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명량’이란 영화가 최고 흥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무려 총 관객 수가 1,7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대단한 기록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실화로 만든 영화이고, 일본과 현재, 과거사와 역사 왜곡 문제로 대척점에 있는 것이 더욱 국민적 호응과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울돌목이라는 조류가 심한 곳으로 유도하여 12척의 판옥선으로 일본 배 130척을 물리치는 세계 해전 사상 유래 없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눈에는 할 수 있다고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이요, 그가 가지고 있는 혜안과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현실이 어렵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절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는 중요합니다. 암울한 현실에서 어둠과 절망을 본다면 그 인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현실이지만 영안이 열려 긍정의 세계를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복된 길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보이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현실이나 부정적인 것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세계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주님의 역사는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빛의 세계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영적 진리를 정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어떤 상황도 어둠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의 신, 사단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발전하고 좋아진다고 해도 영적으로는 부정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빛이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 땅에 긍정의 세계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46)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면 빛의 세계, 긍정의 세계를 열 수 있습니다.
빛의 세계를 여는 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긍정의 세계를 열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얼마든지 ‘예’하고 ‘아니라’함이 없습니다. 즉 주님 안에서는 부정적인 ‘아니오’가 얼마든지 긍정적인 ‘예’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영원한 빛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와 있는 것입니다(고후 1:18-19). 이 세상에서 가장 부정적인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심으로 긍정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는 언제든지 ‘예’가 되는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절대 절망이고 절대 부정적 상황입니다. 이제 여인의 삶은 다 끝난 것입니다. 과부에게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이 절대 절망, 부정도 절대 긍정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과부를 위로하시고 외아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눅 7:13-15). 주님 안에서만 얼마든 긍정의 세계가 열립니다. 주님만 ‘예’가 됩니다. 우리 주님만이 영원한 ‘예’이고 긍정의 세계의 문을 엽니다.
말씀 안에서 긍정의 세계를 열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든 주님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부정과 절망을 덮고 긍정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0).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만 들리면 우리의 어떤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빛의 세계를 열어가고 창조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미움을 피해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피신을 하여 떠납니다. 그러던 중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게 됩니다. 이 상황은 야곱에게 있어 죽음에 처한 것 같은 최고의 절망과 어둠의 순간입니다. 그가 꿈속에서 기도하다 잠이든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는 죽음 같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들리므로 가장 소망에 찬 긍정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긍정의 세계를 열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부정적이고 어둡다 해도 성령이 역사하면 부정의 세계는 긍정의 세계, 빛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성령은 부활이 영이기 때문입니다(고후 1:21-22).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 블레셋의 침공을 받아 40일 동안 그들은 어둠에 있었습니다. 골리앗이란 팔 척 장군이 나타나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한 사람도 골리앗에게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어둠이고 부정입니다. 그때 어린 소년 다윗이 물맷돌 5개로 담대히 나갑니다. 그는 한 순간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승리하는 긍정의 역사를 여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성령의 역사만 부정의 어둠을 깨트리고 영원한 빛의 세계를 여는 것입니다.
And... 이 세상은 어둠과 빛이 공존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과 사단의 영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질서도 그렇지만 우리 안에도 성령과 사단의 영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도 내가 주인이 되어 살고 있다면 그것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를 십자가에 내려놓은 사람은 온전한 빛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의 절대절망은 절대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절망의 상황에 있다면 온전한 빛이신 주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주님 안에서는 절대 소망입니다.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을지라도 주님 안에서는 그 시기가 바로 도약의 시기입니다. 주님만 빛이요, 소망이십니다. 주님 외에 더해지는 것이 없이 오직 주님을 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 외의 것을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그분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원한다면 그 무언가를 내려놓으십시오. 주님 자신을 원하십시오. 그 분으로부터 오는 것은 주님 존재를 구할 때 오는 선물일 뿐입니다. 선물을 주시는 분을 원할 때 우리의 삶은 긍정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