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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 강을 건넜을 당시 카이사르는 단 한 개 군단만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8년간의 갈리아 정복을 거치며 생긴 결원을 보충하지 않았기 때문에 1개 군단이라고 해도 10개 대대 5천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에 지나지 않았죠. 하지만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에 퍼져있는 자신의 군대를 집결시키지 않고 단 한 개 군단만으로 일단 수도 로마로 진군을 감행합니다. 한 마디로 속공 전략이었죠. 원로원의 최종권고가 도착한지 채 2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아무 방비도 되어있지 않을 폼페이우스의 허를 찌른 겁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만 사로잡는다면 내전은 그 순간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무능한 원로들 쯤은 더 이상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걸 쌍방 모두가 알고 있었죠.
1월 17일,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 소식을 전해들은 직후 곧바로 원로들과 현직 집정관 등을 모두 거느리고 즉시 로마를 떠납니다.
폼페이우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탈리아 동남부의 해안도시 브린디시를 향해 남하합니다. 브린디시로 가는 도중에 들른 카푸아에는 자신의 2개 군단 1만5천의 병력이 있어 카이사르가 거느린 10개 대대 5천 병력규모의 세 배의 군세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실전 경험도 없는 신병 부대 따위로 당시 로마 최강의 정예부대인 카이사르의 부대를 상대하는 모험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남하를 계속합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는 와중에도 계속 회담을 제의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폼페이우스는 매번 거절합니다.
3월 17일, 폼페이우스를 태운 배가 브린디시를 출항합니다. 폼페이우스가 떠나기 전 카이사르도 이미 브린디시에 도착해 있었지만 미리 모든 배를 징발해버린 폼페이우스의 군세를 바다쪽에서 포위할 길이 없어 카이사르는 어쩔 수 없이 눈 앞에서 폼페이우스의 선단이 항구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로써 내전을 조기에 수습하려던 카이사르의 의도는 일단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속공 전략으로 카이사르는 별 힘도 안 들이고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본국을 손에 넣었으니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었죠.
10. 웅대한 대전략
뜻밖에 허를 찔려 급히 퇴각해야 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서 무사히 떠난 순간 자신에게 승기가 돌아왔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동부와 북아프리카 지역 전체를 평정하여 휘하의 세력으로 거느리고 있었고 에스파냐 총독의 권한까지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이탈리아 밖으로 눈을 돌리면 폼페이우스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카이사르로서는 자신이 정복한 북부의 갈리아 지역을 제외한 세 방면이 모두 적대적인 세력권이었습니다. 게다가 해군이라고는 전무한 카이사르로서는 지중해 전체가 전장이 될 경우 삼면이 포위되는 형세라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 밖에 없었죠. 바로 이 점을 두 전략가는 모두 알고 있었고 카이사르가 가장 두려워하고 막으려 했던 것 또한 이것이었습니다.
경제적 상황을 보면, 카이사르가 자신의 세력인 갈리아와 이탈리아 반도에서 1년 동안 거둘 수 있는 세금은 은화로 5천만 데나리우스에 지나지 않은 반면, 폼페이우스가 1년에 거두어 들이는 속주세는 무려 그 서너배인 2억 에 달했습니다.
요컨대 경제력과 병력의 수에서 절대적으로 밀리고 해군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상황, 이 절망적인 상황이 당시 카이사르가 처해있는 현실이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넘어가 휘하의 세력을 총동원하여 힘을 결집하고 삼면에서 카이사르를 포위하여 압박하는 대전략을 실행합니다. 제해권을 모두 자신이 쥐고 있는 이상, 카이사르는 자신이 있는 그리스로 넘어올 수도 없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유리한 것은 자신이라고 폼페이우스는 확신하고 있었죠.
11. 전투력
여기서 잠시,
그렇다면 모든 면에서 카이사르가 불리했는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카이사르는 무려 8년 동안이나 갈리아 전역에서 숱한 사선을 넘어 단련된 당시 지중해 최강의 정예병사 3만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직접 써서 발간한 <갈리아 전쟁기> 를 모두 읽은 폼페이우스도 당연히 이것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카이사르와의 정면대결을 보류한 것이죠. 폼페이우스 또한 양이 아닌 질로 승부하는 전략가였기 때문에 이 카이사르의 3만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동시대 거의 모든 로마인들이 폼페이우스의 승리를 점쳤던 것과는 정반대로 폼페이우스는 싸우면 불리한 건 자신쪽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죠.
그리고
"그가 아무리 최고의 지휘관이라고 하나 그는 병사가 없다."
...라고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던 카이사르 또한 이걸 알고 있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전쟁의 향상은 병사가 적은 장군은 어떻게든 싸우려 하고 병사가 많은 장군은 어떻게든 시간을 끄는 다소 괴이한 양상을 띄게 됩니다.
당시 폼페이우스를 따라 그리스로 건너간 모든 원로들은 틈만 나면 압도적인 병력을 끌어모아 카이사르와 일대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는데 폼페이우스는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고 끌어모은 병력의 수도 10개 군단 6만을 넘지 않았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당시 마음만 먹으면 10만 대군도 끌어모을 수 있을 정도로 자금력과 인력이 모두 부족하지 않았죠.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해적소탕 같은 넓은 지역을 제압할 때에는 12만까지도 병력을 부렸지만 그 외에는 한번도 10개 군단이 넘는 대병력을 부린 적이 없습니다. 카이사르와의 일전을 앞두고도 딱 10개 군단을 소집하고 이들을 훈련시키는데에만 혼신의 노력을 쏟아부었죠.
과거의 한니발은 9만이 넘는 대병력을 끌어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로마를 치러 갈 때는 4만 6천으로 알프스를 넘었고 로마 역대 최고의 전략가인 스키피오 또한 9개 군단 이상을 부린 적이 한번도 없으며 이들보다 훨씬 이전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겨우 3만6천을 이끌고 대제국 페르시아로 쳐들어갔습니다.
하여간 고대의 지중해 세계 전략가들은 한결같이 4,5만 정도의 군세를 가장 좋아했고 소수정예에 환장하는 변태들이었던 건 확실합니다(;;;;). 수가 적으니 일단 보급이 싸게 먹힌다는 이점도 있고 전술운용이 훨씬 더 자유롭다는 이점 때문에 전쟁 좀 할 줄 아는 지휘관일수록 대군보다 소수정예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죠. 이것 때문에 "고대 지중해 세계는 병력이 적은 쪽이 이긴다." 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죠.
덧붙이자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모두 퇴장한 뒤 일어나는 내전에서는 10만 대 10만이 붙는 대전투도 나오는데 이건 도저히 전술이고 뭐고 없는 그냥 막싸움이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붙었던 내전기를 읽다가 이걸 보면 가히 글을 보는 눈이 썩을 지경입니다.
각설하고, 요컨대 둘의 전력을 비교하면 병력의 질이나 충성심,사기 면에서는 카이사르 쪽이 비교도 안되게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모든' 부분은 폼페이우스가 압도적으로 우세했죠.
11. 개막. 지중해 대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출항하자마자 곧바로 발길을 돌려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어진 브린디시를 떠나 수도 로마로 북상합니다. 폼페이우스가 브린디시에서 떠난지 2주가 지난 시점, 로마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진퇴양난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스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는 현재 오합지졸들만 거느리고 있는 상황, 지금 당장 그리스로 쳐들어가서 폼페이우스를 친다면 승리는 거의 확실했으나 문제는 그것을 실현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선단을 꾸릴 자금이 없으니 뱃길로 이틀 거리인 그리스를 갈 수가 없었죠. 북쪽으로 아드리아 해를 끼고 돌아가는 육로가 있긴 했으나 이 루트는 거의 한달이 넘게 소모되기 때문에 자칫 배후의 에스파냐에서 역습이라도 온다면 적진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죠.
그런데 이 때 로마에 도착한 카이사르에게 뜻밖의 낭보가 전해집니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이 도주할 때 너무 급히 가는 바람에 수도의 국고에 그해 예산이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곧바로 국고를 살포시 털어줍니다. 꽤 넉넉한 군자금을 확보한 셈이죠.
그리고 이 돈 문제가 당분간 해결되자 카이사르는 한 가지에 생각이 미칩니다. 배후를 정리하기로 한 것이죠.
로마에 도착한지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카이사르는 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합니다. 폼페이우스와의 내전 기간 동안 카이사르는 단 한 순간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속공전략을 고수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질 폼페이우스의 군세를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변변한 군대가 없는 폼페이우스의 역공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판단, 곧바로 '서쪽' 을 들이치기로 한 카이사르의 이 속전속결의 한 수는 절묘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지중해 서부세력권인 에스파냐에는 폼페이우스 휘하의 세 명의 사령관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병력을 모두 합할 경우 무려 9만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병력의 수 따위에 겁을 집어먹을 리는 없었죠.
12. 서부전선(BC 49)
로마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로마를 떠나 북상하는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최정예 6개 군단 3만병력에 총 출동명령을 내립니다. 드디어 당시 지중해 최강의 부대인 '카이사르의 군대' 가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직접 이탈리아에서 1만5천의 군대를 끌고 북상하여 서쪽으로 진격합니다. 합류하게 되면 총 4만5천 8개 군단에 달하는 대병력. 에스파냐를 단숨에 제패할 수 있을 만큼의 대군이 되는 것이죠. 빠른 속도로 행군을 서두른 카이사르는 이미 2주가 지난 시점에 갈리아 남부 지역에 진입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1) 마르세유
이탈리아에서 에스파냐로 가는 중간 길목에는 갈리아 남부 최대의 도시, 마르세유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마르세유가 폼페이우스파를 자처하며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성문을 닫아 버립니다. 카이사르로서는 서쪽 길목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데다 배후를 정리한다는 본래의 목적 때문에라도 이 마르세유를 장악해둬야만 했습니다.하지만 마르세유는 당시 지중해 서쪽에서 가장 발달한 대도시였고 또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단기간에 함락이 불가능한 도시였습니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던 카이사르는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곤란하다고 판단, 이 마르세유를 포위하는데 2개 군단을 남겨두고 자신은 6개 군단을 이끌고 에스파냐로 넘어갑니다.
2) 레리다
당초에는 8개 군단 4만5천의 대병력으로 단숨에 에스파냐를 처리하려 했지만 뜻밖에 마르세유라는 장애물이 나타나 3만의 군세만을 데리고 에스파냐로 건너온 카이사르는 바르셀로나에서 서쪽으로 100여 킬로미터 쯤 떨어진 레리다에 도착합니다. 이 레리다에는 폼페이우스 파의 에스파냐 삼 장군 중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 두 사령관이 7만8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하고 있었죠.
카이사르는 적 진영을 보자마자 자신의 군대가 공격하기 불리한 위치에 있음을 간파하고 먼저 적 진영과 레리다 시 사이의 보급로를 끊는 일에 착수합니다. 하지만 이때 폭우가 쏟아져서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참호를 팔 수 없게 되었죠. 설상가상으로 카이사르 쪽의 다리가 모두 물살에 떠내려가 오히려 카이사르가 고립무원의 위기에 빠집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폼페이우스 측 장병들은 한껏 기세가 올랐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부대는 실컷 좋아하고 있는 폼페이우스 측 병사들에게 보라는 듯이 너비가 거의 10미터에 달하는 운하를 여러 개 파버렸습니다. 물길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려버리자 이제 폼페이우스 측의 보급로가 막혀버렸죠.
눈 앞에서 강물의 흐름이 바뀌는 기적을 본 폼페이우스 진영의 두 장수는 미련없이 남쪽으로 퇴각을 결심합니다. 에스파냐 남부에는 삼 장군 중의 한 명인 바로의 2개 군단도 있었기 때문에 남부로 전선을 옮겨 병력을 결집하여 카이사르를 최대한 묶어두자는 전략이었죠.
3) 에브로 강
에스파냐 동북부 카탈루냐 지방에서 남부인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가기 위해선 에브로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에브로 강을 거의 눈 앞에 둔 시점, 이미 강행군으로 먼저 도착해 있는 카이사르의 군대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강을 건널 수 없게 된 폼페이우스 진영의 두 장군은 어떻게든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퇴각하기를 반복했지만 카이사르의 추격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고 보급로마저 완전히 차단당하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대병력이면서도 자꾸 도망만 가는 적을 쫓는데 지친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오히려 몸이 근질거려 빨리 싸우자고 장교들을 달달 볶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곧 항복할 적과 "굳이 싸워 희생을 만들 필요가 없다" 며 청을 물립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한 수순이지만, 이미 전의를 잃고 탈영병이 속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폼페이우스 진영은 사절을 보내 전면적인 항복을 제의합니다.
4) 에스파냐 완전 평정
카이사르는 항복한 폼페이우스 진영의 병사들을 모두 제대시키고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에게는 거취 선택의 자유를 줍니다. 능력은 없어도 충성심은 남달랐는지 이 둘은 모두 폼페이우스가 있는 그리스로 떠납니다.
2개 군단 1만2천여 병력으로 에스파냐 남부를 지키고 있던 바로는 카이사르의 군대가 접근하자마자 곧바로 투항합니다. 이로써 에스파냐 땅에서 폼페이우스의 세력은 완전 무력화 되었고 전혀 병력의 희생없이 에스파냐를 완전히 평정한 카이사르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다시 로마로 향합니다.
로마로 돌아 가는길에 끝까지 저항하던 마르세유마저 함락시키고 배후를 완전히 정리한 이 때가 기원전 49년 10월. 4월에 로마에서 에스파냐로 진격한지 반년도 되지 않아 이룬 성과였습니다. 루비콘 강을 도하한 때부터 줄곧 속공으로 일관해 오던 카이사르의 전격작전이 다시 한번 완벽하게 먹혀들어간 셈이죠.
13. 장군 멍군
카이사르가 에스파냐를 평정한 이 시기, 다른 전장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카이사르의 군단장들 중 카이사르의 신임을 얻고 있던 심복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카이사르의 유능한 부관 안토니우스였고 다른 한 명은 용감하기로 유명한 쿠리오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이 쿠리오에게 4개 군단을 주어 지중해 남부의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했는데 이 4개 군단이 유바의 군대에 대패하여 전멸당한 것입니다. 사령관 쿠리오마저 전사한 통렬한 패배였습니다.
폼페이우스에게는 어차피 거리가 너무 멀어 보급도 원활히 할 수 없고 경제력도 없는 서부전선보다는 이 북아프리카 전선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에, 이 지중해 남부전선에서의 승리는 다시금 폼페이우스 진영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죠.
카이사르가 수도 로마로 복귀하기 전, 한 통의 비보가 더 전해집니다. 카이사르는 에스파냐로 출정하기 전, 국고에서 얻은 자금으로 어떻게든 해군을 편성하여 40척의 배로 이루어진 선단을 구축하고 그 지휘를 두 장군, 안토니우스의 동생 가이우스와 로마 역대 최고의 웅변가 치체로의 사위로 유명한 돌라벨라에게 맡겼었는데 이 해군이 폼페이우스 휘하의 해군 사령관 리보의 선단의 파상공격에 전멸해버립니다. 카이사르는 또 다시 배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죠.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간 전선에서는 탁월한 전술로 승리했지만 휘하의 수하들에게 맡긴 다른 전선에서의 전략대결에서는 폼페이우스가 승리했습니다. 한번씩 주고받은 상황, 이로써 약 한 달간의 소강상태, 대치국면이 조성되었죠. 그리고 이 대치국면이 길어질 경우 유리해지는 건 당연히 자금력이 풍부한 폼페이우스였습니다.
14. 그리스로
카이사르로서는 어떻게든 이 바다를 건너가 폼페이우스와 일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아직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건너간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훈련이 덜 되어 있는 폼페이우스의 군대와 싸운다면 반드시 이길 자신이 있었죠. 군선은 거의 한 척도 없고 수송선의 수도 부족한 카이사르로서는 고작 이틀거리의 뱃길이라도 건너기가 지난한 일이었지만 카이사르는 도박을 해서라도 이 난관을 타파하기로 결심합니다.
과감하기로는 옛날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도 울고 갈 카이사르는 비록 무모한 짓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폼페이우스의 허를 찌르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이미 군대가 월동에 들어갈 무렵인 겨울철에 배를 띄우기로 결심합니다.
본래 겨울철의 지중해는 거친 북풍이 불어 통상적으로 항해가 금기시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폼페이우스의 선단도 모두 항구에 정박해 있었죠.
카이사르는 금기시되는 겨울철 항해와 겨울철 군사활동을 모두 감행한 셈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한 가지 난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배가 너무 부족하여 한번에 수송을 할 수도 없어 병력을 나누어 2회 수송을 해야할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1진을 이끌고 먼저 그리스로 건너간 다음 곧바로 수송선단을 왕복시켜 남아있는 2진을 안토니우스가 이끌고 오도록 계획합니다. 게다가 최대한 많은 인원을 태우기 위해 먼저간 1진은 최소한의 식량을 제외한 모든 짐을 후발대에게 맡기죠.
좋게 말하면 과감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한 이 그리스 상륙 작전은 결과적으로 멋지게 성공합니다. 상식을 깨고 한겨울인 1월에 배를 띄운 카이사르의 1진은 행운까지 따라주어 단 한 명의 손실도 없이 거친 바다를 건너 무사히 그리스 해안에 상륙하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넘어 로마로 진격한 이후 꼬박 1년, 드디어 두 영웅이 만날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Civilization IV - Baba Yetu (piano).sw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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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아무래도 다음편에서 결판이 나겠군요 ㅎㅎ 궁금해 하실 분은 별로 없겠지만 막짤 독일책 (다스 엔데 덜 뢰미션 레푸블릭? 이렇게 읽는거 맞나요???) 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 로마공화국의 종말
인데 한국에 번역되서 출간된게 있는지 모르겠네요. 재밌을 것 같은데...
아무튼 다음편은.....조만간 또 올리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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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잼있게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ㅎㅎㅎ
책을 읽었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다음내용이 다시금 궁금해지네요 ㅋㅋㅋ
저도 로마인 이야기 2권부터 6권까지는 최소 다섯 번은 본 것 같네요 ㅎㅎ 로마시대 왠만한 전략가들은 그때 다 쏟아져 나오니까요.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수고하십니다 읽을때마다 현기증이 나네요... 못기다리겠어요 ㅠㅠ ㅋㅋ
ㅋㅋㅋㅋ 조만간 또 올리겠습니다 ^^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 ^^
잘보고 있습니다! 항상 기다려져요! ㅋ
감사합니다! ^^
로마인이야기 처음 봤을때 느낌이 살아나네요ㅋ
본문에 치체로는 키케로를 말씀하신거죠?
존롤스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입니다ㅎ
넵 ㅎㅎㅎ 제가 라틴어 발음을 몰라서 거의 헷갈리는 건 이딸리아노로 표음합니다 ㅎ;;;
흥미진진하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ㅎㅎ ^^
재미있게 일고가요^^
감사합니다! ^^
재미있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ㅋ
수고스러울 것까지야....ㅎㅎㅎ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