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로 익은 우애
주 영혜
가을이 깊어지는 요즘, 나뭇잎도 알록달록한 옷을 입으며 가을 채비를 하는 듯하다. 빨갛고 튼실한 열매도 맺었다. 그런데 어떤 가지는 큰 가지에 태양의 손길을 빼앗긴 탓인지 부실한 열매를 힘겹게 매달고 있다. 안타깝게도 태풍에 꺾여 시들어버려 생을 다한 가지도 있다. 우리네 형제자매들의 삶도 이와 같을게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운명과 능력에 따라 각자 다른 모양새로 삶을 거느려 나간다. 또 서로의 서사를 엮어가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여느 가정과 달리 남매들이 다 함께 모여 살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맏이로서의 소임을 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빠의 직장과 언니들의 교육을 위해 언니들과는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주말에 오실 때 아버지는 시골 사람들은 구경도 못해 본 새로운 것들을 많이 사오셨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할 쯤 가족들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가 보물처럼 남아있는데 그곳에도 언니들 목소리는 담겨있지 않다. 그만큼 서로의 어린 시절을 공유하지 못했다. 난 막내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인정이 많다고 조부모님과 부모님으로부터 귀염을 듬뿍 받았다. 바로 위 셋째 언니는 여동생한테 사랑을 빼앗겼다고 여겨서인지 나를 품어주기 보다는 샘을 부릴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 언니는 얼마 후 도회지로 전학을 갔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남동생과 보냈다. 남동생은 내가 다니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난 눈 녹은 진흙 길을 가방을 들고 동생까지 업고서 하교를 했다. 이건 동생이 창피하다고 해 몇 번밖에 못 해 보았지만 그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너무 추운 날에는 동생 교실로 찾아갔다. 내 목도리를 여자 것이라고 싫다는 동생한테 억지로 건네주고는 마냥 뿌듯해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하나밖에 없는 우산을 갖다주고 난 친구들과 비를 흠뻑 맞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땐 동생을 위해서라면 창꽃(진달래꽃) 뒤에 숨어 어린애 간을 빼먹는다는 문둥병자한테 내가 동생 대신 잡혀가 줄 수도 있다고 여겼던 깜찍한 용기도 있었다. 남동생도 내 마음을 아는지 내가 넘어져서 무릎에서 피가 날 때면 자신이 아픈 양 엉엉 울어줬고 내 껌딱지였다.
나도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도회지로 전학을 왔다. 어여쁜 둘째 언니랑 같은 방을 써서 좋았다. 언니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다. 친척이 언니를 백합처럼 곱다고 말씀하신 날부터 나에게 둘째 언니는 백합 언니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20대 초반일 때 백합 닮은 우리 언니는 교통사고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슬픔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캔퍼스 벤치에 친구들을 앉혀놓고는 더 밝게 웃고 떠들어댔다. 그즈음 길에서 언니와 비슷한 사람을 봤다. 정신없이 달려가서 보니 아니었다. 난 창피한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흐느껴 울었다. 언니는 “하루에 한 번은 꼭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할 시간을 가져라.”라는 말을 하곤 했었다. 국어 선생님이라 그런지 멋진 사람이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도 자주 말해 주었다. 학력고사 끝나고 교회를 안다니던 내가 언니를 따라 기도원에 갔었다. 그곳에서 금식 기도 이틀을 하고 보리밥이 눈에 무척이나 아른거렸던 추억도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아빠의 돌아가심, 스무 살 초반 꿈 많던 시기에 언니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일, 두 번의 충격은 그 당시 나로 하여금 세상 욕심을 내려놓는 염세적 사고를 갖게 했다. 그 당시 언니의 사랑 담긴 조언을 생활화했더라면 내 삶의 귀한 자양분이 돼 있었을 게다. 독서로 슬픔을 달랬더라면 지면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또 다른 높은 이상을 갖고 달릴 수 있게 인도했을지도 모르겠다. “해는 서산에 지고 쓸쓸한 바람만 부네∼∼” 언니는 사랑의 스잔나 OST를 자주 흥얼거렸다. 35년이상 지난 지금도 언니의 그리운 목소리가 귓전에 살아 맴도는 듯하다. 이 영화 주인공의 슬픈 운명처럼 자신도 일찍 떠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이 노래를 즐겨 부른 건 아닐까? 생각하니 내 몸 세포 하나하나까지 먹먹해진다. 세월에 떠밀려 자주 꺼내 보지 못해 미안하지만 내 가슴 속 안뜰에는 여전히 언니 닮은 백합꽃이 지지 않고 곱게 피어있다.
내 나이도 인생의 가을 문턱에 들어섰다. 지금은 큰언니와만 가까운 곳에 산다. 많은 나이 차로 어릴 적 쌓아진 정은 깊지 않았었다. 그런데 큰언니와 형부랑 가까이 살면서 수십 년 정을 나누다 보니 오랜 시간 달여 농축된 조청과도 같은 끈끈함이 생겼다. 아낌없이 챙겨주는 두 분은 존재 자체로도 든든하고 힘이 된다.
슬프지만, 설렘을 안고 내디뎠던 출발역보단 인생의 종착역이 더 가까운 우리 남매들이다. 어린 시절에는 나의 사랑이 남동생과 둘째 언니에게만 향해있었다. 그런데 주름살이 늘어날수록 우리 남매 모두에 대한 애틋함이 더해져 간다. 우리가 한날한시에 떠날 수는 없겠지만 둘째 언니처럼 너무 일찍 홀연히 떠나지는 않길 바라본다. 자식한테만큼 모두를 내어줄 수는 없지만 부족하면 채워주고, 넉넉하면 나눠 주려하는 남매지간이다.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서로에게 떠먹여 주기도 하며 함께 하고 싶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풀꽃처럼 기대고 의지하며 나이 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