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주영혜
엊그제 술을 너무도 사랑했던 친척이 쉰둘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알콜 중독으로 인한 간 손상이 원인이란다. 형제들이 많아서인지 장례식장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쓸쓸한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 소리 내어 비통하게 울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서일까?' '그의 생전에 가족들이 받은 고통이 그만큼 커서일까? 10여 년 전 사업을 실패하기 전, 그는 훌륭한 학벌에 매력적인 신사였다. 특유의 농담 섞인 말투로 분위기를 띄워주어 분위기메이커란 소리까지 들었다. 깊은 밤 가로등처럼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었고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알코올 중독의 늪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불현듯 근사한 슈트를 입고 가족들과 행복한 식사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현실인듯 떠올랐다. 남들보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야 함이 얼마나 두렵고 아쉬웠을까... 너무 가엾어서 가슴 저 밑바닥이 데인 것처럼 아려온다. 그분이 좋은 곳으로 가시길 촛불 같은 염원 담아 기원해본다.
세상엔 수많은 중독이 있다. 알콜중독, 마약중독, 도박중독, 게임중독 운동중독 니코틴중독 등... 이중 마약중독, 도박중독은 사랑의 힘보다 더 강하다고 한다. 영국이 들여온 아편은 중국 청나라 백성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했다. 조선시대에는 놀음 빚 대신 어린 딸을 노인한테 팔아넘기는 슬프고도 기막힌 일도 종종 일어났었다. 농경사회의 특성상 겨울철 농한기에 사랑방에 모여 화투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 중독에 노출되기 쉬웠던 것 같다. 중독은 지나치면 물질은 물론 건강, 신뢰, 꿈과 소망까지도 모두 앗아가 버린다. 한 인간을 비참한 파멸로 이끌 뿐 아니라 원초적 쉼터가 되어주는 가정까지도 무너뜨릴 수 있다. 이처럼 중독은 대부분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하지만 때로는 적당한 중독이 필요하기도 하다. 직장 일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에는 약간의 중독이 필요하다. 지치고 싫증 나는데도 수많은 시간을 참고 견디며 일해야 한다면 그건 고통이 아닌가? 약간의 중독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 성장의 좋은 불씨가 되기도 한다. 좋아하는 일에 푹 빠지고 열정을 다할 수 있는 건 축복된 일이다. 그 일을 하는 시간엔 힘듦보단 즐거움으로 채워진다.
배우자와 수십 년을 함께 하다 보면 어찌 다 맘에 들 수 있겠는가? 멋지고 사랑스러웠던 행동조차도 때로는 답답함으로 느껴질 때가 있을 게다. 평범한 일상의 감사함이 권태로움으로 퇴색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남편과 아내에게 적당히 콩깍지가 씌어지면 좋겠다. 그러면 작은 일에 넉넉한 너그러움으로 서로를 품게 된다. 상대에게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진한 향이 느껴진다. 익숙한 편안함으로 애틋하기까지 하다. 한 사람에게 모두를 내어줄 수 있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저 미소가 지어진다. 아가페적인 사랑처럼 계산이 앞서지않는 태고적 순수함이다.
하지만 살면서 보고 들은 것 중, 문제 있는 것들에는 애초에 발을 깊게 담그지 않는 게 좋겠다. 강철같은 의지력의 소유자라 해도, 중독이라는 깊고 끈적한 늪에 빠지면 발 빼는 게 쉽지 않다. 인간은 나약한 속성을 숙명처럼 지니고 태어난 신의 피조물이니까.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지나침은 금물이다. 하지만 열정 담긴 중독이라면 충분히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