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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7.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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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1코린5,1-8)
형제 여러분, 1 여러분 가운데에서 불륜이 저질러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불륜입니다.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우쭐거립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슬퍼하며,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에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나는 비록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러한 짓을 한 자에게 벌써 판결을 내렸습니다.
4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함께 모일 때,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6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7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복음<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9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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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7.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9.06 22:15
2026년 9월 7일 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6,6-11
회당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그라든 손은 펴지지 않는 손,
무언가를 주지도 받지도, 돌보지도 못하는 손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성경을 늘 ‘속뜻’으로 읽었는데,
이 오그라든 손을 ‘굳어 버린 영혼’의 표징으로 보았습니다.
사랑을 주지도 못하고, 돌봄을 받지도 못하는,
잔뜩 움츠러든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고발하겠다’며 지켜봅니다.
사람이 회복되는 것보다
‘규정이 지켜지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굳은 논리를 정면으로 되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안식일은 본디 ‘쉼과 돌봄과 회복’의 날입니다.
그날 사람을 살리고 돌보는 것보다 더 합당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던 그 손을,
사람은 ‘말씀에 기대어’ 뻗습니다.
스스로는 펼 수 없던 손을 믿음으로 내밀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습니다.’
돌봄이란 바로 이렇게, ‘펼 수 없던 손을 그래도 뻗어’
누군가를 향해 내미는 그 한 걸음에서 시작됩니다.
돌봄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규정·효율·바쁨’ 뒤에서
종종 눈앞의 사람을 못 본 척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오그라든 손보다 규정을 앞세웠듯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은 늘 ‘한 사람’에게 먼저 가 닿습니다.
돌봄이란 ‘사람을 규정 앞에 두지 않고,
규정보다 사람을 먼저 살리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돌봄은 나 자신에게도 필요합니다.
오그라든 내 마음에도 주님께서 “손을 뻗어라” 하십니다.
반대로 바리사이들은 끝내 손을 펴지 않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화가 잔뜩 나서’ 더 굳어 버립니다.
펴지 않은 손, 돌보지 않는 마음은
회복 대신 완고함 속에 갇힙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손을 펴서 돌보고 회복될 것인가, 굳어져 갇힐 것인가.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손과 마음은 지금 ‘오그라든 채’ 굳어 있지 않은가?
나는 ‘규정·바쁨’ 뒤에서 눈앞의 사람을 못 본 척하지 않는가?
나는 ‘손을 뻗어라’ 하시는 말씀에 손을 펼 용기가 있는가?
나는 지친 ‘나 자신’에게도 돌봄의 손을 내미는가?
주님,
오그라든 제 손과 마음을 펴 주소서.
‘손을 뻗어라’ 하시는 말씀에 돌봄의 손을 내밀게 하시고,
규정보다 사람을 먼저 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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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7.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9.06. 21:11
신앙과 의심의 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저는 의심을 품는 법을 배우지 못한 "참된 신앙인"들이 걱정스럽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의심이 없는 신앙...
신앙과 의심의 춤
2026년 9월 6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성숙한 신앙의 삶 안에서 의심이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성찰합니다:
기본적인 종교의 믿음은 우주 안에 깃든 일관성과 목적, 자비와 방향성에 대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서구에서 형성된 신앙의 개념은, 모든 사물 안에 하느님께서 내재하시며 이 모든 것이 선한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는 평온하고 희망 어린 신뢰라기보다는, 특정한 사상적 믿음의 진리를 이성적으로 동의하는 데에 더 치우쳐 있었습니다.
저는 의심이나 불안을 전혀 품지 못하는 "참된 신앙인"들이 걱정스럽습니다.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는 이들은, 마치 햄릿의 왕비처럼 ‘너무도 강하게 항변하며’ 오히려 애써 자신을 드러내려는 듯 보입니다. 삶의 온전한 신비를 붙드는 것은 언제나 그 반쪽, 곧 죽음과 의심이라는 동일한 신비를 함께 견디는 일입니다. 무엇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언제나 그 안에 여전히 감추어져 있고 알 수 없는 부분을 함께 품는 것입니다. [1]
사실 의심과 신앙은 서로 맞물린 개념입니다. 큰 신앙을 지닌 이들은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깊은 의심의 시간을 겪곤 합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도 이러한 의심을 수십 년 동안 경험하셨음이 선종 후에 밝혀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신뢰하던 영적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어둠이 너무 짙어 제 마음으로도, 제 이성으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공허합니다. 제 안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2] 이 고백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준 사실 자체가, 우리가 성경적 신앙의 본질을 얼마나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확신에서 의심으로, 그리고 의심을 거쳐 삶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길은 하느님과의 만남뿐 아니라 모든 만남, 지적 깨달음, 인간 관계 속에서도 필요한 여정입니다. 인간적 신앙과 종교적 신앙은 그 대상이나 목적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을 "사상"이나 '교리'로 삼았을 때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교리나 도덕적 의견이 참되다는 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이신 하느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며 심지어 우리 편에 서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3]
젊은 날의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의식의 차원에서 대부분의 불안을 지워버리기에, 많은 이들이 그러한 '통제의 탑' 안에 머물고 싶어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온전함의 모든 부분을 품을 만큼 충분한 경험을 쌓지 못했습니다. 인생 전반기의 순진함은 일종의 설렘과 기쁨을 담고 있어, 앞에 더 깊고 검증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쉽게 놓아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세월에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인생 후반기에 들어선 이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어른들이 없다면 사회는 사회적으로나 영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대부분의 의심을 지워버리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생존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관은 참된 것이 아니며, 지혜도 아닙니다. 지혜는 오히려 신비와 의심, 그리고 알 수 없음과 함께 기쁘게 살아가며, 바로 그 삶 안에서 역설적으로 그 신비를 어느 정도 풀어내는 은총을 경험합니다. [4]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제 신앙 여정 속에서 "매일 묵상"을 발견하게 된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또한 브라이언 맥라렌 선생님의 훌륭한 저서들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 그 책들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제 의심과 질문들이 결코 이단이 아니며, 제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위안이 됩니다.
—Katy B.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Falling Upward: A Spirituality for the Two Halves of Life (Jossey-Bass, 2024), 70–71.
[2] Mother Teresa, Come Be My Light: The Private Writings of the Saint of Calcutta, ed. Brian Kolodiejchuk (Doubleday, 2007), 210.
[3]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Naked Now: Learning to See as the Mystics See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2009), 117.
[4] Rohr, Falling Upward, 7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CAC Environment, 2019-10-09, Photograph, CAC campus, Albuquerque NM. "되어 가는 여정" 위에서 짐을 내려놓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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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7.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07 04:20
- 가까운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연출자
“일어나 가운데로 서라.”
지난 토요일에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자중자애하는 사람이 진정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는 걸 봤습니다.
진정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지 아는 사람이요,
자기가 없으면 사실 다른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어 자기만 소중하고 존귀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게 되면
그런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 모르지만 참 자존감의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참 자존감의 사람은 자기가 무엇보다 소중하고 우주의 중심임을 아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중하고 귀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존귀함이고 품위입니다.
반대로 천박하고 교만하면 할수록 남을 깔보고 깔아뭉개는데
그것은 진정한 존귀함과 품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고
그래서 자신이든지 남이든지 존중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손님이 오면 손님을 귀빈으로 환대하는데
정작 가까운 사람은 쓰레기처럼 여기며 폭력적으로 대한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대단한 어리석음이고 불행입니다.
결국 자기는 쓰레기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고,
남도 불행하게 만들고 자기도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것 때문에
지난 토요일에 이어 오늘도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와 실랑이를 벌이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그렇게 밀어내고 깔아뭉갠 손 병신을
사람들 한가운데로 세우심으로써 주인공으로 만드십니다.
안식일의 노예였던 사람의 아들들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만드신 주님께서
이젠 늘 변두리에 있고 조역만 하던 사람을 파티의 주인공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더 엄청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을 뿐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심으로 그 이상으로 우리를 신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미사 성찬 예절 중에 물과 포도주를 섞으며 “이 술과 물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바칠 때마다 주님의 이 비하적 사랑에 프란치스코처럼 감격하고 감탄합니다.
그러면서 이토록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시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먼저 존귀한 사람으로 내가 살고 이웃을 존귀한 사람으로 대해야겠다는
마음속 다짐을 하곤 하는데 오늘도 그렇게 다짐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왕비로 모심으로써 자기가 왕이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이를 가운데 세우신 것처럼 우리도
가까운 사람을 주인공이 되게 하는 연출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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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7.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9.07. 05:07
우리 안에 있는 사랑할 힘을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참된 자유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자유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지만, 세상에서 말하고 경험하는 자유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자유, 즉 사랑하는 자유, 다른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사랑의 자유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를 움직이고 생명을 충만하게 회복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일어나 가운데 서라!"(루카 6,8)는 말씀에는 사랑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에게서 나오는 새롭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손을 뻗어라!"(루카 6,10) 하신 명령은 기적을 일으켜, 죽어 있던 것을 다시 강건하게 하시며 생명을 회복시킵니다. "구원한다"는 것은 "죽음에서 건져낸다"는 뜻이며, 또한 "치유한다"는 뜻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치유하심으로써, 그 안에 죽어 있던 것을 되살리십니다.
무엇이 죽어 있었던 걸까요?
손은 우리에게 주어진 행동의 힘을 상징하는데, 루카 복음 저자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그 사람의 마비된 손이 오른손이었다고 전합니다. 오른손은 근본적으로 바른 행위를 할 힘, 즉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사랑할 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 암브로시오(340–397)는 예수님께서 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 즉 "손을 뻗어라(내밀어라)!"에 깊은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자주 손을 뻗으십시오. 가난한 이가 청할 때 뻗으십시오. 이웃을 도울 때, 과부를 보호할 때, 부당한 모욕을 당하는 이를 구할 때 손을 뻗으십시오. 또한 하느님께 당신의 죄를 고백할 때 손을 뻗으십시오." (1열왕 13,4-5 참조)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그 사람의 마비된 손은 곧 사랑할 힘을 잃은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힘을 회복시켜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반대했습니다. 안식일에 치유하심으로써 그들의 율법적 권위가 위협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다른 이들이 무력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권력은 언제나 타인을 지배하거나 억누르는 힘입니다. 그것은 자리와 특권을 다투는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사랑을 막아버리는 공격적인 힘입니다.
이러한 권력은 복음으로 회심하지 않은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사회 안에도,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참된 권력의 기준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지, 타인을 위한 것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위에 권위가 있다고 느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내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동정심을 품으시고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치유하고 용서하시며 다시 살리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해 주신 모든 존재에게, 특히 우리 인간에게 그 사랑할 힘을 본질적으로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이 사랑의 힘을 발휘될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더 큰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달아갈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운 존재요 참으로 소중하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임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자신의 저서 [보편적 그리스도](The Universal Christ)에서 이렇게 강조하여 말합니다. "프란치스칸 신학에서 진리는 언제나 사랑을 위한 것이며, 진리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니다."라고요. 그러니 사랑이 결여된 진리는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의미에서 토머스 머튼의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창조된 우리]라는 묵상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고 단순하게 사랑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지 않은 데도 사랑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억지로 그런 어떤 환상을 믿도록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우리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엄청난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물론 솔직히 말해 얼마나 많은 면에서 사랑스럽지 못한지를 인식해야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인 현실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국은 참으로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임을 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 과제를 이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순수하고 겸손한 삶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빨리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아닌 바와 우리인 바를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바가 실제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겉만 번지르르한 값싼 옷과 같은 외적인 가짜 자신을 벗어 던져버려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하는데, 이것은 그 진정한 자신이 갖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모든 부족함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갖고 있는 아주 거대하고도 매우 단순한 품위 안에서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창조되었고, 본래부터 우리에게는 하느님 당신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이기심 없는 그런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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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7.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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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 2026.08.28. 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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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 2026.08.29. 03:3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12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 2026.08.30. 05:42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42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2026.09.02. 06:35 )
http://www.ofmkorea.org/ofmkfb/584513
가난과 기도 7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 2026.09.04. 19:58 )
http://www.ofmkorea.org/ofmkfb/58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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