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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대열동기생 8순 마지 개인 인생사의 회고 글 모집(제안)
대열 동기생 여러분!
우리는 오는 2027년 동기생 평균연령으로 8순(八旬) 맞이합니다. 요즘 많은 이들이 회고록을 남기고 있고, 그 회고록 출간의 적정한 계기가 대체로 80세가 되는 해로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이미 회고록을 내신 분들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방대한 회고록은 아니더라도 80 인생에서 남기고 싶은 적은 이야기 하나라도 남기는 것이 보람될 것입니다, 그리고 동기생들과 어깨동무해 그런 기회를 가지면 엄두와 용기도 날 것입니다,
마침 우리는 지난 2021년 육사입교 54년, 임관 50년을 맞아 동기생 전체 대열의 회고록을 낸 바 있으며, 이때 30여 명의 동기생이 군문과 공직에서의 역사 속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회고로 올린 바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뜻은 있었지만 시간과 자료가 부족해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을 금치 못했던 동기생들이 있었기에, 이번 8순을 맞으면서 다시 기회를 드리면서 아울러 전 동기생들이 참여하는 회고문의 문집을 마련해 보겠다는 생각에서 이 제안을 올립니다.
작성해서 대열역사기록 편집장인 김명수 저에게 보내주시는 기한은 지금부터 2027년 전반기까지의 넉넉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불편한 현실이지만, 매년 이승을 떠나는 동기생들이 늘어나고 있어, 되는 대로 작성해 제게 보내 주시면, 일단 즉시 대열 카페 '대열역사자료실'에 올려서 모든 동기생들이 함께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2027년 회고집 출간 시에는 본인이 유고(有故)의 상황이더라도 회고록에는 유작으로라도 올려 남길 생각입니다. 넉넉한 시간을 두는 것이니 모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고의 글은 대열 회고록에서처럼 군문이나 공직에서의 것처럼 공적인 것으로 제한하지 않고, 이를 포함해 되도록 개인의 취향이나 가족과의 일상 등 자유로운 소재의 사적인 글을 담는 것으로 할 생각입니다. 분량은 한글 워딩 12포인트 기준 5매 내외로 할 것이며 넘치는 부분은 편집과정에서 필자와 상의해 적절히 조절할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회고 글 작성을 돕기 위해 저 자신의 회고 글을 아래에 예문으로 올리니 참고 바랍니다.
2023년 9월7일
역사편집장 김명수
구경꾼 내 인생, 군문에서도
동기생들과의 등산이나 명승지관광에서 국립공원 매표소 앞에 서면 난감해져 행렬의 뒤로 숨어 쭈밋거린다. “어~! 모두 유공자증 다 가져왔지요? 앞으로!” 동호회장이나 인솔 대표의 그 말에 나오는 반응이다.
임관 이후 동기생들은 월남전 참전 12명은 물론, 웬만하면 크든 작든 훈·포장을 받았고, 행정부처로 진출했어도 30년 이상 공직에서 국가 공공시설의 무료입장이나 할인 혜택을 받는 국가유공자 자격을 갖추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나는 없어~!” 하면 “아니~왜 유공자증이 없어?” 당연한 동기생들의 물음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뿐이다.11년의 군복무와 이어진 기관에서의 공직생활 16년을 통해, 나눠 먹기식이 아닌 진짜 제 공을 인정받는 표창을 여러 개 받긴 했지만, 더 상급의 훈·포장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직급에 오르기 직전에 정치적 숙청을 당해버린 탓이다. 무에 남 탓일까 만은.
동기생들과 군 골프장을 가도 군인연금수혜자격 20년을 채우지 못해, 그린피의 차이가 크다. 내 해당만 지불하면 그만이지만, 정서적으로 일행에 민폐가 되기에 마음이 편치 않다.
돌아보니 내 인생 전체가 이 모양이다. 이거 저거 달려든 게 게 많았지만, 끝까지 가지 못한 탓에 한 분야에서의 진짜 전문가 수준으로 오르지 못한 꼴이다. 성년 반세기 동안 역사적 주요 사변(事變)에서 주역이 아닌 구경꾼으로만 살았다는 자성(自省)에도 늘 빠져있다.
육사출신 군인이면, 조국수호의 전장에서 운명을 다하는 게 최고의 영예로운 삶을 산 것이며, 혹 장군이 되면 영광일 것이고, 대령으로 만기 전역을 해도 군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자랑스러운 삶일 텐데 그렇지 못했다.
은퇴 이후 어느 날, 광화문 역 지하차도에서 mbc라디오에서 나왔다는 여성 리포터의 거리 인터뷰에 응하며, 젊은이들에게 들려줄 어르신이 생각하는 인생을 한마디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느냐는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으며, 나도 놀랄 만큼 답변이 총알처럼 튀어나온 적이 있다.
“인생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이어 보충해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앞서, 구경꾼에 머물고 말았다고 자평하는 내 인생도 결국 매순간 내 선택의 결과이니 누구를 원망할 일은 결코 아니다.
지금도 아쉬워하는 월남전 참전의 기회를 스스로 버렸던 선택부터, 자랑스러웠어야 할 내 참 군인의 길 전반의 리듬을 깬 시초일 것이다. 1971년 소대장 시절 월남전파병에 지원하려다, 먼저 월남전에 다녀오신 13기 선배 대대장님의 만류와 호의로, 소위 계급에 일찌감치 대대작전과에 훈련관으로 비파(비공식파견)되는 길과 바꿨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보병으로서 전방에서 소대장 대대작전장교 소총중대장, 후방에서 보수교육, 다시 전방에서 연대작전참모, 보병대대장 등의 경력을 거치는 것이 장차 장군으로 가는 길이란 것이 공식 같은 것이었으니, 감지덕지 그에 매일만 했고, 중위진급 이후 후방교육으로 떠난 전임 대위 작전장교(당시는 통상 훈련관이라 호칭)의 뒤를 이었고, FEBA에서 GOP로 부대이동을 하면서는 공석인 대대정보장교(정보관)까지 겸직하면서, 지금도 보람 있었다고 기억되는 많은 임무들을 수행했었다.
지금은 평화의 댐이 세워진 북한강의 더 북쪽 강상 남방한계선까지 겨울철 결빙된 북한강을 대대장님과 함께 스케이트를 타고 정찰에 나서, 어름두께 40cm가 넘을 경우 가능한 적의 경전차 강습을 막을 방벽대책을 강구했었다.
유사시를 대비해 동계에는 결빙강상에 철조망과 파일 등 장벽 설치는 물론, 대전차 방벽이나 대화구처럼 결빙을 일거에 폭파해 내려앉힐 폭파장치를 구상하는 상식적인 작전계획이었지만, 함정을 만들며 잘라낸 얼음으로 방벽을 쌓고, 준비와 실행과정을 내 특기인 그림으로 일일이 스케치해 기록으로 남긴 것은 기발한 것으로 평가됐었다.
대대 ATT 수행과 GOP로의 부대이동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 한 치의 오차도 없게 하면서, 특히 정확한 행군장경 계산 하의 행군계획은 1분도 착오 없이 대대 전체가 목표지에 도달하게 해, 일품으로 평가받았다.
방책선 전방 비무장지대에 발생한, 적의 소행인지 여부가 불명확한 원인미상 폭발에 대해, 육본 상황실과 실시간으로 교신하는 가운데, 정보관으로서 직접 들어가 오래돼 낡은 부비트랩의 동물에 의한 폭발이었음을 확인해 보고해 상황을 안도 속에 종료케 했지만, 선배 수색중대장님으로부터 무모했었다는 후배사랑의 질책을 받기도 했었다.
FEBA로 철수한 이후 퇴역을 3개월 앞둬 손 놓고 있던 6.25참전 고참 후임 대대장님을 대신해, 5박6일 동안 한숨도 못자고 대대ATT를 치르며 포병, 공병, 전차 등과의 제병합동작전을 지휘해 가장 정교한 계획과 실행이 요구된다는 도하철수작전까지를 성공적으로 마쳤던 소중한 경험도 가졌다.
오래 방치된 대대작계를 검토하면서 허점투성이로 문제가 많음을 발견하고 스스로 입체적으로 전면 수정하느라 군단작계까지 훑어 공부했고, 역습계획에 망라된 춘천-홍천까지의 축차적 저지진지들까지 현장 답사해 계곡 아래로 유실된 벙커와 장벽들을 되찾으며 총체적으로 문제 삼아 보강했었다.
대대 정보작전장교 이후의 보직은 연대 인사장교였지만, 연대장 특명으로 GOP 직후방 백암산 후사면의 연대 전방작전지휘소(TCP)의 상황장교를 맡아야 했고, 역시 연대장 명령으로 예하대대의 ATT기간 중 공석인 인사장교 대역으로 해당부문 브리핑도 깔끔하게 맡아 해주었었다.
사단과 군단에서 각각 실시하는 음어경연대회에 대대 및 연대의 장교대표로 출전해, 지금은 기억이 애매한 분당 200자인지 얼마인지 수준으로서 통신병들 못지않은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었다.
이를 테면, 제 구실은 한 셈이지만 실패한 전력도 많았다. 소대장은 재안산 1천m 능선에 벙커 하나를 짓고 내려와 그만 두고, 선배 대대장님이 대대장 화기인 81mm 박격포를 맡으라고 해, 6.25때부터 써서 포구가 확장돼 명중률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소대원들과 힘을 합해 정확한 제원산출과 확고한 포판다지기 방열에 집중하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 명중률을 한껏 높여 놓았더니, 정작 군단 및 사단의 VIP들도 참관하는 전방 화집점 시범사격 때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망하고 말았다.
나를 믿었던 대대장님을 실망시켜드려 대대장님이 떠나는 날까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나 역시 통솔은 자애롭게, 훈련은 엄정하고 빡세게 대했던 부하들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던 것도 그때부터다.
훈련관 시절 원주에서 나온 미군과의 공지합동작전에 통신병만 데리고 나갔다가 철수하면서, 통신병이 음어를 미군 지프차 보닛에 두고 와, 1군사령부에서 회수해 연락해 오는 바람에 음어방치의 책임을 지고 견책을 받게 됐다.
평소 근무성적을 감안한 연대장님과 보안대에서도 나를 구해줄 배려로 군단장표창을 품신해 내려 받게 해주었지만, 이미 내 경력에는 상처가 나고 말았다는 생각에 낙심했다. 역시 나는 부하단속 못하는 리더라 자책하며 향후 지휘관으로서의 전도가 신통치 못할 것이란 못난 생각과 함께.
짱짱한 대대정보작전장교와 연대TCP상황장교 경력을 가졌기에 3년 만에 전방을 떠나 받은 보수교육 OAC과정에서는 전술학 정진에 대한 기대에 부풀게 했고 실제 과정도 흥미롭기 짝이 없었다.
교육과정 시험성적이 좋았다. 5월의 장성지역대상 대대방어와 6월의 CPX실습과정 참모판단작성 결과는 우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적은 늘 선두거나 상위1%대였다. 23기 모 선배를 밀어주자는 선후배 기수들의 합의 압력(?)을 받아들여 성적 드라이브를 둔화시킨 패착은, 엉뚱하게 공부벌레 타사 출신에 수석의 자리를 내어주는 결과를 내고 말아, 한동안 억울했다.
박정희대통령의 1,3,5공수여단과 같은 강한 특전여단을 추가하라는 지시에 따라 7.9공수가 창설되면서, 중대장 배출 OAC과정교육생 중 생도시절 첫 공수훈련을 받은 동기생 다수가 창설공수여단 중대장으로 배정되었다.
그리 전술학 정진에 매진했고, 그런 연마를 바탕으로 초임지 화천으로 돌아가서 중대장을 멋지게 해 보려던 꿈은 사라졌다.
그러나 끌려간 공수부대에서 진짜 군인의 매력에 빠졌었다. 창설 7공수특전여단에 배치돼, 1공수특전여단 영내의 7여단 인사참모부에서 창설준비를 맡았다. 차출 병력들을 점검해 금마의 주둔지로 내려 보내며, 태권도복 조달과 비공수 신임 여단장의 특전사 공교육장 공수기본훈련교육도 챙겼다.
중대장 발령 이후는 여단 특수전 정보작전실의 안팎을 구상하고 신설했으며, 내 아이디어대로 부대마크 천마(天馬)의 도안과 의미도 창안했다.
여단자체 특수전교육대교관, 참모총장방문 준비 태권도 시범단 지휘, 75년 한미연합훈련 FALL EAGLE작전의 단독행동 심판관, 산악은거 유격작전, 이리시내 깡패소탕 등 다이나믹한 나날을 힘차게 보낼 수 있었다.
1976년 초 특전사 특수전교육대 특수전교관으로 전보된 후는 핵심과목들인 침투, 심리전, 독도법 교관을 하며, 특수전상황실 외국 VIP방문 시 영어브리핑도 맡았고, 교관들 자체연구 분야로 일본자위대의 부활 연구도 자임했다.
모로코 특수전 교관으로 차출돼 파견될 준비하던 가운데(그 파견은 결국 유보됐지만), 모종의 임무수행이 시사되는 정보기관으로 차출되고 말았다.
그곳의 육사선배님의 전화로 제의를 받고, 무슨 소리냐며 관심 없다고 응답한 정보기관 교육 차출은, 이후 반 강제적으로 추진되었다.
물론 최종 선택은 내게 있어서, 보안대출신 교육대장님께 보고 후 받은 조언은 “특수기관은 가지 않는 게 좋다.”란 것이어서 거듭 사양했지만 어느 날 모처로 시험을 보라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당시 기관의 피치 못할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이고, 나도 거기에 따랐다.
앞서 말한 대로 개인적으로는 여러 능력을 발휘하며 모범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부하와 함께 하는 대외경쟁에선 신통치 못해, 리더로서 너그럽기만 하고 단호하지 못해 마땅치 않은 것으로 자평한 나를 되돌아보며 그 길로 나섰다.
전후 사정은 복잡한 것이라 더 이상은 생략한다. 제시된 교육과정이 매력적이었다. 첩보영화의 주인공을 만드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MI-6가 배경인 <영화 007>의 제임스본드처럼 군인들도 파견돼 근무하는 겸직제도였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원대 복귀할 수 도 있으려니 해서기도 했다.
한편 이 기관의 창설초기 주역들이, 육사2기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8기 우등생들이 주축을 이뤘던 육군본부 정보국 출신들이었다는 점에서 군인의 겸직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정보기관에서는 남북 간 휴전상황인 평시에도 국내외 및 북한까지의 등지에서 북한노동당정권의 남한적화간접침략 저지를 위한, 대적(對敵) 정보전 등 비정규전 분야에서의 안보활동을 치열하게 실전(實戰) 전개함으로써, 현역 못지않은 국가안보기여 공헌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특수전교육대에서 자위대를 연구했기에 일본파견을 희망했지만 해당 조직이 감편되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심리전교관이었음이 감안됐던지 이후 퇴직 시까지 대북심리전에 종사했다. 군사심리전을 넘는 국가심리전이 중추였지만, 휴전선심리전은 국방부와 협력하는 관계여서 군 복무를 떠난 이후의 향수를 달랠 수도 있었다.
1982년 10.26사건의 여파로 이 기관 현역들은 모두 원복하거나 예편을 하게 됐다. 신분은 육군소령이지만 군을 떠난 지 5년의 공백을 따라잡기 힘들다는 타산과 이 기관에서의 임무가 더 전략적이란 생각에서 원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이유 있는 선택이 이후 나를 공허하게 만든 모양이다. 수많은 꿈속에서 늘 원대 복귀해 멋진 지휘관이나 참모생활을 하는 나를 보게 된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 ‘특혜 받은 육사출신’으로 지목돼 정치적 숙청을 당한 이후 억울해서 꾸던 아픔의 꿈보다 더 진하고 자주 지속돼 오고 있다.
그 꿈은 요즘도 지속되고 있다. 동기생들과 국공립 유원지를 가거나 군 골프장을 가게 되는 일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니 그럴 것인가? 아니다. 스스로 군문을 떠난 것이 후회되지만, 1982년 예편이후 정보기관에 근무하면서도 내내 나는 군인이라 생각했지. 민간공무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 또한 국가중앙정보기관에서 국익을 위한 중요 활동전선에서 충성을 다해 왔었지만, 전역 후 20여 년 동안 군문의 동기생들이 전후방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는 구경꾼이었으면서도 말이다.
이 글은 죽기 전에 남길 내 인생 전체의 이야기 <마땅찮은 구경꾼 내 인생>의 한 부분 군문에 해당하는 글이기도 하다. §§
2023년 9월7일
예비역 소령
一鼓 金明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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