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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와 함께한 나무들
‘버들가지 골라 꺾어 님에게 드리오니 / 주무시는 창가에 꽂아두고 보옵소서. / 밤비 내릴 때 새 잎이라도 나거든 날 본 듯 여기소서.’
최경창(1539~1583)
조선 중기의 기생 홍랑이 헤어지게 된 애인 최경창(1539~1583)에게 받친 시 한수이다. 북도평사라는 벼슬로 함경도 경성에 있을 때 둘은 사랑을 나누다가 임기가 되어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그를 배웅하고 어둠이 깔리는 저문 날, 홍랑은 비를 맞으며 버들가지와 이 시조를 지어 건네주었다고 한다. 신분을 초월한 연인사이의 안타까운 이별이 버들가지에 절절히 배어 있다.
1. 사랑과 버들과 연인
우리의 역사 속에 버들은 대부분 여인의 나무다. 버들은 그 생김새부터 강인한 남성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봄이 무르익으면 가느다랗게 늘어진 버들가지는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비튼다. 새싹이 틀 때 멀리서 바라보는 버들은 황금 실로 차양을 만들어 우아하고 기품 있게 늘어트린 듯하다. 버들에서 다가오는 느낌은 가냘픈 여인을 연상한다. 그래서 버들은 여인의 신체적 특징과 비유되는 말로 쓰인다. 가느다란 허리를 버들허리(柳腰), 예쁜 이마를 버들이마(柳眉), 우아하고 늘씬한 몸매를 버들맵시(柳態)라 한다.
옛 사람들은 봄날에 지금처럼 벚꽃 구경을 간 것이 아니라 버들 꽃구경을 갔다. 갓 피어나는 버들잎에 섞인 꽃들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황록색의 아름다움으로 자연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 옛 시인들은 버들에 취하여 연인을 생각하면서 시 한수 읊은 것을 멋으로 알았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 도연명은 집 앞에 5그루의 버들을 심어두어 오류선생이라고 불린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시문집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버들을 소재로 한 시가 무려 90여 수나 등장한다. 버들은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따스한 봄바람에 실려 오는 사랑 이야기의 한가운데서 긴긴 가지를 늘어트리고 있다.
옛 사람들이 연인과 헤어질 때 배웅하는 마지막 이별 장소는 나루터이다.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눈물을 감추고, 나루터에 흔히 자라는 버들가지를 꺾어주면서 눈빛으로 사랑을 주고받았다. 버들을 건네주는 깊은 뜻은, 산들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은근한 투정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빨리 돌아오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괴로울 때 그 이름을 외면 곧 사랑과 자비로써 고뇌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 그림에는 관음도가 널리 그려졌으며, 대표적인 것으로 양류관음도와 수월관음도가 있다. 둘 다 관세음보살이 버들가지를 들고 있거나 병에다 꽃아 두는 형식이다. 이는 버들가지가 실바람에 나부끼듯이, 미천한 중생의 작은 소원도 귀 기울여 듣는 보살의 자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애틋한 암묵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버들에 다른 화려한 꽃이 섞이면 조금 육감적이고 퇴폐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춘향전》을 보면, 봄바람에 글공부가 싫어진 몽룡이 광한루로 바람 쐬러 나갔다가 마침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과 첫 만남을 이루게 된다. 몽룡은 ‘저 건너 화류(花柳) 중에 오락가락 희뜩희뜩 어른어른하는 게 무엇인지 자세히 보고 오너라!’고 방자를 재촉한다. 옛 유원지에 흔히 심어놓은 버들에 그네를 매고 복사꽃 오얏꽃을 배경으로 치맛자락을 펄럭였으니 숫총각 몽룡으로서야 금세 정신이 ‘몽롱’해 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평양의 기생방에 유행하던 화류가(花柳歌)는 가사 첫머리를 ‘화류(花柳)간에 노든 벗님, 이 내 말씀 들어보소’로 시작한다. 또 몸을 파는 여인을 두고 노류장화((路柳墻花)라고 한다. 길가에서나 흔히 만나는 버들이나 담 밑에서 핀 꽃은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꺾을 수 있다는 뜻에 빗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어울려 노는 곳을 아예 화류계라 하였다.
2. 역사 속의 버들과 여인들
* 유화부인과 갯버들-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 주몽의 어머니가 버들 꽃 부인, 바로 유화부인이었다.
물의 신 하백의 큰 딸인 유화는 동생들과 함께 강가의 놀이터 둔치로 향했다. 이런 곳에는 갯버들이란 이름의 버들이 잘 자란다. 나지막한 키에 여러 포기가 뭉쳐 자라며 이른 봄에 내미는 앙증맞은 꽃을 단 나무가 갯버들, 다른 이름은 버들강아지다. 하백은 버들강아지처럼 귀여운 맏딸에게 유화(柳花)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마가 끼는 법, 어느 날 유화는 하느님의 아들이라 자칭하는 바람둥이 해모수를 만나 짧고도 진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바람난 딸에게 크게 실망한 하백은 눈물을 머금고 유화를 추방해버린다. 천만다행으로 동부여의 금와왕에게 발견된 유화는 왕궁으로 들어가는 행운을 잡는다. 엉뚱하게도 그녀는 알 하나를 낳았고 여기에서 나온 아이가 뒷날 주몽이 된다.
강가에 주로 자라는 갯버들
* 태조 왕건의 왕비 유(柳)씨와 버드나무-고려사 열전 후비 조에 보면 태조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서 장군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 가다가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말을 쉬게 하고 있는데 나중에 신혜황후가 된 유(柳)씨가 길옆의 시냇가에 서서 생긋이 웃고 있었다. 왕건이 아름다운 그녀에 반하여 “누구의 딸이냐?”고 물은 즉 처녀의 대답이 고을 유천궁이란 부호의 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건이 그 집으로 가서 머물었는데 처녀로 하여금 왕건을 모시고 자게 하였다. 그 후는 서로 소식이 끊어져서 정절을 지키고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는데. 어느 날 왕건에게 알려져서 불러다가 부인으로 삼았다.
궁예 말년에 홍유, 배경견,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의 집으로 와서 궁예를 쫒아낼 궁리를 하려고 하는데, 왕건은 유씨에게는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중요한 회의라는 것을 눈치 챈 유씨는 나왔다가 다시 북편 창문으로 해서 가만히 휘장 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여러 장군들이 드디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사를 표시하니 왕건은 낯을 붉히면서 한마디로 거절하고 있었다. 이 때 유씨가 급히 휘장 뒤에서 나와 왕건에게 말하기를 “대의를 내세우고 폭군을 몰아내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의 의견을 들으니 저도 의분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려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순수 갑옷을 가져다가 왕건에게 입혀 주었으며 여러 장군들은 그를 옹위하고 나가 그가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과 하였다.
선혜왕후는 자기의 미모를 믿고 왕건을 만나는 과정부터 의도적이었고 공격적이었다. 성도 버들 유(柳)씨이고 버드나무 옆에서 태조와 인연을 맺었지만 날씬한 허리를 가진 연약한 여인이 아니라 나라의 임금을 갈아치운 대단한 여장부이었다.
*버드나무 상자 - 살아서 버들은 사랑의 정표로서 대접을 받았으나 죽어서는 저주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 성종 때 연산군의 어머니의 중궁 윤씨는 비방 주문과 버드나무상자에 넣어 권숙의 집에다 던지는 ‘비상 투척 사건’에 연루된다. 이는 성종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빌미가 되었고 그 후에도 불같은 질투를 참지 못하여 급기야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결국 폐비가 되고 죽임을 당해 뒷날 갑자사화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숙종 때는 희빈 장씨가 인현황후를 저주하기 위해 지금의 창경궁 통명전 연못가에 각시와 붕어를 넣은 버드나무상자를 묻었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았다. 가녀린 버드가지로 엮은 작은 버들궤짝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여인과 함께 했다.
*버들잎 - '태조가 영흥에서 개경으로 왕래를 하다가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 목이 몹시 말랐다. 그 때 신덕왕후 강씨가 마침 냇물에 빨래를 하고 있었다. 태조가 물을 청하자 왕후는 바가지에 물을 떠서 버들잎을 띠워 드렸다. 태조가 연유를 물으니 급히 마시다가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 하였노라고 해명했다.'<영유당전서> 버들잎을 마실 물에 띄웠다는 설화는 우리의 옛 이야기에 흔히 등장한다. 여성의 지혜로움과 현명함을 보이는 상징으로 버들잎을 들었다.
* 도깨비불과 버들 - ‘세조가 대군 시절 불과 14세의 나이에 어느 날 기생집에 잤다. 밤중에 기생과 관계하는 자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 세조가 놀라 뒷벽을 발로 차고 나와 몇 길이나 되는 담을 단숨에 넘었다. 그 사내가 계속 따라오는데, 이번에는 2중의 성벽을 만나자 역시 뛰어 넘었다. 1리쯤을 달려도 그 대로 따라오니 다급하여 썩은 버들둥치 속에 들어가 숨었다.<오산설림>’ 물가의 습기가 많은 곳에 자라는 버들은 흔히 나무속이 잘 썩어서 큰 구멍이 생기는 수가 많다. 여기는 깊고 음침하여 잘못 들어간 설치류나 곤충들의 무덤이었으며, 도깨비불의 원천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꺼려하고 겁내는 곳이다. 세조가 어지간히 급했던 것이다.
* 동궐도의 능수버들 - 성종 때 대비와 왕대비가 거처할 장소로써 창경궁을 중축하면서 임금은 궁궐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빨리 자라는 버들을 심으라고 했다. 19새기 초에 그려진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가지가 늘어지는 능수버들이 사방을 감싸고 있으니 당시에 심은 버들이 능수버들이라 짐작할 수 있다. 좋은 의미로는 사생활 보호를 위한 배려였겠으나, 임금과 사별하고 권력의 핵심에 밀려난 여인들에게 먼 산을 쳐다보고 가신님을 그리워하는 것 마저 제약을 둔 게 아닌가 싶다. 더욱이 한참 봄바람에 물오른 버들가지가 전하는 느낌 때문에 여인들은 왕비 시절의 추억을 ‘가슴 아프게’ 넘나들었을지도 모른다.
3. 왕비와 함께한 나무
* 왕비를 2번이나 한 고국청왕의 왕비 우씨
왕비를 2번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고구려 9대 임금인 고국천왕과 10대인 산상왕의 왕비는 다 같이 우씨라는 동일인이다. 고국청왕이 죽고 후사가 없자 왕비 우씨는 시동생인 연우와 내통하여 다른 시동생을 따돌리고 연우를 10대 산상왕으로 추대한 후 자신은 또 왕비가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우씨는 왕비를 두 번 한 셈이다. 삼국사기에서 11대 임금인 동천왕 8년(234)조를 보면 “가을 9월, 태우 우씨가 죽었다. 태후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좋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고국천왕을 다시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계곡이나 구덩이에 나의 시신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 하여 태후의 유언대로 상산왕 옆에 장사지냈다. 얼마 후 무당이 동천왕에게 말했다. “고국천왕의 혼백이 저에게 내려와서 ‘우씨의 혼백이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구나, 네가 동천왕에게 이를 알려서, 나의 무덤을 가리는 시설을 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고국천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한다.
죽어서도 다른 사람도 아닌 친동생을 찾아다니는 우씨가 얼마나 꽤씸하였겠는가? 그래도 불륜의 현장을 아예 볼 수 없도록 부탁한 고국천왕의 선택은 현명하였다. 바람난 아내, 살아서도 힘들 것인데 죽어서 까지 막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 사랑을 위하여 왕궁을 무단가출한 평강공주
삼국사기 열전(列傳) 온달 조에 보면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처녀의 몸으로 용감하게 온달의 집을 찾아갔다. 앞을 볼 수 없는 그의 어머니와 만나는 과정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공주는 보물 팔씨 수십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눈먼 노모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을 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것없어서 귀인이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는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굷주림을 참다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시집오겠다는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비루하여 귀인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귀인이 거처할 수 없습니다.” 하니 공주가 대답하였다. “예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만일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꼭 부귀해야만 같이 살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공주가 금팔찌를 팔아서 전답, 주택, 노비, 우마, 기물 등을 사들이니 살림 용품이 모두 구비되었다. 하였다.」
글쎄? 온달을 부러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공주라는 신분에다 돈까지 잔뜩 가지고 시집을 왔고, 글 모르는 신랑을 교육시켜 장군으로 출세까지 시켰으니 온달입장에서는 평생 평강공주에게 소리 한번 크게 낼 수 있었겠는가?
* 선덕여왕과 모란
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7) 때 당나라 태종이 붉은 빛과 자주 빛, 흰 빛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3되를 함께 보냈다. 왕은 이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고 뜰에 심으라고 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기다려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나중에 신하들이 물었다. ‘어떻게 향기가 없음을 아셨습니까?’ 왕은 말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이때 모란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이후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매김한다.
* 비로자나불과 진성여왕과 향나무
해인사의 쌍둥이 비로자나불은 향나무로 만들었으며, 신라시대인 883년에 제작된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불상으로 판명됐다. 대각간 위홍과 51대 진성여왕이 발원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삼촌과 조카 사이인 두 사람의 결혼은 근친결혼 사례가 많았던 당시에는 흔히 있었던 일이다. 진성여왕은 결혼 2년만에 남편 위홍이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대해 사랑을 잃은 슬픔을 표했다. 조선시대 문인 조위의 문집에는 “진성여왕은 해인사를 ‘혜성대왕 원당(願堂)’이라 이름 짓고, 왕위도 버리고 해인사로 가서 지내다 죽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뽕나무와 누에치기
서울 성북초등학교 옆에는 자그마한 돌비석 하나가 선잠단지(先蠶壇址)라는 이름을 달고 주택가 한구석에 무심히 서 있다. 사람의 관심에서 비켜선 곳, 그러나 한때는 임금님도 맞이하는 광영의 터였다. 조선 성종 2년(1471), 옛 중국 황제의 왕비로서 누에치고 비단 짜는 신선이 된 서능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만든 곳이다.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품질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고 누에 신선에게 어려운 청을 넣기 위함이다.
농업을 주관하는 신을 동대문구 제기동의 선동단(先農壇)에서, 잠업을 주관하는 신은 이곳 선잠단에 모시고 국가에서 매년 제사를 지냈다. 선잠단 앞에 뽕나무를 심어 궁중 안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매년 3월 첫 번째 뱀날(初巳日)에 엄숙하게 거행하여 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08년 7월, 선잠단은 제기동의 선동단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버린다. 현재는 달랑 비석 하나로 선잠단 옛 터임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다행이 1993년부터 성북구청에서 주관하는 선잠단 문화행사가 재현되면서 선잠 왕비 행차를 하고 선잠 제례(祭禮)를 올리고 있다.
이처럼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일은 예부터 농업과 함께 농상(農桑)이라 하여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에 양잠이 시작된 것은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東夷傳)’ 마한 조(條)에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서 옷을 해 입었다” 하였으니 삼한시대 이전으로 짐작된다. 우리의 기록에도 고구려 동명왕과 백제 온조왕 때 농사와 함께 누에치기의 귀중함을 강조한 대목이 있다. 신라 박혁거세 17년(BC40)에는 임금이 직접 6부의 마을을 돌면서 누에치기를 독려한 삼국사기 내용이 있다. 이후 통일신라(남북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누에치기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된다. 뽕나무와 누에로 만들어지는 비단은 당시로서는 오늘날 반도체나 자동차만큼이나 나라의 중요한 기간산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는 비단 생산을 더욱 늘려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처음 나라를 열어 불안정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이 편안히 살게 하려면 산업생산을 통한 수입증대가 필요했다. ‘비단입국’의 가치를 높이 들 수 있었던 이유는 명나라에 보내는 조공과 신흥귀족들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비단의 수요도 만만치 않아서다.
태종 때는 집집마다 뽕나무를 몇 그루 씩 나누어 주고 심기를 거의 강제하다 시피 하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집안단속은 쉽지 않았을 터, 태종 11년(1411) 임금은 이렇게 역정을 낸다. “옛날에는 후궁들이 부지런하고 알뜰하여 친히 누에를 쳤는데, 지금은 아래로 궁중 시녀까지 모두 배불리 먹고 할 일없이 내 옷까지도 모두 사서 바친다. 앞으로는 시녀들로 하여금 길쌈을 맡아서 내용(內用)에 대비하게 하라.”고 한다. 이에 대한 신하들의 ‘주상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이다. 아마 궁녀들의 빈둥거리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 세종으로 내려오면서 누에치기는 더욱 독려한다. 예부터 내려오던 친잠례(親蠶禮)를 강화하여 왕비가 직접 비단 짜는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각 도마다 좋은 장소에 뽕나무를 널리 심도록 하였고 누에치기 전문기관인 ‘잠실’을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원년(1506)에는 보다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각 도에 있는 잠실을 서울 근처로 모이도록 구조조정을 한다. 바로 그때 그 장소가 오늘날의 서초구 잠원동 일대다. 세종은 이렇게 궁궐 밖에다 뽕나무심고 누에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세종 5년(1423) 잠실을 담당하는 관리가 임금께 올린 공문에는 ‘뽕나무는 경복궁에 3천590그루, 창덕궁에 1천여 그루, 밤섬에 8천280그루가 있으니 누에 종자 2근 10냥을 먹일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렇게 넓지도 않은 경복궁에 이 만큼 뽕나무가 자랐다면 그야말로 ‘뽕나무대궐’이 되었음직하다. 그 탓인지 밤나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직영하는 뽕나무밭이 더 많았다고 한다.
흔히 우리는 세상이 너무 변하여 옛 정취를 찾을 수도 없게 되면 상전벽해란 말을 쓴다. 잠실은 뽕나무 밭, 누에들의 터전이 바다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촌이 되어있다. 구한말까지만 항도 3~400년이나 된 뽕나무 여럿있었다하나 이제는 모두 죽어버렸다. 얼마 전까지 살아있던 단 한그루도, 생명이 끝나버린 그의 시신을 없애지 않고 서울시 기념물 1호란 이름을 붙여 옛터를 지키게 하고 있을 따름이다. ‘님도 보고 뽕도 따던’ 그 옛날의 청춘남녀들은, 무성한 잎으로 은밀한 사람을 가려줄 뽕밭이 없어졌으니 모두 카페로 피시(PC)방으로 가버릴 수밖에 없다.
* 모란과 부귀영화
주변을 환하게 밝혀서 아름답고 화려한 꽃의 대표자리는 모란이 차지한다. 그래서 모란은 예부터 화왕(花王)이라 하여 꽃 중의 꽃으로 꼽았다. 옛 사람들은 달덩이 같은 큰 얼굴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여인을 ‘모란꽃 같다’ 고 하여바로 미인의 대명사였다. 오늘이야 옛사람들이 복 없다고 싫어하던 ‘팥잎만 한 얼굴’ 이 미인이고, 얼굴이 조금만 크면 ‘얼큰’ 이라고 하여 싫어할 만큼 세상도 많이 변했다.
설총은 미인을 모란에 비유한 화왕계(花王戒)라는 설화를 지어 후세의 임금이 덕목으로 삼도록 하였다. ‘꽃 나라를 다스리는 화왕은 찾아오는 많은 꽃 중에서 아첨하는 장미를 사랑하였다가 뒤에 할미꽃 백두옹(白頭翁)의 충직한 모습과 충언에 감동하여 정직한 도리를 숭상하게 된다.’ 는 내용이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을 정도다. 차츰 모란은 미인을 상징하고 부귀영화를 염원하는 꽃으로 발전하였다. 민화풍으로 그려진 모란도(牧丹圖)는 혼례용 병풍으로 쓰였으며 고려청자 상감의 꽃무늬 분청사기의 꽃, 나전칠기의 모란당초(牧丹唐草), 수놓은 꽃방석, 와당(瓦當)의 무늬, 화문석의 밑그림까지 모란의 상징성을 그림으로 나타낸 쓰임새는 끝이 없다.
모란
꽃의 색깔은 예부터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의 내용 중에는 ‘홍모란, 백모란, 정홍모란(丁紅牧丹)’ 이 등장한다. 인조 23년(1646) 일본은 ‘청, 황, 흑, 백, 적모란’을 색깔별로 보내달라고 하였으나 다른 색깔은 없다고 적모란만 보내주었다.
화려한 모란꽃을 많이 심은 곳은 엉뚱하게도 절집의 안마당이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 졸음에 겨워 / 고오운 상좌 아이도 / 잠이 들었다 / 부처니은 말이 없이 / 웃으시는데 / 서역 만리 길 / 눈부신 노을 아래 / 모란이 진다’ 조지훈의 고사(古寺) l에서처럼 모란은 봄이 무르익어 가는 산사(山寺)의 대표적인 꽃이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란 유명한 시로도 우리는 모란을 잊지 못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 모란이 지고나면 그 뿐, 내 한 해는 가고 말아 / 삼백예순날 마냥 섭섭해 우옵네다 /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석류와 다산(多産)
중국의 한 무제 때인 기원전 126년 장건은 13년간에 거친 서역순례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석류를 처음 가져왔다. 이후 중국에 널리 퍼졌고 아름다운 꽃과 독특한 열매 때문에 수많은 시가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동국이상국집에 등장하고 고려자기의 문양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 고려 초 이전에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석류꽃은 꽃받침이 발달하여 몸통이 긴 작은 종(鐘)모양을 이루며 끝이 여러 개로 갈라지고 6장의 꽃잎이 진한 붉은 빛으로 핀다. 이런 꽃 모양을 보고 송나라의 왕안석은 ‘짙푸른 잎사귀 사이에 피어난 한 송이 붉은 꽃(萬綠叢中紅一點)...’이라고 노래하였다. 석류꽃의 아름다움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뭇 남성 속의 한 여인을 말하는 ‘홍일점’ 의 어원이 된 것이다.
석류 열매가 익어 가는 과정은 아이에서 어른까지 차츰 커져 가는 음낭과 크기나 모양이 닮았다. 석류 꽃과 열매의 이런 특징들은 다산의 의미와 함께 음낭의 상징성이있어서 옛 여인들의 신변 잡품에 여러 가지로 쓰였다. 조선시대 귀부인들의 예복인 당의 (唐衣), 왕비의 대례복, 골무, 안방가구 등에 석류문양이 단골 메뉴로 들어갔다. 또 비녀머리를 석류꽃 모양으로 새긴 석류잠(石榴簪)을 꽂았는가 하면 귀부인들이 차고 다니던 향낭은 음낭을 상징하는 석류열매 모양으로 만들었다.
석류는 중국이나 우리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꽃만이 아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Exodus 28:33)에는 대제사장이 입을 예복의 겉옷 가장자리에 석류를 수놓고 금방울을 달았다는 내용이 있다. 포도와 함께 석류는 성서에도 여러 번 등장하며 솔로몬 왕은 석류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다한다. 기독교의 종교화에서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로서 묘사되기도 하며 15세기 유명한 이태리화가 보티첼리의 ‘성모의 석류’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인도의 전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자기 새끼를 1천명이나 가진 마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잔인하게도 사람들의 아이를 보기만 하면 거침없이 잡아먹었다. 슬픔을 이기자 못한 엄마들은 부처님에게 달려가 구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부처님은 수많은 마귀의 새끼 중에 딱 한 마리만을 골라 몰래 숨겨버렸다. 마귀는 새끼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미친 듯이 찾아 헤매면서 비로소 그 많은 자식 중에 단 한 마리를 잃었어도 마음의 쓰라림은 꼭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는 아이들을 잡아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새끼를 돌려주면서 부처님은 아이 대신 석류를 먹도록 했다는 것이다.
* 단종과 정순왕후와 관음송(觀音松)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혔다. 배를 타지 않고는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곳,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다. 1457년 6월 28일 임금 자리에서 쫓겨 낮지 2년 4개월 여 만에 군사 십여 명과 시녀 몇 명에 둘러싸인 채 이곳 청령포로 귀양 온다.
청령포에는 관음송이란 별명을 가진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다. 유배당한 임금과 아픔을 함께하였다고 알려진 나무다. 높이 30m에 세아름에 이르고 땅위 2m쯤에 두 갈래로 갈라져 자라고 있다. 이 소나무가 비극의 현장을 지켜보았고,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하여 후세 사람들이 관음송(觀音松)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단종은 이 나무에 기대서서 멀리 한양을 바라보며 두고 온 왕비생각에 눈물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임금 노릇 두해 째인 14살의 사춘기 소년 단종은 한살 연상인 정순왕후를 맞아드린다. 어린 부부의 애틋한 사랑으로 어려운 처지를 버티어 오다 어느 날 갑자기 청령포로 쫓겨 온 것이다. 그가 이곳에 들어올 때 나이는 겨우 17살, 오늘의 우리 아이들이라면 고등학교 2학년짜리다.
단종이 관음송 굵은 줄기에 기대어 왕비를 그리워하는 시간도 그렇게 길지 못했다. 그해 여름 물난리를 만나 청령포가 휩쓸리자 2개월 남짓한 ‘유지속의 외로운 섬’ 생활마저 마감하고 영월 현정이 있던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가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그는 예견 한 듯, 가까이 있는 자규루라는 누각에 올라 지은 시한 수가 애절하다. ‘원통한 새 한 마리가 궁궐을 나온 후 / 외로이 푸른 산속에 갇혀버렸네 / 밤이면 밤마다 잠 못 이루고 /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와도 한(恨)은 끝이 없어라 / 두견새 울음도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 피눈물 흘러서 지는 꽃은 붉게 물들었구나. / 하늘마저도 애절한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 어찌하여 시름 젖은 내 귀에만 들리는가.’
귀양 온지 4개월 남짓, 그해 9월에 일어난 산 넘어 경상도 순흥부의 금성대군 역모사건을 핑계로 세조는 어린 조카를 아예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다. 청령포 관음송 나뭇가지 너머로 애태워 그리던 왕비는 영영 만나지 못한 채 영겁의 세계로 떠나야만 했다. 10월 24일, 관풍헌 어디에선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그의 짧은 생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한편 이렇게 헤어진 정순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어 여든 두해를 살았다. 죽어서도 만나지 못하고,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사릉(思陵)이란 무덤에 묻히는 것으로 한 많은 일생이 끝나 버린다.
박상진
ㆍ서울대학교 임학과 졸업 /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 농학박사 학위 취득
ㆍ경북대 명예 교수
ㆍ현재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천연기념물 분과)
ㆍ저서 「궁궐의 우리 나무」,「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