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blog.naver.com/ksujin1977/223552771340
제6회 조태일문학상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 박석준
“산다고 마음먹어라. 내일 새벽에 수술을 할 거다.”
서 의사가 말하고 간 후,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아 침대 뒤 유리창으로 눈길을 주는데,
창틀에 파란색 표지의 작은 성경책이 놓여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까?
나는 왜 지금에야 이 책을 삶과 관련하여 생각하는가?
나는 얼마 살지도 않았으면서 삶이 저지른 죄가 있다.
병실에선 사람의 소리가 삶을 생각게 하는데’.
그 성경책을 집어 넘겨보는데
‘없어져버린 삶!’이라고 생각이 일어난다.
‘너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2, 3개월밖에 살 수 없어!
수술 성공할 확률은 1프로다.’
마른나무 가지들이 공간에 선을 그은 12월 말인데
살아 있다, 움직이는 말소리, 사람 발소리,
사람 소리를 담고 시공간이 흐른다.
사람의 소리는 사람의 형상을 공간에 그려낸다.
유리창을 본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나의 귀가 병실의 다른 침대들이 있어서 내가 20살임을,
보호자 간호원 환자의 말하는 소리를, 살아 있는 소리들을
그리고 내 어머니의 소리들을 뚜렷하게 감지한다.
어머니는 내가 50살인 12월 말에 입원했는데
다음 날부터 15개월 넘도록 의식이 없었다.
사망하기 하루 전에야 의식이 돌아와
“밥 거르지 말고 잘 먹어라. ”
말소리를 너무 약한 목소리로 마지막으로 전했다.
“산다고 마음 먹으세요. 내일 낮에 수술을 할 겁니다.”
순환기내과 장 의사가 말하고 간 후, 이상하게도
유리창이 출판하지도 않은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를 공간에 그려낸다.
‘심실중격에 구멍이 다시 생겨서 피가 새고
심장병과 동맥경화가 깊어요,
수술 성공할 확률은 1프롭니다.
밥 거르지 말고,’
말소리가 그 사람의 형상을 병실에 그려낸다,
말소리는 살아 있는 사람의 형상이다.
사람의 소리는 사람의 형상을 시간에 그려낸다.
63살 2020년 2월로 온 나는 삶이 저지른 죄가 있지만,
사람의 소리, 시이면 좋겠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1818년 출판한 철학서
---------
박석준 시인의 시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푸른사상)'가 '제6회 조태일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수상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는 한국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갖은 고통을 겪었던 한 개인의 가족사를 비롯해 음울한 도시의 풍경과 소시민의 삶이 형상화돼 있다. 시대적 수난 속에서 온몸에 새긴 삶의 감각과 절망의 노래에서 시인의 강인한 삶의 의지와 응전 의식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음울한 세계를 담는 음울한 가락, 한껏 늘어져 있는 거친 어조들이 이 시대의 정신을 촉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