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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롬 8:5-11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5-11 /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살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삽니다. 6) 성령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누리지만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뜻대로 산 사람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일도 없고 또 결코 지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8) 그러므로 아직도 옛날의 죄에 물든 자아의 지배를 받아 육신의 욕망대로 따라가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사정이 다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의 여러분 속에 계시기만 하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속에 계신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육신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용서해 주셨으므로 여러분의 영혼은 살 것입니다. 11) 그리고 만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속에 계시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속에 계시는 이 성령에 의해서 여러분이 죽은 후에도 여러분의 썩을 몸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과 성령의 대조된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람 안에 성령께서 거하셔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합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5-6) 바울은 육신과 영을 대조시킵니다. 육신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첫 사람 아담의 선례를 따라 사망에 이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선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며, 마침내 사망에 이릅니다. 반면 영은 예수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구원의 확신으로 생명과 평안을 누립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인 삶이며, 평안은 죄사함 받은 확신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원수(7-8) 바울은 육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기준에서 묘사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행하여서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육신의 의지는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자연인의 타락한 본성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9-11) 바울은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규정하며, 그리스도의 사람의 영적 현주소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성령께서 육신을 대신하여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과거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육신(타락한 본성)이 그의 몸과 생각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뒤로는 육신 대신 성령께서 그의 안에 살아계십니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계실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기에 거룩하신 영이 그 안에 거하십니다. 또한 그 안에 거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망 선고를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 몸 또한 부활할 것입니다. 한편,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성부)의 영, 살리신 이(성부)의 영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구원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된 사역임을 보여줍니다.
적용: 지금껏 나 스스로의 노력은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거룩한 승리를 거두려면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성령의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북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원숭이를 잡을 때 조롱박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조롱박에는 원숭이의 손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나무 열매를 잔뜩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곤 이것을 원숭이가 지나는 길목에 두고 원숭이가 이 조롱박을 발견하기까지 기다립니다. 냄새를 맡고 온 원숭이는 조롱박 구멍 속에 손을 넣고 나무 열매를 꺼내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처음 집어넣은 빈손과 달리 잔뜩 움켜쥔 손은 구멍에서 절대 빠지지 않습니다. 꽉 움켜쥔 손을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다가와도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아 결국 잡힌다고 합니다. 이때의 탈출 방법은 간단합니다.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 설 교 >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
로마서 8:5-11
▣ 국민을 잘 섬기겠다고 다짐하면서 새로운 각오로 출발한 대통령이 취임한지 100일 동안의 국민들의 평가는 실망할 정도로 아주 작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한국의 새로운 정부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국은 미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자기들의 국익을 위하여 새로운 한국 정부에 기대하는 것들이 있고 우리나라 각계각층에서 그리고 우리 국민 개개인들도 나름대로 "이렇게 해 주었으면, 저렇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시험지옥을 면케 해 주었으면 하고, 학부모들은 사교육비 안 들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고, 대학졸업자들은 많은 일자리를 기대했고, 노동자들은 더 좋은 근로조건을, 기업은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지역은 지역대로 제각기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온 국민이 바라는 소망대로 잘 살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는 더욱 이 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 요즈음 결핍증이라는 병을 무섭게 여기고 있습니다. 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이 병은 참으로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런데 "후천성 사랑결핍증"이란 질병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세상에 질병으로 죽어간 사람보다 미움으로 인하여 죽어간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미움은 상대방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치명적인 독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일3: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사랑을 강조하신 사도 요한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오늘은 "육신의 사람, 영의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종종 깊은 패배감과 절망감에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식과 함께 깊은 좌절감이 엄습해 오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깊은 패배감, 절망감, 죄의식, 좌절감에 젖어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잘 믿어보려고 결심하고, 새롭게 출발하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였는데, 오늘도 여전히 죄악의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깊은 좌절에 빠질 때도 있습니
▶ 사도 바울이 괴로워 부르짖었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파스칼은 말하기를 "우리 안에는 천사와 악마가 날마다 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선을 추구하려는 나와 악을 선호하고 악을 따라가려는 내가 내안에서 날마다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전쟁은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의 전쟁보다도 더 무서운 전쟁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이냐? 상징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싸운다는 말로 표현할 수있습니다
유다서1: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
딤후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할 중요한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싸움보다도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싸움입니다. 내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 갈등과 싸움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사람과 영을 좇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육신을 좇는 사람이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한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 법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6- "육신이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 이니라"
▶ 결국 이런 육신의 생각대로 살면 우리는 사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의 생각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동네에 지킬이라는 의학박사가 있는데 어려운 사람을 전부 무료로 치료해주고, 과부를 보살펴주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 동네에서는 자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고 사랑과 존경과 칭찬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큰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밤만 되면 흉악범이 나타나서 온 동네를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이 흉악범은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능욕하고, 약탈을 일삼아서 온 동네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굳게 작정을 했습니다. 바로 흉악범을 잡아 동네를 평화롭게 하자는 결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종소리가 울려서 모든 동네 사람이 모였는데, 거기에 흉악범이 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흉악범의 가면을 벗기는 순간 동네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흉악범은 바로 그들이 존경하는 지킬 박사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 이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한 일과 악한 일을 하는 두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선한 양심도 있지만 또 한편에는 거짓과 탐욕으로 죄를 짓게 하는 육신적이고 정욕 적인, 마귀가 기뻐하는 악한 양심도 있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에는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이라고 분류해 놓았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체와 자기 마음의 욕구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육신이 이끄는 대로 자기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육신적 의지와 감정, 육신적 지혜에 이끌려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 성경에 육에 속한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삼손을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모태 신앙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나실인,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살지 않고 육신으로 살았습니다. 육신으로 생각하고 육신으로 행동하고 육신적 감정만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신적 약점을 영적으로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육체는 건장한 사람이나 종교, 도덕적으로는 허약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끝내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나서 힘을 잃어 버렸고 비참한 말로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영의 속한 사람도 육의 속한 사람처럼 살아가면 성령께서 떠나면 모든 힘과 주어진 축복을 빼앗기고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건입니다.
롬13:14- 사도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리스도인들은 육에 속한 사람으로 육신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삶만 살아가고 육신의 정욕과 탐욕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육신을 좇아 살아가는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의 속한 사람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2. 성령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어떤 때는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차안에서 잠을 잘 때가 있습니다.
그런대 안타까운 것은 창밖에 경치가 너무 너무 아름다운데도 차안에는 거의가 잠만 자고 또 차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창밖에 아름다운 세상은 바라보지 못하고 차안에서 노래나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집에서 잠자지 방안에서 평안히 이야기 하지 돈과 시간을 들여 아름다운 곳에 무엇 하러 와야 하는가?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 안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습니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차 안에서 오직 잠자고 노래 부르고 노는 데만 정신을 팔고 아무도 그 아름다운 차창 밖의 경치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 버리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차 안에서만 논다고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마는 여행도 있습니다. 봐야할 경치는 하나도 보지 못하고 다 놓쳐 버리고 지나쳐 버릴 때가 있습니다. 외국 여행에서도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 이 이야기는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 이라는 인생열차 안에서 더 좋은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고, 아예 그러한 것에 관심도 갖지 못하고, 인생열차는 지나가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 찬송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내게 계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성령이 내게 계심이라
성령이 계셔도 계신 줄 모를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고린도 교인 중에 성령이 계신 줄도 모르고 몸을 가지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 몸이 주님이 계신 전인데 이 몸을 너희가 더럽히느냐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성도들이 성령이 계셔도 계신 줄도 모르면서 신앙생활 한다면 얼마나 외로운 일입니까? 구원받았어도 외로울 때가 많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외롭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인생을 두려워 하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같이 계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주님이 같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갑자기 죽을지라도 그 죽음 가운데도 주님이 같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육신은 고통이 조금 있을지라도 너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삶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갈2:2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복음성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승리하는 신앙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신앙이란 그리스도와 신비한 결합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부단히 호흡하면서 생각하고, 말하며, 일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에 속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젠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영에 속한 삶. 바로 내안에서 그리스도가 주인 되시고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거할 때에 성막에 머물고 있던 구름이 떠오르면 모든 백성들이 이삿짐을 싸고 구름을 따라 옮겨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구름이 머무는 곳에 머물렀습니다. 이렇게 하여 40년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구름기둥이 멈추어있는데, 한 달이든지 십년이 되어도 멈추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구름이 움직이는데도 구름을 바라보고, 그 구름을 따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으면 광야에 낙오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밤 중에 불기둥이 피어오르는데, 불기둥이 한 밤 중인데도 움직여 나가면 힘들지만 따라가야 가나안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 우리는 내 기분, 내 정서, 내 컨셉을 내려놓고 성령의 기분, 성령님의 정서, 성령님의 컨셉을 따라가야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즈음 컨셉이란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구상할 때에 목적과 개념을 정리하여 나아가려는 방향을 잡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 중심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컨셉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영적 빈혈인생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영적 빈혈 인생이다. 영적빈혈 인생은 영적으로 안색이 창백해지고 어지럽고 쉽게 피곤을 느낀다. 빈혈은 의학적으로 심한 출혈, 소화불량, 지라에 염증, 비타민B12의 부족 등 으로 생긴다고 합니다..
영적빈혈 인생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심한 출혈을 막아야 한다.
섭취한 영양분에 비해 세상일이 너무 많아서 계속하게 되면 심한 신앙적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둘째로, 편식을 막아야 한다.
편식을 막으려면 기도생활 ,성경연구, 봉사생활 등 신앙생활을 조화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연구도 신약과 구약을 조화 있게 소화시켜야 합니다.
셋째로, 소화불량을 막아야 한다.
먹기만 하고 운동하지 않는 것도 그 원인이다. 성경을 많이 아는데 생활 속에서 뜨겁게 실천하지 못할 때 영적 소화불량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지라에 염증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
체내에 염증이 생긴 것을 영적으로 비유한다면 정신적으로 삐뚤어지고 사고방식이 왜곡되고 아집이 세고 불평에 가득 찬 사람을 말한다고 합니다.
▶ 그런데 영적 빈혈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영적 재생 불량 성 빈혈이다.
세상에는 재생 불량 성 빈혈로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병은 한마디로 피가 만들어지지 않는 병입니다.
만약 나에게 영적으로 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주님에 의한 대수술을 받지 않는다면 전혀 소생할 가망성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으로부터 영적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 재생 불량 성 빈혈인생에서 예수 충만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새로운 예수님의 피가 생수의 강처럼 흘러 영적 빈혈에 시달리는 사람까지도 살려 낼 수 있는 능력으로 충만한 주님의 사도로 살았습니다.
▶ 영적 빈혈 인생을 살아가지 아니하고 성령 충만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육적인 삶 영적인 삶
미국의 전도자 무디는 자기의 생일을 묻는 이에게 항상 자신에게는 두 가지 생일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육신의 생일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고 거듭난 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모두 이 두 가지의 생일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른 두 가지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 하나는 생리적인 삶 곧 육체적인 생명이요, 또 하나는 신앙적인 삶 곧 영적인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사람들은 육적인 생명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육신의 생명을 화학적으로 분해하면 전부 3000여원 어치에 해당하는 값싼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호흡이 끊어져 죽고 나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얼굴이 아름다워도 얼마 안가서 주름이 지고 맙니다.
시편 90편에 보면 ‘인생은 70이 지나면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처럼 이 땅에서 사라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 성경의 주제는 참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아닌 영적인 생명, 영원한 생명이 성경의 주제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또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기도와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더욱 우리는 육에 속한 인생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을 따르는 사람
로마서 8:5-11 / 이규현 목사
하늘이 있고 땅이 있듯이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가 있습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영과 육의 세계를 구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다른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영을 좇느냐 육체를 좇느냐, 하늘을 추구하느냐 땅을 추구하느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느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느냐, 잠시뿐인 것에 목을 맬 것인가 영원한 것을 추구할 것인가에 따라 다른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 눈이 열리지 않으면 육신의 지배를 받아 육신을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의 세계에서는 영의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영에 눈을 뜬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깨닫는 것은 영입니다. 영으로라야 영의 일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세계가 열린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같은 십일조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돈 이야기로 듣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얘기로 들을 수 있습니다. 큰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육의 개념으로 판단하면 아무리 영적인 것이라도 육의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을 따르는 것입니다. 5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육신을 따르는 것과 영을 따르는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것은 육신에 사로잡혀 육신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육신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죄의 힘 앞에 무력하게 끌려다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삶은 자기 욕심에 이끌리고 조종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욕심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욕심은 계속 커지다가 결국에는 파멸의 길로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영을 따르는 사람은 다릅니다. 성령이 우리가 욕심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의 세계에 눈이 열리면 멀리 볼 줄 압니다. 손해를 보아도 참을 수 있는 것은 다른 세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둑으로 치면 신자는 고수입니다. 하수들은 대마가 죽는 줄도 모르고 상대의 말을 잡을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가 다 죽는 것입니다. 눈이 열리지 않으면 수가 안 보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서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매달리다가 끝이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고통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늘의 이치와 원칙에서 벗어나 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평안하고 생명을 얻는 길은 없습니다. 영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의 눈이 열렸기 때문에 망하는 길과 평안의 길을 구별해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길이 가장 축복된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그런 감각과 분별력, 영적 지각이 없었지만 영의 눈이 열려 영을 따르는 자가 되면 영의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육신을 따르는 것과 영을 따르는 것의 핵심이 ‘생각’입니다. 행동이 있기 전에 먼저 생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의 출발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창조의 세계도 열린 것입니다.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곳에 가 보면, 그 일이 있기 오래전에 어떤 사람에게 위대한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과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는 같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가 곧 나라는 존재를 결정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곧 ‘나’입니다. 생각이 곧 그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생각을 늘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삶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차이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대하면서도 생각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내 미래를 결정합니다. 현재 펼쳐진 내 삶은 지난날 내가 생각해왔던 것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생각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인격을 만들고, 인격이 일생을 만든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 일생의 출발이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변해야 삶이 변합니다.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 그 은혜는 생각에 역사가 일어나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교회의 훈련 프로그램이 중요한 이유는, 생각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기 때문에, 오랜 훈련을 통해 말씀이 지속적으로 그 영혼에 들어가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내용은 똑같은데 포장지만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근본적인 변화는 생각의 변화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은 행동과 의지까지 주장합니다. 어디에 관심을 가지느냐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요즘 많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디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늘 ‘돈, 돈, 돈’하면서 돈만 생각하고 돈만 말합니다. 돈 사람입니다.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 세상적인 생각으로 꽉 차있다면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머릿속은 온통 세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세상 한가운데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 선택의 핵심은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합니다. 한쪽은 사망이고 다른 쪽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큰 차이입니다. 영을 따르는 삶과 육신을 따르는 삶의 길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선택입니다. 어떤 사람은 ‘행동하지 않았는데 생각쯤이야’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생각을 그렇게 간단하게 취급하면 안 됩니다. 생각의 결과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6절에서는 육신의 행동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죄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에 생각도 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생각에서 사망과 생명이 결정되고, 생각에서 평안과 생명이 결정됩니다. 자신에게 평안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봐도 좋습니다. 내가 어떤 결정을 했을 때 평안이 없다면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속 시원하게 행동했는데도 평안이 없다면, 잠 못 이루고 소화가 안 된다면, 영이 아니라 육신을 좇았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위장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마음이 깨어진 것은 육신에 속해서 육신을 좇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생각을 하면 우리 안에 생명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좀 손해 보고 억울해도 평안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얻어맞고 차꼬를 매고 있으면서도 찬양을 합니다. 찬양은 마음에 평안 있을 때 나옵니다. 비록 육체는 감옥 안에 있지만 영혼은 하늘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찬양하니 간수들이 그 찬양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평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혀진 것을 우리는 ‘의’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할 때의 ‘의’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맺어져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 삶이 의를 추구하는 삶이고, 그럴 때 우리 안에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의’가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이 없고 두려움이 오고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을 할 때는 반드시 평안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영어 성경에서 생각은 마음(mind)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생각)을 관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깨어진 마음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마귀가 사람을 무너지게 하는 방식을 잘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마귀가 뿔을 달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드는 것이 아니고 교묘하고 은밀하게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문득 내 안에 들어온 이상한 생각을 분별해서 초기에 진압합니다. 이 생각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마귀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은 생각의 세계 안에서 일어납니다. 작은 생각이라도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 욕심, 분노하는 마음을 그대로 두면 그것이 자라고 결국 사고를 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생각을 그대로 두면 마치 가꾸지 않은 정원과 같이 잡초가 일어나 황폐해집니다. 처음에는 내가 생각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나를 지배합니다. 만약 죄 된 생각이 나를 지배하면 나는 생각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생각은 행동의 조종실입니다. 생각이 어디엔가에 붙들리면 거기에 사로잡혀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에 빠진다는 표현을 씁니다. 사로잡혀 있는 것이 강해지면 집착이 되고, 집착이 강해지면 정신병으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생각의 기능이 무너지면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극적인 일들은 사실 이 부분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갸룟유다는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메시아를 3년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수없이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은 30에 스승을 팔아버렸습니다. 이 역사는 아주 작은 생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탐욕의 생각에 빠지면 무슨 일을 할지 모릅니다.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은 ‘보는 것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의 것을 선택하고 보고 듣습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요즘과 같이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는 영상매체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미지로 다가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각과 영혼을 파고듭니다. 몇 초짜리 광고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영적으로 판독하고 해석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는 우리도 모르게 수많은 메시지를 전달받게 됩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한국의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줍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있어도 계속 보면 좋지 않은 것이라도 수용하게 되고, 나중에는 공감하게 됩니다.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인터넷도 그렇습니다. 다윗의 실패도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본 다윗이 고개를 돌리고,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였다면 아무 일도 아닌 일입니다. 출발은 아주 단순하고 작은 사건이었지만 들어온 생각을 허용하니까 남의 아내를 빼앗고, 살인하고, 결국 다윗 왕가에 끊임없는 거짓과 모략, 성적인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마침내 다윗가(家)가 몰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것을 볼 때, 감시자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방송국에 전화도 할 수 있고, 기준을 가지고 보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된 영상매체들에 대해서 우리는 경계심을 가지고 시민운동을 만들기도 하면서 건전한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순간 뇌 회로가 빠르게 움직여 생각이 작동되고 그 결과 행동을 낳습니다. 좋은 것을 많이 보면 비전이 되지만 좋지 않은 것을 계속 보면 범죄로 이어집니다.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좋은 메시지를 계속 들으면 영혼이 따뜻해지고 마음의 응어리들이 순화되는 것을 체험합니다.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옵니다. 생각의 세계를 질서 정연하게 가꾸는 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들이 우리의 생각과 내면을 가꾸는 것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영성이라는 주제가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외형적 종교활동으로는 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자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요즘 나는 무슨 생각을 많이 합니까? 만약 우리의 생각을 엑스레이로 찍어본다면 어떨까요? 그 생각이 내 인생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정밀 진단을 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생각은 나도 모르게 큰 종양처럼 크게 자랐을 수도 있습니다. 홀로 있을 때 하는 생각이 나의 본래 모습입니다. 신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 초점이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영에 속한 자들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자의 삶은 이기주의적인 삶입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합니다. 자주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합적이고 좀 더 넓게 바라보는 안목이 없기 때문에 자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날마다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도 이기주의자일 수 있습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화를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아진 극단적 이기주의자들도 자신의 만족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구도 희생시킬 수 있고 수단화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친족살해도 많이 생겼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서 친족 살해는 일주일에 한 건 꼴로 일어난다고 합니다. 극단적 이기주의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수단화하고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멀리 보지 못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도 이 죄를 지은 다음 일어날 일에 눈이 가리워진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나를 더 즐겁게 할까, 어떻게 하면 나를 만족시킬까 하는 자기 만족의 끝이 없습니다. 골로새서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만족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만 만족이 되지 않아 불행합니다. 욕심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망가질 대로 망가져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초점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신자는 섬김의 대상이 바뀌었습니다. 나를 만족시키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갑니다. 대상이 바뀌고 생각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이전처럼 돈을 벌지만, 돈을 버는 이유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전에 육신을 따르는 자로 살 때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독을 품고 돈을 벌었지만, 이제는 이 돈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까 하는 것입니다. 건강을 추구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우리는 땅에서 살고 있는데 하늘의 뜻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 생활을 하면서 말씀을 묵상하고 매일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면 땅의 것에 매이지 않도록 하늘의 것을 생각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도 얻고 땅도 얻습니다. 그러나 땅에만 매여있다면 땅도 하늘도 다 잃습니다. 중요한 것은 위에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야 진정하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인가 나인가, 땅인가 하늘인가, 이 세상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인가, 보이는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인가. 영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자가 되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드디어 바울이 성령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으며 육신에 따르던 삶을 청산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과 우리의 차이는 ‘영’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계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가 육신에 거하지 않고, 육신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힘으로는 영의 세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 7장에서 결론이 났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 8:3)」 성령이 오셨습니다. 9절의 말씀처럼 성령의 내주하심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가를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에 거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거나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은 우리 마음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가려고 할 때 성령이 우리를 망하는 길로 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양심에, 환경으로 고통을 주어서라도 하나님의 선한 방향으로 나가도록 간섭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욕심에 눈이 가리워졌지만,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밝히 보게 하심으로 저 길로 가면 망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니 우리는 불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집을 피우고 육신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당장 기쁨과 평안이 사라져버립니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실 것이고,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에 합당하게 살도록 이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생활을 내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떻게 보면 참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작은 차이지만 정말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신앙생활은 너무 신나고 즐겁습니다. 레일 위에 기차가 올라간 것처럼 신나게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잘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 육신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내 힘으로 하려는 것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기를 바랍니다.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려는 것을 내려놓고, 욕심에 따르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할까에 관심을 갖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우리 삶에 기쁨과 평안이 흘러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영의 생각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쓰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생각들로 가득 찰 때 성령이 친히 생명과 평안의 길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이 말씀하시는 대로 좇아가며 영의 생각으로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로마서 8:5-11 / 박상훈 목사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라고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아니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삶의 본을 보여주시려고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아니셨습니다. 사실 그렇게만 하셨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 없는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억장이 무너지듯 하셨을 것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너무 아파서 찢어지듯 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 때 땅이 진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며 죽으시는 모습을 바라보실 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도 고통 속에 떨리셨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 때 바위가 터졌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마음도 터지듯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엄청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롬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영적으로 보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육신을 따르는 자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영을 따르는 자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자입니다. 반면에 영을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먼저 육신을 따르는 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여기서 육신이라 함은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타락한 본성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자는 거듭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이전의 육신을 따라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본시 마음에 품은 생각이 바깥으로 행동이 되어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육신을 따라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육신을 생각하며 육신을 따르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육신의 일을 생각하며 육신을 따르는 자로 살지 않습니다.
고후5:21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시고, 그 대신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마치 예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죄악 된 삶을 사신 것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마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예수님의 온전한 삶을 산 것처럼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칭의 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은 성화입니다. 곧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의 삶과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의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의 삶은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 5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리스도의 사람은 육신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생각하며, 육신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영을 따르는 자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모두 성령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5절에서의 “영”도 성령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며 성령을 따르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사람도 때로는 육신의 일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은 몸의 속량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곧 회개하고 다시금 성령의 일을 생각하며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앞 절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며 육신을 따르는 자로 삽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며 성령을 따르는 자로 삽니다. 각자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먼저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으로 이끈다든지, 또는 서서히 죽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육신의 생각은 사망 그 자체입니다. 엡2:1 말씀처럼, 죄와 허물로 인해서 앞으로 죽게 될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로 인하여 이미 죽었습니다.
사망한 사람의 특징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아무리 통곡해도, 사망한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영적인 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사망한 사람은 하나님을 전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딤전5:6 말씀입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향락을 좋아합니다. 육신에 대해서는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었습니다. 하나님과는 관련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때의 생명도 하나님에 대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합니다.
나아가서 여기에 나오는 평안도 하나님에 대한 평안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있는 말씀처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하나님과 평안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과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육신을 따르는 자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영을 따르는 자입니다.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때로는 그리스도의 사람도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영의 일을 생각하며 영을 따르는 자 되어, 날마다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앞 절에서 살펴본 대로,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7절 전반부 말씀처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까닭이 밝혀집니다. 7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의사도 없고, 또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능력도 없습니다.
여기에 “Total Depravity” 곧 전적 타락 혹은 전적 부패의 교리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적 타락의 교리입니다.
렘13:23 말씀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듯이, 타락한 사람이 스스로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또한 렘17:9 말씀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육신의 생각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는 사실을 능히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육신의 생각을 고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그 결과는 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물론 여기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아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육신에 있는 자들로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육신의 본성 때문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며 육신을 따르며 삽니다.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갈5:19∼21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그들의 결과는 어떠합니까?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와 또한 높은 산에서 변형되셨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7절과 8절 말씀의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과 평안이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즐겨 복종하기 때문이라. 영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니라.”
또한 갈5:22∼23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날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영”과 “영”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나옵니다. 모두 성령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 속에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 속에 성령이 거하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으며, 유대인의 지도자였고,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았으며, 또한 백성들을 가르치던 위치에 있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간음하다가 붙들린 여자나 또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 말씀을 하셨더라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까닭은 무엇입니까? 비록 니고데모가 인간적으로는 뛰어났는지는 몰라도, 아직도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 속에는 성령이 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니고데모는 거듭나서 영에 있는 사람으로 변해야 했습니다.
니고데모만큼 우리는 사회적으로 출중하지도 못하고, 도덕적으로 뛰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 까닭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고전12:3 말씀처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습니다.
롬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살아 역사하십니다.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여기에 두 가지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몸과 영,” “죄와 의,” 그리고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이 우리의 몸이기 때문에, 영도 우리의 영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이더라도, 그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도 그의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영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앞 절에서 밝힌 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더라도 그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죽으면, 그의 몸은 죽는 것으로 끝이 나버리고 맙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은 우리 몸의 부활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엡2:1 말씀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우리에게는 우리 영의 부활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여기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인 우리 안에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거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영을 살리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역시 살리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보여주어야 할 모습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잠시 잠깐의 세상입니다. 육신대로 살지 맙시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기 바랍니다. 언제나 영의 일을 생각하며, 영을 따르는 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날마다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생각은 삶이 됩니다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생각은 삶이 됩니다.”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생각은 삶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루하루를 주로 무엇을 생각하며 사십니까?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오직 주님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한 주간 동안 제게 강력하게 다가왔던 말씀입니다. 5절과 6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아멘.
여러분?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진정 복음 앞에 서는 시간이었습니다. 새벽5시부터 밤11시까지 진정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시간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영화롭게 하라, 진리가 결론이 되게 하라.” 이 말의 의미를 분명 깨닫게 된 놀라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저 이대성의 복음 떳떳이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간에도 저 이 대성의 존재적 자아, 병든 자아는 이미 2000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나는 진정 승리자입니다. 나는 진정 예수 안에서 참으로 자유한 자입니다.”
얼마나 기쁘던지요,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진정 영의 일을 생각했더니 정말이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영생의 기쁨이 물밀듯이 밀려왔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분명 사탄 마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나를 넘어뜨리려 해도 나를 쓰러뜨리려 해도 나는 반드시 예수 이름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아니 나는 승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의 보혈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였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암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들입니다.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을 따라서 살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는 삶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영으로 자기의 육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하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두 아들과 함께 공원을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공원 안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어있었습니다. 서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벌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벌은 큰 아이의 얼굴 주변을 맴돌면서 윙윙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아이는 무심결에 손을 들어서 벌을 떨쳐내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벌은 갑자기 큰 아이의 눈언저리에 따끔하게 침을 쏘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큰 아이는 퉁퉁 부어오른 눈언저리를 손으로 쥐고서 아파 죽겠다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런데도 벌은 성에 차지 않는 듯이 이번에는 작은 아이의 얼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지레 겁을 먹고서 아버지 뒤에 숨었습니다. "아빠! 벌이 나를 물려고 해요. 살려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작은 아이를 토닥거려주면서 이렇게 달랬습니다. "얘야, 겁먹지 말아라. 이미 저 벌은 네 형을 쏘았기 때문에 그 벌에는 더 이상 침이 없단다. 너를 쏘려고 해도 쏠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큰 아이의 얼굴에 박혀있는 벌의 침을 뽑아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작은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아라. 여기 벌의 침이 있잖아! 저 벌이 너를 위협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침으로서 너를 해치지는 못한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의 침은 사망,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죄는 무서운 침을 이미 쏘아버렸습니다. 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침을 쏘았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사망의 침을 이미 쏘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망의 침으로 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5:5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의 모든 요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사망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되 어떤 모양으로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그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또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기만 하시라고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본을 보여주라는 단순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만 하셨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되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그 아들 예수님의 몸에 죄를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 가운데 죽는 모습을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의 광경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 하셨을 것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너무 아파서 찢어지는 듯 하셨을 것입니다.
땅이 진동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며 죽으시는 모습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의 마음도 고통 속에 떨리셨을 것입니다. 바위가 터졌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도 터지는 듯한 아픔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처럼 엄청난 일을 통해서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으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치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바울은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육신을 따라서 살지 말고, 영을 따라서 살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영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영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이 육신의 삶을 살면 잘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사망입니다. 우리가 영을 따라서 영의 일을 생각할 때, 그 속에는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우리의 과거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육신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반절 말씀입니다.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영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육신의 일을 생각하면 잘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 속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3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영을 따라서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평탄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형통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육의 일에 치중하지 말고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영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영을 따라 영의 일을 생각하십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삶이 됩니다. 우리가 늘 언제나 영의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안이 늘 언제나 저와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넘쳐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왜 우리가 육신의 일을 생각해서는 안됩니까? 다같이 따라합시다. “육신의 일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7절 상반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반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아니,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과는 정 반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신의 생각에 이끌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7-8절 말씀과 정 반대로 살면 됩니다. 제가 7-8절 말씀을 정 반대로 읽어 보겠습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즐겨 굴복하기 때문이요, 굴복할 수밖에 없음이라. 영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할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엄청난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단코 포기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할진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으면서도 계속해서 육신의 생각에 얽매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버리고 마시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으로 영의 일을 생각하도록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러하시기에 우리가 육신의 생각에 골똘하면 골똘할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쳐서라도 영의 사람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환난과 시련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까닭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진정 영의 사람으로 바꾸시려고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끝까지 포기치 않으시고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사인이 왔을 때 육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180도 바꾸겠노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 후로는 늘 언제나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9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누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완벽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랍비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삶을 가르쳤습니다.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가르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그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만일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나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셨더라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니고데모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못될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여러분? 두 가지가 서로 예리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몸"은 "영"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는 "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죽은 것"은 "산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이 두 가지 가운데서 무엇을 택해야 마땅하겠습니까? 몸이 아니라 영을 택해야 합니다. 죄가 아니라 의를 택해야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을 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 곧 부패한 육신의 행실을 좇아서 살아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를 인하여 산 것, 곧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홀연히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1절 말씀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온전히 바뀌어 질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우리 육의 몸 또한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 질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우리는 육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모든 일들을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겨버렸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부패한 육신 때문에 영과 육의 갈등 속에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육의 사람처럼 육신의 일에 치중치 마시고,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우리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주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과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입니다. 잠시 잠깐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하여 죽은 몸의 행실에 따라 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을 따라서 영의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은 진정 삶이 됩니다. 우리가 진정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영의 일을 생각하며 살면 진정 생명과 평안을 누립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전혀 기도에 힘쓰고 오직 주만 바라보며 사는 자에게, 어찌 우리 주님께서 모른다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내가 진정 영의 일을 생각하며 삶에도 도리어 더 큰 고통과 슬픔이 찾아 왔다면 그것까지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부터 1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아멘.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생각은 진정 우리의 삶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 어떤 생각을 하며 사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후로는 영의 생각, 영을 따르는 삶을 살아 진정 사탄 마귀와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뿐 만 아니라, 예수 생명, 예수 평안이 넘치는 거룩한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래도 좋은 생각
로마서 8:5-6 / 최성규 목사
우리는 ‘착각은 자유’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착각이 자유가 아니라, 생각이 자유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생각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생각의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이라고 말씀합니다. 가룟 유다는 생각 관리에 실패해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시간 관리, 방향 관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각 관리입니다. 생각에는 좋은 생각이 있고, 나쁜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생각은 영의 생각입니다. 나쁜 생각은 육의 생각입니다. 성경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육의 생각만 합니다. 성도들도 환경을 보며 육의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롬 8:6)라고 말씀합니다. 나쁜 생각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그래도 좋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우울해도, 그래도 좋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쁜 생각이 들어도, 그래도 좋은 생각으로 채워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새가 당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당신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의 생각을 할 때, 우리의 삶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6). 좋은 생각이 어떤 생각인지 알아봄으로, 육의 생각에 지배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영의 생각으로 세상을 바꾸는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
첫째,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
조용기 목사님은 가마니를 깔고, 뚫어진 천막을 치고 교회를 개척할 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긍정적인 말의 고백을 통해 생각 속에 들어오는 부정적인 생각을 쫓아내셨습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100년 전만 해도 휴대폰과 컴퓨터의 상용화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휴대폰과 컴퓨터를 사용합니다. 제가 어릴 때, 고향에는 교회가 없었고, 예수를 믿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불가능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당장 현실이 어렵다고 불가능을 생각하지 맙시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안 될 이유를 먼저 찾습니다.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말을 합니다. 안 될 이유가 100%라 하더라도 우리는 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안 되더라도, 하나님은 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모두 어떤 상황에서도 갈렙처럼 고백합시다. 갈렙은 가나안 땅 정탐 후, 그들을 ‘밥’으로 생각했습니다(민 14:9). 85세일 때도 헤브론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근거는 자신의 능력이나 군사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갈렙의 긍정적 생각은 하나님으로 인한 긍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 14:8)고 고백합니다. 노년의 나이에도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고 선포하며 나아갔습니다. 갈렙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때문에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보고 믿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믿고 보는 존재입니다. 믿으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어떤 문제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믿음대로 이루어주십니다.
둘째,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선한 생각
성경에 이름이 비슷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롯과 룻입니다. 이름은 비슷했지만, 삶은 정반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하면서 큰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창 13:5-6).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불행했습니다. 자신의 행복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복을 많이 받아서 좁은 땅에 함께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가고 싶은 곳을 먼저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롯은 한번 사양도 하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좋은 땅을 냉큼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복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룻은 이방 여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에 아픔이 가득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너의 행복을 찾아 떠나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모두의 행복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기로 작정합니다. 룻의 선한 생각이 결국 룻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고,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영예까지 얻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시어머니인 나오미도, 남편인 보아스도, 룻도 모두 행복해졌습니다.
우리는 선택 앞에서 수많은 생각을 합니다. 롯처럼 자신의 이익만 먼저 생각하다가는 소탐대실(小貪大失)하게 됩니다.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생각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생각이란 룻처럼 모두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복만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선택한 룻은, 자기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모두 행복하게 했습니다. 너를 행복하게 하면, 나도 행복해집니다. 모두의 행복을 구하면, 나의 행복은 배가 됩니다. 우리 모두가 나만 생각하는 좁은 생각을 버리고, 모두를 생각하는 대인배가 되어서, 모두 행복하게 삽시다.
셋째, 은혜를 마음에 새기는 감사 생각
목회를 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다보면, 인간관계를 잘 맺는 비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비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람을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사람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기억하고, 감사를 표현하면, 감사를 받는 사람과 감사하는 사람 모두 행복해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행복에 겨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크신 은혜를 매일 생각합니까? 이 크신 은혜에 매일 감사합니까?
바울은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심에 감사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직분을 맡기심에 감사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바울의 삶을 생각해보면 고난의 연속입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고백합니다. 은혜를 마음에 새기는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사람의 은혜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에게도 감사할 때, 그 사회는 건강해집니다. 행복한 사회가 됩니다.
생각은 영의 생각도 있고, 육의 생각도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생각을 하면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좋은 생각은 제일 큰 자산입니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자산입니다. 우리가 좋은 생각을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고, 모두 행복하고, 인류가 행복해질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