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을 비운다는것에는 찬성을 하시는것 같아요.
마음을 비워야 우리가 올바로 배울수가 있단는 것을 잘 알고 계시죠.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욕망과 절망을 가지고 있지요. 그 외에도 수 많은 생각들 즉 신념과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들을 어떻게 비워야 할까요?
종교서적들을 보면 대체로 그러한 안좋은 마음을 멀리하거나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강화하라고 가르치죠.
한가지 궁금한것은 버린다고 버려집니까? 멀리한다고 멀어지나요? 제 경험상으로는 그렇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그냥 버려지는것이라면 불가에서 관조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겠죠.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것처럼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끊임없이 파도 칠겁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우리는 결심하고 마음을 통제하려 듭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것이 멈출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무리 좋다고 한들 그런것들로 꽉차있다면 그것은 비어있는것이 아니죠. 좋고 나쁘다는 판단이전에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되는것이 합리적이죠. 왜냐하면 내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알고보니 좋은게 아닐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진정으로 좋은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새로운것이 들어 올수가 없겠죠.
그래서 좋은것이 항상 좋은것이 아니죠.
예를들면요,
내 마음에 욕망이 있다면 우리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버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멀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욕망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욕망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욕망이 내 안에서 꽃을 피우도록 해야합니다.
욕망과 하나가 되어서 그것을 관찰하고 좋다 나쁘다의 판단이 개입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 알게 되겠죠. 어디서 오는지를 알게 된다면 나의 관심은 그곳으로 옮겨가겠죠.
그리고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것은 살아있는것이 아니라는것도 알게 되겠죠.
멋진 고급자동차를 보면 처음보는 순간 우리는 일종의 감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은 기억되죠.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감동을 반복적으로 음미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유한다면 나는 매우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것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 하게 됩니다. 그러한 일련의 행동이 욕망이 되는것이죠.
무엇인가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두뇌는 그것을 지속하려고 합니다. 두뇌의 기능은 기억과 반복입니다. 이러한 관찰속에서 어제의 감동을 지속하려는 나의 노력이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것을 알게 됩니다.
감동을 저장하고 지속하려는 두뇌의 자동화된 기능은 매우 기계적이고 위험한 것이죠.
그래서 티벳쪽의 스님들은 이러한 감동을 원천차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금욕이라는 말도 나오는것이고요.
많은 종교적 단체들은 금욕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하는것이고 매우 폭력적인 행동이죠.
수많은 감동이 나쁜것일까요? 아니면 그러한 어제의 감동을 기억하고 오늘도 반복하려는 두뇌의 시스템이 나쁜것일까요? 아름다운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고 반복하는것은 또한 습관적인 두뇌의 기능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악하거나 나쁘다고나 할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이 있는 순간에 기억이 개입합니다. 저장하고 반복하려 들죠. 그러나 그것의 위험성을 우리가 직시한다면 기억의 개입을 차단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기억의 위험성을 알고 이를 차단하는 과정에는 매우 높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에너지를 어떻게 우리는 보존할 수있는것인가요? 우리는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종교인들이 기공이다 요가다 호흡이다 하는 등의 수련에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에너지가 필요하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것이 아니라면 매우 위험합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하지 않을께요. 아는것도 없고요. 다만 많은 에너지를 모으는것은 새로 만들어 내는것이 아니고 누수를 없애는것이 방법이라는 말씀만 드립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불가에서는 연기법에 의한 설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이름이고 실제는 이러한 과정이죠. 그러면 그것을 뭐라 이름붙이든 이름이 중요한 것이아니고 실제적인 이러한 관찰이 중요하죠. 연기법에 의해서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고 아무리 외우고 있다한들 그것이 무엇이겟습니까?
이런과정속에서 우리는 욕망이라는것이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겠죠. 이것이 마음을 비우는 방법입니다.
욕망을 버리는것이 아니고 욕망과 하나가 되는것입니다. 그곳에 욕망을 극복하는 열쇄가 있는것이죠.
문제에 대한 답은 정답지에 있는것이 아니고 바로 그 문제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저는 마음을 비우지 못했네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열심히들 토론 하시라
내가 낄 사이트는 아닌 듯 합니다
힌두 베단타 철학 알아 보시라
힌두를 힌두라 말 못하는이 많습니다
브라만과 아트만은 하나다.
불이일원론.
베껴왔음. 브라만은 뭐고 아트만은 뭡니까?
@올빼미 인간의 본질. 한마디로 진아라 하죠
브라만, 아트만 같은 의미 아닌가 합니다
쓰임새에 따라 선별해 쓰는 것 아닌가요
힌두철학은 저도 문외한입니다
@올빼미 부처님은 중도를 설하시죠
불일불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여성이나 남성이나 사람이죠
같아요
여성은 남성이 아니죠
달라요
그러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거는
같은지 다른지 고민하지 말라는겁니다
같은지 다른지는 양극단이죠
양극단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양극단을 설정하고 허욱적 거리지 말라
양극단은 망상
용수하고 힌두 베단타는
불이일원론을 설합니다
일원론이 아트만으로 귀결될겁니다
한번 검색해 보세요
올빼미님...기특도 하십니다...
글쓴 내용자체가 --- 올빼미님의 마음을 비워낸겁니다.
올빼미님의 응어리진마음이 펼쳐쳐서,,, 펼쳐져 글내용으로 나타났죠...
푸러져 저저어디쯤 볼수 있께 글 내용으로 나타났쯤. 저저어디쯤에 내마음 비워 내씀.
내마음을 비워내 저만치 펼쳐놓지않으면 어떻게 볼수 있을꺼요...
또한
펼친모냥 그대로에
몬진모르지만 그 우주원리공공이라는 놈이 곧이곧대로 드러나있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체득할거요
세상말장난...심하네.
말장난대로 열심히 비우고 다비우면
펼쳐진 내모습의 한계. 고 한계 자체가 공의 현현이겠쬬..이게 믿음의 길, 아라한의 길이 트이는것. 새로운길루루
무슨 말인지 암호해독중임.
소오강호님이 어떤분인지 알아야 쉬운데.
아무튼 좀만 기달리시오 . 내 생각좀 해보리다.
우주원리꽁꽁이라...... 흠흠...
씨앗을 뿌려야 열매가 맺듯이
씨앗이라는 조건이 성숙해야 열매를 맺듯이
마음을 비우려면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씨앗을 뿌려야 하는거고
마음을 비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는거고
마음을 비우는 씨앗이 성숙하면
마음을 비우는 조건이 성숙하면
마음이 비워지는 열매를 맺는 것 아닌가 합니다
마음을 비우려고 아둥바둥 해 보아야
이것 또한 집착이고. 업이고
조건이 성숙하면
저절로 비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만 보지말고
조건을 만드시라
힌두 희론에 좌충우돌 하지 마시길
그 씨앗과 조건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궁금합니다.
@올빼미 저도 잘 모릅니다
자꾸 아트만을 찾으시는 것 같아 댓글 쓴거고
아트만을 찾지 마시고
연기를 보시라 글적거린겁니다
인간의 씨앗은 목적 아닐까요
예를 들면
보람된 삶. 선한 삶을 결심했다 합시다
아트만은
자기통제가 가능하기에
결심하면 이루어진다고 보는 유형
연기는
무상하기에 변한다
즉. 결심 조차 무상하기에 변한다
만고의 진리
기부를 결심했다고 봅시다
이게 이루어집니까
유지되나요
기부를 흔들림 없이 행하고자 하려면
통장 자동 이체 조치를 만들면 됩니다
기부 조건을 만들라
결심에 그치지 말고
조건을 만들라
누누이 강조하신겁니다
연기로
엉뚱한 답변이면 죄송
근본적인거는 묻지 마시고
저는 그런 것 모릅니
@창발 흠 저는 힌두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거든요. 좀 오해하신듯 합니다. ^^
@올빼미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욕구가 있다.
‘식욕, 성욕, 수면욕’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세 가지는 기본적인 욕구이며 본능이다.
부처님은 이 세 가지의 욕구만 잘 다스린다면 모든 사람은 해탈의 길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 만큼 이 세 가지 욕구는 인간의 마음으로서는 다스리기 힘든 것이다. 부처님은 그래서 중도(中道)를 취했던 것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식욕, 성욕, 수면욕도 적당한 중도를 취한다면 생활의 활력소가 될 것이다.
@창발 불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연기를 알고, 중도 실천
버리는게 아니라 버려지는 겁니다
@창발 중도는 한마디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글쓴이는
싸워서 이기는 것을 물으니 답이 안나오는겁니다
희론 힌두 토론 밖에 안되요
이게시판에 어울리지도 않고
@창발 싸워서 이기는 것을 구하는거는
그 또한 업이되는거고
힌두 잡소리는
또하나의 할레루야
@창발 힌두 잡소리는 또하나의 할레루야라?
할레루야가 무슨뜻인가요?
범아일여 梵我一如 :브라만과 나는 하나이다.
凡我一如 :평범(상식)과 나는 하나이다.
인도의 4성계급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보았을 때
브라만은 선택된자 선택된 진리로 보면
밑에 것은
보통사람 일반상식
기득권을 쥔자는 위를
흙수저는 아래를 선택하겠죠.
위는 우파니샤드(힌두)의 진리이고
아래는 본인이 만든 말이지만
싣달타가 내세운 무아론에 근접하지요
이양반은 태자로 태어나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해도
후인이 받아드리는 입장이고
본인은 흙수저라 뼈를 깎는 아픔으로
얻어진 야기를해도 경험자 외는
헛소리로 치부하지요.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 같아요.
유행(붐)분위기(무드)를 타는 것이
세상사
마음을 비우는법이라?
마음을 비우는 법은?
모든잘잘못을 용서하고
개념[槪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