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선 안될 사랑을…소춘풍(笑春風)의 순애보(殉愛譜)
-군왕(君王)과 천기(賤妓)의 숨은사랑
1. 성종(成宗)임금, 주요순 야걸주(晝堯舜夜桀紂)
성종(재위 1469∼1494)은 이조 제9대 임금으로 새로운 법도를 정립하면서 새로운 문 물을 일으킨 조선 왕조의 손꼽히는 성군으로 알려진 임금이다. 13세에 등극하여 38세로 승하할 때까지 25년간 선정을 베푼 임금이다.
그의 치적으로 뛰어난 것을 들어 보면, 첫째 세조 때부터의 직전제(職田制)실시에 따른 토지의 세습과 겸병(兼倂)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여 관민간의 뇌물 거래를 근절시켰으며, 둘째 젊은 과부의 수절을 강요하던 예법을 철폐하였고 , 셋째 민심을 현혹시키던 미신을 타파하도록 하였으며, 백성들의 원고(怨苦)를 고려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장리(贓吏)의 자손은 등용하지 않는 국초 이래의 규정을 완화하고 또 백성들에게 농잠을 장려하였다.
성현(成俔) 등의 <악학궤범>. 노사신(盧思愼) 등의 <동국여지승람>. 서거정(徐居正) 등의 <동국통감>과 <삼국사절요>, <동문선>, 강희맹(姜希孟) 등의 <오례의> 등을 편찬하고 특히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하여오던 《경국대전》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 1492년에는 이극증(李克增), 어세겸(魚世謙) 등에 명하여 《대전속록 大典續錄》을 완성하여 통치의 전거(典據)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였다.
적극적인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1479년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관찰사 허종(許倧)을 도원수로 삼아 2만4천의 군사로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게 하여 국초부터 빈번히 침입하는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평소에도 미복으로 거리를 돌아보고 백성들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밝게 알아 정사에 반영하고,
언제나 백성들의 편에 서서 백성들을 아끼는 임금이었다.
성종은 이렇게 뛰어난 군주이면서 한편 보기 드문 풍류객이었다.
그는 세 왕비와 여덟 명의 후궁들의 몸에서 30남매(19남,11녀)의 자녀를 두었고 또한 자주 궁중에서 주연을 베풀어 연락(宴樂)을 즐겼었다. 1469년(예종 1)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성종은 본래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어서 법통으로는 그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보위에 올라야 하는데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몸이 허약하므로,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한 그 재질을 사랑하여 정희대비(貞熹大妃:世祖妃)가 한명회·신숙주(申叔舟) 등 대신들과 의논하여 둘째 아들인 그를 보위에 오르게 하였다. 성종은 등극 후에도 월산대군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자주 연회를 베풀어 월산대군을 기쁘게 해주었는데, 그것이 습성이 되어 주색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세인들간에는 ‘성종은 주요순 야걸주(晝堯舜 夜桀紂)이다’ 란 말이 있었다.
이 말은 낮에는 중국의 요(堯)와 순(舜) 임금처럼 선정을 베푸는 지혜로운 왕이지만 밤이 되면 하나라의 걸(桀) 임금이나 상나라의 주(紂) 임금처럼 주지육림에 빠진다는 것을 빗대어 일컬은 말이다. 심지어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왕실 종친들과 관계되어 있고, 많은 신료들이 연루되어 있어서 그렇잖아도 시끄럽고 창피한 일이었는데 왕과 잠자리를 가졌던 어우동이 노비와도 간통을 하여 비록 단둘만의 은밀한 밤중 일이었지만 임금 자신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고 반상의 질서를 깨버린 사실이 성종의 귀에 들리게 되자 이런 소문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한 한편으로 매우 괘씸하게 여긴 성종이 교부대시(絞不待時)라 해서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의금부에 의하여 어우동의 목에 올가미를 메어 사형시켰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 준다
물아래 하늘이오 하늘 우희 안자거니
어즈버 신선(神仙)이 되건지 나도 몰라 하노라
추강(秋江)에 밤이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無心)한 달빗만 싯고 빈배 저어 오노라
위 두 시조는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구중궁궐을 떠나 강가에서 자연을 벗삼아 한적한 세월을 보내며 읊은 것으로 전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