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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 전투(1939년)
1939년 5월 11일부터 동년 9월 16일까지 몽골 영토에서 발생한 소련군, 몽골군과 일본군, 만주군 사이의 무력 충돌. 일본 측은"노몬한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부르지만 사실상 소련과 일본 제국의 전면전에 가깝다.
봉소전쟁 당시 중국군을 격파한 소련군의 두번째 만주 승리.
중국 국민당의 국민혁명군이나 군벌군처럼 현대화된 군대라고 볼 수 없었던 구식 군대만을 상대하다가 갑자기 수준급의 열강의 군대를 상대하면서 일본군의 문제점이 부각된 전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일본군은 전차를 폭파시키기 위해 일반 보병이 총에 맞으면 전차 밑에 엎드려 수류탄으로 폭파시키라는 명령을 주로 내렸고 이런 문제는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아 카미카제 전술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러일전쟁때 이겼다고 자만하던 일본군은 '러시아 제국이나 소련이나 거기서 거기지 뭐.'라고 생각했다.
사건은 1932년, 만주국 성립시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과 몽골 사이의 국경을 할하 강으로 정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대해 전통적으로 할하 강 동쪽 16km 지점에 있는 노몬한 언덕을 경계선으로 간주하던 몽골이 반발하면서 갈등이 빚어졌다. 일본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정하면 기존의 국경선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출부를 형성하는데 그것이 몽골에게는 잠재적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 자체는 모래와 잡초 투성이인 황무지여서 가치가 없었다. 또 만주국(일본)과 몽골(소련)이 주장하는 국경선의 차이는 약 10-20km 정도의 사소한 거리에 불과했다. 한 줌에 불과한 황무지를 놓고 굳이 무익한 싸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으므로 협상으로 잠정적 국경선을 정하려는 움직임도 초기에는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육군은 소련을 제1의 가상 적국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소련 또한 러일전쟁에서 겪은 패배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던 데다가 적백내전 당시 개입했던 일본의 야욕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 부근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군 육군은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에서 보듯이 중앙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모험주의적인 충돌을 일삼았으므로, 소련은 이런 망나니같은 일본군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동안 일본의 군사적 야욕은 관동군을 확장하면서 점점 노골화되었다. 소련은 관동군이 극동에서 어떤 깽판을 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군비를 계속해서 증강해 나갔고, 관동군도 마찬가지로 소련의 군비 확장을 근거로 병력을 늘려 나갔다.
1935년 1월에는 할하먀오 사건, 1935년 12월에는 오라호도가 사건, 1936년 1월 말엽에는 금창구 사건, 같은 해 3월에는 타우란 사건이 발생했는데 해당 사건들 모두 양측에서 몇십 명 정도의 피해만 입었을 뿐 그다지 주목할 만한 사건들은 아니었다. 이때까지는 그냥저냥 흔한 국경분쟁 수준이었다.
그러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숙청을 시작하여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 유능한 장성들을 대거 사형시킴에 따라 일본은 소련의 군세를 과소평가했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의 부관으로 유럽을 방문 중이던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 혼마 마사하루(1888~1946) 소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귀국하여 "소련군의 고위 지휘관이 숙청당했으며 이런 결과로 인해 소련군은 일본군에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림에 따라 일본은 소련과 비교적 큰 규모의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는 것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이후 비교적 큰 규모였던 2번의 무력 충돌이 연달아 터졌다.
건차자도 사건은 1937년 6월 19일부터 동년 7월 4일까지 벌어졌던 소규모 국경분쟁으로, 교전 및 피해 규모는 적지만 사건의 발발 시기가 한창 2차 대전의 전운이 고조되던 때였던 데다가 이후 소련과 관동군의 행보를 정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중요성이 높다.
건차자도(乾岔子島/Kanchatzu Island)는 중국 아이후이 구(爱辉区) 동남쪽 100km 지점에 있는 아무르 강의 하중도로서, 만주와 소련의 공식 국경선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볼쇼이 우수리스키 섬(Bolshoy Ussuriysky Island)이라고 했다(줄여서 우수리스키 섬).
당시는 1858년 아편전쟁 도중 체결한 불평등조약인 아이훈 조약, 전쟁 후인 1860년 체결한 베이징 조약으로 아무르 강 이북 지역과 연해주가 모두 러시아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즉 엄밀히 말하면 아무르 강 내에 있는 하중도인 건차자도도 러시아 제국의 후예인 소련의 영토였던 것. 그러나 만주국은 자기네 배가 다니는 항로가 아무르 강이라며 국제법을 내세워 건차자도의 영유권을 주장했고 소련은 당연히 아이훈 조약을 들먹이며 영유권 확보에 나섰다. 이 당시 건차자도에는 만주국에서 보낸 사람들이 거주 중이었다.
분쟁이 벌어진 배경을 좀 더 상세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아이훈 조약, 베이징 조약으로 국경을 정한 것은 조약 체결 당시 아무르 강의 수로 위치에 따라 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약이 체결된 1858, 1860년에서 70여 년이 지난 상황이었으므로 폭우, 홍수 등 자연적 요인으로 인해 지형이 그 당시와 다르게 바뀌어 있던 것이 분쟁의 발단이 되었다. 원래 조약에서 아무르 강의 주요 수로를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한 섬은 러시아 소유, 남쪽에 위치한 섬은 중국의 소유로 규정해 놓았는데 1930년대가 되자 수로의 위치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건차자도는 조약 체결 당시 아무르 강의 수로 북쪽에 있어 본래 러시아 소유였으나 이때 수로가 섬 북쪽으로 흐르게 되어 수로의 남쪽에 위치하게 된 건차자도는 중국, 즉 만주국 소유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당시에는 건차자도 말고도 여러 곳에서 이와 유사한 국경 획정 문제가 야기되었는데 건차자도는 그 중 가장 큰 섬이었다. 소련은 조약 체결 당시의 상황이 중요하며 수로의 위치 변동은 일시적인 것으로 섬의 소유권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주장했고 만주국은 현재의 상황을 조약의 내용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며 맞섰다.
1937년 6월 19일, 2척의 소련군 건보트가 강 중앙선을 넘어 건차자도에 접근해 소련군 병사 20명을 상륙시켜 섬에 살던 만주국 공무원 등 거주민들을 내쫓고 노동자를 납치했으며 강을 지나던 만주국 소속 선박을 위협하였다. 다음날인 6월 20일, 만주국 경찰이 소련군의 월경 행위를 조사하다가 소련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기도 했다. 조사 결과 이미 40명의 소련군이 건차자도를 요새화하고 있었다. 만주국 외교부는 소련 측에 계속 항의했으나 소련에서는 6월 28일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고 이에 우에다 겐키치 관동군 총사령관은 관동군 참모본부의 동의를 얻어 관동군 제1사단을 아무르 강 인근에 파견했다.
관동군 제1사단은 이 섬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는 6월 29일 야습을 감행하기로 했으나, 관동군 참모본부에서 외교를 통해(니들이 웬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계획이 지연되었고, 같은 날 소련도 건차자도에서의 철군에 동의했다. 그러나 6월 30일 아침 소련군 건보트 3척이 선제 공격을 가하자 가나에 미하라 중좌가 지휘하는 1사단 제49연대는 37mm 포로 응사했다. 관동군은 포상을 급조해서 고폭탄, 철갑탄을 사용해 소련군 건보트에 포격을 퍼부었다. 이 포격으로 건보트 1척이 침몰하고 1척은 파손되었다. 소련군 사망자는 37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일본군 사망자는 없었다. 침몰한 건보트에 타고 있던 소련군이 강에 빠져 강둑으로 도망칠 때 일본군이 기관총 난사를 퍼부으면서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이때 이미 시게미츠 마모루 일본 대사와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인민위원 사이에 이미 정전 협정이 결정되었는데 관동군이 해당 전보를 수신하지 못해 양 군 간에 교전이 일어나버린 것.
시게미츠 대사는 소련 측의 선제 공격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고 7월 4일 소련군은 건차자도에서 철군했다. 관동군은 얼씨구나 하며 건차자도를 점거했고 이후 건보트 7척이 더 접근해 왔지만 관동군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1941년부터는 소련도 건차자도를 내버려두었다. 그 이유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소련이 이러한 명백한 도발 행위에 더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강하게 불어닥치던 대숙청의 피바람 때문에 소련군이 일본군을 압살할 것이란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소련군이 철수한지 3일 뒤인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소련 정보부에서는 중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 예측하여 추가적인 보복을 가하지 않으면 일본이 중국 전선으로 눈을 돌릴 것이라 생각하고 교전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윽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소련의 예측대로 관동군은 건차자도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저 형식상으로 만주국이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동군은 소련군이 쫄아서 반격하지 못한 것이라 단단히 착각했고 관동군 참모 츠지 마사노부는 향후 일어날 소-일 간 전투에서 "우리의 자랑스런 병사들이 중앙의 명령 때문에 반격을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심지어 주중 미국 대사마저도 소련의 군사력이 약해서 반격을 못한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2차 대전 종전 후 건차자도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아마도 만주 작전 때 소련군에게 점령된 것으로 추측된다.
일명 장고봉 사건(張鼓峰事件). 주로 영어권에서는 '하산 호 전투(Battle of Lake Khasan)', 일본에서는 노몬한 사건처럼 축소하려는 의도인지 '장고봉 사건'이라고 부른다.
1938년 7월 29일부터 동년 8월 11일까지 약 2주 간 소련군과 일본군(조선군, 관동군)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로, 소-일 국경분쟁 중 할힌골 전투 다음으로 컸던 전투였다.
장고봉(張鼓峰, 러시아명 сопка Заозёрная/Zaozyornaya)은 두만강 근처에 있는 해발고도 약 150m의 언덕으로, 그 자체로는 흔해빠진 언덕이어서 별다른 쓸모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지도에 보이다시피 만주, 조선, 소련 사이에 절묘하게 걸친 탓에 소유권을 두고 분쟁이 시작되었다. 분쟁이 있던 장고봉의 정상 부분을 소련, 만주국 양국은 서로 점령하지 않고 그냥 무주공산으로 방치하고 있었다.
당시 이쪽의 국경선에 대해서 소련과 만주국 간 의견이 엇갈렸다. 소련은 베이징 조약에 근거하여 국경선은 장고봉 정상을 통과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은 장고봉 정상 일대는 만주국에 속한다고 보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이 국경선을 왜곡하고 있으며 만주국에 설치된 국경 표지판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나 어쨌든 해당 구역의 방위를 담당했던 조선군 제19사단은 이곳을 국경 불확정 지대로 보고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해 장고봉 정상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7월 12일 소련군이 파견되어 장고봉 정상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발견되었다. 다음날 13일에는 일본군 감시병이 소련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은 대사관을 통해 항의했으나 역시나 이번에도 소련은 시크하게 씹었다. 이로써 건차자도 사건이 끝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던 때 또 다른 무력 충돌이 예고되었다.
일본은 장고봉에 정찰대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소련군에게 사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인솔하던 하사가 죽는 등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관동군은 중국 전선에서 공세를 준비하느라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장고봉에서의 사태를 악화시키기 싫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관동군 작전참모들이 '좁은 곳이라 전투가 확대되지도 않을 것이고 소련군이 전차까지 끌고 오지도 않을 듯'이라고 하여 제19사단을 동원해서 소련군을 격퇴하기로 했다. 조선군 사령관 고이소 구니아키는 제19사단의 출동을 명령했다.
7월 29일 확인 결과 소련군은 장고봉 북쪽에 위치한 사초봉(沙草峰, 러시아명 сопка Безымянная/Bezymyannaya)에도 진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제19사단이 공격을 가했지만 이미 대규모로 증강된 소련군을 격퇴하지는 못했는데, 7월 31일 19사단 휘하 제75연대가 야습을 가해 소련군 제40사단을 격퇴하였다. 덕분에 제19사단은 장고봉과 사초봉을 탈환할 수 있었다. 이후 8월까지 소련군이 여러 번 반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은 의외로 선전해서 이를 막아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8월 1일 소련군 항공대가 나타나 두만강 인근 지역에 폭격을 가한 것이다. 8월 2일에는 당시 극동 군관구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가 참전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슬금슬금 병력을 증강시켜 나갔다. 반면 일본군은 장고봉 일대의 19사단에 이렇다할 중장비나 추가병력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일이 크게 터지는데...
건차자도 사건 이후 제대로 열받은 소련이 1개 군단과 1개 기계화여단, 연해주 항공대를 동원해서 8월 6일 대반격을 가해왔다! 무장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19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장고봉에서 간신히 버티고는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19사단 장병들은 분투하여 장고봉과 사초봉을 빼앗기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고, 소련군 측도 상당한 사상자가 나왔다.
그러나 소련, 일본 모두 확전을 원하지 않았고, 결국 일본의 시게미츠 마모루 대사와 소련의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인민위원 간 회담으로 8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정전 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 내용은 11일 정오로 전투를 중지하고 소련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확정한다는 것. 19사단은 두 고지를 점령했지만 이를 소련측에 내줘야 했다. 이에 일본군의 조 이사무(長勇) 대좌와 소련 극동군 참모장인 그레고리 슈테른 대장이 회견하여 정전이 발효되었다. 8월 12일 양 군은 문서를 통해 장고봉 이북의 국경선 문제를 매듭지었고 160m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표에서 확인되다시피 소련군의 피해가 더 컸으며, 격분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책임을 물어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숙청했다. 블류헤르 원수는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수감된 후 한쪽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한 뒤 사형에 처해졌다.
여기서 일본군은 소련군의 우수한 화력을 체감했으며, 이때 정신을 조금이라도 차렸다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할힌골 전투 항목이 이렇게 길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3. 제1차 전투
하산 호 전투 이후 양측 간에는 한동안 군사적 충돌이 없었으나 1939년 5월 11일에 70~90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몽골군 소부대가 만주국군 주둔지를 기습했다. 양측의 전투 일지에 '적의 월경을 격퇴했다'는 정도로만 기술되어 피해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경에 구멍이 났다는 이유만으로 관동군은 할하 강을 건너 보복에 나섰다. 사실 1938년에 있었던 하산 호 전투의 복수전을 기도하고 있던 관동군은 '만소국경분쟁처리요강(満ソ国境紛争処理要綱)'이라는 작전 지침을 참모본부의 허가도 없이 만들어 두었던 터라 "야 신난다"하며 전면전에 나선 것이었다. 이에 소련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전력을 집결시켰다. 이로 인해 벌어진 전투가 제1차 노몬한 전투이다.
일본군은 제23사단 예하 제64연대 제3대대와 아즈마 야오조(東八百蔵) 중좌의 수색대와 만주국 기병을 포함해 2천 명을 웃도는 병력이었고 소련군은 제11기계화여단 예하 병력 1,500명 정도였지만 장갑차와 야포의 수는 더 많았다. 소련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한 일본군은 5월 28일 오전에 선공을 걸어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으나 재빠르게 우회 포위에 들어간 소련군이 아즈마 지대를 저녁 때까지 섬멸하였다. 이후 소강 상태가 이어지다가 전투 속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관동군의 결정에 의해 6월 1일 일본군은 퇴각했다. 하지만 지상전과는 달리 공중전은 일본군이 우세였다. 어디까지나 지상전에 비해서였지만.
이 전투는 이후 7월의 제2차 노몬한 전투로 이어진다.
한편 비슷한 시기(1939년 5월 26일~27일) 아무르 강 상류 편검자도(偏瞼子島) 부근에서 만주국 강방함대 소속 건보트 2척이 소련군에게 공격을 받아 1척이 파손되고 1척이 나포되는 이른바 동안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관동군 소속 제4사단이 보복을 계획했으나, 제1차 노몬한 전투에서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반격 준비가 무산되었다고 한다.
주코프 등판
제1차 전투의 의미가 향후 이 지역 국경선 확립에 중요하다고 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의 주장을 받아들인 국방장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는 일본군에게 패하면 시베리아의 방위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이전부터 능력을 인정받던 당시 벨라루스 관할군 부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를 극동 관할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1차 전투를 큰 피해 없이 마무리지은 전임자 니콜라이 페클렌코 소장과 교체했다.
소련군은 1개 차량화보병사단, 2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여단, 2개 기갑여단, 2개 기계화여단, 4개 포병연대, 2개 항공여단, 6개 항공연대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을 투입했는데, 이는 주코프가 당초 요청한 전력의 2배가 넘는 것이었다. 일본군 역시 기존의 제23사단 이외에 군 직할 2개 전차연대에다 정예라 불리우는 제7사단 병력(1개 차량화연대, 1개 공병연대, 1개 보병대대, 1개 포병대대)을 추가, 강화된 야스오카 지대를 전선에 투입하는 등 전력을 증강시켰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력 증강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은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이미 소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병력, 대포나 전차, 차량 모두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제23사단 자체가 불과 1년 전에 만들어진 신편 사단이라 병력의 대부분은 신참 징집병이었고, 장비는 다른 보병사단들보다 훨씬 모자랐다. 증강되었다고는 하지만 말뿐이라 차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병력이 230km나 되는 거리를 도보 행군하여 전선에 도착할 정도였다. 대포는 76문에 불과한 데다 100mm 이상의 대구경포는 불과 10문도 되지 않았고 대전차포도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일본군의 주력 전차는 대전차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능이 크게 뒤떨어졌다. 그럼에도 정작 관동군은 소련군의 전력을 1차 전투와 비슷한 수준인 1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여단이라고 오판했다.
즉, 소련군은 적을 얕보지 않고 충분한 병력을 전개했는데, 일본군은 소련군을 얕보고 보병의 총검돌격이면 소련군의 기갑 부대는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동군의 이런 근거없는 자신감에 상급 지휘관들조차 "적을 지나치게 얕보는 것이 아닌가..."라고 우려할 정도였다.
관동군은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 신병으로만 구성된 제23사단을 빼고 정예 부대인 제7사단으로 공세를 펼 계획을 세웠으나, 우에다 겐키치 관동군 총사령관은 "내 부대가 이런 굴욕을 겪었는데 다른 부대를 투입하면 나는 굴욕감에 자결하겠다."고 흥분하면서 1차 충돌의 주역인 제23사단에게 그대로 '설욕전'을 벌이라고 명령했다.
일본 본토의 육군성은 공세에 회의적이었으나 관동군은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전투를 강행하였다. 관동군이 자신감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소련군의 전력 집결이 일본군보다 늦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일본군 전선과 철도 간 거리는 230km이었으나 소련군 전선과 철도 사이 거리는 750km에 달했던 것이다. 또한 제1차 전투 이후 간헐적으로 벌어지던 항공전이 일본군의 우세로 흘러가면서 제공권은 자기네가 장악했다는 확신이 이 근거없는 자신감을 부추겨, 당시 관동군 참모부는 더 이상의 전력 증강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들고 나오는 셈"이라고 하며 처음에는 제7사단 증파를 반려할 정도였다.
일본군 제23사단은 소련군을 선빵으로 박살내겠다며 7월 할하 강을 도하하여 소련군에 기습을 가했으나, 화력덕후 소련군의 포병은 관동군의 예상을 능가하는 화력을 퍼부었고 도하한 부대는 큰 손실을 입은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관동군은 "포는 포로 잡아야지."라고 하면서 포병을 전개해 소련군 포병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 포병은 포의 숫자뿐만 아니라 포 자체도 성능이 시원찮았다. 소련군 포병은 기습을 받았지만 역습을 가해서 일본군을 역관광시켰고, 일본군 포병은 거의 전멸할 지경이었다. 당시 일본군 포병이 포를 쏘면 소련군은 그 몇 배의 포탄을 퍼부었고, 전투가 지속되면서 일본군은 그렇지 않아도 수리 부품이 부족한 가운데 야포를 혹사하여 과열로 닫히지 않는 주퇴기를 수동으로 동작시키거나 심지어 포가 붕괴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런 판에 포탄이 날아가는 탄도도 개판이라 걸핏하면 아군 진지를 때리는 팀킬까지 발생했다. 그래서 일본군 보병은 자기네 포병에게 제발 포 좀 쏘지 마라고 하는 지경이었다.
그러자 관동군은 '현대식 전력'인 공군과 기갑 부대로 소련군을 제압하겠다며 전투기 부대가 치치하얼에서 발진하여 몽골에 있는 탐사크불락의 소련 공군 기지를 급습하였다. 관동군은 큰 피해를 입혔다고 자축했으나 대본영은 월경 폭격을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대본영과 관동군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은 대본영의 훈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작전을 속행하였다.
한편 일본군 기갑 부대는 87대의 전차와 장갑차(89식 중(中)전차, 97식 치하와 95식 하고, 그 외 94식과 97식 장갑차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제4연대(경전차로 구성되었다)가 7월 2일 밤에 소련군을 기습하였다. 이 기습은 성공했지만 전세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한편 중전차로 구성된 제3연대는 7월 3일 소련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13대의 중전차와 5대의 장갑차가 파괴되는 손실만 입었다. 거기서 97식 전차에 타고 있던 연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7월 4-5일 소련군이 반격을 시작하여 차량 손실이 늘어나자 7월 6일 일본군은 후퇴하였다. 결국 관동군 사령부는 기갑 부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일본군 보병 부대는 전혀 기갑 부대의 엄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군 기갑 부대를 상대로 급조한 화염병이나 대전차총검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할하 강 서안은 동안보다 해발이 높았기 때문에 소련군은 일본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고, 가끔씩 포격을 떨어뜨려 일본군을 혼비백산케 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전투가 소강 상태였던 7월에도 매일 1-2%의 병력 손실을 보고 있었다.
이 시기 소련군 전체로 보았을 때 대규모로 숙청당한 상태으로 많은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그 와중에 유능한 장교들도 무더기로 숙청되었기 때문에,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보듯이 객관적인 전력에 비해 형편없는 전투력을 보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할힌골에서도 소련군의 지휘부가 무능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나, 하필 이 전투의 소련군 지휘관은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였다.
다만 주코프 자신도 이 전투는 처음으로 실전에서 지휘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투 지휘가 빈말로라도 세련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여기에 모스크바의 정치적 압박이 심했고, 병력 또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시간의 이동으로 피로가 누적된 데다 겨우 역 하나에서 모든 수송을 부담하다보니 보급 적체와 혼란도 극심했다. 그러나 어쨌든 주코프는 기동전의 개념을 제대로 탑재한 지휘관이었고, 여러 혼란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일본군을 압도하는 전력을 준비할 수 있었다.
4.3. 소련군의 8월 공세
소련군은 일본군의 공세를 분쇄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격을 위해 계속 유럽 방면에서 오는 증원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 이것은 주코프의 장기로서, 모스크바 전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나타났듯 처음에 수비로 적의 공세가 소진되기를 기다렸다가 적이 기진맥진했을 때 파멸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준비가 끝난 8월 20일, 마침내 소련군은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이 때 소련군은 대규모 지원 포격과 함께 기갑여단 3부대와 기계화여단 2부대가 할하강을 건너 일본군에 대한 양익 포위에 성공했고, 그 결과 선두에 있던 일본군 제23사단을 비롯한 제6군 전체가 포위망에 걸렸다. 이 중에서 제23사단은 끝내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멸했다. 결국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하지만 소련군은 원래의 국경이던 할힌골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전투는 이것으로 끝났다. 관동군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여력이 없었고, 소련도 다가오는 동유럽에서의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할힌골 전투가 끝난 다음날인 9월 1일은 바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날이었고, 9월 17일에는 소련 역시 폴란드를 공격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소련 역시 전투를 계속할 의사가 없었다. 원래 소련은 이 지역에서 영토(그것도 소련이 아닌 몽골의 영토)를 확대할 의도까지는 없었으므로 일본군을 격파한 시점에서 전투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었다. 그 결과 사소한 국경 문제에서 관동군과 소련군 사이의 대규모 결전으로 비화된 이 전투는 다시 사소한 국경 문제로 끝났다.
그런데 관동군은 소련군이 진격을 멈춘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패배를 설욕하겠다며 분쟁 지역에 계속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이때 증원으로 온 제7사단뿐만 아니라 제2, 4사단까지 파견하고 중앙에는 '전사자 수용을 위한 한정 작전'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일본군 대본영은 깜짝 놀라서 나카지마 테츠조 참모차장을 파견하였으나 참모차장도 관동군에 설득되어(...) 이를 추진한다. 대본영은 다시 연락장교를 보내서 거듭 중지를 명령했고, 그제서야 관동군은 공세를 포기하였다. 이후 우에다 겐키치 관동군 총사령관과 이소가이 렌스케 참모장, 핫토리 타쿠시로 작전참모, 그리고 고마츠바라 제23사단장뿐만 아니라 공세를 중지시키려다가 오히려 설득된 나카지마 참모차장도 예비역으로 예편당했다.
5. 공중전에 관한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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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힌골의 Ki-27(97식 육군 공격기). 보이듯이 랜딩 기어가 고정식이다.
할힌골 전투 당시 일본의 전투기들이 공중전에서 소련 공군을 상대로 대등한 전과를 올리고, 우세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물론 양측 모두 자신들이 우세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측은 10:1에 가까운 우세한 격추비를 보였다고 발표했고, 이를 그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일본측이 우세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이를 근거로 일본의 전투기 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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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힌골 전투 중반에 투입된 소련 공군 제70비행연대 도장의 I-153. I-15도 동체 모양이 거의 같다. I-15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I-153은 I-15의 마개조 버전이다.
개전 당시 소련 전투기 전력은 전부 제70전투기연대 소속으로 구식 I-15bis가 14량, I-16이 24량이었고, 개전 직후 제22전투기연대가 배치되어 I-15bis 35량, I-16 28량이 추가로 투입되었으나, 손실이 너무나 지대했던 데다가 지상전이 소강 상태에 빠지자 소련군은 제공권을 그냥 일본군에게 내줘버리고 전력 확충에 전념하기로 결정하면서 6월 내내 와신상담하였고 특히 구식 I-15bis의 비중을 줄이면서 I-16의 수를 크게 늘렸다.
I-16은 당시에도 최신형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기종이었지만, 독소전쟁 초반에 각인된 것처럼 아주 나쁜 전투기는 아니었다. 이는 전투기 성능보다는 2년 간 실전 경험을 쌓은 루프트바페가 독소전 발발 당시의 소련 공군을 압도하는 숙련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I-16은 세계 최초로 인입식 랜딩 기어를 장착한 기종이기도 하며, 스페인 내전에 투입된 결과 프란시스코 프랑코 군대 측의 CR. 32과 He-51이 상당히 고생하기도 했다.
한편 할힌골 전투 당시 일본군의 전투기는 Ki-27인데 이것은 단엽기이기는 했지만 I-16에 기술적으로 뒤진 기종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연구한 책 Airwar over Khalkhin Gol(2010, Vladimir Kotelinikov 저)에 의하면 할힌골 전투 초기에 몽골-시베리아에 배치된 소련 공군의 훈련도가 불충분했고 전투기들도 모두 구식(I-15, I-16, 그리고 7월부터 I-153)이었기 때문에 중일전쟁에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일본군 조종사에 밀렸으나, 소련군은 이후 신형 모델 I-16과 베테랑 파일럿을 계속 이곳에 투입해서 균형을 유지했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련 공군이 일본 육군 항공대를 압도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초반 전과만 가지고 일본 육군 항공대가 소련 공군을 압도했다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이 성공은 소련 공군이 제56전투기연대 등 다른 전투기 전력을 연달아 배치하면서 수적으로 압도, 소모전으로 이끌어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고, 당시 I-15, I-16 등 소련군 주력 전투기들을 설계하면서 전투기의 왕이라고 선전되었던 폴리카르포프는 할힌골 전투에서의 막대한 피해 이후 실각했다.
한편 일본 육군 항공대는 할힌골 전투 당시 23개 중대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그 중 85%인 20개 중대를 투입했고 그 중 절반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특히 후반부에 피해가 집중되었는데 초반에 일본군을 경시하던 소련이 후반기에 유럽 방면의 일류 조종사들을 데려온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덕택에 일본 육군 항공대는 항공기보다는 조종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제대로 된 교훈을 얻었고 그 덕에 조종사 보호 장치가 육군기에는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 바로 도조 히데키. 도조 때문에 많은 수의 육군 장병이 희생된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6. 결과와 영향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러시아가 아직도 오합지졸이라 오판했는데 이 전투에서 대판 깨지고 나서 소련군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진주만 공습 당시 독일은 일본의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에 반해,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이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던 것은 할힌골에서의 참패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투의 교훈으로 당연히 서둘렀어야 할 전차의 성능 개선이나 전차 및 포병 화력의 확충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해군 및 항공 쪽에 예산이 어느 정도 집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예산을 받은 육군 내에서도 그다지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또한 소련군의 기갑 부대에 의해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포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술 면에서 전차의 집단 운용에 의한 기동전을 고려하거나 그러한 전차 중심의 기동전에 대비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군은 교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 전투를 잊어버리기에 급급했다. 장병들의 휴가와 서신 교환이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본토로 귀환한 장병들에게는 헌병대의 감시가 붙었다.
전투에서 이탈한 장병들은 만주 들판의 마적이 되었다. 할힌골의 대패는 관동군과 군부의 언론플레이로 소련군의 침공 야욕을 격퇴한 분전으로 윤색되어 선전되었다. 참고로 현재도 일본 넷우익들은 당시의 선전을 그대로 인용, 소련군 병력이 일본군의 10배나 되었으며 그럼에도 동등한 피해를 입혔으므로 이긴 셈이라는 정신승리를 시전, 양심있는 우익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래놓고 사건이라고 축소하며 이겼다고 우기는 것은 모순일 따름이다.
이때 이후로 발전이 없다시피 한 일본 전차 부대는 태평양 전쟁에서 안습 전설을 만들어낸다. 일본 외무상이던 도고 시게노리는 할힌골 전투를 비난하며 철군을 요청한 바 있는데, 나중에 미군 전차에 뭉개진 것을 듣고 그 때와 달라진 게 없다면서 한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전차병으로 참전한 시바 료타로도 전후에서야 할힌골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게 대패한 걸 알자 자신이 전차병으로 목격한 일이나 할힌골에서나 전혀 다를 게 없었다고 한탄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패한 일본은 소련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게 되었고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은 후에는 최대한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 탓에 나치 독일이 소련을 기습 공격하여 독소전쟁을 일으켰고, 모스크바 공방전이 벌어질 때쯤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만주의 관동군이 또다시 침공해 오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여 극동 지방에 이미 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모스크바로 차출하기를 망설였으나, 일본에 상주하던 전설적인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보낸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전보를 받고 안심하여 극동에 배치된 소련군 부대 중 일부 정예부대를 모스크바로 차출해 독소전에서 사용했다. 그리고 일본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상대를 겁도 없이 건드리는데...
독일의 항복 이후에도 계속 잔존해 있던 관동군은 정예사단들이 거의 다 차출되어 빠지면서 계속 약화되었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만주 작전으로 1945년 8월 만주국이 멸망하고 관동군 역시 소멸했다.
연구위원회의 패배 원인 보고서
의외로(?) 할힌골 전투의 패배가 꽤나 충격적이었던지라 대본영은 1940년 1월부터 할힌골 전투의 패배 원인을 분석하는 연구위원회, 즉 "노몬한 사건 연구위원회(ノモンハン事件 研究委員会)"를 조직해 패배 원인을 심층 분석했다. 3개월 간 조사를 진행하면서 전투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가를 새삼 실감했는지, 위원장을 맡았던 코이케 류지(小池龍二, 1893~1993) 대좌는 후일 회고에서 그런 장비로 적에게 맞서라는 명령을 따르는 병사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라고 했을 정도.
이 보고서가 나온 시점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러나 대본영의 이 보고서에 대한 반응은 "알겠다."가 전부였다. 그리고 연구위원회를 이끌었던 코이케 류지는 보직이 변경되어 한직으로 밀려났다. 사실 처음에는 전훈을 두고 반성을 했지만, 전훈의 결론이 돈을 더 써야한다는 극복불가능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실천가능한" 정신력 강화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이 보고서를 무시했으며, 한술 더 떠서 "미국를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먹어서 나와 협상하겠지?"란 드라마틱한 생각에 선전포고도 없이 공습을 가했으나 "나한테 이런 건 네가 처음이야"를 외친 미국과 전쟁이 터졌고, 대전 내내 똑같은 반복하다가 두 발 먹고 패망했다. 이렇듯 일본군은 이 전투의 패배에서 얻은 전훈을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다. 다만 이 보고서는 육해군 합동조직인 대본영이 작성했지만, 해군은 아예 참고하지 않았거나,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에서 보듯이 일본군이 할힌골 패배의 교훈을 잊었다기보다는 해군에서 육군의 참패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할힌골 전투에 관해 다룬 서적 중 잘 알려진 것으론 앨빈 쿡스(Alvin Coox)의 Nomonhan: Japan Against Russia, 1939, 스튜어트 D. 골드먼(Stuart D. Goldman)의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가 있다. 해당 서적은 일본의 의도적인 은폐로 존재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할힌골 전투가 세계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높게 평가하는데, 전자는 "세계사의 전환점"이라 서술했으며, 후자는 아예 제목부터가 "2차 대전을 결정한 붉은 군대의 승리(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다. 할힌골 전투로 인해 소련은 극동에서 날뛰던 관동군의 기세를 꺾어버릴 수 있었고 나치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개전할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만약 이때 소련이 관동군을 밟아버리지 못했다면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시 일본이 호응해 소련은 양면전쟁 상태에 놓이고 결국 패전해 냉전 체제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몽골 여행 중 할힌골 전투 승전비를 보고 일본에서는 애써 별 것도 아닌 사건으로 축소하고 외면하지만, 세계적으로는 규모가 큰 전투로 알아준다면서 비아냥거린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쓴 소설 '태엽 감는 새'에서 이것을 과거 이야기로 다루었는데 할힌골 전투를 사건으로 격하하는 것을 두고 패배를 감추는 미련한 짓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몇몇 극우들이 불쾌하게 여겼는지 심지어 살해 협박 전화까지 걸었다. 이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는 끝까지 미련하다면서 더 극우들을 씹었다.
•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일본군 주력 전차이던 89식 중전차는 대전차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차가 아니었다. 이 전차의 주포인 57mm 곡사포는 대전차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관통력 자체는 보병포답게 극악이었으나, 종이 장갑으로 악명높은 BT 전차나 T-26을 표준 교전 거리보다 약간 안쪽인 500m 내외에서 격파하는 데 딱히 문제는 없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표준 교전 거리에서 제대로 맞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탄의 산포도가 넓은 단포신포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89식 중전차는 소련군의 BT 전차를 상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비해 처음부터 대전차전을 염두에 둔 탓에 37mm 대전차포를 주포로 탑재한 95식 경전차 하고는 비교적 수월하게 BT 전차를 상대할 수 있었다(일본군의 전차 개발 사상에서 경전차는 영국의 순항전차나 소련의 기병전차(예를 들어 BT 전차)와 마찬가지로 적 기갑 부대와의 교전 및 신속한 추격전을 염두에 둔 다목적 전차였다). 물론 일본군의 37mm 대전차포는 동급 대전차포 중 최악의 대전차 능력을 자랑해서 BT 전차의 45mm 주포보다 사정거리가 짧고 위력도 심하게 부족하긴 했지만, BT 전차도 종이 장갑이고 철판의 재질도 안 좋아서 95식 경전차의 포탄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이 당시만 해도 일본군 전차인 89식이나 97식이 BT 전차보다 방어력이 좋았고 방어력이 매우 낮은 95식 경전차조차 BT 전차와 대등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거기다 당시 소련군 전차병의 숙련도보다 일본군 전차병의 숙련도가 더 높았던 점도 호재로 작용해 95식 경전차는 의외의 성과를 올렸다. 물론 95식 경전차도 제대로 된 전과를 올리려면 500m 이내로 급속 접근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형세를 뒤집을 결과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관광당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관동군은 전차 손실을 보충해 계속 싸워 보자는 생각은 안하고 전차 부대를 그냥 전선에서 빼 버린지라 결국 제대로 된 대전차포도 없는 일본군 보병들은 소련군에게 갈려 할힌골의 거름이 되어버렸다.
• 전차들이 철수하자 대전차포가 부족했던 일본군은 몰려오는 소련군 전차를 알보병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 전차들의 피해는 일본군 참호들을 돌파하면서 늘어났는데, 참호에 사각지대가 많다보니 그것을 노린 일본군의 대전차포나 화염병 투척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소련군 전차 부대가 보병들과 원활히 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들의 피해가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것만으로는 전차 부대의 진격을 멈출 수 없었다.
• 소련군의 인명피해도 적지 않았다. 원래부터 소련군은 제정 러시아군 시절부터 인명피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던데다가 당시 소련군도 전차를 대규모로 투입한 전술을 실전에서 시행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작전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여기에 바르바로사 작전 항목에도 기술되었지만, 전차부대가 스페인 내전 이후 계속 해체와 재편성을 거듭했기 때문에 많은 전차 부대들이 보병 원호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가 대규모 전차 작전에 긴급 투입되어서 운용도 세련되지 못했다. 하지만 유럽 방면에 있던 전력을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인 몽골에까지 급속하게 이동하여 적의 공격을 사전 격멸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여 관동군의 야코를 완전히 깨뜨린다.
일본 극우들은 사상자 수를 근거로 '대등하게 싸운 것이다'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의 승리라고 해야 할 판이며, 더 나아가 독소전쟁은 독일의 대승이 된다(!). 전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할힌골 전투 사망자는 2만 명 이상으로 기록되어, 수천 명에 불과한 당시 발표와는 몇 배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에는 살아있는 사람도 안치되는 등 자료로 참고하기에는 신뢰도가 매우 떨어진다. 즉 이것으로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 소련군 최고 지휘관들은 전투 후 공로로 각종 포상을 받았지만, 고급지휘관 몇몇은 후에 베리야가 지휘하던 NKVD 의 의심을 사서 체포-처형되었다. 극동군 참모장으로 승리에 큰 공을 세운 그레고리 슈테른은 전투 종료 후 주코프와 함께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고 겨울전쟁 때는 제8야전군사령관을, 그 이후에는 주코프의 후임으로 극동군사령관을 역임했지만, 독소전쟁 개전직전 1941년 6월 레프 트로츠키 추종자이자 나치 독일의 스파이라는 날조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이는 슈테른이 트로츠키와 똑같은 독일계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파견되어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바 있는 공군 베테랑 장교였던 야코프 스무쉬케비치도 이 전투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해 주코프의 조공을 맡은 공로로 두 번째 소련영웅 칭호를 받고 소련 공군 총사령관과 소련군 총참모부 부참모장을 역임했지만, 역시 1941년 6월에 날조 혐의로 체포된 뒤 총살형에 처해졌다. 라브렌티 베리야는 주코프도 똑같이 없애려고 했지만, 주코프는 슈테른이나 스무쉬케비치처럼 당시 스탈린이 경원시했던 유대인이 아니었고 이 전투 이전부터 군부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던 인물이라 결국 숙청 대상자 목록에서 제외했다.
• 일본군 제23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원인 중에는 일본군 특유의 문화도 있었다. 일본군에서는 후퇴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 치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소련군의 포위망이 조여오는 와중에도 제23사단의 장교들은 후퇴하자는 말을 못하고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책임 떠넘기기 행태는 과달카날 전투와 임팔 작전에서도 반복된다.
• 스탈린은 승리 후 주코프를 불러들여 일본군이 어떠한가에 대해 물었고 주코프는 "사병과 부사관들은 용감하고, 초급 장교들은 완강하지만, 고급 장교들은 무능하다."고 평가했다. 마치 에르빈 롬멜이 이탈리아군을 "이탈리아 병사는 훌륭하지만 장교는 형편없고 장군은 쓰레기다."라고 평가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츠지 마사노부는 "소관의 작전 계획은 완벽했으나 일선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와 감투 정신의 부재로 패전."이라고 대본영에 보고했다. 결국 아랫선들이 줄줄이 할복하거나 도망쳐서 마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일부 포로들은 이것 때문에 송환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 진짜 어이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대좌가 이 전투에 있었는데 고마츠바라 미치타로와 츠지 마사노부의 대화가 아주 점입가경이다.
야스히토 대좌: 이 전투 말일세. 경들은 이길 수 있다고 보는가?
미치타로 중장: 물론입니다. 전하. 우리 황군이 전쟁에서 진 경우를 봤습니까?
마사노부 중좌: 전하. 원래 전쟁은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지는 것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야스히토가 기가 막힌 듯 쳐다보고는 한마디 했다.
야스히토 대좌: 그런가? 그러면 한 가지만 묻겠네. 만약 경들 빼고 장교와 부사관과 병들 포함해서 전원 전사했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나? 마사노부 중좌가 한 말 그대로 전쟁은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진 것이니 두 사람만 남아도 이긴 것인가? 적군은 별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네.
그 말을 들은 츠지 중좌와 미치타로 중장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장군과 육군대학교 실질적 수석이었던 장교가 명목상 수석이었던 황족보다 생각이 짧았다니... 답이 없다.
• 일본군 제23사단의 피해는 막심하여 참모장 이하 연대장급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생존한 고급 지휘관과 참모들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살하였다. 제23사단장 고마츠바라는 예편된 지 얼마 안 되어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사망했다. 적지 않은 문헌에서 고마츠바라가 자살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 전멸을 당한 제23사단을 제외하고 인접 부대와 상급 부대의 지휘관이나 참모 중에서 제대로 책임을 진 자들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 책임 추궁을 당하기는커녕 2차 대전에 멀쩡하게 참전하였다. 모든 책임은 제23사단이 뒤집어 쓴 셈이다.
•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으로 병력과 물자의 보급이 중국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 최고 정예인 관동군조차 정예부대는 중일전쟁에 투입되고 전차나 항공기를 포함한 군수 물자 또한 상당량이 중국 전선에 투입중이었다. 한마디로 양면전쟁... 반면 소련은 당시 일본을 상대로만 전투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