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나? 출근길에 바라본 하늘은 어제와 다르게 어두워 보인다. 오늘도 어김없이 720-2번 버스에 올라타 자리에 앉는다. 아직 방학기간이라 버스 안은 한가롭다. 창가옆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꿈속처럼 아련하게 들리는 제랄드 졸링의 Spanish heart를 들으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하는 집시의 피가 내 안에도 있는 건지 불현듯 이대로 무작정 떠나고 싶다. 누군가는 그 동안 실컷 놀았으니 엄살 그만 떨고 열심히 일을 하라지만,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판을 두들겨야 하는 요즘 나의 삶은 속칭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다.
버스는 어느새 수원역을 지나 서호 초등학교 앞을 지나고 있다. 문득 중학교 때 이 곳 어디쯤에 살았던 친구의 집에 놀러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두리번거려보지만, 희미하기만 한 그 아이의 얼굴처럼 생판 모르는 남처럼 낯설기만 하다. 이름도 생김새도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 시간들이 짙은 안개에 숨어 버린 건지. 막연한 그리움에 젖어 있는 내 귀에 다음 내릴 곳은 ‘푸른지대’란 소리가 들린다. 스무 살 어느 여름날 자주 찾아갔던 푸른지대엔 포도밭이 많았다. 내가 좋아한 이들과 포도를 먹으러 갔던 농원들이 내 눈앞에서 휙 휙 사라지고 있다.
내달리던 버스는 고색 산업단지 정류장 앞에 잠시 멈춰 선다. 제법 많은 승객들이 버스에서 내려 총총히 산업단지 안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 버스는 조금 있으면 수원시를 벗어날 것이다. 서서히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화성시로 진입하면서 간간히 허허 벌판에 내리는 승객을 바라보며 저들은 이아침에 어디로 가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동양매직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면 이젠 나도 이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회사에 들어서는 순간, 내 안의 모든 갈등과 감정은 모두 사라진다. 의자에 앉기 무섭게 컴퓨터를 켜고 업무에 필요한 사이트에 접속한 후 모니터 창에 띄운다. 이제부터 내 열 손가락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모니터를 끝없이 응시하며, 웹상으로 들어오는 신청건을 재빠르게 그들의 요구에 맞게 접수를 해야 한다. 사정없이 네이트 상으로 들어오는 질문에도 재빠르게 답을 해줘야 한다. 숨이 차도록 다들 급하다는 내용뿐이다.
저녁 일곱 시, 아침에 지나쳐온 그 길을 다시 되짚어가며 가고 있다. 창밖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본다.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이맘때가 되면 음악을 듣는 것도 시큰둥해진다. 나는 왜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버리고 무엇에 쫓기듯 서둘러 취직을 한 걸까? 요즘 나는 하루하루를 버리고 있다. 아니 버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그래도 말입니다. 어디를 갔다 왔다는 흔적은 남잖아요. 그날 미네르바가 없었다면 그 웹상의 신청건과 넷상의 질문들은 소통이 되지 않는 불통이 되어버렸을 겁니다. 충분히 하루하루를 채워 나가는 삶이었습니다. 싫으면 나 취직 시켜줘요~~-50년째 백수-
와!!! 너무 멋져요. 50년 간의 외길 인생ㅋㅋㅋ
바쁜 하루를 잘 보고갑니다. 수고 많이 하세요.
수고 많이 하는거 저 싫어해요. ㅎㅎ
애고 그점은 저와 같네요.^*^
즐길 수 있는 '의미'가 있을 거예요. 생기를 찾읍시다! 홧팅!
파이팅!!
박차고 나오세요. 용기가 필요할 때 입니다. 드넓은 자유의 공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허무와 무료함으로 인한 심란한 마음까지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선생님! 저 재취업한지 며칠 안 되었어요. 벌써 박차고 나오긴 좀 ..., 그리고 심란한 마음 감당할 자신 없어 걍 다닐게요. ㅎㅎㅎ
서선생님이 미낼바 취직시켜줘요잉. 하하...
아마 모든분들이 같은 창살없는 감옥에서 오늘도 고군분투 하실겁니다. 그래도 일 할 수 있는 직장이 있어 행복하다고 생각 하시며 꿀꺽~ 하고 참으시지요.아니면 칵~ 때려치워 버리시던가....ㅋㅋㅋㅋ... 봄이 눈 앞에 왔습니다. 항상 즐거움만 생각 하시기 바랍니다. ^^
꿀꺽 아님 칵~~~
미네르바님 홧팅~. 저도 퇴직을 앞두고 생각이 아주 많답니다. 울 아이들이 지들 핑계대지 말라고 하더군요. 다시 어디로 취업을 할수 있을지도 걱정이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인것 같아서 결정했습니다.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살고있는 그대에게 꾀병을 부린듯하네.. 꽃자리도 미네르바도 모두 모두 파이팅!!!!
저도 같은 버스에 타고 한 바퀴 휘~이익 돌아 하루를 살아내고 저녁을 맞이한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자주 뵈어요. 카페에서
배달나가는 치킨집 오토바이를 봅니다. 주말연휴에도 생업을 계속하고있는 그와 연휴혜택을 누리고있는 나는 서로 비교할만한 무엇이 있는가? 어쨌든 일은 경제를 위해서도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정년은 7년 남았네.
정년까지 7년이나 남으셨군요. ^!^
대충 자유인으로 편하게 즐기지 않구서..그새 재취업을 하셨구랴. 거기도 화장실에 비데 있수? 비데를 너머 좋아 하지 마슈..
비데를 좋아할 시간이 없어요. 그대신 사무실과 복도에 화초가 참 많아요. 울 사장님이 화초 마니아인가봐요.
님과 마음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 전해지네요, '쉼' 조차 쉴수없는 그런 마음, 그것일까요?
제 마음이 휠휠 날아 나비님에게로 날아갔나요?
보헤미안..집시 피가 흐르는 당신.. 규격 속에 갇혀살려니 조금은 괴롭겄어요.. 훨훨 날며 날개짓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싶을 텐데....하지만 때가 오겠지요.. 지둘러봐요..
저 같이 우울증에 걸린 분이 또 있었네요. 이런이런..ㅉㅉ 저도 한동안 그랬었는데... 최근엔 퇴근후 취미 활동도 하고 에세이스트 같은 카페에 가입도 하면서 삶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힘냅시다. 화이팅!!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