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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01
2월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연중 제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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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땅, 이 백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치유활동을 통해 당신 백성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은 보편적인 사랑, 큰 사랑, 모든 인류를 다 품어 안으시는 큰 사랑의 소유자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신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 당신과 함께 인생여정을 걸어갔던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도 충실하셨습니다.
당신과 가까이 살았던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랜 투병생활로 고생이 많은 환자들의 마음 상태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한번 잡아보겠다는 절박한 심정,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번 회복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예의나 격식을 제대로 차릴 여유도 없지요.
때로 이쪽 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일방적이고도 찰거머리 같은 요청에 때로 힘겹기도 했을텐데,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언짢아하지도 않으시고, 한명 한명의 아픔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정성껏 치료해주십니다.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까지도 함께.
요즘 "토착화"란 용어를 자주 씁니다. 교회나 수도회에서 개최하는 회의나 행사 때마다, 특히 선교관련 세미나 같은 때 단골 주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토착화"입니다.
그런데 "토착화"란 단어 본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토착화"를 외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교회나 수도단체가 한 지역에 "토착화한다"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참된 토착화는 단순히 전례생활에만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사 때 부르는 성가를 무조건 국악성가로 바꾸고, 성찬의 전례 때 사용되는 제병을 백설기 떡으로 바꿔 사용하고, 전례복장을 모두 한복 스타일로 바꾸는 것만이 토착화의 전부는 아니겠지요.
토착화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이 나라, 이 땅, 이 백성을 극진히 사랑한다는 가장 뚜렷한 표현"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몸 붙여 살아가는 이 나라 백성들을 극진히 사랑하기에 그들의 전통이나 문화, 사상이나 가치관을 존중하여 열린 마음으로 대처하고,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 토착화의 본질일 것입니다.
토착화의 핵심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육화강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바로 그 곳, 자신이 두 발로 서있는 바로 그 땅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정신이며, 그 육화의 영성의 실천이 토착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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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을 만날수록 삶은 더 긍정이 된다>
영국의 어떤 학교에서 학기 초에 ‘우수한’ 아이들로 편성된 학급이 ‘열등한’ 학급으로, ‘열등한’ 학급은 ‘우수한’ 학급으로 컴퓨터에 잘못 입력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교는 5개월이 지난 뒤 학사관리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황한 학교측은 컴퓨터의 오류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학생들에게 학기말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험결과가 놀랍게 나왔습니다. 원래 우수한 아이들의 성적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학기 내내 선생님들에 의해 열등하고 학습능력이 부족한 아이들로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둔한 학급의 점수는 크게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대단히 우수한 아이들로 여기고 교육하였고, 그들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을 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로 되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본인 안에서 샘솟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믿음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삶으로 그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 삶도 이렇게 돌아갑니다.
‘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라는 책을 쓴 울리히 슈나벨은 내가 만들어내는 모든 삶의 결과는 자기 확신이 자아내는 생각을 증명해 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애인과 해어졌다면 그는 이미 생각으로 자신은 애인과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애인과 해어지며 ‘거봐, 결국 내 생각이 맞았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좀 황당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일면 맞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대로 되는 게 세상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병든 이들을 데려갑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그들을 치유해 주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고, 사실 그 믿는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것이라 믿은 이들은 정말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큰 긍정입니다. 더 큰 믿음입니다. 작은 것을 들어주시면 큰 것도 들어주실 것이란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치유되게 하신 데에는 그들의 희망을 꺾지 않아서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희망도 꺾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을 가까이하며 부정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숨졌고 두 번째 부인은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롱펠로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신의 작품에는 진한 인생의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롱펠로는 마당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도 롱펠로가 사과나무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습니다. 예수님께 청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청을 다 들어주신 것 같지만 안 들어주시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안 들어주셨던 것은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고 다 들어주셨다고 믿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더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가장 완전한 계시입니다. 그 자비와 만나면 더 부정적으로 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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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53-56 :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병자들이 자기의 병을 치유 받기 위해서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들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인간의 절박한 요구, 사람이 줄 수 없는 무엇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러한 은혜를 받고도 결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조한 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이 군중들 중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분으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와 같이 수많은 군중들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인가? 또 친구와 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용하고 또 도움만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떤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찾으면서도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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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들의 행동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온 지방을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군중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필사적으로 자기가 아는 병자들이 낫기를 간절히 청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마을에 새로운 가게가 생겨 호기심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 계산대에는 하느님께서 계셨습니다. 놀란 부인이 묻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팔고 계시는지요?”
하느님께서는 답하십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 수 있답니다.” 부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잠시 뒤에 말을 쏟아 냅니다.
“행복을 사고 싶습니다. 사랑과 평화도요.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자유도 주셔요.”
그러더니 또 덧붙입니다.
“저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제 이웃을 위해서도 사고 싶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오해를 한 것 같군요. 여기서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씨앗만 팔고 있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바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라는 만큼의 필사적인 간절함과 그에 따른 적극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보고 있습니까? 그분을 만나려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자 뛰어다니고 있습니까?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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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은, “병이 나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끝부분에 있는,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계시고, 사람들이 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만 해서 병이 나은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옷자락 술’이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면서, 옷자락 술에 사람들이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는 일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옷자락 술’은 없어도 상관없는 물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믿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져서 병이 나았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옷자락 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셨다고 믿은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예수님을 안 믿고 ‘옷자락 술’만 믿는 것은 미신입니다. 만일에 그 ‘옷자락 술’을 신격화하고 섬긴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복음 말씀에 나오는 병자들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어떤 성물 같은 것에 의지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것은 미신이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믿음의 내용’이나 ‘믿음의 수준’이 어떤지 판단하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믿음의 수준’을 판단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은 그냥 주님께 맡겨두고, 우리는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나의 믿음은 올바르게 주님을 믿고 있는 ‘참 신앙’인가? 아니면 ‘옷자락 술’을 믿는 것에서 그치는 ‘미신’인가?”
자기 자신의 믿음이 ‘참 신앙’인지 ‘미신’인지는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1) 단순하게 말하면, “주님께서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이다.”라고 믿으면 ‘참 신앙’이고, “‘옷자락 술’이 나의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미신’입니다. (‘참 신앙’의 수준에서는 어떤 성물이 없어도 믿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신’의 수준에서는 자기가 믿는 그 성물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하고, 불안해합니다.)
2) 소원이 이루어지든지 안 이루어지든지 간에 모든 결과를 주님의 뜻에 맡길 수 있는가? 맡길 수 있다면 ‘참 신앙’이고,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해 달라고 고집부리면, 그것은 많이 미숙한 신앙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3)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의 모습도 식별 기준이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더 충실하게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참 신앙’이고,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주님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4)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서 끝나버린 다음에도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면 ‘참 신앙’이고, 실망하고 좌절해서 신앙생활을 중단한다면 ‘참 신앙’으로 주님께 간청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믿음의 수준’이나 ‘믿음의 내용’을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딱한 사정만 보셨고,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믿으라는 요구를 하신 것도 아니고, 고쳐 주신 다음에 당신을 믿으라는 요구를 하신 것도 아닙니다. (병이 나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자유의지에 맡겨 두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입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베풀어 주는 것이 ‘자비’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병자만 고쳐 주셨는데(마르 6,5-6), 그것은 ‘믿음을 먼저 가져라.’라고 요구하신 일과 같지 않은가?”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 믿는 사람들’을 안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병을 고쳐 주려고 해도 청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병을 고친 몇 명의 병자는 예수님을 믿었고, 믿었으니 청했고, 청했으니까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고, 청하지 않아서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자비 실천’도 예수님의 자비와 같아야 합니다. 만일에 ‘불우이웃 돕기’를 하면서 그 대상을 신자로 제한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또 비신자들을 대상에 포함시킨다고 하더라도 예비신자로 등록할 것을 조건으로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자비 실천’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아무런 조건도, 제한도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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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준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도 많습니다. 12년 동안 하혈 병을 앓은 부인의 경우가 대표적이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환자들도 그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이들이 감히 하느님께 손을 대었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감히 당신께 손을 대었다고 하셨을까요?
아마 이들도 하느님께 손을 댄다고 생각하였다면 아마 손을 대지 못했을 것이고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듯이 손을 대기는커녕 오히려 멀찍이 떨어져 무릎 꿇고는 벌벌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십니다. 이는 마치 겨울 청천 하늘에 달이 잎새 없는 나뭇가지에 걸리듯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걸리어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느님이며 인간이시라는 것은 골치 아픈 신학의 문제가 아니고 도그마의 문제도 아닙니다. 만남의 문제이고 사랑의 문제입니다. 느낌의 문제이고 감동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내려오시어 우리의 손에 걸리고 우리의 귀에 걸리고 우리의 코에 걸리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걸리는 하느님의 겸손과 사랑에 우리는 프란치스코처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손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 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며 지고의 장엄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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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병로 라파엘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절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마을이든 도시든, 촌락이든 예수께서 가시기만 하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주기를 청한다.
유명한 성지들을 방문할 때 우리는 절실히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을 본다. 무슨 일이 있길래 저렇게도 간절히 기도하는 걸까?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얼마나 절실한 상태에 있는지 말해준다.
곁에서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도 주님께서 그들의 청을 들어주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우리 체험이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진 후에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며, 그분의 참된 자녀로서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맹세를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어느새 일상이 주는 안온하고 평온한 분위기에 취해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는가!
그렇기에 어쩌면 일상 안에 작지만 절실한 그 무엇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크나큰 은총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진정 지혜로운 이들은 어쩌면 그런 것들을 주님께 청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주님께서 주신다는 믿음을 간직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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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이은주 마리 헬렌 수녀님]
<간절함이 다할 때>
작업하던 두 권의 책이 하루 이틀 간격으로 출판되던 날, 10년 동안 마음을 닦아가며 기다린 한 달 영신수련에 초대되었다.
목마름으로 쩍쩍 갈라진 내 영혼에 그분을 향한 간절함만 남아 있을 때였다. 그래서였을까? 피정에 들어가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나의 역사’도 단숨에 적고, 주변을 정리하고 피정을 시작한지 하루 반나절 만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은총의 시간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를 따라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것은 차라리 목마른 영혼에게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편이 맞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는 시구가 떠올랐다.
오늘 복음에서도 기다림에 목마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기다림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그분을 만난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 6,54- 55)
하늘나라, 그 먼 길을 가다 보면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같은 목적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걸음을 떼는 사람들은 서로 닮아가고, 그런 중에 해방된 영혼은 또 다른 상처 받은 사람을 보듬게 된다.
그러기에 올곧은 지향을 품고 항구하게 제 길을 걷는 스승이나 도반을 만나는 것은 삶의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길은 만남을 통해 깊어지고, 만남은 또 다른 창조를 이루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만남은 아무 때나 찾아오지 않는다. 간절함이 다할 때 문득 내 앞에 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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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를 하면서 후진하던 차와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운전자가 내려와서 괜찮은지 물어보고, 물도 주고, 친절하게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물리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별 탈은 없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운전자가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가 길에서 쓰러졌고, 걱정되어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갑자기 길가다가 넘어진 사람이 되었고, 운전자는 엄청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먼저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지만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겼고 정든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갔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가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제사와 율법과 예배도 필요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겁니다. 비록 성전이 없어도, 나라가 없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자녀임을 잊지 않았고,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시비를 가리는데 익숙합니다. 인과응보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사필귀정의 자연법칙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해석을 내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속을 썩이던 할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엘 갔습니다. 할아버지를 진찰한 의사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잠시 후에 깨어났습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내말도 안 듣더니 이제 의사 말도 안 듣네. 의사 선생님이 죽었다고 하잖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중풍병자를 일어나게 하셨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할머니와 비슷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어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자신들이 세운 질서를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같은 분이 되셨습니다. 놀라운 표징과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면 지금 이 순간순간들이 모두 놀라운 표징이고,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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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고마운 나의 사람아>
마르코 6,53-56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고마운 나의 사람아>
멀리서도 나를 알아보고
한걸음에 달려오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내 겉모습만을 훑지 않고
내 속마음을 정성스레 헤아리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나와 있고픈 선한 욕심 버리고
나와 있어야 할 벗 뒤로 물러서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스스로 나에게 올 수 없는
나에게 와야만 하는 벗을 이끄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내가 품고픈 벗에게
나보다 한걸음 먼저 다가가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벗에게
나보다 앞서 내가 되어주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나와 벗을 이어주고
슬며시 뒷자리로 물러서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나와 벗을 사랑하기에
둘만을 남겨놓고 사라지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언제 어디서나
나와 벗 사이에 없어도 있을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나에게 또 하나의 벗이 되고
벗에게 또 하나의 내가 되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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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그리스도인답게…>
어느 성당에 큰 예수님 성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상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신자분들이 부서진 예수님의 조각상을 찾아 다시 복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각들을 다 찾아서 복원했는데…. 아뿔싸 예수님의 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자분들은 의논 끝에 예수님의 조각상을 손이 없는 채로 그냥 놔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각상 밑에다가 이런 글씨를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손 외는 다른 손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너다. 너는 나다. 우리는 그리스도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느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사람들은 병자들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고,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쉴 틈도 없이, 먹을 새도 없이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군중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측은한 마음(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마을, 어느 고을, 어느 촌락에 들어가시면 당신 앞에 나온 병자들을 전부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단, 예수님을 알아보고 맞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은 “다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정말 고칠 수 없는 불치병(낫지 않는 병)은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병을 낫게 하는 하느님의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 예수님 앞에 머물러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권능으로 고운님들의 영혼의 힘과 생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고운님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맞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맞습니까? 맞으면 큰 소리로 ‘아멘’하십시오. 그러기에 ‘고운님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답게 고운님들이 받았던 사랑의 빚을 갚을 차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맞아들이기를 원하는 믿음으로 오늘 만나는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고운님들의 몸과 마음에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가득한 하느님의 권능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저 두레박 사제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맞아들이기를 원하는 믿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하느님의 권능으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베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찰나(아주 짧은 순간)에 고운님들의 아픈 마음도, 병든 육신도, 흐릿해진 정신도 모두 회복되고 치유가 이루어지는 은총으로 구원의 길을 걸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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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03)
♧♧ 시편 73편 15절…
“나도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하였지만 그것은 당신 아들들의 모임을 배신하는 것.
* “나도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하였지만...
이는 아삽이 14절과 같은 생각을 했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입 밖에 발설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음을 뜻합니다. 그는 자신의 원망과 불평, 의문을 가졌던 생각을 공공연히 내뱉을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을 염려하여 그같이 하지 않은 것입니다.
* 당신 아들들의 모임...
‘당신 아들들...’이란 주님의 백성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말합니다.(시편 79편 13절, 100편 3절. 예레미야서 23장 1절. 에제키엘서 34장 31절. 참조) 그리고 ‘모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도르’라는 말은 ‘무리’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데(민수기 32장 13절. 신명기 1장 35절. 참조), 여기서도 그러한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 배신하는 것...
만일 깊은 믿음을 가졌던 아삽은 불신앙의 말과 행동을 했었더라면 그것이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 그들을 낙심하거나 절망스럽게 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마태오 복음 18장 6절. 참조)
♧♧ 시편 73편 16절…
"깊이 생각하여 이를 알아들으려 하였으나 그것은 제 눈에 괴로움뿐이었습니다."
* 깊이 생각하여 이를 알아들으려 하였으나...
‘생각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솨브’라는 말은 ‘계산하다.’ ‘셈하다.’ ‘무게를 달다.’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라는 뜻으로, 아삽이 지금까지 자신이 의문을 품은 문제에 대한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기 위해 여러 방명으로 연구하고 고민한 것을 뜻합니다.
* 괴로움뿐이었습니다.
아삽이 자신의 지식과 이성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헤아리려 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큰 부담거리가 되었고 쓸데없는 일이었음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러한 아삽의 고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분인 하느님과는 달리 유한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에서 하시는 모든 일을 능히 깨닫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코헬렛 8장 17절. 참조) 사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계시해 주는 한도 내에서만 그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을 뿐 그밖의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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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한 장의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 밑의 설명을 보니, 우리나라 민화 ‘파초도’라고 합니다.
소위 풀 나무라고도 불리는 ‘파초’를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민화라 그런지 나무인지, 열대 정글을 그린 것인지 알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사람들은 이 파초도를 보고서 뭐라고 말할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각양각색의 대답입니다.
그림 하나만으로도 각양각색의 답을 얻습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어떨까요? 더군다나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완벽하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거짓말쟁이나 정신적으로 아픈 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향할 때는 늘 겸손의 모습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겸손보다는 교만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참 많이 하지요.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때로는 협박의 말도 합니다. ‘이거 해 주지 않으면, 저 이제 당신을 믿지 않겠습니다.’
어느 회사의 직원이 사장님께 요구사항만 계속 말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습관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할까요? 아마 조만간 실업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이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병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 오라고 명령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찾아갑니다. 또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간곡하게 청합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가고 예수님께 간절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굳은 믿음을 갖고 주님을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모습을 취하곤 합니다. 전혀 찾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닌 의심을 하면서 오히려 주님 곁을 떠납니다. 주님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님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길이 내 앞에 펼쳐질 수 있습니다. 늘 하고자 했던 일을 할 시간이 더 이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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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
어느 곳에 강의하러 갔다가 시간이 남아 근처 카페에 들려서 강의 점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카페는 특이하게도 현금을 받지 않더군요. 투명한 회계 처리를 위한 것인가보다 하며 신용카드로 계산했습니다.
잠시 뒤에 주문했던 커피를 들고서 창가에 앉아 노트북의 화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카페 안이 시끌벅적해지는 것입니다. 어르신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립니다.
“왜 내 돈을 안 받겠다는 거야? 이거 돈 맞다고!!”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은 현금으로 계산을 하려 했고, 카페 직원은 신용카드 외에는 결제할 수 없다고 하니 화가 나신 것입니다.
어르신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통용되는 돈인데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잘못 아닐까요? 직원은 명령받은 대로만 할 뿐이겠지요. 여기에 한 직원이 어르신의 화를 더 불러일으켰습니다. 글쎄 소란을 피우면 신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르신은 더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어르신, 여기 규칙이 이런가 봐요. 제가 어르신께 차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그리고 카드로 계산하려고 할 때, 어르신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뭔데? 나 돈 많아!”
이렇게 말씀하시고 화를 내시며 나가셨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다가섰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나 봅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도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정말로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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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아름다운 연인이자 도반이신 분>
-주 예수 그리스도님-
요즘 참 많이 저절로 나오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아름답다!”입니다. 며칠전 서원 25주년 은경축때 아홉분 수녀님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하여 카톡 사진에 즉시 담았고 여러분들과 나눴습니다.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어하는 것도 우리의 영적본능입니다.
또 어제는 고맙게도 수도형제가 31년 전 사제서품식 동영상을 노트북에 다운 받아줘 잠시, 처음으로 봤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들로 길이 보관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였습니다.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보니 환히 보이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사부 성 베네딕도의 사랑하는 오누이, 흡사 영적 연인처럼 느껴지는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축일입니다. 기록상으로는 63세 사셨으니 당시로는 장수한 편입니다. 오늘 미사에는 생략되었지만 오늘 복음전에 배치된 부속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사부 베네딕도 별세 축일(3.21), 사부 베네딕도 대축일(7.11)에도 역시 아름다운 부속가가 있습니다. 잠시 오늘 부속가를 나눕니다.
-“영원 평화 안식이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담뿍 안겨졌도다
휴식소에 들어가 사랑하던 정배와 포근한 정 누리니
사랑하던 그 이를 얼마나 그리워해 열심히 찾았는고
눈물로써 하늘을 움직여 비오게 해 오빠 맘 누그렸네
숭고하신 말씀이 천당 복락에 대한 성 베네딕도 말씀
갈망과 동경이며 동신이신 정배인 그를 일깨우셨네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신부여 면류관을 받으라
백합 중에서 살며 가득히 찬 행복 속 맘껏 쉬고 취하리
강가에서 나아와 천당 궁궐로 가는 동녀 중의 비둘기
아름다운 향기로 우리 인도하여서 영생 얻게 하소서.”-
곡도 가사도 참 깊고 그윽하고 아름답습니다. 원문대로 라틴어로 할 수 있다면 더욱 마음에 와닿을 것 같습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님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두 남매간 만남의 일화를 바탕으로 성녀 스콜라 스티카의 아름다운 생애가 고스란히 담긴 노래입니다. 참으로 두분이 모두 아름다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으로 삼은 생애였기에 이런 남매간의 아름다운 영적 연인이자 도반관계이겠습니다.
참으로 베네딕도 성인과 스콜라스티카는 우리 수도자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오늘 호세아에서도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부족한 우리를 영원한 영적 반려자, 연인이자 도반으로 삼겠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호세아 예언자의 아내 ‘고메르’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반영되었음을 봅니다. 그러니 ‘그 여자’나 ‘아내’라는 말마디가 거북하고 불편하면 ‘연인’이나 ‘도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성실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연인이자 도반관계에 있어서 필수적 자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가서의 입당송도 아름답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연인임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 신랑인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 영혼을 일깨우는 우리의 연인이신 주님의 감미로운 음성입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도 참 아름다운 영적 연인이자 도반관계를 보는 듯 합니다. 성 베네딕도와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관계와 흡사한 느낌입니다. 여기서 저는 마리아를 통해 우리의 영원한 영적 연인이자 도반이신 주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다섯까지 요소를 찾아냈습니다.
첫째, 찾는 것이고, 둘째, 환대하는 것이고, 셋째, 함께 하는 것이고, 넷째, 경청(傾聽, 敬聽)하는 것이고, 다섯째,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주님을 찾았고 주님을 환대했고 주님과 함께했으며 주님의 말씀을 경청했고 주님께 순종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 수도자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빼다 박은 듯 닮은 성녀 스콜라 스티카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리아의 모습이 다음 대목에 압축 요약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의 환대에도 우선 순위가 있으니 바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마르타는 생각 못했습니다. 미사구조를 봐도 주님을 환대하는 말씀전례후에 성찬전례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이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이 우선입니다. 분도 규칙도 “들어라! 오, 아들아!”로 시작됩니다. 주님은 마르타에게는 경청의 중요성을 일깨우시며 마리아를 격려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이 아름다운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이신 당신과의 영적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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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라>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 삼아 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 환영 받지 못 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 5,15).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 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 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 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복음선포는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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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현존"을 강렬하게 체험합니다.
"그들(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내리자."(마르 6,54)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일행과 함께 배에서 내리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육화의 신비이니, 그 지역 사람들에게 오늘 이때는 매우 구체적인 육화의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마르 6,54)
누군가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다는 건, 보는 이 내면에 이미 상대의 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났거나 소문을 들었거나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그분을 접한 이들이지요. 그냥 스쳐지나거나 망각 속에 우겨넣지 않고 기억 안에 그분을 간직하고 있었으니 알아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예수님을 자기 존재 안에 모시고 있었던 것이지요.
"뛰어다니며 ...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6,55)
그들의 앎이 매우 역동적이고 활발한 움직임으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연민을 가졌던 지방 곳곳의 병든 이웃들에게 지금 누구보다 예수님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지요. 그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 일처럼 팔을 걷어부치고 발 벗고 나서서 구원이 필요한 이와 구원자의 만남, 접촉을 주선합니다.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 청하였다."(마르 6,56)
그들은 뛰어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래서 알아본 그분께 직접 청을 드립니다. 자기 이익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병들고 아프고 고통 겪는 이들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주님께 간청을 드리는 겁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결과가 참 아름답지요! 그들의 관심과 수고로운 땀방울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제 일처럼 감응하며 희생을 바친 그들의 힘은 바로 그들이 알아본 예수님의 현존입니다. 이들로 해서 예수님의 현존이 더욱 빛납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들 안팎에 존재하십니다. 실제로 그 지방에 오셔서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기 전에 이미 당신을 알아볼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한 그들은 분주히 봉사하는 "외적 활동"과, 주님께 청하는 "기도"로 세상의 고통과 예수님의 현존을 잇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떤 신분이건 이 자체가 거룩한 직무 수행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제1독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주님의 계약 궤를 성전 안쪽 성소인 지성소 안에 모시는 장엄한 순간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1열왕 8,12-13)
솔로몬이 사랑과 경외심으로 가득차 주님께 아룁니다. 인간이 아무리 엄청난 성전을 짓는다 한들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걸맞을 수야 없을 테니,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닌 솔로몬이 지금 자기 업적을 자랑하고 생색내려는 것은 아닐 겁니다.
솔로몬은 주님의 영광에 맞갖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만큼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께 감사하다고, 그래서 당신께 제 깜냥을 다해 거처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다고 아뢰는 것이지요.
"짙은 구름"
그렇습니다. 성경 저자들이 곧잘 주님의 현존을 구름으로 묘사해 왔듯이 주님은 짙은 구름 속에 계십니다. 그분은 좀 알 것 같다가도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 중에 누가 감히 그분을 선명히 보았다고, 잘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드러나실 분이면 하느님이 아니시지요...
그런데 짙은 구름 속에 계시는 분이 피와 살을 취해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게다가 누추하고 초라한 우리 내면에까지 개의치않고 들어오셔서 머무르시고 거처를 삼으십니다. 솔로몬이 외친 "웅장한 집"은 못되어도 이미 친밀하고 정감 넘치는 "현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기쁨에 뛰어다니며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모으고, 또 그분께 제 일보다 더 간절히 청원을 넣습니다. 주님을 모시는 일에 꼭 장엄한 예식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랑, 주님을 향해 불타는 사랑이면 족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도 솔로몬처럼 주님께 외칩시다.
"제가 당신을 위해 ○○한 집을 마련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에 넣을 단어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참으로 자기다운 말들이 저마다의 삶의 지향을 담아 떠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박한, 순수한, 거룩한, 정결한, 따사로운, 진실된, 아름다운, 귀여운, 정갈한, 소중한, 귀한, 깨끗한, 튼튼한, 굳건한, 예쁜...
그 집이 어떤 집이든 주님께서 기꺼이 들어오십니다. 현존에 대한 갈망은 우리보다 그분이 더 크시니까요. 주님을 모신 행복한 하루, 주님 현존을 전하는 보람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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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약함이 아니라 강함 때문에 겪으시는 고통>
눈먼 이에게 빛을 주시고, 굽은 이를 펴 주시고, 죽은 이를 일으켜 주시고(마태 11,5 참조), 우리의 바람에 맞갖은 약을 주시고, 간청하는 이를 옷자락의 술로 고쳐 주시고(마르 6,56 참조), 손을 댄 이를 낫게 해 주신 권능의 주님께서 나약했다는 말입니까? 불경한 그대들은 그분의 상처를 보고 그것이 하느님의 약함이라 여기는 것입니까? 그 육신의 상처는(참조, 마태 27,35; 마르 15,24, 루카 23,33; 요한 19,18.31-37) 약함이 아니라 강함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이의 생명이신 그분의 상처에서 모든 이에게 생명이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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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삶에 의미와 목적이 있는 환경 만들기
삶에서 의미나 목적의식과 같은 질적으로 긍정적인 면을 발전시키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그러한 긍정적인 면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과 환경에 우리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삶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삶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고, 우리 각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도 자명한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알아차린’ 듯싶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녀를 위하여 그가 의미와 목적을 ‘알아차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 자녀가 자기 삶의 목적을 발견하도록 돕기 위하여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자신이 자기 삶의 목적을 인식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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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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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 생긴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은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민수 15,37-41 참조)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접속되고 저희에게 당신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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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당신은 이미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제 마음이 항상 당신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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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합치>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
고구마 튀김을 할 때
튀김옷을 입은 고구마를 달구워진 기름에
넣는 순간 '뽀르르' 소리를 내며 기름 속으로
들어가고 잠수를 탔다가 위로 쏙 올라오면 노릇노릇 맛있는 고구마튀김으로 탄생합니다.
고구마가 기름에 들어가서도 생것이기를
고집하며 기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튀김이 되는 새 삶을 놓치고 맙니다.
손을 대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저분을 모시면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분 안으로 녹아들어가는
움직임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노릇노릇 불링불링,
바삭바삭 고구마 튀김 뜨거운 기름에
몸 던진 너를 보며 구원을 배운다.
내리는 은총과 의지의 노력이 합치될때
새 삶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
"어디에 손을 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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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아픔의 자리가
끝내 만남의
자리가 됩니다.
상처의 기쁨이
만남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상처보다
더 큰 주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나 자신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봉헌합니다.
봉헌은 주님과의
진실한 접촉입니다.
주님의 상처에서
나의 상처를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빛나게 하십니다.
서로의 상처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상처에서 길을
만납니다.
상처가 끝내
거룩한 믿음의
자리가 됩니다.
상처에서 시작되는
치유이며 믿음입니다.
어쩔 수 없는
제 아픔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상처에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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