지역 등산사와는 다르게
작성되지만 어쩌면 제주도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며, 한라산 등반의 즐거움을 배가시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아니한다.
지금까지 제주도 산악인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은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묻혀지기 전에
알려 드리고자 그동안 찾았던 한라산에 대한 기록들과 기억을 더듬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제주 사람들의 고향을 알아보려면, 한라산을 어디서 보는 것이 제일 아름다우냐를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늘 보아온 장엄한 한라산이 각인되어 언제 보아도 그 모습이
아름답고 경외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한라산은 제주 사람들에게 어머니 품과 같이 포근하고,
생활터전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하늘같은 존재요, 성지로 여기는 곳이기도 하다.

성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 어디 인간의 힘으로 되랴마는, 제주 산악인들에게 가장
존경받았던 김종철씨와 타계하신 몇몇 산악동지들이 있었다면 최소한의 역사 작성이나마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신령이라던 김현우씨는 건강이 좋지 않고, 일부는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의논대상이라야 열 손가락 안이다. 그나마 김승택씨가 40여 년 전 일들을 새록새록 기억해내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한 가지 고민스러운 것은 한라산 등산사에 조난사고를 많이 기술해야하는 데 따른 부담감이다.
육지에서 와서 무사히 마치고 간 팀은 알 수 없어 기술하지 못하고, 기억조차 하기 싫은 조난사고에
대해서만 언급해야하니 글 쓰는 이의 마음은 착찹하기까지 하다. 한라산을 찾았다가 불귀의 객이 된
분들의 유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전하면서 다시 한 번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은 제주도 산악운동사를 정리하여 산악 후배들에게 전하는 뜻 깊은 기회라
생각하며, 그들에게 완결편을 만들어내라는 과업을 부여하고자 한다.
태평양 큰 바람 막아주는 한반도 진산

이름이 여러 가지로 불리게 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진산(鎭山)이란 보통 도읍의 뒤에 위치하여 그 지방을 편안하게 지켜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런 뜻에서
제주도는 한반도의 진산이다. 태평양에서 한반도쪽으로 불어오는 큰 바람을 한라산이 막아주어 한반도의
안녕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태풍의 길목에 우뚝 서서 내륙지방을 지켜주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이 은혜로 말미암아 영남과 호남의 곡창지대가 만들어지고, 내륙지방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정한다면 한라산을 대할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건하게 임해야할 것이다.
한라산(영주)은 금강산(봉래), 지리산(방장)과 더불어 우리 나라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한라산은 범상한 이들은 근접하기를 꺼리는 신성시됐던 곳이기도 하며, 난대·온대·한대 및
고산지대의 식물을 한 몸에 지니고 있어 세계적인 식물보고로도 알려지고 있다. 우리 나라 전체 식물
4,000여 종의 절반인 1,800여 종이 분포하고 있다니 얼마나 많은 식물종이 자생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유배지이자 요새지
조선시대 제주도는 대표적 유배지였고, 일제시대 제주도는 대륙침략의 전초기지였다. 유배지로서의
제주도는 왕도 서울에서 최남단에 위치한 절해고도로 2,000리, 2,500리, 3,000리를 초월한 상징적인
최악의 유배지요, 유배당한 유형인은 대체로 중대범인 국사범이나 정치범들이었다.
유형인들은 최악의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절대절명의 유배적 상황에 직면하고 체험한 것들을 글로
옮김으로써 소위 섬을 소재로 한 유배문학을 만들어냈다. 이들 유배문학 작품들은 한결같이 주옥같은
국문학 작품들이어서 오늘날까지도 국문학사적 위치와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죄질이 무거운 국사범이나 정치범인 경우 언제 복권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방의 수령과 방백들이
전직 예우로 유형인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경우가 있어 유배생활을 불편없이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제주도에 유배된 49명 중 일부는 제주도를 주옥같은 유배문학의 산실로
만들었는가 하면 후학들을 양성한 이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일제 말에는 일본군이 소위 정예부대 관동군 10개 사단 20만 명을 한라산에 투입시켜
요소요소에 요새를 구축하고 동굴을 파서 연합군을 유인 격멸키 위한 주전장으로 무모하게
기도한 바 있다. 당시 일본은 제주도에 대륙 폭격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에게 한라산
등반은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세부자료들을 입수할 수 없어 자세히 기술하지 못하나, 한라산을 다용도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산을 한 바퀴 도는 하찌마께도로와 한라산을 개발하기 위해 만들었던 개발단도로, 일본군이
만들었던 인공동굴 등의 자료들은 누군가가 찾아내어 정리하고 보존해야할 아픈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한라산의 특이한 기록들
1002년(고려 목종 5년) 6월에 한라산에 4개의 구멍이 나면서 붉은 물이 솟아났다. 제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붉은 물이 솟아날 때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땅이 움직이며 우뢰 같은 소리가 나다가
7주야만에 맑아졌는데, 산에는 모든 초목이 없어지고 연기만 그 위에 덮여 있었다고 한다.

한라산 높이는 이재수의 난이 발생했던 1901년 독일 지리학자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가
측정했다. 1901년 5월 인천에서 현익호를 타고 제주를 방문한 겐테는 35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영실 코스로 한라산에 올라, 한라산 높이가 1,950m라고 측정한 지리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기록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940년 일본이 만든 제주도 지도에 오름 높이가 다르게 적힌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측량기술은 한 수
위였던 모양이다. 그는 1901년 중국을 경유해 한국에 도착, 미국인 센즈(Sends)를 만나 제주도에 대한
정보를 듣고 5월에 한라산을 등반했으므로, 이방인들에게도 한라산은 매력적인 산으로 비췄던 모양이다.
제주를 방문한 서양인 1호는 2002 월드컵 축구대표 감독 히딩크의 조국인 네덜란드인 하멜이다(1653년).
이재호 목사는 겐테 일행들에게 “한라산에 오르게 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원주민이건 이방인이건 아직까지 한라산에 올라갔다온 사람이 없고,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함과 안정을
누군가가 깨뜨리는 날이면 산신령이 악천후와 흉작과 역병 등으로 반드시 이 섬을 응징할 것“이라고
말해 목사를 설득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