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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 국민 가방, 오드리 헵번 덕?
브랜드마다 출시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인기를 누리고 있는 베스트셀러 제품이 있기 마련. 루이비통의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 제품은 바로 ‘스피디’다. 한때 루이비통을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90년대 우리나라만 해도 스피디를 길을 걷다 3초에 한 번씩 볼 수 있다고 ‘3초백’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 이 스피디는 배우 오드리 헵번에 의해 유명해졌다. 1930년에 만들어진 스피디는 원래 큰 여행 가방 모양이었다.
그러다 1960년대 배우이자 모델인 오드리 헵번이 루이비통에 연락해서 스피디 모양의 작은 가방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한다. 헵번이 작아서 휴대가 간편한 스피디를 애용하는 모습이 여러 번 목격되자 젊은 여성들의 ‘잇템’으로 떠오르면서 다양한 크기의 스피디가 제작되고 오늘날까지 인기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루이비통에 관한 또 다른 재밌는 일화도 있다. 2대 사장 조르주 비통은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능성을 겸비한 트렁크를 만드는 데 주력했고 그는 고객의 짐을 더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잠금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당시 상류층의 여행 가방이었던 루이비통 트렁크는 좀도둑의 먹잇감이 되곤 했다. 이런 점을 의식한 조르주 비통은 새로운 자물쇠를 개발해 특허 등록을 한 다음, 당시 탈출 마술사로 유명했던 해리 후디니에게 새로운 안전 잠금장치를 풀어 탈출해 보라고 도발했다. 후디니가 이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아 자물쇠의 성능을 과시하진 못했지만 이 제안만으로도 큰 화제성을 일으켰고 자연스레 제품이 홍보되는 효과를 누렸다.
나치에 충성… 흑역사도
그러나 흑역사도 있었다. 루이비통은 제2차 세계대전의 비운을 빗겨나가지 못했다. 1940년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한 후 수많은 패션 하우스에는 정권에 협력하지 않으면 문을 닫으라는 강제 명령이 내려진다. 당시 대표였던 가스통 비통은 루이비통의 문을 닫지 않고 나치에 협력했다. 심지어 가스통의 아들이자 루이비통의 증손자 헨리 비통은 나치 정권에 대한 지지와 충성심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당대 권력층을 향한 충성은 패션 업계를 장악하기 위한 하나의 비즈니스였을 것이다. 앞서 19세기 루이비통은 나폴레옹 3세 으제니(Eugénie) 황후에게도 헌신한 바 있다. 으제니 황후는 루이비통에게 자신을 위해 일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황실에 발을 디딘 루이비통은 황후를 위한 가방을 만들었고 그의 작품은 황실과 상류층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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