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과 3.1 만세운동길
강순희(향원)
대구 중구 골목 투어 근대로(路)의 여행 2코스는 근대문화골목이다.
청라언덕 선교사 주택을 출발하여 계산성당, 이상화, 서상돈 고택, 약령시, 진골목 등을 지나 화교협회(소학교)에 이르는 1.64km 길이다. 탐방 소요시간은 2시간가량이다. 황사가 심하던 봄날, 도서관의 인문학 수업 중에 탐방하는 일정이 있어서 일행과 함께 다녀왔으나 하루 만에 보고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뒤 시간이 날 때마다 가끔 들러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5코스까지 있지만 유독 2코스에는 근대 건축물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아 늘 가보고 싶은 곳이다.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 전, 3.1 만세운동길 90계단을 오르고 싶어서 늦은 오후에 그곳으로 향했다.
90계단 아래 섰다. 올려다보니 계단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경사가 완만하고 폭은 좁은 편이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계단은 가운데와 끝에 같은 너비의 경사로가 있어 양쪽으로 나뉘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른다. 계단의 왼쪽을 따라 ‘3.1 만세운동길’이라는 글씨가 적힌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봄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는데 그 사이 바뀐 것 같다. 청사초롱 모양의 키 낮은 가로등도 깃발과 함께 줄지어 서 있다. 사진 액자들은 주로 오른쪽 벽면에 전시되어 있다. 계산 성당과 대구 전경, 대구고보, 계성학교에서 본 서문시장, 신명학교, 남성정 예배당(현, 제일교회) 등 만세운동과 관련된 사람들과 대구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천여 명의 학생들이 오르내리며 지나갔을 길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신명학교 여학생들은 당시 검정치마와 흰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조끼허리를 치마에 달아서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는 개량한복이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구 지역의 3.1 운동은 서문 장날인 3월 8일부터 약 한 달 동안 크게 3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부르는 만세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90계단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청라언덕에 이른다. 청라언덕의 가운데를 지나는 길은 내리막길이다. 언덕을 내려가면 좁은 도로 아래를 지나는 커다란 문이 나온다. 타일로 된 벽에는 독립 만세를 외치는 선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다른 쪽은 독립유공자의 벽이다. 대구 3.8 만세운동에 참여한 분들의 이름이 타일마다 새겨지고 있다. 그 문 밖으로 길은 다시 이어지고 서문시장 쪽으로 갈 수 있다. 이 길은 2003년부터 ‘3.1 만세운동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3.1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갈 때 약속의 날 3월 8일이다. 계성, 신명, 대구고보 학생들이 대구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 가며 서문시장 큰장터를 향해 달려갔던 애국 혼이 서린 길이다.”
90계단에 오르기 전에 보았던 쌈지공원의 평평한 돌 위에 새겨져 있던 글이다. 쌈지공원의 바닥에는 1920년부터 2009년까지의 일들이 연표처럼 적혀있었다. 1921년 현진건 빈처, 1928년 박태준 오빠 생각, 1937년 헬렌 켈러 동산신명학교 방문… 등 대구 예술가들의 업적과 대구의 역사가 음각되어 근대사를 스토리로 담아낸 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청라언덕은 달성토성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언덕이라고 동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세기 말 미국의 선교사들이 교회, 학교, 병원을 설립하고 여호와 이레의 동산이라 명명한 곳이다. 선교사들은 원활한 선교활동을 위해 동산을 구입하고 12채의 집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보존 상태가 좋은 3채가 남아서 대구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90계단을 통해 청라언덕으로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챔니스 주택이 있다. 챔니스 주택은 1910년에 지어졌는데 안산암의 성돌을 초석으로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2층이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의 방갈로 형태의 건축물이다. 대구읍성이 허물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돌이 대부분 근대건축물의 기초석으로 쓰이면서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에는 커다란 느릅나무가 서 있었다. 챔니스 주택은 의료박물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블레어주택은 최초로 지어진 선교사주택인데 청라언덕의 가장 남쪽 경사진 땅 위에 있다. 블레어주택에는 성돌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교육,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지대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집 앞의 향나무가 인고의 세월을 담고 있다.
챔니스 주택과 블레어 주택 사이에 동무생각 노래비가 있다. 박태준의 꿈과 추억이 서린 이곳에 2009년 노래비가 세워졌다. 대구가 고향인 박태준이 이 곡을 짓고 노산 이은상이 노랫말을 붙였다. 이곳이 푸른 담쟁이덩굴이 휘감겨 있던 청라언덕이고 백합화는 그가 흠모했던 신명학교의 여학생이다. 지금도 청라언덕에는 푸른 담쟁이가 곳곳에 보이지만 선교사 주택의 벽에는 담쟁이가 거의 없었다. 붉은 벽돌을 보존하기 위해 2011년 담쟁이를 제거했다는 이야기를 문화해설사에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동산의료원 방향으로 웅장한 제일교회 건물을 뒤에 두고 스윗즈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스윗즈 주택은 대구의 선교사주택 중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히고 있다. 1910년경에 건축되었으며 대구 읍성이 허물어지면서 나온 안산암의 성돌을 기초로 하여 지은 이층집이다. 나무 서까래와 한식기와지붕이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이채롭다. 창 마다 스탠드 글라스의 곱고 투명한 빛은 따뜻한 느낌을 준다. 현재 선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윗즈 선교사는 미국 명문가의 따님인데 머나먼 이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다 40대 후반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곳 청라언덕 은혜의 정원에는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의 묘지가 있다. 우리가 어둡고 가난할 때 머나먼 이국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며 끝내 이 언덕에 묻힌 분들에게 머리가 숙여졌다.
90계단을 내려와 다시 길을 건넜다. 이상화, 서상돈 선생의 모습을 타일로 모자이크 한 큰길가 벽면 위에 정성껏 또박또박 써 놓은 글귀가 마음을 끌어당겼다.
“골목길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이자 문화이며 소중한 문화재이다. 골목길은 우리가 살아온 상상의 공간이며 창조의 시작이다. 대구 근대골목으로의 조그만 여행을 통해 잊힌 추억과 삶의 공기를 찾다.”
골목길에는 앞서 간 세대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근대골목을 여행하면서 우리는 그들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마음속 대화를 나눈다. 그 길에 우리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남겨놓을 것인가?
** 지난번 올린 글이 두서가 없어 다시 정리, 수정했습니다만 너무 길기만 합니다.
첫댓글 근대골목길을 제대로 답사하지 못했는데 유심히 살펴보고 싶내요. 지난 해 이맘때 김광석 거리를 걸어 보고 몇 군데 사진을 찍어 카톡에 올리기도 했는데 관심이 많더군요. 이글을 읽고 지하철역에 내리니 근대골목 1~5코스 안내도가 있더군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선 세심하신 관찰력과 자세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한 두번 골목 투어를 했지만 그냥그냥 겉 껍데기만 돌아보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글 을 읽으며 3.1 독립운동과 선교사님들의 활동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언젠가 한번쯤 다시 걸어볼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골목길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이자 문화이며 소중한 문화재라는 말" 몇 번이고 되새겨 봅니다. 혼자서, 또는 여럿이, 때로는 어떤 모임에서 그 길을 다녀보지만 늘 미흡하고 아쉬운 느낌을 주던 곳이었습니다. 정말 그때의 그 모습대로의 복원은 가능할런지...... 잘 읽었습니다.
한국관광 100선에 대구에서 유일하게 들어있는"골목투어 근대로의 여행" 코스 자랑스러운 곳입니다. 청라언덕에 있는동무생각(사우) 노래가 있어서 길이 남을것 같습니다. 3.1 만세운동길 90계단 선생님의 세밀한 글을 읽고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잘 정리된 촣은 글 읽고 새로운 의미를 느꼈으며 잘 읽었습니다.
저도 90계단을 오르며 감격이 새로웠습니다. 60년대 초 큰댁언니가 결혼해 90계단 중간 쪽에 신접살림을 살면서 고생하던 곳이 골목투어가 되어 3.1만세운동길이라고 지어졌다고 하니 그길이 새롭습니다.건성으로 보았던 골목투어를 선생님께서 세밀히 관찰하신 글을 읽고 다시한번 가봐야겠습니다.
강선생님의 글을 통하여 근대 골목 역사를 새롭게 배우고 느낍니다. 3.1만세운동길의 독립정신은 길이 보전하고 전승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 이국땅에 와서 선교.의료 활동을 하시다 이 땅에 묻힌 그분들을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좋은 글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요즘 지하철 청라언덕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며 출퇴근을 하고 있지요. 만세운동길 90계단도 조만간 올라보고 싶고 청라언덕에 대해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청라언덕은 달성토성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어 동산이라고 하는군요. 동산동에 산적이 있어도 그걸 몰랐습니다. 긍을 읽으며 많이 배웁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청라언덕. 참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젊은 시절 동무생각이라는 노래를 흥얼 거리던 생각이 납니다. 이름이 언제부터 불리게 되었는지? 나도 한번 가본 일이 있지만 세세한 내용을 모르고 둘러보았습니다. 마치 문화제 해설가와 같은 자세한 설명에 더 호감이 갑니다. 한번 더 가 보고 싶습니다.
골목길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이며 문화라는 말씀에 깊은 공감을합니다. 저녁 나절엔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밥먹으러 오라는 다정한 어머니의 외침이 골목에 흘러나오던 기억이 떠 오릅니다
선생님 글은 세심한 관찰과 따뜻한 시선으로 글을 담담히 써내려가면서 잔잔한 의미를 전해주십니다 .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