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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백록담서 반짝 봄맞이
새벽 6시 성판악이다. 아직은 컴컴하다. 헤드 랜턴과 함께 섣달 스무사흘 하현달이 왼쪽에서 조심스레 따라온다. 그 많던 눈이 녹고 바닥은 돌너덜로 울퉁불퉁하다. 데크가 깔린 길은 부드러운 감촉이 온몸으로 묻어난다. 1000고지 표지석을 지난다. 한라산에서는 물이 고이거나 흐르는 소리를 좀처럼 들을 수가 없다. 서서히 먼동에 랜턴을 거두기 시작한다. 그렇게 많은 비가 내려도 그치면 금세 화산석 속으로 잠수해버려 건천이 된다. 속밭대피소에 다다르니 팡파레 울리듯이 갑자기 까마귀가 환영 인사를 한다. 뚜우따르르르 흉내 낼 수 없는 새소리가 나무속에서 울려 퍼진다. 아침을 알리는 경쾌함보다 어둠을 밀쳐내는 은은한 새벽이 가슴에 담긴다.
사라오름으로 부지런히 가는데 아무래도 뒤통수가 따갑지 싶다. 돌아보니 나뭇가지를 비집고 큼직하게 떠오르는 일출이다. 두근두근 웅장하고도 정말 아름다운 한라산자락의 일출이다. 얼른 시계를 본다. 7시 25분쯤이다. 정상이 들어온다. 엊그제 그렇게 많은 비가 내렸어도 진달래대피소의 그 많은 눈은 미처 다 녹이지를 못했다. 짓밟아 다져진 길바닥은 수년 간 간수를 뽑아낸 소금처럼 푸석푸석 미끄럽지 않아 아이젠이 없어도 괜찮다. 간혹 큰 나무가 순서 없이 벌렁벌렁 바람에 넘어져 엉덩이를 드러냈다. 충치처럼 어딘가 허점이 있지 싶다. 정상에 가까워지며 키를 낮춘 구상나무숲이다. 아마도 고온화 현상 때문인지 고사목이 늘어나면서 어수선하다.
헐떡거리며 정상에 올라섰다. 3시간 4분으로 기록을 단축하고 싶었으나 그러지를 못해 좀은 아쉽다. 백록담을 들여다본다. 그 안은 허탈하도록 텅 비었다. 마치 커다란 화채 그릇 같은 백록담은 바닥이 거의 드러났다. 눈이 녹아봐야 눈물로 까짓 얼마나 되랴. 2월의 기상관측 이래 최대라고 할 만큼 비가 내렸지만 그뿐 그릇을 채우지 못했다. 좀은 낮은 북벽으로 살짝 기울여 바닥의 물을 모아야 약간의 물이 고여 있는 것이 고작이다. 백두산에 버금갈 한라산에 백록담이다. 미련이 남았는지 몇 번이고 두리번두리번 훑어본다. 백록담에 전설일 뿐 그 어디에도 흰 사슴은 없다. 노루라도 있는지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얼음 몇 조각만이 있을 뿐이다.
한라산에는 전설의 흰 사슴 대신 삼족오(三足烏)에는 못 미치지만 까마귀가 뒤를 이은 것은 아닌지. 곳곳에서 까마귀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주위를 맴돈다. 자신들의 성스러운 영역임을 과시하는가 싶어서 갸웃거려 본다. 오늘은 신비스런 안개도 뿜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신선한 바람이 넘쳐 나오지 싶다. 써늘하지 싶어도 견딜 만하다. 철퍼덕 주저앉아서 제주 시내를 보고 서귀포 시내를 본다. 멀리는 성산 앞바다까지 내다볼 수가 있다. 눈향나무가 바람을 피해 잔디처럼 바닥에 찰싹 붙어 포근하게 덮고 있다. 이불처럼 감싸고 있다. 굳이 고개를 들거나 허리를 일으켜 세우지 않아도 그 모습 그대로 넉넉하고도 아름답다. 쏟아지는 햇살이 따스하기만 하다.
햇살을 받으며 그냥 앉아 있다. 내일이 마침 입춘이다. 지금은 따스하니 분명 겨울 속에 봄날이다. 아직은 한겨울로 저녁에 다시 비나 많은 눈이 온다고 하지만 겨울이 아니다. 오늘 때 이른 백록담의 봄맞이가 되었다. 아무래도 이번 제주도 백록담 산행은 꿈속을 잠시 헤맨 듯싶다. 길을 나서기 전날 그렇게도 비가 많이 내려 기상관측 이래 최대의 강우량이라 했다. 돌아오는 배에 오르며 비가 내리나 싶더니 진눈개비에서 눈이 내렸다. 서울지역은 십이 년 만에 가장 많은 적설량이라고 한다. 원점으로 돌려놓았지만 봄 속에 푹 빠져 노닐다 온 것은 분명하다. 그저 멍멍하다. 불과 이틀이지만 삶의 한 부분에 꿈같은 일들이 끼어들어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 2013. 0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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