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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윤봉문 요셉 순교자 묘역]
경남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3길 69-22
(지번) 일운면 지세포리 1176-1
(전화) 055-682-2818
복자 윤봉문 요셉(1852-1888. 4. 1)
출생지/거주지 : 경상도 경주
신분 : 회장
연령 : 36세
참수 형식 : 교수
순교지 : 경상도 진주
윤봉문(尹鳳文) 요셉은 경상도 경주 인근(포항시 기계면 지촌리)에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좀 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하려고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현, 경남 거제시 옥포동)에 정착하였다.
윤 요셉의 부친 윤 스타니슬라오는 그 이전부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다. 또 거제도로 이주한 뒤에는 진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켰으며, 이러한 인연 때문에 윤봉문 요셉은 장성하여 진 아녜스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1887년 겨울에는 경상도를 담임한 로베르(A. P. Robert, 金保祿) 신부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자 거제도를 방문하였다. 이때 윤 요셉이 거제도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였는데, 그 해 거제도에서는 15명의 어른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이듬해 봄에는 그곳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었다.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함으로써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박해였다. 이 박해 때, 윤 요셉은 다른 교우 3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모진 형벌에도 불구하고 관장이 강요하는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영 관장은 이 사실을 곧바로 대구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도적과 같으니, 윤봉문을 진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윤 요셉은 진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십계명을 외우면서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하옥시킨 뒤, 그 날 밤에 옥리들을 시켜 교수형을 집행토록 하였으니, 그때가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0일)로, 당시 윤 요셉의 나이는 36세였다.
윤봉문 요셉이 순교한 다음, 로베르 신부는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교구장에게 보고하였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순교자 윤봉문의 가족이 거제도에 정착한 것은 1868년경이다. 그의 부친 윤사우(尹仕佑)는 경북 영일군 사람이었는데 할머니의 입교로 가족 모두 영세하게 되었다. 신자가 된 윤사우의 가족은 양산 대청(現 부산시 기장면)에 숨어 살았는데,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마도로 피신 할 목적으로 거제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윤사우는 거제도에서 날품팔이와 필묵행상을 하며 몰래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옥포에서 동수(洞首-洞長)로 있던 진진부(陳進富)를 알게 되었고 열심 권면하여 그를 입교시키게 되었다. 한편 신자가 된 진진부(요한)는 윤사우의 둘째 아들을 사위로 맞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는데 그가 윤봉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순교자는 옥포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윤봉문의 체포와 순교는 1888년 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는 한불수호조약의 결과로 공적으론 신앙이 허용되어 있었던 시기였다. 즉 1886년 프랑스와 우리나라는 수교(修交)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골의 교우들은 이 사실을 알리 없었고 지방의 관리들도 신자들의 권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에 윤봉문의 순교가 가능했던 것이다.
1888년 2월 7일(음) 옥포에서 체포된 순교자는 거제 부사(府使) 박병용(朴炳容)의 호출을 받고 거제 관아(官衙)로 끌려가 태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는 천주학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통영으로 압송된다. 포졸들은 배교시키려고 심한 문초와 고문을 가했지만 순교자는 믿음으로 견디어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로 순교자를 다시 진주로 옮겼다.
진주로 갈 때 양쪽 발에 칡넝쿨을 매어 끌려갔는데 칡넝쿨이 마찰되어 피를 많이 흘렸다. 진주에서도 여러 번 문초와 혹형을 받은 뒤에 그 달 22일(음)에 (1888년 4월 1일 양력) 순교자는 진주 감옥에서 교살(絞殺) 당해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37세였다. 순교자의 가족으로는 부인 진(陳) 펠리치타스와 아들 학송(學松 루카. 당시 7세) 딸(松岳 가타리나. 당시 2세)이 있었다.
순교자의 유해는 진주 장재리 공소의 교우들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가매장하였다.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분은 장(張) 도민고 회장이었다. 그 후 10년 뒤인 1898년 경 당시 옥포 본당 복사(服事)로 있던 성(成) 바오로가 순교자의 유해를 거제도로 모셔 왔고 옥포 앞산의 족박골(足泊谷)에 안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윤봉문의 무덤 앞 첫 비석에는 그의 이름을 봉용(鳳用)이라고 새겨놓았고 옥포 본당 주임이었던 김후상(金厚相 바오로) 신부가 지은 ‘거제도 천주교 연혁’에도 그의 이름은 봉용으로 나온다. 봉용은 그의 속명(俗名)이었고 봉문(鳳文)은 관명(冠名), 곧 항렬을 따른 족보상 이름이었다. 몇몇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봉주(鳳周) 혹은 봉동(鳳同)으로 나오는데 봉용을 잘못 읽은 결과다.
[출처 : "죽어 영원을 사는 사람들" 천주교 마산교구 성지사적지 정비위원회 ]
증언록
로베르 신부의 서한집 1권
『꽁뜨랑뒤 Compte-rendu 1887~1888』에서 발췌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으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미신자(未信者)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아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나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 흘린 윤 베드로의 피가 거제도에 많은 구원의 열매를 싹트게 하리라고 희망할 만한 여러 가지 조짐이 있습니다.
이 서한에서 로베르 신부는 윤봉문의 세례명을 ‘베드로’로 적었다. 그래서 훗날 그의 세례명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편지 원문에는 ‘요셉’으로 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편지를 ‘꽁뜨랑뒤 잡지’에 올리는 과정에서 실수로 바뀌었음을 알아낸 것이다. (신은근 신부)
병인치명사적 18권
윤 요셉. 본디 양산 사람으로 거제에 와서 살더니, 무자년(1888년) 사군난(私窘難)에 통영 포교에게 잡혀 중영(中營. 군인들 감옥)에 갇혔다가 진주 진영으로 이수(移囚)하였더니, 영장(營長) 구연팔이 잡아 들여 물어 가로되 “너 무엇을 하느뇨” 답 왈 “천주교를 합니다.” 영장이 또 문 왈 “너 천주교를 하면 읽어보라.” 하거늘 천주 십계를 읽으니, 영장이 또 문 왈 “너 천주교를 누구에게 배웠느냐.” 요셉이 답 왈 “양대인(洋大人)에게 배웠습니다.” 영장이 또 묻기를 “그러하면 진서를 배웠느냐 언문으로 배웠느냐.” 하고 또 묻기를 “너 그러면 진서를 배웠거늘” 요셉이 대답하기를 “언문으로 배웠습니다” 하니, 영장이 말하기를 “언문으로 배웠으면 가짜를 배웠구나” 하고 또 가로되 “너는 웃관(上官)에서 도적으로 죽이라 분부가 있는 고로 내가 죽이겠다” 하니 요셉이 대답하기를 “지금 천주교 하는 사람을 죽일진대 영문(營門)으로 초문(初問)하여 회문(回聞) 후에 죽이주소” 하니 영장이 대답하기를 “네 말이 쓸데없다” 하고 오문(午門. 성의 남쪽 문)으로 보내어 가둔 후에 모든 하인에게 분부하여 가로되 “이 일을 누설치 말라” 하고 옥중에서 가만히 교(絞)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7세요, 때는 무자년 2월 21일이라.
증인(證人) - 동진규. 외인(外人) 진영(陣營) 장교(將校)라. 지금 살고 이 사정은 진주 비라실 장(張) 도민고가 동진규에게 친히 들었느니라.
현재 윤봉문 순교자 묘소가 2013년 4월 20일 족박골에서 일운면 지세포리 1176-1로 이장되었습니다.
윤봉문 순교자 묘지 이장
2013년4월 20일(토)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윤봉문 순교자 묘지 이장을 위해 주교님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신자 100여 명은 순교자 묘지에 모여 순교자 유해 발굴 과정을 지켜보았다.
EXIF Viewer사진 크기750x502
▲오전 6시 30분, 기본파묘
▲오전 9시 40분, 시작성가, 시복시성 기도문 바침
▲오전 9시 43분, 이장 관련자 선서
▲오전 9시 46분, 본격 발굴 시작
▲오전 11시 20분, 유골이 전체적으로 드러남
▲오후 12시 28분, 교구장 봉인
▲오후 13시 30분, 지세포 성지 도착
▲오후 13시 38분, 묘소 축복
▲오후 13시 50분, 하관 완료
이번 순교자 묘지 이장은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이 묘소 이장의 타당성이 담긴 청원서를 교구장 주교님께 올리면서부터 준비되어 왔다. 시복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마산교구 담당사제 이성현 요한 신부는 묘지 이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복자 윤봉문 요셉의 묘소 이장 청원서’를 주교님께 제출하였다.
청원서의 내용을 보면, 현 위치(거제시 옥포 2동 1509-2)에 있는 순교자의 묘소는 산세가 높고 터가 좁아 신자들의 접근이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교자가 안장된 윤씨 가문의 선산이 타인에게 매도되어 순교자를 모시기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장의 사유이다.
주교님은 청원서의 내용을 검토하시고 묘소를 이장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하여 ‘복자’ 윤봉문 요셉 묘소 이장을 위한 교구장 교령敎令과 훈령을 2013년 4월 18일에 발표함으로써 묘지 이장이 현실화되었다. 새로운 이장터는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산 103-12에 위치한다. 이곳은 2000년 9월부터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이 윤봉문 순교자 묘소 이장과 성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던 곳이며, 주변 경관이 수려할 뿐 아니라 신자들의 접근이 용이해 대규모 신심행사를 거행하기에 적절한 곳이다.
윤봉문 순교자
윤봉문 요셉은 경상북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요셉의 부친 윤사우는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는데, 우연한 기회에 옥포에 있던 진진부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키게 된다.이러한 인연으로 윤봉문 요셉은 장성한 뒤 진요한의 사위가 되어 옥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1888년 거제도에서 박해가 일어나 윤봉문은 다른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모진 형벌에도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상부의 지시로 진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도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지만,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순교자는 1888년 4월 1일 진주 감옥에서 교살絞殺당해 당시 3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순교자의 유해는 진주 장재리 공소의 교우들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가매장하였다가 10년 뒤인 1898년경 거제도 옥포 앞산의 족박골에 안장하였다.
윤봉문 요셉 순교자 묘지 이장의 의미와 우리의 자세
신앙의 자유를 찾아 헤매던 여정처럼 순교자의 인생도 죽어서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다. 순교자의 유해가 남의 땅에 모셔져 접근이 어렵던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거제 교우들이 순교자의 희생과 신앙을 기리고 하느님 백성이 순교자의 신심에 더욱더 잘 접근할 수 있게 하려고 2013년 4월 20일 그가 거제에 처음으로 발을 내려놓은 지세포 인근 산자락에 순교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이장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자의 유골이 너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였다. 아울러 다른 유골에 비해 우측 골반뼈와 꼬리뼈가 많이 상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과 발목 밑으로 뼈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은 순교자의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짐작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낸 순교자는 어쩌면 이곳 지세포로 다시 돌아오고 싶으셨는지 모른다. 그 순수하고 맑게 신앙하던 처음처럼 돌아가고 싶어서 그렇게 백골이 되어 기다리고 계셨던 건 아닐까.
최근 시복시성 움직임으로 마산교구 신앙의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각 지구에서 일어난다. 성지聖址 개발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성지聖址는 개발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신앙 선조들이 죽으면서까지 증언하셨던 그 신앙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 삶의 자리에서 다시 찾는 것이 진정한 시복시성을 준비하는자세일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마산교구 담당사제 이성현 요한 신부
[조석빈, 조석증 형제 순교자 묘역]
뼈대있는 유교 집안이었던 창녕 조씨 김해파의 30대 손으로 부친 조대연의 5형제 중 셋째와 넷째로 태어난 석빈과 석증은 천주교로 개종한 뒤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조씨 형제는 모습과 나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다 같이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상자를 매고 주로 양반들을 찾아다니면서 천주학 연구와 전교에 앞장섰다. 생곡의 배씨 사랑방에도 자주 들러 유학과 서학의 비교 연구에 힘썼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 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만 배교를 완강히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김해읍 왜장대에서 순교하였다.
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의 굽힘 없는 신앙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지만 결국 조씨 형제는 참수형을 선고 받았다. 관헌은 먼저 형 석빈을 가차 없이 참수하고 나서 다시 동생 석증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배교하기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그는 "형님의 목에 십자가 꽃이 피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도 속히 참수해 주기를 간청함으로써 마침내 그 역시 참수되어 형제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갈대에 싸여 온 형의 거구와 이엉에 덮여 온 동생의 왜소한 알몸은 사학죄인이라 하여 조씨 문중의 반대로 선산에 묻히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의 고 배문한 신부의 3대조인 배정문 공에 의해 집 뒤 언덕 밭에 암장되었으며, 그 후 배문한 신부 본가에서 4대에 걸쳐 순교자 조씨 형제의 묘를 보호 관리하여 왔다.
형 석빈은 손(孫)이 없었고, 동생 석증은 아들은 있었으나 그나마 아들 대에서 후손이 끊겼다고 한다. 그 후 이들 형제의 순교사실에 관한 구전이 배씨 집안을 통해 대대로 전해오다가 1989년 6월 19-20일 부산교구에서 묘지 발굴과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울산 병영 순교 성지 성당] - 구 병영 장대벌 성지
장대벌은 장대가 있는 벌판이라는 뜻으로,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가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돌로 쌓은 대를 말한다.
울산시 중구 외솔큰길 241 (남외동)에 위치한 울산 병영 순교성지는 박해 당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있어 군사훈련 뿐 아니라 중죄인을 처형하는 장소로 쓰여, 병인박해(1866-1873)중에 3인 순교자를 포함하여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로 추정된다. 연병장 정면에 장대가 있었고, 연병장에서는 군사들의 훈련, 사열, 열병 이외에 간혹 중죄인에게 군문효수가 집행되기도 하였다.
<울산 병영 순교 성지의 순교자들>
□복자 이양등 베드로(?-1868)
이양등(李陽登) 베드로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다. 본래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는 꿀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베드로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야고보)과 김종륜(루카)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베드로는 얼마 안되어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이양등 베드로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어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나가 허인백, 김종륜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이었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복자 김종륜 루카(1819-1868)
김종륜(金宗倫) 루카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김 루카는 평소에 화목함을 특히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모님을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언양 간월(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김 루카는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김 루카는 얼마 되지 않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김 루카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어서 김 루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한결같이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베드로 회장과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순교 당시에 김종륜 루카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 야고보의 아내 박조예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복자 허인백 야고보(1822-1868)
허인백(許仁伯) 야고보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24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이후로는 아주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야고보는 아내 박조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극기는 물론 겸손과 인내의 덕을 쌓는 데도 노력하였다. 또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야고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도 다시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8개월을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허인백 야고보는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산시 상북면 이천리) 산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김종륜(루카)을 만나 함께 신앙 생활을 하였고,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그는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자주 순교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을 때도 죽령 교우촌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에는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가족들에게 이르기를 “나를 위해 기도해 주어라. 성녀 바르바라의 순교 행적을 기억하도록 하거라.”고 당부하였다.
경주 진영에 이르자, 곧 문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을 뿐 천주교 서적이 있는 곳을 대거나 다른 신자를 밀고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화가 나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내 그의 몸에서는 피가 나고 다리뼈가 드러나게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어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당하고 신앙을 증거한 뒤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나가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으리.
바람처럼 그렇게 잊히지만 않으면
살아서 부를 이름이야
내 가지지 않아도 좋으리.
내가 살아 부르던 그 이름을
내가 죽어 부르던 그 이름을
바람처럼 그렇게 잊히지만 않으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나는 좋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