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17(월)
루카 복음 10,25-42
(루카 10,27)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루카 10,30)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카 10,37)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루카 10,42)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묵상-
위 네 구절을 네 개의 길로 생각하고
하나로 관통하는 맥을 찾아 볼거다.
이를테면 옴니버스 묵상 글이 될 듯.
주님께서는 오늘, ‘사랑’이라는 의미를
긴 비유와 함께 풀어내신다.
영원한 생명이 이웃사랑과 연결되다니!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 하나하나의 보물을 엮어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를 완성해주신 예수님의
카리스마가 빛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어설프게나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안 되는 자신을
탓하면서까지 애써왔다. 각자 다르기에
자기만의 속도로 그리 살다 보니
사랑이라는 것에 제법 눈이 열렸다.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하려면
놓쳐서는 안 될 또 다른 사랑이 있는데
그게 무엇이게요?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봐야 한다.
그것도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해서!
즉, 자기와의 관계에 얼마나 집중하고 살아
왔는가에 대한 결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과연 자신을 애정어린
마음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며 돌본 적이
있냐는 거다.
마음과 목숨 다해 사랑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느님과 남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도 해본 사람이 할 줄
안다는 것, 강도한테 당해 죽어가는 중환자를
보고 멈추어 돌본 사람은 사마리아인뿐이었다.
하느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사제도 지나쳐
버렸고, 성전에 계신 하느님을 첫 자리에 두고
사는 레위인도 무심히 지나가 버린 거다.
미사를 집전해야 한다거나, 성전에 가서
제를 올려야 하는 용무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를 하며 말이다.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에 그들을 판단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온 몸이 망가져서 누워있는 사람에게 가엾은
마음을 느낀 사마리아인은 어쩌면 자신도
그런 어려운 상황을 겪어봤거나, 병고의
고통과 외로움을 공감할 만한 경험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자기의 약함과 고통을 마주하며 자기
한계에 대한 인정과 연민,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이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는 통찰을 했을 수도 있겠다.
사마리아인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주님 말씀을 알고
체험하고 실천한 사람이었을 듯하다.
강도당한 환자를 자동반사적으로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역량이 아무에게서 나오는 건
아닐 터,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힘을 가늠하게 된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여인이 또 등장한다.
마리아의 언니 마르타다. 집안 일에 늘
열심이었던 마르타가 오매불망 그리던
예수님이 가정방문을 하셨으니, 얼마나
흥분했겠나. 성향을 보니 가뜩이나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일에 집중하는 사람인것
같은데 더 난리가 난거다.
그런데 마리아는 분위기 파악이 안 된 듯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을 들으며
얄밉게 굴고 있다. 마르타가 약이 오르고
억울하고 심술이 나서 예수님께 이르는 거,
당연하다. 여기서 간과하게 되는 한 가지,
마르타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던 것 같다.
그즈음 예수님의 존재는 일부러 찾아다니며
만나야 할 귀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분이
내 집안까지 오셨으면, 다른 거 좀 내려놓고
그분만이 주시는 영적 선물을 받는 게
남는 장사였을 듯. 하지만 마르타는
누군가를 섬기고 대접하고 마음을 쓰는
이웃사랑에 꽂혀서 더 좋은 것을 놓치게
될 판이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상태에 빠지는 거다.
허나 마리아는 언니가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자신에게 유익한
영적 은총을 얻을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거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힘이 아니고는 자신의 나약함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주님과의 친밀한 거리인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거다.
이는 마리아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진정한 이웃사랑과 하느님 사랑을
할 수가 없고 한계가 많음을 인식하고,
사랑은 내 것을 주는게 아닌 주님께
받아서 주는 것임을 깨달았던 거다.
그런 자신에 대해 연민을 갖고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푼 건강한
자기 사랑의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주님과 내가 존재로서 만나 사랑을
나누지 못하면, 행위적 사랑에
집착하다 결국엔 지치고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여 마리아는 절대로 뺏기지 않을
소중한 한 가지,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칭찬받기에 이른다. 마리아와 마르타가
잘 상의해서 둘이 반반씩 섞어 더 균형을
이루면 어땠을까!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께서는
영혼의 성 7궁방 꼭대기 단계에서
거두게 될 열매를 마리아와 마르타가
함께 가는 것, 즉 건강한 통합(중용)을 꼽았다.
사랑의 주님,
가장 큰 계명은 마음과 목숨을 다해
행하는 사랑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곧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도 하셨지요.
강도만난 환자를 지나쳐간 사제와
레위인은 이웃 사랑을 외면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던 것이었네요.
분주하게 누군가의 시중을 들고
뭔가를 주도적으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마르타 역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네요.
나 자신을 먼저 깊이 사랑해본 적이
있었을까요? 말로는 부모와 자식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그들에게
부담을 주고 불편하게 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또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자기 자신은
밀쳐두고 특히 지나간 상처와 아픔들을
마주하거나 돌봐주지 못하고 묻고
억압하며, 부족하고 뜻대로 안 되는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고 외면했던가요.
그런 왜곡된 모습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들,
과연 기뻐하실까요.
오히려 맘이 아프시지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만일 놓치고 지나온 각자의 상처와
기억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을 만나주고, 미워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자신과 잘 화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것이 어쩌면 사순시기에 저희가
해야 할 작은 회개가 아닐까요.
부디 저희가 자신과 관계를 잘 맺어서
그 힘으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고
싶습니다. 강도 만난 환자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처럼 그 마음으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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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맺는
온갖 관계 중에서 단 하나만이
진정으로 평생 이어집니다.
바로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연민과 온정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사소한 실수는 용서하고 털어버릴 수 있는
관계라면 어떨까요?
자기 자신을 다정하고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단점에 웃어버릴 수 있다면
어떨까요?
첫댓글 박지현 요셉피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