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현현상瞑眩現像
박찬호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서인 줄 알았다
술을 끊은 이후부터 몸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그즈음
아파트 단지 내
귀뚜라미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귀뚜라미 소리가 없는 가을밤은
조용히 겨울을 재촉했다
어찌 된 일인지
술을 끊고 건강이 회복된 이후,
귀뚜라미 소리를 못 듣게 되었고
귀갓길 발걸음은 무겁고 힘이 들었다
명현현상瞑眩現像일거라 생각했다
내친김에 뜬금없이 담배도 끊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 없이, 조건 없이
몸은 확실히 더 좋아진 듯했다
혈압도 떨어지고 당뇨도 없어지고 혈색도 좋아지고
보이는 모든 것이 좋아졌다
한데
이상스레 가끔 가슴이 저려오기도 하고
환절기 독감 앓듯 머리가 아파오는 날이 잦았다
명현현상瞑眩現像일거라 생각했다
그렇다
일시적인 반응일거라 생각했다
건강이 호전되면서 겪는 좋은 신호라 생각했다
웃음이 줄어드는 것
좀 더 분노가 자주 이는 것
차츰 철학자가 되어가는 것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
전보다 더 많이 눈물이 나는 것
내 안에 미움이 점점 차오르는 것
특히,
너에 대해 무척이나 객관적이 되어서
냉철해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징후가 강할수록 효과는 높아진다고 했다
그리고 일시적인 반응이라고 했다
이제 잠시 후면 귀뚜라미 소리도 다시 들리고
귀갓길 흔들리는 발걸음도
사뿐사뿐해질 거라 믿었다
금방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말 일시적인 반응이라 했다
금방 나을 거라 했다
참으로 가까운 인천 시립 승화원
앞쪽으로 훤한 강물이 보여서 좋다며
여덟 기基짜리 납골묘를 계약하고 온 그날은
딱히 한 일도 없었으나 피곤하다며
술 한잔을 안 드신 날이었다
그 가을밤 평소보다 밤은 더 스산했고
낡은 창문 틈 사이 가을 밤바람은
차가운 휘파람이 되어 들려왔다
그 밤, 밤새 신음에 가까운 잠꼬대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아마도 교교皎皎히 흐르는 남한강 줄기를 따라
그 납골묘 깊은 안쪽 너머 어딘가를 다녀왔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앞쪽으로 강물이 장대하게 흐르는
그 땅이 싫다고 하셨다.
언젠가 때가 되어 형식처럼 찾아오더라도
자식들이 오가기에는 너무 불편하다 하셨다
자주 오기엔 너무 멀다 하셨다
죽은 후에나 벌어질,
아니, 벌어져도 별 의미 없는
그런 쓸쓸하고 우울한 걱정으로 또 며칠을 보냈다
빨리 죽게 제발 좀 도와달라는 고통을
유언처럼 남기고
원하는 대로 그 땅으로는 잠들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정말 엎어지면 코 닿을
시립 납골당 그 두 뼘 깊이에 안치 되었다
낮이면 밝은 햇살이 너무도 환한 그곳에
가족들과 가까워 덜 외로울 거라 믿었던 그곳에
뜬금없이 눈물이 나는 그날 밤의 기억
다음 주에는 꼭 찾아가야겠다는 약속을
벌써 일 년째 하고 있는
어느 가을밤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