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살랑살랑 얼굴을 간지럽히고 빼곡한 송림에선 진한 솔향기가 배어나왔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찾아든 새봄을 펼쳐 보이는 신어산은 그 이름처럼 신령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걸친 두터운 외투가 거추장스러웠고 등에선 금세 땀이 솟았다. 사실 오늘 산행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무릎관절을 이유로 산이라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아내인지라 차라리 미리 알리지 않는 편이 더 나았던 것이다. 그래야만 낮은 산이나마 산행에 성공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현직에서 물러난 10년 뒤 살던 대도시를 떠나왔다. 새로 삶의 둥지를 튼 인구 30만의 신도시 아파트에선 강 건너 신어산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파트 18층의 서재나 거실 침실에서 무시로 고개만 돌리면 나타나는 게 신어산이었다. 그래서 저 산에 올라 몸담은 아파트를 조망해보자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산이 날 향해 손짓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 그런 느낌을 받은 때가 9년 전 이맘때인 초봄이었다. 그날이 그날인 백수의 삶인데도 미루기 잘하는 습관 때문인지 산을 찾아 나서질 못한 채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랬으니 이러다간 영영 신어산을 오르지 못하고 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신어산을 얼마나 가볍게 보았으면 주말 오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찾았던 것일까. 그것은 김해 율하의 오찬장에서 산으로 직행한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결단코 산을 낮추어본 것은 아니었다. 신어산은 강 건너 금정산처럼 화강암 계열의 토르가 온통 뒤덮고 있는 바위산이었다. 그런데도 소나무가 울창하게 빼곡했고 참나무를 비롯한 낙엽교목들도 찾아든 봄기운에 낯빛이 달라보였다.
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3개로 갈라지는 지점의 중턱에 고찰 은하사가 자리한다. 깎아지른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절집을 감싸고 있어 산에서는 더없는 명당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반세기 전 현직 때 절에서 전기를 사용하겠다고 신청하여 답사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온전히 남은 건 별로 없다. 신어산이란 이름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과 허황옥 왕비의 신화에서 유래한다. 신어는 수로왕릉 정면에 새겨진 두 마리 물고기로 인도 아유타국과 가락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카펫처럼 부드러움을 안겨주는 산의 종주능선은 근교를 대표하는 워킹 코스이자 부산을 에워싼 연봉들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로 꼽힌다. 이곳에서는 빤히 바라보이는 금정산과 태백산맥의 구봉산에서 몰운대로 뻗은 낙동정맥의 산군은 물론 지리산 영신봉에서 분성산에 닿는 낙남정맥의 산들까지 조망할 수 있다. 또한 신어산과 이웃한 무척산 그리고 강 건너 물금의 오봉산과 원동면 토곡산 웅상읍의 원효산과 천성산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꼭 정상을 오르고 말겠다는 나의 결기를 눈치 챘는지 아내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등산로에 붙은 팻말이 가리키는 암자까지만 다녀오자고 했다. 하지만 그 암자라는 것이 정상 턱밑에 바짝 붙어있어 암자가 곧 정상이나 다름없었다. 산의 중턱을 지나면서부터 토종소나무 군락이 나타났다. 하늘로 쭉쭉 뻗은 개량종 소나무들보다 꼬불꼬불 예술미를 갖춘 나무들을 카메라에 담자니 입가에 미소가 배어나왔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 같지 않은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처럼 무례한 말을 소나무들이 듣는다면 그들은 얼마나 열을 받을까 싶었다.
산 초입에 바위를 깎아 세운 몇 점의 김해예찬 시비 곁엔 '나무의 마음'을 노래한 노산 이은상의 시도 들어있어서 선정한 이들의 혜안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여 카메라에 나타나는 영상은 역광으로 흑백 이미지에 가까웠고 층을 이룬 암반과 그곳에 뿌리박은 나목들은 무채색 이미지로 다가왔다. 주말 오후인지라 산을 내려서는 등산객들과 나들이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난 노인에게 산 정상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 대신 아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첫눈에도 아내가 산을 오를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란 걸 알았던 모양이다. 산을 오르면서 카메라에 풍광을 담느라 하산하는 사람들을 살피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인사를 건네 오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산을 내려서는 중년사내 둘은 싱글벙글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우정이 부러웠다. 그들은 암자 안내판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등 뒤에서 인사를 해왔다. 폰을 건네받아 바위에 뿌리박고 선 거송을 배경으로 두 사람을 찍어주었더니 무척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오늘 따라 동서로 뻗은 신어산을 북동쪽으로 감돌아 흐르는 낙동강이 더없이 유장하다.
산의 남쪽으론 광활한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지만 도시가 산업화되면서 옛 곡창지대는 많이 사라졌다. 신어산이 짧은 시간에 오를 수 있는 명산임을 알게 되자 조금 전 레스토랑에서 아무런 말없이 헤어진 처가 동기간이 떠올랐다. 이젠 가이드로서 그들을 초대해서 올라도 될 것 같으니 위안이 되기도 한다. 옹졸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신어산엔 눈에 거슬리는 시설물도 없지 않았다. 부자도시를 자랑하듯 거의 꼭대기까지 천편일률적으로 설치한 데크계단은 이미 부식되기 시작했고 골조인 철제빔은 그 정도가 심했다.
차라리 돈이 적게 드는 원형 나무토막계단이 운치가 있어 보였다. 바위산에 맞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돌계단을 만들었더라면 수명도 반영구적이고 친환경적이 아닐까 싶었다. 정자 밑 억새와 진달래 군락지 평원을 가로지르는 등산로엔 황톳길에다 끝까지 멍석을 깔았다. 화학섬유 멍석재료가 썩고 분해되면서 생태계에 미칠 영향이 투자한 예산보다 더 걱정스러웠다. 황토는 입자가 곱기 때문에 산소를 많이 함유하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미생물이 자라면서 다양한 효소가 그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정화능력이 우수한 것이다.
그러고 황토길을 걸으면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불면증 해소와 피로회복에도 도움을 준다. 정상에 부는 바람을 걱정한 건지 아니면 평원의 꽃과 억새를 눈앞에서 감상코자 그랬는지 6각형정자가 산 정상이 아닌 주등산로 밑에 자리 잡은 것 또한 낯설게 다가왔다. 여러 말 보탤 필요 없이 서울 남산의 팔각정을 떠올린다면 그 답은 명확해질 것이다. 반백년 전 그때는 김해가 부산의 변방에 불과했고 양식이 귀했던 시절인지라 곡창지대로만 알려져 있었다. 김해공항이 들어선 울만 덕두도 수리시설이 잘 갖춰진 평야의 일부였다.
김해가 고향인 사람에겐 어떻게 들릴는지 모르지만 당시 김해는 부정하게 전기를 사용하는 비중이 타지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급기야 전력회사는 부산 서면의 사업장을 하루 문 닫아 걸고 전 직원을 풀어 김해지역 도전 잡기에 나섰던 기억도 있다. 더 기괴한 풍문은 김해교도소(공식명칭 부산교도소)는 김해 사람들로만 채워도 모자란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그랬던 김해가 2천 년대 들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울산 구미 포항 창원처럼 대단지 공업도시를 빼고는 경기 안산 다음으로 큰 산업도시로 변모했던 것이다.
산에선 공항이 가까워 산 위를 오가는 항공기들이 이어지고 그 굉음이 공장에서 울리는 소음처럼 끊이지 않고 들렸다. 산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동식물들이 소음공해에 시달릴 것 같았다. 신적인 물고기 즉 신어가 있는 산은 그 모양이 거북을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산에는 신령스러운 거북바위 설화를 지닌 ‘영구암靈龜庵’이 있었다. 암자의 3층 석탑 주변이 거북의 머리이고 대웅전 앞이 목이란다. 또한 삼성각 뒤 봉우리가 등껍질인데 꼬리부분이 산의 정상이란 주장은 좀 엉뚱해 보인다.
옛 가야에 불교가 전해진지 어언 2천년이다. 인도 아유타국 장유화상은 불법전파를 위해 가락7암자를 세웠고 이곳 신어산 남쪽 중턱의 영구암이 그 으뜸 암자였다. 다대포 몰운대의 영구암은 큰 거북이 산을 오르는 형상으로 영험한 기운이 강해 선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는 남방제일 선원으로 꼽히기도 했었다. 산을 오른 신령스런 거북은 이곳 신어산에 머물러 멀리 동해를 굽어보며 뭇 중생을 지혜의 바다로 이끄는 서원을 품고 불국토 구현을 염원하는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산을 내려서는 시각의 일몰은 갈길 급한 나그네를 떠오르게 했다. 송림 사이로 찬란한 빛이 보이나 했더니 어느새 사위가 어둑어둑해졌다. 아내는 무릎을 절뚝거리면서 남편에게 안 들릴 만큼 구시렁대며 저만치 앞서서 하산하고 있었다. 도로에 닿자 아내를 벤치에 기다리게 해놓고 주차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 사이에 아내는 고양이를 만났던 모양이다. 황금색으로 복부가 심하게 팽창한 고양이가 해거름에 먹이를 찾아 사람에게 접근했던 것.
하지만 등산배낭이 없는데 고양이의 먹이가 있을 리 만무했고 벤치의 오른쪽과 왼쪽을 옮겨가며 머리로 사람을 툭툭 치며 치근대던 고양이는 틀림없이 뱃속에 새끼를 가졌을 거라고 했다. 고양이도 호랑이와 같은 맹수의 야성을 지녔지만 싹 숨기고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건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차가 경사진 도로를 거의 다 내려설 때까지 우린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못한 짠한 마음을 서로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