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극장*-대구 98/ 상희구
어저께 오후 백주 대낮에, 대구시 교동校洞 양키시장 인근에서 엄청난 총격사건이 일어났다. 일단의 무법자들이 난입해서는 마구 총을 난사하는가 하면 살인, 재물 약탈, 부녀자 겁탈까지 실로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는데 기이하게도 이런 끔찍한 사건에도 당국에 신고하는 이, 한 사람 없었고 관할 파출소나 경찰서 어느 곳도 팔짱만 낀 채 수수방관, 아예 무시해버렸다 한다.
나중에 백일하에 범인들의 신분이 밝혀졌는데 그들의 면면이란 것이 이러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리안 코흐, 지안마리아 불론테, 울프강 럭치
* 자유극장 : 대구 양키시장 인근에 위치한 5, 60년대 대구의 유수한 외국영화 개봉관
- 시집『대구大邱』 (황금알,2012) ....................................................... 양키시장에서 향촌동 건너가는 길목에 위치한 자유극장은 건너편 송죽극장과 함께 6,70년대 대구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34년에 개관한 자유극장은 처음 개봉관이었으나 70년대부터는 이른바 2류 극장인 재개봉관으로 바뀌었다. 개봉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요금 부담이 적어 젊은이들이 주로 찾는 극장극장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황야의 무법자와 왕우의 외팔이 시리즈를 본 것도 자유극장에서였다. 또 건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전음악감상실 <녹향>이 있었고 ‘뉴델제과’가 있었으며 일대에는 청춘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동성로와 중앙통에서부터 그 일대까지를 통칭 ‘시내’라고 불렀다. 아마 내 청춘의 첫사랑을 두근거리며 처음 기다렸던 곳도 그 언저리 어디였을 것이다.
1970년대 초 대구의 극장 수는 3류 따라지 극장까지 포함하여 서른 개가 넘었다. 가히 극장 전성시대였다. 신도, 신성, 미도, 남도 등 변두리 극장은 후라이보이 체리보이 등이 쇼를 주도하는 쇼 전문 극장이었다. 양훈 양석천이 단골 코미디언이었고 가끔 남진 나훈아 등의 인기가수도 출연했다. 이들 극장들이 1980년대 컬러TV의 등장으로 먼저 '3류 극장'부터 퇴출되기 시작하더니 2류 극장들도 차차 문을 닫기 시작했다. 아마 자유극장도 이 무렵에 문을 닫았을 것이다. 1990년대 들어 복합상영관의 등장으로 6개 개봉관마저 차례로 폐업신고를 내더니만 올봄엔 대구 최초의 영화관인 ‘만경관’이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96년 만에 영업종료를 알려 이제 옛 극장의 자취는 온데간데없다.
1970년대의 대구는 겉으론 평온했으며, 어려운 살림에도 극장의 필름이 차르르 돌아가듯 그런대로 무난히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70년대의 그 엄혹함을 기억한다면 결코 삼삼하게 낭만적으로 추억될 수는 없으리라. 1971년 9대 대통령 선거에서 별의별 부정선거 관권선거 금권선거를 다 동원하고, 극도의 지역감정을 부추기고서도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간신히 이겼다. 이때부터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온갖 유언비어들이 난무했다. 이효상 국회의장의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 도토리 신세가 된다."에서부터 시작하여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경상도에 피바람이 분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했다. 불안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 10월 비상계엄과 함께 유신헌법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72년 11월, 경북대 학생운동의 구심에 서있던 여정남은 유신헌법 반대집회로 구속되었다가 고문을 받고 풀려난다. 이후에도 유신반대시위가 이어졌고 1974년 서울에선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 배포와 함께 각 대학의 대규모 시위가 펼쳐졌다. 74년 4월 긴급조치 4호가 발령되었다. 이때 여정남은 다시 체포되어 구속된다. 같은 날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사건 및 2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군법회의는 인혁당 피고인 21명 중 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틀 뒤에는 민청학련 피고인 여정남,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 7명에게도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여정남을 제외한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은 감형되거나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인혁당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했다.
1.2차 인혁당 사건은 사법부 사상 가장 치욕적인 흑역사였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6.3 항쟁이 발생한 해에 같이 일어났고, 2015년 재심에 의해 최종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50년이 걸렸다. 그리고 1975년 4월9일 민청학련 관련자 중 유일하게 남은 여정남과 2차 인혁당 관련자 7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대법원의 판결과 사형 집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정권에 의해 기획된 명백한 살인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 중 사형수 8명이 모두 대구 등 영남 출신이었다. 왜일까. 대구의 ‘야성’은 뿌리가 깊다. 일제 때 항일투사들을 가장 많이 배출했으며 해방정국에서 청년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도 대구였다. 1946년 ‘10월 항쟁’은 대구가 중심이었다.
당시 노동자와 농민 계층이 일으킨 대도시 민중항쟁으로는 대구가 유일했을 정도로 대구는 진보성향의 도시였다. 1956년 대선에선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전국에서 최다득표를 한 지역이 대구 경북이었다. 박정희 정권 초창기까지도 대구는 대표적인 야당도시였다.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윤보선과 맞붙은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는 광주․전남에서 52%를, 대구․경북에서 50%를 득표했다. 그러다가 김대중과 맞붙은 1971년 대선 때는 박정희가 영남에서 72%라는 몰표를 받았다.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권이 노골적인 지역감정을 조장한 결과였다. 대구 경북이 박정희 정권의 전략적 근거지가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이 반대 저항 세력의 주요 근거지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극단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인혁계 지도자들을 제거하였다. 이때부터 그러니까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인해 정통 야도 대구가 완전히 박정희 정권의 품에 안기게 되었던 것이다. 대구는 오늘날까지 보수의 상징이자 영남 패권의 중심지로 전락한 채 얼룩진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실로 ‘엄청난 만행’이 저질러졌는데도 우리는 영화를 보듯 그것을 그냥 넘겨버렸다. 서른하나 젊은 나이에 처참한 고문으로 강요된 허위자백과 꼭두각시 재판을 거쳐 형장으로 끌려간 비극의 주인공 여정남을, 인혁당 사건에 희생된 대구와 영남사람들을 기억한다면 고분고분 그 망령에 길들여질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같이 분노하는 사회에서만 정의는 실현된다.”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시인 솔론의 말이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그 망령에서 벗어날 기회를 만나랴. 과거의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팔짱만 낀 채 수수방관’할 것인가. ‘자유극장’도 없어진 마당에 그리워하고 집착할 과거에 대한 향수가 있기나 한가. 권영진 후보가 선거운동 중 한 장애인 여성에게 떠밀려 넘어져 꼬리뼈를 다치는 부상을 당했다. ‘할리우드 액션’이란 조롱도 있으나, 그건 아니고 단지 운이 나빴고 순발력이 발휘되지 못한 탓인 것 같다. 권 후보 측은 처음 ‘백주의 선거 테러’로 규정했다가 나중에는 원희룡 후보를 벤치마킹하는 선에서 정리가 된듯하다. 하지만 권 후보도 박정희 때부터 시작된 지난 수십 년의 정치독점 도가니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감지하였을 것이다. 어디서나 앓는 소리가 들리지만 대구야말로 지난 10년 간 경제 사정은 전국 최저이고 지역사회도 활력을 잃었다. 대구의 자존심과 희망을 찾기 위해서라도 투표는 꼭 해야겠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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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