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8년에 광해군(光海君)이 조선 15대 왕으로 즉위하자, 대북파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역모를 꾀하였다는 이유로 소북파의 영수(領首) 류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소북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이를 빌미로 상궁 김개시와 이이첨(李爾瞻),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었다.
그리고 대북파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선조의 적통인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때마침 그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 사건이 몇년뒤에 계축년에 일어난다. 이를 계축옥사(癸丑獄事)라고 한다.
같은 해 1608년 광해가 즉위 하는 해에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김평손" 등의 연명(連名)으로 '서자(庶子)들에게도 관계에 진출할 수 기회를 주도록 허통 상소'하였다.
이는 광해군이 세자시절에 보여주었든 양반들만 과거를 치루는 것을 일반 서자와 상민들에게도 같이 치뤄 실력위주로 사람을 가려 벼슬길을 열어주어 또 다른 계층에 인물들을 두루 정치에 참여시키겠다는 광해군의 본 마음을 알기에 상소를 하였다.
하지만 이를 두고 광해군은 자기를 왕위에 올려주었든 대북파 조차 결사 반대로 인해 이들이 올린 상소는 허락 할 수 없었다.
1613년 광해군 5년 7명의 서자들이 자신이 올린 상소가 허락되지 않자(서자들도 벼슬에 오를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의 상소), 불만이 쌓였다.
이들은 소양강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짓고 옛날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세상을 냉소하였다. 때로는 생활이 궁핍해지면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아예 여주(驪州)에 모여 서로 결의형제하고 도적이 되어 악행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이 훗날 칠서(七庶)의 난(亂)¹으로 발전한다.
★. 칠서(七庶)의 난(亂)¹: 박응서(朴應犀:박순(朴淳)의 서자(庶子) ·서양갑(徐羊甲: 목사 서익(牧使 徐益)의 庶子) ·심우영(沈友英:심현(沈鉉)의 庶子) ·이경준(李耕俊: 병사 이제신(兵使 李濟臣)의 庶子) ·박치인(朴致仁: 상산군 박충간(商山君 朴忠侃)의 庶子) ·박치의(朴致毅: 박치인(朴致仁)의 제(弟: 동생) / 박충간(朴忠侃)의 庶子) ·김평손(金平孫) 등 고관들의 자제들이나 서출(庶出)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혔음을 한탄하며 세상을 증오했던 7인의 서자(庶子)들이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조선의 3대 왕인 태종 이방원은 왕으로 즉위하자 슬그머니 교지를 하나 내린다. "서자 출신은 결코 관직에 등용하지 말것"..
조선 건국의 아버지이자 숙명의 라이벌인 정도전의 모든 것을 철처히 짓?는 것이다. 그로 인해 조선 초기까지 별탈 없든 정실과 측실 자식들의 관직에 변화가 태종에 의해 생기면서 조선이 끝날 때까지 이 법이 지겨며 많은 이들이 한과 눈물로 한 세상을 보낸 것이다.
단지 정도전이 서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태종이 교지를 내리든 날부터 양반의 서자들의 벼슬 길을 법적으로 막아 버렸다.>>
그들은 결국 조령(조령/새재 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 죽이고 은자 500냥을 강탈하는 사건으로 붙잡혔는데, 포도청에서 그들을 심문하는 중에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의 농간에 꾐에 빠져들어 하지도 않은 역모사건에 연루된다. 이들은 이렇게 모음 자금으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이를 사주한 자는 대비 김씨와 외할아버지 격인 김제남이 연루되었다고 자백을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계축화옥(癸丑禍獄 1613, 광해군 5)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대북파는 광해군을 옹립하였고, 소북파는 어린 영창대군을 옹호하였다. 실권파인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당시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였지만, 영창대군(광해군의 동생, 선조의 적통)의 외할아버지(선조의 장인)인 김제남(金悌男: 서인)만 증거가 없어 방면하였으나 대북파로써는 눈에 가시였다.
마침 조령에서 일으난 칠서들의 강도살인 사건을 이이첨(李爾瞻)은 이들을 역모로 몰았다. 그들은 이이첨(李爾瞻)이 시킨데로 자백을 하였다. 자기들은 친분(아버지들과 같은 서인)이 있는 김제남이 시켜서 자금을 모아 군을 양성하여 지금의 혼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옹립한다는게 계획이었다고 허위 자백을 받아내었다. 칠서의 목숨을 담보로 말이다..(박응서의 옥).
결국 그들로부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또한, 사건을 취조하는 동안 김제남(金悌男)과 인목왕후 부녀가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의 첫번째 왕후)의 무덤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로 인해 김제남(金悌男)은 사사(賜死)되었고, 그의 세 아들 역시 처형당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다.
이후 영창대군은 당시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하여 증살(烝殺...증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죽을 당시 그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정온'이 그 의문을 제기하기에 '광해군'은 '정항(鄭沆)'을 불러 철저히 조사하지만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
1613년(광해군 5) 칠서들과 친하게 지낸 이유로 혀균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평소 친교가 있던 서자 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광해의 오른팔인 격인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해 목숨을 구했고, 대북파(大北派)에 일원으로 열심히 참여했다.
광해의 장남 즉, 세자의 비는 이이첨의 자식이었다.몇해 동안 후사를 보지 못하자 광해는 허균의 자식으로 하여금 후비로 간택한다. 이예 이이첨괴 허균은 보이지 않는 파워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그중 가장 혀균의 큰 실수는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던 "문창부원군 유희분, 병조판서 박승종,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모함한 것이다.
이예 기자헌(奇自獻)은 자신들을 모함한 사람이 허균이라고 반대 주장하였으나 허균과 파워게임에서 진 기자헌(奇自獻)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하지만 기자헌(奇自獻)의 아들이자 허균의 제자이기도 했던 '기준격(奇俊格)'은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허균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에 허균도 억울하다며 맞상소를 올려 변명하려 했다. 이예 광해의 오른팔인 이이첨은 수하들을 총동원하여 폐모론을 주장한 허균을 탄핵하였고, 기준격과 함께 그를 반역 죄인으로 몰아 붙였다.
설상가상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누군가가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내용은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격문은 후에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인 것으로 밝혀진다.
결국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 앞에서 살벌한 국문이 열게 된다. 이른바 허균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국문이었다. 국문 중에 허균과 고변을 발고한 제자인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허균은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응하게 된다.
광해는 허균에 대한 역적 연좌와 적몰, 집을 부수고 못을 파는 일, 그 지역의 수령을 파직하는 일, 그 읍호를 강등하는 일 등을 모두 율문에 따라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심복들과 함께 창덕궁 인정전 잎 저자거리에서 혀균은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
4) 광해의 정치
이러한 옥사와 역모 사건이 광해 때에도 빈번하였다. 하지만 광해는 아버지 선조 때 부터 봐 온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무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당파를 초월한 이원익(동인과 남인), 이항복(서인), 이덕형(동인과 남인)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일으난 전쟁에서 재조지은(명나라를 도와 군대파견에 찬성)의 기치를 꺼내든 신하들과 명과 북방 정세의 정확한 정보력으로 광해는 신하들과 척을 지면서도 명과 후금 어느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광해는 조선의 실리가 최우선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이 같은 결정으로 훗날 서인들에게 계축옥사와 더불어 또 한번에 반정에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2. 서인(西人)과 능양군이종(綾陽君 李倧)의 반란.
1) 인조 반정
1620년(광해군 12년)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서와 이귀·김자점·최명길과 그의 형 최내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
광해군 15년인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밤 능양군(綾陽君)과 서인을 주축으로 한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
이이반(李而?)이 도중에 밀고하였으나 서인들은 예정대로 거사는 실행에 옮겨졌다. 능양군과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심기원, 구굉, 구인후, 최명길, 최내길 등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어 반란군들이 입궁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강등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 때 광해군 정권 때의 권세가였던 이이첨 · 정인홍 · 유희분을 비롯하여 무려 40여 명이 참수되었고 숙청되어 귀양간 자가 200여 명이라 전해진다.
반정 모의에 참여했으나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당했다. 조선 역사에서 일어난 4번의 쿠데타 중에서 인조반정처럼 반대파를 철저하게 압살한 적은 없었다.
또한 정인홍의 경우 당시 88세의 고령으로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처형하였다. 그것도 사약이 아닌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정승을 지낸 인물 및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처형할 때 목을 베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1689년 송시열이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은 것과 상반된다.
이로써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 정권의 우상인 조식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받았다. 이리하여 인조는 저 유명한 인조반정으로 숙부인 광해군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조선의 역사상 성공한 반정은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 반정과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이다.
하지만 그는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남한산성에서 오랑캐로만 여겼던 청의 "홍타이지" 즉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우리 역사의 치욕의 순간을 직접 경험한 왕이다. 그 외에도 장남을 살해하고(독살설), 며느리와 손자까지 깡그리 죽여야 했든 인물이다.
2) 인조의 가계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의 다섯번째 아들인 정안군이다. 서자의 손자이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왕이 되기에는 많은 약점을 가진 가계이다. 정안군은 선조와 인빈 감씨 사이의 소생에선 3번째 아들이다.
인빈 김씨¹는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와 함께 선조의 후궁에서 사랑을 많이 받은 여인들이다. 공빈 사후 인빈 김씨가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녀의 아들 신성군은 광해군과 세자 자리를 다투며 그 지위를 가장 위협하기도 했던 아들이 되지만 임진란에 15살 나이로 신성군은 사망한다.
★.인빈 김씨¹: 명종 10년인 1555년 전생서주부(典牲署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효성(李孝性)의 딸 전주 이씨이다. 그녀의 외조부인 이효성은 왕실의 일원으로,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의 증손자이다.
또 그녀의 언니가 신경과 결혼하여 낳은 딸은 광해군의 후궁으로 책봉된 숙원 신씨이다.
인순왕후(명종의 비)가 선조에게 후궁으로 추천하여 1573년(선조 6년) 종4품 숙원(淑媛)에 책봉되었다. 이후 정3품 소용(昭容), 종2품 숙의(淑儀), 종1품 귀인(貴人)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에 정1품 인빈(仁嬪)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광해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후궁이었던 공빈 김씨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죽자 선조의 총애가 모두 인빈에게 옮겨가게 되었으며, 또 이때를 틈타 그녀의 아우인 김공량(金公諒)이 이산해 부자와 결탁하여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한 정철 등을 유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선조의 광해군에 대한 총애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세자이던 시절에는 선조의 미움을 받던 광해군을 변호하기도 하였고, 임해군의 옥사가 있을 때에는 그녀의 소생들이 정사 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광해군은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라고 까지 하였다
그녀는 1613년(광해군 5년)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조회를 3일간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나 사헌부에서 "인빈은 후궁일 따름이니, 법에 조회를 중지하는 예가 없었고, 예에도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사사로운 은혜로 예법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대하여 무마되었다고 한다.
인빈 김씨의 후손들이 인조 이후에도 계속 조선의 왕위를 물려 받는다.
선조와 그녀 사이에는 4남 5녀를 두었다. 아들만 기록하겠다.
장남 : 의안군 성 (義安君 珹, 1577년 ~ 1588년)
차남 : 신성군 후 (信城君 珝, 1578년 ~ 1592년) ? 신립의 딸과 결혼 손녀 : 전주 이씨 - 죽산(竹山) 안씨 안홍량(安弘量, 1590년 - 1616년)에게 출가.
삼남 : 원종 부 (정원군, 定遠君 ?, 元宗, 1580년 ~ 1619년) ? 능성 구씨 구사맹의 딸(인헌왕후)과 결혼 손자 : 능양대군 종(綾陽大君 倧) - 인조 손자 : 능원대군 보(綾原大君 ?) 손자 : 능창대군 전(綾昌大君 佺) 사남 : 의창군 광 (義昌君 珖, 1589년 ~ 1645년) ? 양천 허씨 허성(허균의 형)의 딸과 결혼
인빈 김씨는 신성군을 통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신성군이 병사하여 그 꿈을 접은 듯 했으나 그녀는 때를 기다렸다.
선조의 새로운 계비인 인목왕후가 적통인 "영창대군"을 생산하자 현실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꿈을 접고 한때 적대적이었던 광해군쪽으로 적극 지지하게 된다. 언니의 딸(조카)를 광해의 후궁으로 보내 광해와 가족이 된다.
그녀의 선견지명으로 인해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이 목숨을 잃는 피바람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자식들을 무사히 보호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도 탄탄하게 구축해 두었는데 병사한 신성군은 임진란에 탄금대에서 목숨을 잃은 신립 장군의 사위였다.
그녀의 또 다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정원군(인빈 김씨의 삼남)의 장인은 강직하고 명망 높은 "구순"의 손녀였다. 이 결혼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인빈 김씨의 오래비인 김공량은 선조의 총애를 받는 여동생을 믿고 여러가지 세도를 부리다가 구순에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이에 김공량이 인빈을 찾아가 하소연 하고 구순을 험담하자 오히려 인빈은 선조를 설득해 구순의 손녀를 자신의 셋째 아들과 혼인시킴으로써 명망 높은 구순을 인척으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이러한 대범한 처세술과 자신의 아이들과 조정의 주요인물들과 맺어 놓은 인척관계를 보면 그녀 만큼 권력의 성격을 잘 이해한 궁중 여인도 없었는듯 하다. 이러한 연유로 훗날 인조 반정의 주역은 신립 장군의 후손들과 구순의 후손들이 참여하게 된다.
정원군은 부인 구씨와의 사이에서 세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인 능양군이 바로 훗날의 인조이다. 능양군의 뒤를 이은 동생들인 능원군과 능창군은 일찍 세상을 떠난 정원군의 형들인 의안군과 신성군의 양자가 되어 그 가계를 잇게 하였다.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에 대한 평가는 "인조실록" 과 "선조실록"에 서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인조실록"에서는 당연히 정원군과 능양군(인조)는 어린시절 부터 비범하고 출중하여 선조의 사랑을 받고 왕이 될 조짐들이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의 기록들에는 정안군은 임해군, 순화군과 더불어 선조의 망나니 아들 3명중 한명으로 일컫어진다.
임진 왜란 당시 일본군과 내통하여 밀거래를 하여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고, 지방에 행차하며 막대한 금품을 약탈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 했다고 한다. 이런 망나니짓을 하고도 무사할수 있었던 것은 단지 선조의 총애를 받은 어머니인 인빈 김씨와 그녀가 쌓아둔 인맥과 처세 덕이었다.
3) 능양군 시절에 인조...
능양군(인조)는 할아버지인 선조의 배려를 통해 사저에서 자라지 않고 궁중에서 자랐다.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에게도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기록에는 5, 6세 때에도 선조가 품안에 두고 번거러워 하지 않고 귀여워 했다고 하니 그의 어린시절은 궁궐에서 사랑받으며 행복한 시기를 보낸것 같다.
선조가 별세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는 아버지 정원군을 따라 경희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인렬왕후가 되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과 가례를 올린 후에는 사저로 분가하였다. 능양군이 18세 때 맏아들인 소현세자를 얻는다.
광해군의 치세에서도 인빈 김씨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탈했던 그 자식들도 그녀의 사후(광해군 5년 이후)2년 뒤인 광해군 7년(1615년)에 신경희의 옥사로 일컫어지는 사건을 맞아 신성군의 양자가 되었던 동생인 능창군이 유배를 당하고 자결 하게되는 사건이 일어난다.(실제로는 영창대군과 같이 증살(蒸殺) 했다고 함)
4) 인조 반정에 원인과 후원자들
이는 수안군수 신경희가 획책하던 모반에 추대되었다는 고변을 받은 광해군이 역모의 수괴로 능창군을 강화로 유배하여 살해한 사건으로 이후 광해군은 정원군과 능창군의 집을 빼앗고 그자리에 인경궁을 짓는다.
아들을 잃고 집까지 빼앗긴 정원군(인조의 아버지)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으로 4년동안 화병으로 자리를 보전하다 죽는다. 이후 정원군의 아내였던 구씨 부인은 남편과 아들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위해 친정 식구들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반정을 계획하게 된다.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다보면 남자들이 전면에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그 뒤에 남성들 못지않은 강단을 지닌 여성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죽은 신성군이 신립의 사위였으므로 신성군의 양자인 능창군의 죽음에 신립 장군의 아들인 신경진도 가담하였고 구씨의 친정 오빠인 구굉과 함께 반정의 주축 세력이 되게 된다.
이는 무인 세력과 여러 인물들의 가담을 불러오게 된다. 구인희, 김류, 이귀, 김자점, 최명길, 이괄등의 인물들이 반정에 가담하게 되었고 광해군이 인목대비 유폐라는 유교적 사상하에 패륜이라는 최악의 악수를 두면서 당파를 초월한 사대부 전체와 적대하게 되자 이를 주요 명분 중 하나로 삼아 광해 15년(1623년) 3월 12일 밤 마침내 거사를 일으켜 능양군(인조)이 몸소 무장하고 일가 친척들이 수장으로 있는 군사들을 직접 이끌고 새벽에 궁궐을 들이치게 된다..
5) 1623년 4월 11일..인조 반정..
사실 반정의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소문으로 초기 군사를 이끌기로 한 김류는 집에서 두문불출 하다가 이괄의 설득으로 합류하는 등의 혼란이 있었고 반정의 정보는 그 전 해인 1622년에는 계획이 누설되어 이귀, 신경진이 거사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있기도 했으나 너무나 많은 역모, 고변, 국문등에 진력이 난 광해군은 이러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말았다가 결국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왕위를 잃게 되었다.
거사날 능양군과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심기원, 구굉, 구인후, 최명길, 최내길 등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궁궐의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어 비교적 손쉽게 반정에 성공하게 된다.
반정군이 궁안으로 진입하자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이던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사로잡혀 반란군 과 광해 보다 9살이나 어린 어머니인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그녀는 반정 후 폐위된 내 죄악을 33세 가지나 조목조목 나열했다. 자잘한 것은 없는 것으로 넘기더라도 나의 죄악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나보다 아홉 살 어리긴 하지만 엄연히 어머니뻘인 자기를 폐서인하고 자기 아버지(김제남)를 죽였으며,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범한 죄.
2. 과도한 토목공사(경복궁 복원)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죄.
3. 결정적으로 임진란을 극복 할 수 있었든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소홀히 하고 오랑캐 나라(여진)인 후금과 '밀통'했다는 죄로 그 책임을 물어 공도 없고 덕도 없는 왕자의 신분인 "군(君)" 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 를 보내졌다.
광해군 정권하의 세력가이던 이이첨, 정인홍, 유희분을 비롯한 고관대작 40여명이 참수되고 숙청되어 귀양을 간 사람이 200여명에 달했습니다. 조정의 고관 대신이 40여명이나 참수되는 일은 사실 연산군 때의 사화에서도 없었던 일로 인조와 반정세력의 광포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이와 같이 쿠데타나 반정에서 반대파를 완벽하게 압살할 수 있었던 경우의 드문 사례가 된 인조반정은 그 여파로 그 후에 조선의 외교나 정책이 한 방향으로만 향하게 되는 원인이 되어 결국엔 나라를 또 한번 도탄에 빠지게 한다.
반정의 주요 명분중 하나가 인목대비의 폐위와 유폐였으므로 반정군은 인목대비를 복위하고 그녀의 교서를 받아 인조를 즉위시키는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은 권력을 쟁취하고자 한 명분일뿐 인조 즉위후에는 인목대비를 크게 예우 하지 않고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만다.
또한 논공 행상에서 공정하지 않아 내부적인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는 앞서의 반대세력을 철저히 제거 할수 있었던 부분과 맞물려 인조의 치세가 순탄하지 않게 흘러가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정상적이라면 왕이 될수는 없었을 서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약점 또한 인조의 왕위를 치세 내내 위협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6) 무능한 왕 인조의 즉위 초기현상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군의 명분은 인목대비를 유폐한 불효,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죄,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다하지 못했다는 부분이다.
그 외에도 33개의 죄목을 열거하며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하고 민심을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적어도 주요 명분중 하나인 후금과의 우호관계라는 명분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새로운 임금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명나라를 섬기는것은 사대주의에 찌든 사대부들에게나 중요한 명분이었고 백성들에게는 광해군은 임진왜란 등에서 전쟁의 고통을 나누었던 "우리 임금" 이었기 때문이었다.
반정의 주요 세력은 서인 게열로 이 차가운 민심에 당황하여 남인계(온건파 동인)의 이원익을 영의정에 제수하는등 남인계에게도 요직을 나누어 주며 민심을 달래려 했었다.
당시의 당파는 크게 동인과 서인으로 볼수 있는데 선조 중기부터 광해군까지 동인이 세력을 잡았다.
동인은 또한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나눠졌고, 북인은 또 대북(광해군 지지)과 소북(영창대군 지지)으로 분파가 되지만 크게 보면 이들은 모두 동인계였다.
반면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서인계열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 멸망 때까지 시대에 흐름에 따라 여러분파로 나뉘어 졌다..
반정 세력들은 모두 한 배를 탔지만 각각 속내는 달랐다. 인조는 왕위를 원했고.. 서인은 동인에 밀려 실각된 권력을 찾고자 하였고.. 아들(영창대군)을 광해군에게 잃은 인목대비는 복수를 원했다...
먼저 반정을 지지한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죽이려 했지만 남인계인 이원익등의 반대로 제주도에 유배하는데 그친다.
풀리지 않은 그녀의 복수심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김개시와 후궁들, 궁녀들에게 향해서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서인은 할수 없이 권력을 남인에게 일부 나누어 주긴 했으나, 곧 반대 당파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으로 대북계 인사와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했던 소북계(영창대군 지지) 인사들까지 숙청과 살육이 자행 되었다. 이러한 명분과 관련없는 살육과 단순한 반대 당파에 대한 숙청은 반정의 명분이 허울뿐이라는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1623년 10월에는 광해군의 이복 동생인 흥안군 이제를 추대하고자 하는 역모가 있는 등 인조 즉위 초기의 왕권은 그리 단단하지 못한 상태였다.
명나라는 인조 반정을 왕위 찬탈로 생각했었고, 후금은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며 군사적 도발을 해왔다. 더구나 내부적으로는 수 많은 역모, 반란이 일어났다.
7) 이괄의 난(李适 亂)
이괄은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신경유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23년 음력 3월에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반정 후 두달이 지날 쯤에 이괄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후금을 방비하기 위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평안도 영변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사에 대한 불만이 컸다.
반정 막바지에 누설에 대해 겁을 먹고 집을 나오지 않았던 김류나 자신보다 역활이 작았던 이수일등이 자신보다 상위의 공신이 된것을 아마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또다시 변방으로 나간 것도 불만이었다 .
하지만 이괄이 평안 병사 및 부원수가 되어 군사력을 통솔하게 되자 조정에 남은 반정 공신들 중에 이괄은 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자인데 그가 군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껄끄러워 했다.
그러던 중 1624년 음력 1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이괄에 대한 불편함을 가진자들이 주축(김류와 이수일)이 되어 인조에게 이괄이 북인계 인사들과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고변을 하게 된다.
하지만 조사에도 불구하고 이괄의 역모에 대한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압송하여 조사를 하기로 결정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괄은 논공행상의 불만뿐 아니라 자신을 제거하려는 반정 세력들에게 분노했다. 이로 인해 이괄은 정말로 반역을 일으키게 된다.
이괄 역시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 선조와 온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선조의 10남)을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괄의 아들인 이전을 압송하러온 사령들을 죽이고 항왜(降倭: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왜군) 100명을 선봉으로 삼아 1만 2천명의 군사로 한양으로 진격한다.
반군은 관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개성을 지나 임진강에 이르렀다. 이 소식에 놀란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급히 화성(수원)으로 피신하였다가 천안을 거쳐 공주까지 피난을 간다. 인조는 이괄의 난과 앞으로 일으날 두번의 호란(胡亂) 때도 도성에서 버려두고 도망을 치는 치졸함과 자신만을 위한 행보를 계속한다. 인조 정권 내내 백성들의 평범한 삶의 정치와는 완전 단절되었다. 인조와 함께한 서인정권들은 앞으로도 계속 잘못된 선택을 한다.
1624년 이괄은 3월 29일 한양에 입성하여 흥안군을 왕으로 세운다. 이처럼 승승 장구하던 이괄은 같은날 '장만'과 '임경업'이 지키는 길마재(무악재)를 포위 공격하다가 패배하여 그 기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광주로 이동하던 그의 군세는 관군의 추격으로 와해 되었고, 달아나던 이괄은 부하들에게 살해 당하게 된다. 왕으로 추대되었던 흥안군은 국문도 없이 살해당했고 이로서 이괄의 난은 3일 만에 완전히 진압되어 버린다.
이괄의 난은 이후 이괄의 부하였다가 살해된 한명련의 아들 한윤, 한택 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강홍립 휘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정묘호란의 불씨가 된다.
더구나 인조는 한양에서 피난 전에 김류의 주장으로 이미 무고가 밝혀진 북인계 인사들을 모조리 죽였버린다. 죄가 없는 사람들을 왕인 인조가 죽여버린 것이다.
단지 당파가 달라서 죽임을 당한 피의 숙청이었다. 이처럼 인조는 서인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이일로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한양으로 돌아온 인조와 서인 집권층에 대해 백성들이 철저히 외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8) 서인을 견제
인조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 세력은 수시로 자신들이 공을 세워서 인조가 즉위할 수 있었음을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떠벌였다. 서인 공신 세력의 이같은 행위에 인조는 분노하면서도 힘을 쓸 수 없었것을 새로운 인사를 대거 등용시켜 서인들을 견재하려 했다. 인조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의 산림 학자들과 김육 등 비공신 계열 서인 세력을 기용하였다.
또한 반정 초기 왕족 출신 남인계, 정승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기용한 것을 비롯, 남인 계열의 정치참여를 확대시켜 이들을 통해 서인 공신 세력을 견제한다.
서인들은 이괄의 난이 진압되면서부터 계속하여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성균관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건의한다. 하지만 남인계 성균관 유생들은 이이가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것과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가마를 보고도 호종하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서인의 이념이 국시가 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인조는 이이와 성혼의 의혹들을 언급하며 문묘배향을 거절하였다. 이후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여론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9) 인조의 정통성 강화를 위한 꼼수 작전
인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 정원군은 대원군으로 추존하여 정원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고,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들 또한 선조->정원군->인조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구성하여 자연스러운 계승 순서와 인조의 정통성 강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서인계 예학자(禮學者)인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김장생의 아들)과 송시열(宋時烈,)과 남인계 허목(許穆) 등은 인조가 선조의 후사를 계승하였으므로, 선조를 아버지라 하고 정원군은 황숙부나 황백부로 불러야 된다고 고집하였다. 인조는 머리가 아팠다. 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고, 아버지를 숙부라고 하려니..
인조는 꼼수를 써기로 했다. 예학자(禮學者)들의 말을 듣는 것 처럼 액션을 취하고, 반정 공신인 이귀, 이정구 등을 중심으로 아버지 정원군의 추존 작업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이중적 액션을 각기 다르게 하였다. 예학자(禮學者)들의 중론을 듣는 것처럼 여론을 각색한 후 결론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원종이라 하였다.
인조의 꼼수에 예학자(禮學者)들의 반발은 계속되어 정원군의 추존에 반대하여 김장생, 김집 등은 사퇴, 낙향하였고, 허목(許穆)은 이를 비판하다가 불이익을 받고 관직 임용이 금지당하기도 했다
10) 백성들에게 인정 받지 못한 왕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한양을 떠나 피난하던 날, 한강변에서 도강을 하려고 배를 타려 했을때 백성들이 인조가 탈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을 정도이고, 이괄의 반란군이 한양 입성에 열렬히 환영을 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인조는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왕이었다.
백성들은 철저히 인조와 서인정권에 대한 높은 반감을 보였다. 이는 후에 임진왜란 때의 자발적인 의병 봉기와 달리 정묘호란시 강화도에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했을때 인조를 구하려는 백성들이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철저히 외면을 당하는 인조의 조정이였다.
물론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선조의 조정을 백성들이 기억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조와 서인정권의 행보가 그들이 말한 대의와 명분 보다는 당파의 이익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게 가장 큰 이유였다.
11) 인조 조정의 외교적인 무능과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
광해군 재위기간에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그래도 가장 인정할만 한 부분은 전란을 치르면서 생긴 국제 정세와 외교에 대한 감각으로 이를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그가 취한 실리적인 외교 정책은 후금과의 충돌이나 전란을 미연에 막기도 했다. 반면 인조와 서인 집권층은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급박하게 흘러가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철저히 무시하였다..
반정 후 인조와 서인은 척화파를 중용하여.. 광해군의 밀명으로 청과 싸우는척 하다가 투항한 강홍립의 일가와 친척을 모두 몰살 시켰 버린다. 이 결과가 훗날 정묘호란을 발생하는 또다른 불씨가 타오르게 된 것이다.
인조와 서인 집권세력의 무지와 외교적 무능은 정묘호란시 후금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겠다는 화평안을 보낼 때.. 그 문서에 명의 연호를 써서 보내 버렸다.
조선에서 온 조서를 받아 보니 강력한 힘을 가진 후금을 자극한 것이었다..
이에 분개한 후금의 사신은 이 조서로 인해 옷감 4만필과 소 4천마리를 추가로 요구 하였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빛도 갚는다는데...
글 한자 한자가 국가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과 한 것 같다. 단지 무식한 오랑케를 일게워주는 듯한 모양이다.
특히 중요한 시기에서 외교전에 좋은 표본은 광해군이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 대한 지원으로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때 누르하치에게 "조선 국왕이 대금국 칸 전하에게 드립니다" 라고 적어 국서를 보내 후금과의 전란을 막은 것과는 참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수 없다.
이런 일은 또 한번 겪게 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의 일이다.
후금은 인조에게 "조선국왕의 아우와 대신들을 인질로 보내면 항복으로 인정하겠다"라는 요구에..
인조 조정은 다른 사람으로 꾸며서 냈다.이는 곧 탄로가 나 버렸다. 결국 본인들이 아님이 들통나자 후금에서는 조선을 믿을 수 없어 더 큰 요구를 하게 된다.
"조선의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 라는 추가 요구를 받게 되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가게 된 이유가 된 것이다.
보다 가볍게 넘어갈수 있는 일에도 얕은 수를 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꼭지를 돌게하는 이른게 바로 오랑케 같은 생각이며 행동이 아닐지 반정에 승공한 인조와 서인들은 누가 누굴 보고 오랑케라고 하는지..
이괄의 난 이후 후금에 투항한 한윤, 한택 형제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청태종)를 만나 인조반정의 부당성과 광해군의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명나라에 사대주의로 일관하는 인조와 서인정권의 태도에 후방의 위협을 느끼던 후금의 홍타이지는 결국 1627년(인조5년 정묘년) 1월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후금의 군.. 길안내 역활로 선봉에선 이가 바로 강홍립 이었다.
12) 병자호란 전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에 정세
1619년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하였을 때는 그 요청에 못 이겨 광해군은 강홍립으로 파병군 장군으로 삼아 조선파병군 1만여명을 원조케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그들에 전쟁에 결코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고 정쟁의 판도에 따라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주었다.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명은 후금에게 대패를 하였고... 《아부달리(阿布達裡) 전투》에서도 명군은 또다시 패한다.
<사르후와 아부달리의 위치>
명군이 불리한 상황에서 《부차 전투(富車戰鬪) -> 위 지도에서는 부찰(富察)》에 참여한 강홍립의 조선 파병군은 후금에게 포위 공격을 당하자 강홍립은 후금에 적각 항복하였다. 이 때문에 후금은 조선에 대한 보복적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양국 간에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본래 홍타이지(청 태종)는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평 방침에 반대하여 주전론을 주장하여 왔는데, 이는 후금의 남진 정책에 대한 배후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재위하고 있는 동안은 조선에는 전의가 없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광해군의 권유로 평안북도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여 요동의 회복을 획책하며 후금을 자극하였다
<평안북도 철산군 가도의 위치>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으났을 때 누르하치의 후금은 만주에서 명군을 힘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명의 힘도 아직은 만만치 않아서 산해관 밖 영원성<寧遠城)의 전투:1626년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과 후금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영원성(寧遠城)을 놓고 벌인 공성전이다.
홍의포(紅夷砲:네덜란드에서 중국 청나라를 거쳐 유래된 대포)로 중무장 명나라의 2만 군대가 16만의 후금의 군대를 밀어내는 데는 고작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이틀 동안의 공성전에서 후금군은 적에게 전혀 타격조차 주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결국 후금군의 사기는 모조리 바닥이 났고, 누르하치는 후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16만의 군대가 후퇴를 시작하자, 2만의 군대는 이를 추격하여 30여리를 뒤?아 더욱더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에서 누르하치의 후금은 대패배하고 만다. 누르하치는 홍의포 부상으로 인해 전사하고 만다.
하지만 후금에는 누르하치(努爾哈赤: 청 태조)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皇太極)가 있었다. 광해군의 집권시에는 조선이 뚜렷한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전화를 피할수 있었으나 이제 인조의 정권은 아에 대놓고 명에게는 무조건 사대를 하고 홍타이지(皇太極)의 후금에 대해서는 오랑케라며 적대적인 모습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정묘호란(1627년)에 대해서는 당시 후금에 대한 명나라의 교역중단 조치와 그동안의 급격한 팽창에 따른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지만 명나라와 전력을 다해 겨루고 있던 후금 입장에서는 후방에 있는 명나라의 우방을 자처하는 조선과 조선 정부의 적극적으로 지원을 받은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은 조선국경 안에서 머물며 후금의 뒤를 공격하는 게릴라 전을 펼치며 치고 빠지는 전술을 폈고 있는 신경에 거슬리는 존재임이 분명 하였다.
모문룡은 평안도 앞바다의 가도에 머물면서 병력은 1만 정도였다. 모문룡의 명군은 적극적으로 후금을 공격하는 대신 명나라와 조선을 오가는 무역선을 대상으로 밀무역과 통과세로 부를 쌓으며, 조선 정부에는 식량지원을 요청하고 식량이 제때에 도달하지 않으면 주변 부락을 약탈하는 패악을 부리고 있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 폐해가 엄청났지만 어찌 할 수 가 없었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영원성 전투의 패배와 명나라 모문룡의 후방 교란으로 인한 문제로 명나라의 전쟁 보다 우선 후방 안정에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인조에게 반란을 일으켜 실패한 이괄의 잔당 중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단점과 주둔한 위치를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지졸(烏合之卒)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계속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홍타이지에게는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13) 정묘호란
결국 1627년 3월 1일 정묘년에 홍타이지는 슈르하치(누르하치의 동생)의 아들 아민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후금군의 길 안내를 맡은 것은 앞서 언급한 강홍립이었다. 후금군의 일부는 모문룡을 공격하고 주력부대는 3월 3일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약 일주일 후인 3월 11일에는 평양을 함락시켰다. 평안도 안주성에서 남이흥, 전상의,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전사했고. 평양을 거쳐 3월 12일(음력 1월 25일)에는 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로 피신을 한다. 인조와 서인들은 오판을 하고 만다. 바로 믿었든 명나라의 배반이다. 인조와 서인은 급하게 조선의 사정을 설명하고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해준 군을 보내 주리라 생각했지만 명나라는 이미 제 코가 석자인 상태였다.
또 인조와 서인들이 오판한게 있다. 의병들이었다. 나라가 힘들 때 임진왜란 때 처럼 각지에 의병이 일어나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의 일반 백성인 이립과 정봉수의 의병들이 후금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후금군에 타격을 주기에는 미비했었다. 하지만 후금은 조선이 결사 항쟁하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후금 역시 조선을 점령하려는 것보다 굴복시켜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에 조선과 후금이 형제 관계를 맺는다는 화친 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 하려고 했다.
1627년 음력 3월 강화도에 있는 인조와 서인들은 화전(和戰)의 양론이 분분하던 중 후금이 강화를 제의해 오자 인조는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主和論)을 채택, 후금과 교섭하여 정묘약조를 체결하였다.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가 성립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1. 후금군은 평산(平山) 이남으로 더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할 것 2.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3.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 화약은 두 나라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관계가 굴욕적인 데다가 막대한 세폐(歲幣)와 수시로 요구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으로 더욱 배금의 길을 걷게 되었다.
후금도 경제적 이익은 취할 수 있었으나 모문룡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에 더욱 팽창된 후금이 조선에 대한 강압적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어 결국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4) 병자호란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최근에는 인조와 서인정권에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전쟁이었다. 사실 인조는 정묘호란이후 국호를 바꾼 청나라에 대해 납작 업드린 상태로 사실상 많은 양보를 했었고, 청의 계속되는 심한 요구를 더이상 들어 줄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조와 서인들의 머리속에는 여전히 명에 대한 사대라는 명분에 얽매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불러왔다는 생각이 더 맞다고 생각하면 된다.
청의 군신관계 요구에 대해 존명사대의 명분에 갇혀있지 않고 실리적인 판단을 내릴수 있었다면 굴욕은 있었더라도 전쟁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격렬하게 반발하지는 않았을듯 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칭제(청나라로 국명을 바꾸고 황제라 칭함)를 결심하고 조선에 의견을 구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조정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이 홍타이지에게 배례하지 않는 등 친명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였다. 실제로 홍타이지는 조선에게 선전포고에 가까운 최후 통첩후 7개월 동안 입장표명을 기다렸다. (물론 군사적 준비와 압록강이 얼어붙기를 기다린 이유도 있었다.)
홍타이지가 이런 생각을 하는 시간에 인조와 서인 정권은 싸울 것이냐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를 가지고 끝없이 대립 했었고 결국 인조는 어떤 군사적인 역량에 대한 판단이나 준비도 없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교서를 내린다. 조선의 최종 의사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면전에 앞서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결심했다.
1636년 병자년 12월2일 12만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약속을 지키지 않는 조선으로 또 한번 진격한다. 청나라와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정묘호란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전략적인 전쟁이었다면 이번 병자호란은 명백하게 명나라로 편을 정한 조선을 징벌하기 위한 전쟁이인 것이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 논과 들을 깨끗이 비워 군량미를 조달하게 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성벽을 튼튼히 하여 수비에 치중하는 작전 )"으로 기병력이 강한 청군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청군의 침공로 주변의 성에 아군들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써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체화 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 본 경험이 있는 청군은 또다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작전을 달리한다.
한편 수성 작전을 펴는 조선군에 청군은 별도로 인원만 남겨두고 평안도와 황해도를 지나 무조건 한양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인조를 목표로 남하하여 한양에 도착했을 때 조선의 봉화로 소식을 들은 것은 그들 도착 하루 전이었다. 청군은 완벽히 인조와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즉, 봉화를 통한 소식을 한양에 있는 인조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고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날이 12월 14일이었다. 그때 인조는 급히 한양을 버리고 또 파천에 나섰다.
(말이 좋아 파천이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이괄의 난 때 도망, 정묘호란 때도 도망, 그리고 병자호란 때도 또 도망..무슨 일이 나면 무조건 도망.. 이런 왕을 누가 따르겠는가? 진짜 무능고 대책 없는 왕이다.)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청군의해 차단당한 소식을 접한 인조는 부랴부랴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로 보낼 잔 글씨로 쓴 격문은 벌의 분미물로만 볼 수 있다. 이러한 뭉친 글을 몰래 성 밖으로 보내 근왕군을 모으려고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국도인 한양과 조선 왕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전개했으므로 한양과 그 주변을 제외한 지역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
특히 삼남 지방(경상,전라,충청)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勤王軍)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근왕군(勤王軍)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勤王軍)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게 각개격파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14-1) 근왕군(勤王軍)의 동향
가장 먼저 12월 17일, 강원감사 조정호가 근왕군(勤王軍) 약 7000여 명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000여 명이 12월 24일 남한산성 근처의 검단산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튿날 청군의 별동대에게 격파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勤王軍)은 토붕와해(土崩瓦解)했다. 조정호는 잔여 군사를 이끌고 가평으로 퇴각하여 다른 근왕군과의 합류를 꾀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7일 근왕군 7000여 명을 규합하여 진군했으나 북병사 서우신과 함경감사 민성휘이 지휘권을 놓고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고 복잡하게 다퉜다.
서우신은 곧장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자고 주장했지만, 민성휘는 양평의 김자점과 합류한 후에 세력을 키우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민성휘의 의견을 좇아 함경도 근왕군은 양평으로 향했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북방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2만 3천에 달했지만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서 전쟁에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충청감사 정세규는 12월 18일에 인조의 격문을 받아 즉시 7,000명의 근왕군을 규합하였고, 좌영장 최진립(崔震立), 우영장 심일민(沈逸民), 별장 황박(黃珀), 중군 이건(李楗), 참모관 이경선(李慶善), 방량차사원(放粮差使員) 이상재(李尙載), 군기차사원 김홍익(金弘翼), 심약(審藥) 이시량(李時亮) 등이 참전을 했다.
12월 25일 공주를 출발하여 12월 27일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과 용인시 수지구의 경계를 이루며 탄천으로 합류하는 동막천)에 당도해 화전(火箭)을 이용해 남한산성에 신호했지만 성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온다는 첩보를 받은 청군은 청나라 태종의 매부인 양굴리(揚古利)가 조선 근왕군 진압 장군으로 별동대 이끌고 험천 일때에 매복을 하고 있었다. 이를 모르는 충청의 근왕군을
청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것으로 시작하여 청군의 공격을 10여 차례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근왕군의 기력이 다 해 충청감사 정세규는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다가 부하들에게 구출되었지만 최진립(崔震立) 이하 모두 진중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원으로 퇴각하였다.
청군이 처음 압록강을 건너 한성으로 남하하면서 평안도를 통과한다. 당시 평안감사 홍명구는 청군의 압록강 도하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조직 후 평양성 북(北)에 있는의 자모산성에 들어가 청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진(南進)하였으므로 아무것도 대처할 수 없었다.
평안감사 홍명구는 평안병마사 유림 휘하의 5,000명의 관군 병력을 합세하여1636년 12월 18일 평양을 출발해 남하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 이들의 진격을 막고자 주둔한 청군의 별동대에 가로막혀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지휘관의 의견분열로 조선의 정예군 5,000명의 군대는 평안감사 홍명구는 관군 2,000명과 평안병마사 유림 휘하 3,000명으로 나워진다.
1637년 1월 26일 홍명구는 새로 합류한 의병 300명을 이끌고 강원도 김화 탑동에 진을 친다. 하지만 그의 군은 청의 별동대와 분전하지만 평안감사 홍명구와 순안현령 허노를 포함한 조선군 1,000명이 전사한다
평안병마사 유림은 김화 백동 고지에 진을 쳐 주둔하였다. 1,000명의 탑동전투 패잔병들이 몰려들며 다시 진을 짰다. 근왕병도 4,000며이나 되니 청의별동대와 해 볼만 하였다. 그들이 보유한 우수한 화기를 살려 청군과 맞서 싸운다.
유림 장군의 분전으로 그들은 1선 살수의 진격으로 시작하여 돌격한다. 2선 사수와 3선 포수의 일제사격은 위력적이었다.
마지막까지 포와 조총을 쏴대며 지원한 어영청 소속 포수들이 승리를 이끌었다. 조선군은 청군 수천명을 전사시키며 승리를 거두지만 이내 남한산성에서 청과 강화소식을 듣고 그들은 평양으로 돌아간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12월 20일 근왕(勤王)하라고 명령받았다. 12월 29일 병력 6000여명을 모은 이시방은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전주 군영을 출발해 북상했고 이어 화엄사의 승병 2000여 명이 이에 합류하였다.
선봉을 맡은 김준용은 1월 4일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이틀 전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청군과 만났다.
1월 5일 김준영은 청군의 돌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은 청군 장수 양굴리를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물자가 부족하여 인해 더는 진군하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수원으로 퇴각하였다. 이시방이 이끄는 근왕군 본대는 광교산 전투에서 김준영이 수원으로 퇴각 소식을 접하자 패배로 오인하고 근왕병을 안전한(?) 공주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14-2) 경기 광주의 쌍룡전투의 대패..
최신 조총으로 무장한 경상 근왕병 8,000명VS 기마병 300기와 재래식 칼로 부장한 보병 1,000명 청군과의 전투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은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총 규모 약 4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병력 8,000여 명 이상은 1637년 1월 3일 경기도 광주의 쌍령근처까지 진출했다.
경상 근왕군을 저지하려고 인근 불당리에 매복하였던 청군은 기병대 3백 기(騎)와와 보병 1,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청군의 병력으로 보아 소규모 부대였다.
경상 근왕병의 대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조총을 다루는 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전투 중에 청군 기병 3백 기가 칼을 빼어 들고 용감하게 돌격하자 8천여 경상 근왕병은 겁먹은 채 거리조차 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사격한 끝에 화약과 화살을 모조리 소모한다.
청군은 일단 후퇴하고 나서 조선군이 화약을 소모한 상황을 확인하고 재차 돌격을 감행하여 허완이 이끄는 좌군을 완벽히 궤멸시키고 적장 허완을 잡아 참수시킨다..
민영이 이끄는 우군은 좌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싸웠으나 화약이 떨어져 이를 재보급하던 도중에 화약이 폭발하여 군사 수십이 그 폭발로 말미암아 죽고 전선이 무너졌다. 이를 틈탄 청군 기병대가 총돌격하자 우군도 완벽히 붕괴했고 민영도 이 와중에 죽었다.
경상도 근왕군은 청군의 수십 배에 이르는 우월한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 채 결국 참패해버린다.
(진짜 웃낀다.. 적군이 많으면 중과부족으로 인해 패하고, 전투 인원이 많아도 이런 저런 핑게로 패하고, 임진란에 왜군이 신무기인 조총으로 자죽지세로 한양에 진군했지만, 청군이 올 당시 최신 무기를 가지고 전투에 임했으도 불구하고 칼든 적군과의 그것도 몇명 되지 않는 쪽수의 적군에게 완패하고.. 청군으로 볼 때는 광주 쌍령전투는 청나라의 대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게 무슨 조선의 정규군인가?
진짜 웃낀다..)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었던 심연은 선봉 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팔도의 근왕군이 전부 청군에게 격파당하여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고 근왕군은 더 조직되지 못하였다.
인조와 서인들은 엄청난 잘못된 판단을 한다. 병자호란 중에 무수한 잘못된 판단을 하였지만 이것보다 더 큰 잘못된 판단은 없다. 바로
강화도로 세자빈과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를 피난 시킨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썰물 처럼
진군을 청주까지 왔을 때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 갔을 때 광해를 세자로 임명하고 조선 왕실의 신주를 주어 조정을
두개로 분리시킨 바가 있다.
혹시 왜의 침공으로 인한 선조가 요동으로 피신 할 때를 대비한 포석인 것이다. 이런바 분조(分朝:조정을 분리하는 것)이다. 인조도 선조를 따라 신주를 아들이 모시게 함으로 혹시 모를 대비를 하게 하였다.
인조와
조정은 수전의 경험이 적은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청군도 이러한 조선 정부의 계획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그들은 명나라 수군 출신인 공유덕과 경중명 등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먼저 한양에 도착하여
한강 일때 조선인들을 모아 소규모 배를 건조하여 수레에 싣고 꽁꽁 언 한강을 따라 강화도 인근으로 집결하여 강화 상륙작전을 조선군
모르게 준비를 단단히 했다..
청군은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왕자들을 인질로 잡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개성을 지나 파주로 들오온 청군은 군을 둘로 나눠 일군은 강화도로 진군을 하였고 이군은 인조를 잡으로 도성으로 진군을 하였다.
뒤이어 인조도 남한산성의 물자와 인력 부족으로 인해 장기간 항전을 할 수 없어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청군의 남진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인조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조선군의 방비도 문제가 있었지만, 청군이 속전속결로 한양을 점령하기 위하여 중간 중간에 있는 조선 산성과 도성은 공략하지 않고, 곧장 한양으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선의 봉수 체계가 이를 빨리 한양으로 알렸으면 되었을 텐데, 이나마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아 인조는 강화도로 갈 수 없었던 것이 되어 버렸다.
15) 인조의 잘못된 선택으로 피바다가 된 강화도
인조는 왕족들을 강화도로 들여보내면서 이들을 호위하고, 강화도 방어를 책임질 검찰사를 물색하였다. 이때 영의정 김류가 자기 아들 김경징을 추천한다. 인조는 사람 됨됨이 나 자질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아부를 하는 사람말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강화 검찰사로 인명을 한다. 인조는 이 선택으로 인해 강화도를 피 바다로 만들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김경징은 아버지를 닮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이익만 챙긴다. 우선 강화도 들어가는 것만 해도 그렇다. 당시는 겨울이라 바다에 얼음이 많아 배가 하루에 한 번 밖에 뜰 수 없었다.
그러면 이럴 때 누굴 먼저 배에 태워야 하겠는가? 조선의 세자빈과 원손 그리고 봉림대군을 먼저 태워야 하는 것 원칙이다, 하지만 김경징은 자신의 가솔을 먼저 강화마루에 와서 자신의 가족과 재물을 먼저 배에 싣고 강화로 들어가 버린다.
뒤 늦게 강화마루에 도착한 세자빈인 강빈은 추위에 떨면서 “경징아! 경징아! 네가 그럴 수 있느냐!”고 바다를 향해 원망의 소리를 쳤다고 한다. 김경징이 인조반정 최고 1등 공신의 아버지의 뒷 배경을 믿고 왕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
김경진의 활약(?)은 강화도에 들어가서는 더 가관이었다. 김경징은 겨울에 청군이 감히 바다 건너오지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광성진 부근에 약간의 수군만 배치했을 뿐, 강화 수비는 손을 놓고 있었다. 수비만 소홀히 했다면 그래도 나을 줄 모르겠다. 김경징은 날마다 술독에 빠져 산다. 보다 못한 신료들이 뭐라고 말을 하여도 그는 듣지도 않는다.
1637년 1월 21일 새벽 청군은 1만6천명의 군사를 소형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했다. 청군이 한양에서 강화도로 오고 있다는 것을 통진가수 김적이 강화검찰사 김경징에게 알렸으나 김경징은 "한강 물이 모두 얼었는데 어떻게 청군이 오느냐?"라고 하며 오히려 김적에게 군율을 물어 목을 베려까지 하였다.
마침 갑곶을 지키는 장수로부터도 똑 같은 보고가 들어온다. 그때서야 김경징은 다급해진다.
청군이 갑곶으로 상륙하려고 하니, 뒤늦게 허둥대는 김경진은 주사대장 장신에게 수군을 갑곶으로 이동시키라고 명을 내린다. 이 때 갑곶에는 충청수사 강진흔이 이끄는 병선 7척과 수군 200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충청 수사 강진흔은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접근해오는 청군을 연이어 격퇴하였다.
그래도 강진흔은 중과부적인 상태에서도 열심히 싸웠는데, 뒤늦게 도착한 장신은 청군 함단이 몰려오자 강진흔이 도와달라는 호소도 외면하고 도망을 가버린다. 결국 강진흔의 충청 수군 방어선을 뚫고 청군의 배가 강화도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런데 청군은 처음에는 당연히 해안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조심스레 척후병만 내보냈다, 척후병으로부터 특별한 방어군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상륙을 하였다. 그리고 곧장 청군은 진해루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만약 조선 강화도 지상방어군이 대포로 대응을 하고 청군의 상륙을 못하도록 하였다면 청군도 쉽게 강화도에 발을 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경징은 이런 유리한 지세를 포기하고 가족과 강화 부사 이민구와 함께 강화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을 가버렸다.
이 대목에서 임진왜란 당시 신립의 방어군이 왜군을 문경 새재와 탄금대 중 지리적 유리함을 버린 탄금대를 선택하여 왜군에게 대패 한 것이 생각난다.
당시 왜군은 문경 밑까지 거침없이 진격한 후, 문경 새재와 같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형에는 당연히 조선군이 매복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이동을 하였지만.신립은 이런 유리한 지세를 포기하고 나름 기마병으로 왜군을 상대하겠다고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지만 결과는 처참한 패배....
김경징이 그나마 신립 장군처럼 자기 목숨을 걸고 강화성을 지켰으면 그나마 뭐라 하지 않겠다. 그러나 김경징은 가족과 함께 나룻배로 장신의 배로 옮겨 타고 도주한다.
이게 왕족과 역대 임금들의 신위를 지키는 총사령관이 짓이다.
천총 구일원(具一元)은 김경징과 장신의 행태에 격분하여 차마 상관을 죽이지는 못하고, 자신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다. 이런 상관 밑에 있어보았자 앞날이 뻔하다고 생각하여 몸을 던진 것이다.
청군은 텅텅 빈 강화산성을 단숨에 함락하였다. 이때 주전론자(主戰論者)인 김상헌(金尙憲,)의 형인 김상용(金尙容)은 절대로 오랑케인
청나라에 굴복 할 수 없다며 문루에 화약을 쌓고 불을 붙여 자폭하고. 이에 몇몇 사대부들은 김상용 처럼 자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강화의 많은 백성들이 청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강화 곳곳에서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때 봉상시정 이시직도 자결하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글을 보낸다. 내용은 이러하다.
<<장강의 험함을 잃어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술 취한 장수는 겁이 나 떨며 나라를 배반하고 목숨을 지키려 드는구나. 파수가 무너져 만백성이 어육이 되었으니 하물며 저 남한산성이야 조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결하려 한다. 살신성인하려 하니 땅과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아! 내 아들아. 삼가 생명을 상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 내 유해를 장사 지내고,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거라. 그리고 깊숙한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구구한 나의 유원(遺願)을 잘 따르기 바란다.>>
인조 정권이 하는 것이 오죽했으면, 아들 보고 세상에 나오지 말고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가라고 하였을까? 이시직의 아들이 실제 산으로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동계 정온 선생의 경우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처음에 할복자살을 시도하였고, 이나마도 마음대로 죽지 못하자, 덕유산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백이숙제처럼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지내다 죽었다..
강화도에는 피난 온 왕족과 대신들과 군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기에서 뿌리를 내려 사는 이들이 있었고 또 그들의 가족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있었다.
더구나 강화도가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고 육지에서 건너온 백성들도 많았다. 이들을 보호해줄 관료와 군인들이 없어진 이상, 이들은 이제 청군에 의해 ‘도마 위의 고기’가 되었다. 전쟁중에는 불변의 진리는 정복자는 전리품으로 특히 아녀자들을 취한다. 아녀자들의 경우에는 약탈 + 겁탈의 1순위 대상이다.
그래서 많은 아녀자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하였다. 이중에는 스스로 자결한 여인네들도 많았지만, 지아비와 아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목숨을 끊은 여인들도 많았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들이 강화도 여기저기서 펼쳐진다.
사서(史書)에는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눈 위를 기어 다니거나, 죽거나, 이미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만약 김경징이 자기 목숨을 걸고 강화도를 지켰다면 과연 이랬을까? 설혹 끝까지 항전은 하지 못하더라도 청군이 강화도를 피의 섬으로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6) 인조의 항복과 강화도 전투의 수습..
1월 22일 강화도를 함락한 청군은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붙잡고 인조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강화도 함락은 인조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쌍령 전투의 패배와 함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다.
그럼 도망간 김경징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전란 후 조정에서는 강화도 전투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였고 신하들은 패배의 원흉인 김경징의 목을 베기를 원하였으나 그런데 인조는 오히려 강화도가 함락된 것은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가 적었기 때문이며, 수군대장 장신도 조수 때문에 배를 통제할 수 없어서 그랬다며, 사형은 지나치다고 유배형을 내렸다. 인조의 잘못된 선택은 쉼없이 계속 된다.
인조는 김경징과
강화부사 이민구를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김경징을 사사하라는 여론이 들끓자 그제서야 인조는 여론에 굴복하여 그를 죽이지만, 그나마도 김경징을 대우하여 참수형은 하지 않고 사약을 내려 그를 죽였다.
또 충청 수사 강진흔을 귀양보내고 '장신'은 자결하게 하였다. 하지만 충청 수군들과 장수들은 애통하게 강진흔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음에도 인조는 강진흔에게 강화부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참형한 뒤 효수하였다. 강화도 총 책임자인 김경진에게는 병사가 없어 청나라에게 패한 것이 괜찮다고 한 인조가 목숨을 걸고 청군과 전투를 해 인과부족으로 전투에 패한 장수에게는 목을 매 죽이는 효수형을 내렸다..
인조의 정신 상태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청군 홍타이지에게 삼전도의 굴욕까지 맛 본 인조는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잘못된 선택은 계속 된다.
나의 사전에는 실패란 없다 다만 잘못된 환경만 있었뿐이라며 힘든 환경만 탓하면서 말이다.
17) 청군의 홍이포 VS 조선군의 천자총통
김자점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정예포수 5,000명을 이끌고 한양 근방에서 청군에 맞서 싸운다. 처음 전투에서 청군 장수를 죽이고 군졸 수천명을 쏴 죽이는 전과를 거두지만, 청 태종의 친병이 돌격해 오자 5,000명의 병력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김자점은 2,000여명과 함께 도주한다.
김자점은 다른 수령들의 정병과 만나 미원(양평)에 진세를 형성하였지만 청군을 두려워해 공격을 지연하다 결국 인조를 구원하지 못한다. 김자겸 뿐만 아니라 수만명의 근왕병이 모여들지만 청군이 두려워 제대로 진격하지 못한다. 충청도의 근왕병 7,000명은 이미 청군에게 격파당하고, 다른 조총으로 무장한 정예군들도 주저하면서 남한산성은 철처히 고립되어 갔다.
쌍령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으므로 더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된 데다가 겨울철의 추위 탓에 수많은 사람이 얼어죽었다.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인조조차 결국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굶어 죽는 사람이 결국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권을 유지하려는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였고 1월 10일 종전을 위해 청군과 협상을 시작했으나 내부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청군은 남한산성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반격을 시도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포대에 포격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총신이 짧아 그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병참의 물자 부족 탓에 계속 대응할 수 없었다.
홍이포의 215Cm 포신과 10Cm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벽을 타격했지만 직접적인 피해는 적었으나 산성을 둘러산 대포 소리는 메아리로 더 울려 퍼지고 포탄에 파편들이 공중에 흩어져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니 대포의 위력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산성안에 인조와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1월 22일,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를 청군이 함락했다는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이 일로 조선군은 항전 의지가 완전 꺾였다.
인조는 항복하기로 결심했고 1월 28일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1637년 1월 28일(인조15년) 병자호란 발발 45일에 인조는 청에 대한 항복을 결정하고 그동안 항전을 해 왔던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잠실)에서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했다.
국왕은 곤룡포 대신 평민이 입는 남색옷을 입고 세자를 비롯한 대신들과 함께 청태종의 수항단(受降壇)이 마련되어 있는 잠실나루 부근 삼전도에 도착해 어가에서 내려 2만명의 청군이 도열하고 있는 사이를 걸어 청태종에게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라는 항복례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1부분의 항복에 조건을 달았다.
18) 조선의 11개 항복의 조건
1.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禮)를 행할 것. 2. 조선은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할 것. 3. 조선은 왕의 장자(長者)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4. 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5.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하고 사호(私好)를 굳게 할 것. 6.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7.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물품 20여 종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8. 성절·정삭·동지·경조 등 사신은 명 구례(舊例)를 따를 것. 9. 가도(假島: 명나라 모문룡이 주둔하고 있는 평안 철산 가도)를 공격할 때는
병선(兵船) 50척(隻)을 보낼 것.
10. 포도(逋逃: 포로로 잡혀갔다가 조선으로 도망친 사람)를 숨기지 말 것. 11.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할 것.
조선에 대한 항복의 예(禮)를 청이 많이 봐준것이다. 원래는 중국의 항복 방식은 항복자의 입에 옥구슬을 물고 망자(죽은 사람)의 옷차림으로 항복의 예를 치루는 것이다. 하지만 청태종은 간략하게만 인조의 항복예(禮)를 받았다.
후대에 우리는 인조의 항복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모르고 그냥 조선의 왕이 오랑케의 왕에게 싸움에 져 항복을 한 것으로만 절을 올린 것에 대한 치욕이라 하지만 과정을 살펴보면 치욕은 무능한 인조와 서인 정권의 패배라 생각한다.
결코 조선인 전체가 아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다시 역사적 신판대에 올려 재판을 해봤으면 좋겠다.
인조는 항복을 할 때도 꼼수를 부린다. 청태종제에게 절을 할 때 땅에 이마를 땅에 약하게 부딛쳤다는 것이다. 이를 본 청태종의 빈정섞인 비난에 인조는 다시 절을 수십번 머리를 부딛쳐 이마에서는 피가 흘렸다.
이 지경을 당하고도 인조는 알량한 자존심에 또 꼼수를 부린다. 남한산성을 나와 자신이 항복한 사실을 기록할때는(훗대 자신을 평가할 때 부끄러운 사실을 숨기로자) 영(令)을 내려 "항복(降伏)이라는 단어 대신 하성(下城: 성에서 나와 내려감)"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했다.
19) 병자호란의 결과
청군이 머물렀든 약 한 달간 한양의 종로와 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그밖에 수많은 마을이 약탈과 방화로 아수라장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려는 노력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1637년 2월 2일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 태종는 먼저 청을 향해 출발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이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떠났다. 이들과 같이 조선 백성들이 포로(피로인)로 수백명이 끌려가기 시작하여 계속해서 청으로 끌려간 피로인들은 노예로 팔리기 시작했다.
조선 백성은 심양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60만명 이상이 거래되었다. 또척화파 강경론자인 이른바 삼학사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참형되고, 주전파인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왜로 끌려간 조선인이 수십만이 왜, 중국, 유럽으로 팔려갔는데 또 이런 사항이 벌어진다.
하물며 왜는 바다가 있어 조선으로 가기가 힘들었다고 하지만 청에서는 노예의 신분에서 운 좋게 풀려 고향에 몇달을 걸려 고향에 돌아 온 여인들은 부모 친척의 환영 받지 못했고 도려 조선의 상류(양반)사회는 그녀들을 천대하였다.
양반의 여식과 평민 여식을 가리지 않고 환향녀(還鄕女)들을 너무 과혹하게 몰아갔다. 양반들의 생각은 청으로 끌려간 그녀들이 오랑케들에게 몸이 더렵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청나라에서 어쩔 수 없게 몸을 허락할 수 밖에 없지 않았겠냐? 전쟁이 나면 승패의 향방에 따라서 정복군은 점령지에서 제일 먼저 여자와 개를 찾는다고 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시절에도 수 많은 사람들을 일본에 산업 시설에 노동과 군 징병으로 끌려 갔었고, 또 나이 어린 수많은 여자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 갔다..
어째든 부모들 찾아 겨우 고향에 돌아 온 환향녀들은 조선의 사회는 그녀들을 몸파는 창녀 취급 했다. 그리고 환향녀는 화냥녀라고 변해 몸가짐이 단정치 못하는 여인들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청의 사신 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龍骨大)가 조선에 수시로 와서 수많은 여인과 여러 관리와 대신의 많은 자녀가 붙잡혀갔는데 한번씩 올 때마다 그 수는 약 200명 이상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명을 침공해 점령지에 인구 확보를 위해서 조선에 수 많은 백성을 끌고가 점령지 인구확보에 주력했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700만에서 900만 사이로 추정됨으로 수치가 사실이라면 조선인 10명중 1명에 가까운 비율로 청나라에 끌려간 셈이다.
무능한 인조와 서인 정권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고한
조선의 백성들과 여인들도 엄청난 박해를 당한 셈이다. 그 후 이 원한을 씻고자 사사로이 북벌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다. 임경업이 명과 연락하여 청을 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도 북벌 계획을 세우지만 그렇게 저렇게 끝나버린다.
조선의 인구에 반도 안되는 여진족들은 조선을 굴복시키고 명을 꺽고 광활한 대륙에 청나라 깃발을 꽂은 것이다. 여진인 모두의 목표과 비젼을 하나로 모아 행동으로 옮길 때는 안될 것도 가능하게 만들지만, 무엇이든 핑게가 우선이 되어 버리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여진이 보여줬다. 여진이 후금에서 청나라로 크져 가면서 끝내는 조선과 명을 굴복시며 그들의 꿈을 기필코 달성 한 것을 만 천하에 보여줬다.
20)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귀환
병자호란 8년후 말기를 향해가던 명나라는 결국 이자성이 일으킨 농민 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당하고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결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게된다..
산해관에서 끝까지 저항하며 청의 진입을 막고 있던 명의 신하 오삼계는 이자성에 굴복하지 않고 결국 청에 투항하여 청군을 화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는 길을 열어주게만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겨우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풀려나 8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는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게 된다.
특히 소현세자의 경우는 청에서 카톨릭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서구문명을 접하고 청의 선진적인 모습을 보게되면서 반청에서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친청적인 입장으로 전환한다.
그는 몽골어를 배우고 서역원정에 출정하여 군사적인 경험도 쌓았으며 서양과학과 카톨릭을 들여오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소현세자의 모습이 용렬한 인조에게는 수치를 상기시키는 존재이면서 친청적인 모습에서 형언할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는 껄끄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정묘호란과 병자 호란은 먼 과거의 이야기로만 치부해 버릴수 없는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당시와 비슷한 실정이다. .
솔직히 보면 당시 청과 명의 명백한 국력의 차이(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기 전까지도 청의 객관적인 국력은 명과 비교 할수도 없을 정도였다. 후금은 인구적인 면으로도 병자호란 당시에는 조선보다도 총 인구수가 적은 나라였다.) 보다 현재의 미국과 중국의 국력 격차가 훨씬 더 적다. 한반도는 어쩌면 가까운 시일내에 다시 한번 미국이냐? 중국이냐? 양대 강대국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당하는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게 어찌 과거의 일이겠는가? 역사는 돌고 돈다.. 다만 주체만 조금씩 바꼈을 뿐이지만..
21) 인조의 잘못된 선택의 끝판.. 장남 소현세자의 살해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후 심양에 머물면서, 강대국 명이 망해가는 것을 생생히 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나라가 조선을 많이 핍박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함께 끌려와 재판을 받은 반청파 김상헌 등과 조선 백성 보호에 많은 힘을 썼다. 몽골어를 배우고 서역원정에 출전하기도 했다.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세자빈 강씨와 함께 일군 밭에서 난 많은 곡물들을 심양의 시장과 청나라의 전쟁 군량미로 납품해서 받은 대금으로 청나라에 잡혀온 조선백성들을 다시 사들여 귀국시키려는 노력도 하였다.
청나라의 도르곤이 명나라 장군 오삼계가 만리장성의 첫 관문인 산해관 빗장을 푼 것으로 청군이 대대적으로 중원 땅으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차지해 나갔다.
그도 도로곤과 함께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면서 서양문물과 국제 정세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천주교 선교사인 아담 샬을 만나면서 천주교와 서구의 과학기술에도 눈을 떴다. 무엇보다 그는 볼모 생활 중에도 청나라의 핵심 인사들과 교분을 가지고 청나라 조정에도 인맥을 만들었다.
하지만 세자의 청나라의 행동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인조와 조정 대신들(주전파)은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고, 못 마탕하게 생각해 왔다.
1644년 음역11월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귀국 하긴 전 청의 황제에게 인사들 드리려 갔다. 황제는소현세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었는데 소현세자는 황제 청태종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다. 황제도 기꺼이 벼루를 내어주었다. 소현세자는 귀국 선물로 인조에게 줄 요령으로 받아 온 것이다.
1645년 음력 2월에 8년만 세자빈 강씨와 함께 소현세자는 고국으로 돌아와 기쁜 마음에 아버지 인조에게 청나라의 발전상과 가톨릭과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진언하였으나 인조의 화만 불러오게 되었다. 화가 난 인조는 청 황제의 선물인 벼루를 소현세자에게 집어던졌다고 한다
귀국 날 부터 아버지 인조는 소현세자 가족을 철처히 감시하고 박대한다.
소현세자는 귀국 후 실리적인 사고와 친청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아버지 인조에게는 심히 거슬리는 행동들이었다
인조는 청나라에 두번이나 굴복하고, 백성을 전쟁에 휘말리게 하고서야 정신을 차려 청나라에 납작 업드려 머릴를 쪼아리는 삼전도의 굴욕도 당했지만, 아직도 인조 자신을 비롯한 조정은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라 여겼고, 청나라로 인해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인조는 뭇 신하들을 거느리고 상복을 입고 슬퍼 했을 만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사대주의에 찌든 반청노선을 표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자간의 사고의 차이는 인조와 소현세자간의 언쟁을 불러 왔고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구나 청나라의 환대를 받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를 볼 때마다 인조 자신이 죽는날 까지 잊지 못한 오랑케에게 삼배구고두를 한 굴욕적인 과거가 떠올라 자신도 모르는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껄끄러운 부자지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현세자가 귀국한지 두달여가 지난 1645년 4월 23일 인조의 어의인 이형식의 시침을 받은 건강하던 34세의 소현세자는 3일만인 4월 26일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아들이, 더구나 자신의 뒤를 이를 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 했는데도 인조는 진상조사를 바라는 세자빈 강씨와 대신들의 청을 뿌리치고 장례일을 앞당겨 서둘러 입관을 진행했고 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장례 절차를 밟게 하였다. 인조는 참관 인원도 종실로 제한하고 어의를 처벌하라는 논의 자체를 금한다.
1645년 공신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인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임금)도 알지 못했다. --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6월 27일 ->
이러한 시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로 인하여 인조가 아들을 또는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설이 큰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소용조씨의 독살설을 채택한다 하더라도 인조의 묵인이 없다면 그러한 행위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수 없다.
1645년 음력 8월 강빈의 동생 강문성이 장사 날짜가 불길하다고 지관인 최남을 찾아가 항의하였는데, 인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해서 강문성과 문명, 문두, 문벽 4형제를 먼 고을에 유배시켰다.
그 뒤 세자빈 강씨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고, 조소용은 세자빈 강씨가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고 무고하였다
1646년 세자빈 강씨의 궁녀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옥에서 죽었다. 이 혐의로 강씨는 별궁에 유치되었으며, 강씨가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김자점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다. 강빈의 죽음으로 친정 노모와 유배간 강빈의 4형제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강빈이 억울하게 죽고 난뒤에 남겨진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에 첫째 석철은 12살이었고, 둘째 석린은 8살이었으며, 셋째 석견은 4살이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장남 석철을 아깝게 여겨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했지만, 석철은 결국 1648년 11월 2일(음력 9월 18일) 제주도에서 장독으로 죽었다.
둘째 석린은 같은해 음력 12월 23일(양력 1649년 2월 4일) 병으로 사망했다.
셋째 경안군 석견은 효종의 즉위 후 복위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인조 실록 49권 26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적에 석철을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석철이 역강(逆姜: 세자빈 강씨)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장독(?毒: 풍토병)이 있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다 장사지낸들 또한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실록을 기록한 사관의 한탄에서 인조가 행한 행위에 대한 당시의 여론을 알수 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데려 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인조는 손자가 자라서 아버지와 어머니(소현세자와 세자빈)의 복수를 하겠다며 청나라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켜 조선으로 오면 인조를 비롯하여 여기에 연루된 많은 이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거라는 예측에서 인조는 손자 석철의 병에도 약을 쓰지않고 죽게 내버려 둔 것이다. .
개인적으로는 풍토병(말라리아)으로 죽었다는 소현세자 두 아들의 죽음에도 많은 의심이 간다. 무슨 11월과 2월에 말라리아가 있겠는가? 풍토병도 박테리아가 왕성할 때 이야기지 추운 겨울에 박테리아가 기승한 한다는게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죽음에 대해 흔히 소현세자의 일가를 법살 했다고 표현을 한다. 즉 인조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살해를 저질렀다는 뜻의 완곡한 표현인 것이다
1645년 음력 6월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자 본인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세자에 책봉시켰다. 친아버지 인조는 장남인 소현세자를 폐위시키고 '폐세자'로 불렀다. 고종때 소현세자는 다시 '세자'로 복권되었다.
어떠한 일의 결말이나 역사에는 만약이란게 없지만, 소현세자가 광해의 아들이고, 인조 반정이 없이 광해에서 소현세자로 자연스럽게 왕위를 물려주었더라면? 그럼에도 2백년 뒤에 일제에게 조선을 식민지배를 했을까? 우리끼리 싸우는 6.25가 일어 났을까? 우리나라의 현제의 상황은 어찌 되어있을까?
광해군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소현세자가 인조의 다음 왕이 되었더라면 후대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한번쯤은 생각해 본다.
1608년에 광해군(光海君)이 조선 15대 왕으로 즉위하자, 대북파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역모를 꾀하였다는 이유로 소북파의 영수(領首) 류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소북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이를 빌미로 상궁 김개시와 이이첨(李爾瞻),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었다.
그리고 대북파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선조의 적통인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때마침 그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 사건이 몇년뒤에 계축년에 일어난다. 이를 계축옥사(癸丑獄事)라고 한다.
같은 해 1608년 광해가 즉위 하는 해에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김평손" 등의 연명(連名)으로 '서자(庶子)들에게도 관계에 진출할 수 기회를 주도록 허통 상소'하였다.
이는 광해군이 세자시절에 보여주었든 양반들만 과거를 치루는 것을 일반 서자와 상민들에게도 같이 치뤄 실력위주로 사람을 가려 벼슬길을 열어주어 또 다른 계층에 인물들을 두루 정치에 참여시키겠다는 광해군의 본 마음을 알기에 상소를 하였다.
하지만 이를 두고 광해군은 자기를 왕위에 올려주었든 대북파 조차 결사 반대로 인해 이들이 올린 상소는 허락 할 수 없었다.
1613년 광해군 5년 7명의 서자들이 자신이 올린 상소가 허락되지 않자(서자들도 벼슬에 오를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의 상소), 불만이 쌓였다.
이들은 소양강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짓고 옛날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세상을 냉소하였다. 때로는 생활이 궁핍해지면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아예 여주(驪州)에 모여 서로 결의형제하고 도적이 되어 악행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이 훗날 칠서(七庶)의 난(亂)¹으로 발전한다.
★. 칠서(七庶)의 난(亂)¹: 박응서(朴應犀:박순(朴淳)의 서자(庶子) ·서양갑(徐羊甲: 목사 서익(牧使 徐益)의 庶子) ·심우영(沈友英:심현(沈鉉)의 庶子) ·이경준(李耕俊: 병사 이제신(兵使 李濟臣)의 庶子) ·박치인(朴致仁: 상산군 박충간(商山君 朴忠侃)의 庶子) ·박치의(朴致毅: 박치인(朴致仁)의 제(弟: 동생) / 박충간(朴忠侃)의 庶子) ·김평손(金平孫) 등 고관들의 자제들이나 서출(庶出)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혔음을 한탄하며 세상을 증오했던 7인의 서자(庶子)들이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조선의 3대 왕인 태종 이방원은 왕으로 즉위하자 슬그머니 교지를 하나 내린다. "서자 출신은 결코 관직에 등용하지 말것"..
조선 건국의 아버지이자 숙명의 라이벌인 정도전의 모든 것을 철처히 짓?는 것이다. 그로 인해 조선 초기까지 별탈 없든 정실과 측실 자식들의 관직에 변화가 태종에 의해 생기면서 조선이 끝날 때까지 이 법이 지겨며 많은 이들이 한과 눈물로 한 세상을 보낸 것이다.
단지 정도전이 서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태종이 교지를 내리든 날부터 양반의 서자들의 벼슬 길을 법적으로 막아 버렸다.>>
그들은 결국 조령(조령/새재 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 죽이고 은자 500냥을 강탈하는 사건으로 붙잡혔는데, 포도청에서 그들을 심문하는 중에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의 농간에 꾐에 빠져들어 하지도 않은 역모사건에 연루된다. 이들은 이렇게 모음 자금으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이를 사주한 자는 대비 김씨와 외할아버지 격인 김제남이 연루되었다고 자백을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계축화옥(癸丑禍獄 1613, 광해군 5)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대북파는 광해군을 옹립하였고, 소북파는 어린 영창대군을 옹호하였다. 실권파인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당시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였지만, 영창대군(광해군의 동생, 선조의 적통)의 외할아버지(선조의 장인)인 김제남(金悌男: 서인)만 증거가 없어 방면하였으나 대북파로써는 눈에 가시였다.
마침 조령에서 일으난 칠서들의 강도살인 사건을 이이첨(李爾瞻)은 이들을 역모로 몰았다. 그들은 이이첨(李爾瞻)이 시킨데로 자백을 하였다. 자기들은 친분(아버지들과 같은 서인)이 있는 김제남이 시켜서 자금을 모아 군을 양성하여 지금의 혼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옹립한다는게 계획이었다고 허위 자백을 받아내었다. 칠서의 목숨을 담보로 말이다..(박응서의 옥).
결국 그들로부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또한, 사건을 취조하는 동안 김제남(金悌男)과 인목왕후 부녀가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의 첫번째 왕후)의 무덤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로 인해 김제남(金悌男)은 사사(賜死)되었고, 그의 세 아들 역시 처형당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다.
이후 영창대군은 당시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하여 증살(烝殺...증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죽을 당시 그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정온'이 그 의문을 제기하기에 '광해군'은 '정항(鄭沆)'을 불러 철저히 조사하지만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
1613년(광해군 5) 칠서들과 친하게 지낸 이유로 혀균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평소 친교가 있던 서자 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광해의 오른팔인 격인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해 목숨을 구했고, 대북파(大北派)에 일원으로 열심히 참여했다.
광해의 장남 즉, 세자의 비는 이이첨의 자식이었다.몇해 동안 후사를 보지 못하자 광해는 허균의 자식으로 하여금 후비로 간택한다. 이예 이이첨괴 허균은 보이지 않는 파워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그중 가장 혀균의 큰 실수는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던 "문창부원군 유희분, 병조판서 박승종,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모함한 것이다.
이예 기자헌(奇自獻)은 자신들을 모함한 사람이 허균이라고 반대 주장하였으나 허균과 파워게임에서 진 기자헌(奇自獻)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하지만 기자헌(奇自獻)의 아들이자 허균의 제자이기도 했던 '기준격(奇俊格)'은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허균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에 허균도 억울하다며 맞상소를 올려 변명하려 했다. 이예 광해의 오른팔인 이이첨은 수하들을 총동원하여 폐모론을 주장한 허균을 탄핵하였고, 기준격과 함께 그를 반역 죄인으로 몰아 붙였다.
설상가상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누군가가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내용은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격문은 후에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인 것으로 밝혀진다.
결국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 앞에서 살벌한 국문이 열게 된다. 이른바 허균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국문이었다. 국문 중에 허균과 고변을 발고한 제자인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허균은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응하게 된다.
광해는 허균에 대한 역적 연좌와 적몰, 집을 부수고 못을 파는 일, 그 지역의 수령을 파직하는 일, 그 읍호를 강등하는 일 등을 모두 율문에 따라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심복들과 함께 창덕궁 인정전 잎 저자거리에서 혀균은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
4) 광해의 정치
이러한 옥사와 역모 사건이 광해 때에도 빈번하였다. 하지만 광해는 아버지 선조 때 부터 봐 온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무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당파를 초월한 이원익(동인과 남인), 이항복(서인), 이덕형(동인과 남인)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일으난 전쟁에서 재조지은(명나라를 도와 군대파견에 찬성)의 기치를 꺼내든 신하들과 명과 북방 정세의 정확한 정보력으로 광해는 신하들과 척을 지면서도 명과 후금 어느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광해는 조선의 실리가 최우선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이 같은 결정으로 훗날 서인들에게 계축옥사와 더불어 또 한번에 반정에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2. 서인(西人)과 능양군이종(綾陽君 李倧)의 반란.
1) 인조 반정
1620년(광해군 12년)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서와 이귀·김자점·최명길과 그의 형 최내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
광해군 15년인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밤 능양군(綾陽君)과 서인을 주축으로 한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
이이반(李而?)이 도중에 밀고하였으나 서인들은 예정대로 거사는 실행에 옮겨졌다. 능양군과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심기원, 구굉, 구인후, 최명길, 최내길 등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어 반란군들이 입궁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강등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 때 광해군 정권 때의 권세가였던 이이첨 · 정인홍 · 유희분을 비롯하여 무려 40여 명이 참수되었고 숙청되어 귀양간 자가 200여 명이라 전해진다.
반정 모의에 참여했으나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당했다. 조선 역사에서 일어난 4번의 쿠데타 중에서 인조반정처럼 반대파를 철저하게 압살한 적은 없었다.
또한 정인홍의 경우 당시 88세의 고령으로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처형하였다. 그것도 사약이 아닌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정승을 지낸 인물 및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처형할 때 목을 베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1689년 송시열이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은 것과 상반된다.
이로써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 정권의 우상인 조식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받았다. 이리하여 인조는 저 유명한 인조반정으로 숙부인 광해군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조선의 역사상 성공한 반정은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 반정과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이다.
하지만 그는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남한산성에서 오랑캐로만 여겼던 청의 "홍타이지" 즉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우리 역사의 치욕의 순간을 직접 경험한 왕이다. 그 외에도 장남을 살해하고(독살설), 며느리와 손자까지 깡그리 죽여야 했든 인물이다.
2) 인조의 가계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의 다섯번째 아들인 정안군이다. 서자의 손자이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왕이 되기에는 많은 약점을 가진 가계이다. 정안군은 선조와 인빈 감씨 사이의 소생에선 3번째 아들이다.
인빈 김씨¹는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와 함께 선조의 후궁에서 사랑을 많이 받은 여인들이다. 공빈 사후 인빈 김씨가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녀의 아들 신성군은 광해군과 세자 자리를 다투며 그 지위를 가장 위협하기도 했던 아들이 되지만 임진란에 15살 나이로 신성군은 사망한다.
★.인빈 김씨¹: 명종 10년인 1555년 전생서주부(典牲署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효성(李孝性)의 딸 전주 이씨이다. 그녀의 외조부인 이효성은 왕실의 일원으로,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의 증손자이다.
또 그녀의 언니가 신경과 결혼하여 낳은 딸은 광해군의 후궁으로 책봉된 숙원 신씨이다.
인순왕후(명종의 비)가 선조에게 후궁으로 추천하여 1573년(선조 6년) 종4품 숙원(淑媛)에 책봉되었다. 이후 정3품 소용(昭容), 종2품 숙의(淑儀), 종1품 귀인(貴人)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에 정1품 인빈(仁嬪)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광해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후궁이었던 공빈 김씨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죽자 선조의 총애가 모두 인빈에게 옮겨가게 되었으며, 또 이때를 틈타 그녀의 아우인 김공량(金公諒)이 이산해 부자와 결탁하여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한 정철 등을 유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선조의 광해군에 대한 총애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세자이던 시절에는 선조의 미움을 받던 광해군을 변호하기도 하였고, 임해군의 옥사가 있을 때에는 그녀의 소생들이 정사 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광해군은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라고 까지 하였다
그녀는 1613년(광해군 5년)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조회를 3일간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나 사헌부에서 "인빈은 후궁일 따름이니, 법에 조회를 중지하는 예가 없었고, 예에도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사사로운 은혜로 예법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대하여 무마되었다고 한다.
인빈 김씨의 후손들이 인조 이후에도 계속 조선의 왕위를 물려 받는다.
선조와 그녀 사이에는 4남 5녀를 두었다. 아들만 기록하겠다.
장남 : 의안군 성 (義安君 珹, 1577년 ~ 1588년)
차남 : 신성군 후 (信城君 珝, 1578년 ~ 1592년) ? 신립의 딸과 결혼 손녀 : 전주 이씨 - 죽산(竹山) 안씨 안홍량(安弘量, 1590년 - 1616년)에게 출가.
삼남 : 원종 부 (정원군, 定遠君 ?, 元宗, 1580년 ~ 1619년) ? 능성 구씨 구사맹의 딸(인헌왕후)과 결혼 손자 : 능양대군 종(綾陽大君 倧) - 인조 손자 : 능원대군 보(綾原大君 ?) 손자 : 능창대군 전(綾昌大君 佺) 사남 : 의창군 광 (義昌君 珖, 1589년 ~ 1645년) ? 양천 허씨 허성(허균의 형)의 딸과 결혼
인빈 김씨는 신성군을 통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신성군이 병사하여 그 꿈을 접은 듯 했으나 그녀는 때를 기다렸다.
선조의 새로운 계비인 인목왕후가 적통인 "영창대군"을 생산하자 현실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꿈을 접고 한때 적대적이었던 광해군쪽으로 적극 지지하게 된다. 언니의 딸(조카)를 광해의 후궁으로 보내 광해와 가족이 된다.
그녀의 선견지명으로 인해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이 목숨을 잃는 피바람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자식들을 무사히 보호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도 탄탄하게 구축해 두었는데 병사한 신성군은 임진란에 탄금대에서 목숨을 잃은 신립 장군의 사위였다.
그녀의 또 다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정원군(인빈 김씨의 삼남)의 장인은 강직하고 명망 높은 "구순"의 손녀였다. 이 결혼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인빈 김씨의 오래비인 김공량은 선조의 총애를 받는 여동생을 믿고 여러가지 세도를 부리다가 구순에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이에 김공량이 인빈을 찾아가 하소연 하고 구순을 험담하자 오히려 인빈은 선조를 설득해 구순의 손녀를 자신의 셋째 아들과 혼인시킴으로써 명망 높은 구순을 인척으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이러한 대범한 처세술과 자신의 아이들과 조정의 주요인물들과 맺어 놓은 인척관계를 보면 그녀 만큼 권력의 성격을 잘 이해한 궁중 여인도 없었는듯 하다. 이러한 연유로 훗날 인조 반정의 주역은 신립 장군의 후손들과 구순의 후손들이 참여하게 된다.
정원군은 부인 구씨와의 사이에서 세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인 능양군이 바로 훗날의 인조이다. 능양군의 뒤를 이은 동생들인 능원군과 능창군은 일찍 세상을 떠난 정원군의 형들인 의안군과 신성군의 양자가 되어 그 가계를 잇게 하였다.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에 대한 평가는 "인조실록" 과 "선조실록"에 서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인조실록"에서는 당연히 정원군과 능양군(인조)는 어린시절 부터 비범하고 출중하여 선조의 사랑을 받고 왕이 될 조짐들이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의 기록들에는 정안군은 임해군, 순화군과 더불어 선조의 망나니 아들 3명중 한명으로 일컫어진다.
임진 왜란 당시 일본군과 내통하여 밀거래를 하여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고, 지방에 행차하며 막대한 금품을 약탈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 했다고 한다. 이런 망나니짓을 하고도 무사할수 있었던 것은 단지 선조의 총애를 받은 어머니인 인빈 김씨와 그녀가 쌓아둔 인맥과 처세 덕이었다.
3) 능양군 시절에 인조...
능양군(인조)는 할아버지인 선조의 배려를 통해 사저에서 자라지 않고 궁중에서 자랐다.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에게도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기록에는 5, 6세 때에도 선조가 품안에 두고 번거러워 하지 않고 귀여워 했다고 하니 그의 어린시절은 궁궐에서 사랑받으며 행복한 시기를 보낸것 같다.
선조가 별세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는 아버지 정원군을 따라 경희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인렬왕후가 되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과 가례를 올린 후에는 사저로 분가하였다. 능양군이 18세 때 맏아들인 소현세자를 얻는다.
광해군의 치세에서도 인빈 김씨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탈했던 그 자식들도 그녀의 사후(광해군 5년 이후)2년 뒤인 광해군 7년(1615년)에 신경희의 옥사로 일컫어지는 사건을 맞아 신성군의 양자가 되었던 동생인 능창군이 유배를 당하고 자결 하게되는 사건이 일어난다.(실제로는 영창대군과 같이 증살(蒸殺) 했다고 함)
4) 인조 반정에 원인과 후원자들
이는 수안군수 신경희가 획책하던 모반에 추대되었다는 고변을 받은 광해군이 역모의 수괴로 능창군을 강화로 유배하여 살해한 사건으로 이후 광해군은 정원군과 능창군의 집을 빼앗고 그자리에 인경궁을 짓는다.
아들을 잃고 집까지 빼앗긴 정원군(인조의 아버지)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으로 4년동안 화병으로 자리를 보전하다 죽는다. 이후 정원군의 아내였던 구씨 부인은 남편과 아들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위해 친정 식구들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반정을 계획하게 된다.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다보면 남자들이 전면에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그 뒤에 남성들 못지않은 강단을 지닌 여성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죽은 신성군이 신립의 사위였으므로 신성군의 양자인 능창군의 죽음에 신립 장군의 아들인 신경진도 가담하였고 구씨의 친정 오빠인 구굉과 함께 반정의 주축 세력이 되게 된다.
이는 무인 세력과 여러 인물들의 가담을 불러오게 된다. 구인희, 김류, 이귀, 김자점, 최명길, 이괄등의 인물들이 반정에 가담하게 되었고 광해군이 인목대비 유폐라는 유교적 사상하에 패륜이라는 최악의 악수를 두면서 당파를 초월한 사대부 전체와 적대하게 되자 이를 주요 명분 중 하나로 삼아 광해 15년(1623년) 3월 12일 밤 마침내 거사를 일으켜 능양군(인조)이 몸소 무장하고 일가 친척들이 수장으로 있는 군사들을 직접 이끌고 새벽에 궁궐을 들이치게 된다..
5) 1623년 4월 11일..인조 반정..
사실 반정의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소문으로 초기 군사를 이끌기로 한 김류는 집에서 두문불출 하다가 이괄의 설득으로 합류하는 등의 혼란이 있었고 반정의 정보는 그 전 해인 1622년에는 계획이 누설되어 이귀, 신경진이 거사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있기도 했으나 너무나 많은 역모, 고변, 국문등에 진력이 난 광해군은 이러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말았다가 결국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왕위를 잃게 되었다.
거사날 능양군과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심기원, 구굉, 구인후, 최명길, 최내길 등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궁궐의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어 비교적 손쉽게 반정에 성공하게 된다.
반정군이 궁안으로 진입하자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이던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사로잡혀 반란군 과 광해 보다 9살이나 어린 어머니인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그녀는 반정 후 폐위된 내 죄악을 33세 가지나 조목조목 나열했다. 자잘한 것은 없는 것으로 넘기더라도 나의 죄악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나보다 아홉 살 어리긴 하지만 엄연히 어머니뻘인 자기를 폐서인하고 자기 아버지(김제남)를 죽였으며,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범한 죄.
2. 과도한 토목공사(경복궁 복원)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죄.
3. 결정적으로 임진란을 극복 할 수 있었든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소홀히 하고 오랑캐 나라(여진)인 후금과 '밀통'했다는 죄로 그 책임을 물어 공도 없고 덕도 없는 왕자의 신분인 "군(君)" 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 를 보내졌다.
광해군 정권하의 세력가이던 이이첨, 정인홍, 유희분을 비롯한 고관대작 40여명이 참수되고 숙청되어 귀양을 간 사람이 200여명에 달했습니다. 조정의 고관 대신이 40여명이나 참수되는 일은 사실 연산군 때의 사화에서도 없었던 일로 인조와 반정세력의 광포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이와 같이 쿠데타나 반정에서 반대파를 완벽하게 압살할 수 있었던 경우의 드문 사례가 된 인조반정은 그 여파로 그 후에 조선의 외교나 정책이 한 방향으로만 향하게 되는 원인이 되어 결국엔 나라를 또 한번 도탄에 빠지게 한다.
반정의 주요 명분중 하나가 인목대비의 폐위와 유폐였으므로 반정군은 인목대비를 복위하고 그녀의 교서를 받아 인조를 즉위시키는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은 권력을 쟁취하고자 한 명분일뿐 인조 즉위후에는 인목대비를 크게 예우 하지 않고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만다.
또한 논공 행상에서 공정하지 않아 내부적인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는 앞서의 반대세력을 철저히 제거 할수 있었던 부분과 맞물려 인조의 치세가 순탄하지 않게 흘러가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정상적이라면 왕이 될수는 없었을 서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약점 또한 인조의 왕위를 치세 내내 위협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6) 무능한 왕 인조의 즉위 초기현상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군의 명분은 인목대비를 유폐한 불효,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죄,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다하지 못했다는 부분이다.
그 외에도 33개의 죄목을 열거하며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하고 민심을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적어도 주요 명분중 하나인 후금과의 우호관계라는 명분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새로운 임금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명나라를 섬기는것은 사대주의에 찌든 사대부들에게나 중요한 명분이었고 백성들에게는 광해군은 임진왜란 등에서 전쟁의 고통을 나누었던 "우리 임금" 이었기 때문이었다.
반정의 주요 세력은 서인 게열로 이 차가운 민심에 당황하여 남인계(온건파 동인)의 이원익을 영의정에 제수하는등 남인계에게도 요직을 나누어 주며 민심을 달래려 했었다.
당시의 당파는 크게 동인과 서인으로 볼수 있는데 선조 중기부터 광해군까지 동인이 세력을 잡았다.
동인은 또한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나눠졌고, 북인은 또 대북(광해군 지지)과 소북(영창대군 지지)으로 분파가 되지만 크게 보면 이들은 모두 동인계였다.
반면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서인계열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 멸망 때까지 시대에 흐름에 따라 여러분파로 나뉘어 졌다..
반정 세력들은 모두 한 배를 탔지만 각각 속내는 달랐다. 인조는 왕위를 원했고.. 서인은 동인에 밀려 실각된 권력을 찾고자 하였고.. 아들(영창대군)을 광해군에게 잃은 인목대비는 복수를 원했다...
먼저 반정을 지지한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죽이려 했지만 남인계인 이원익등의 반대로 제주도에 유배하는데 그친다.
풀리지 않은 그녀의 복수심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김개시와 후궁들, 궁녀들에게 향해서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서인은 할수 없이 권력을 남인에게 일부 나누어 주긴 했으나, 곧 반대 당파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으로 대북계 인사와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했던 소북계(영창대군 지지) 인사들까지 숙청과 살육이 자행 되었다. 이러한 명분과 관련없는 살육과 단순한 반대 당파에 대한 숙청은 반정의 명분이 허울뿐이라는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1623년 10월에는 광해군의 이복 동생인 흥안군 이제를 추대하고자 하는 역모가 있는 등 인조 즉위 초기의 왕권은 그리 단단하지 못한 상태였다.
명나라는 인조 반정을 왕위 찬탈로 생각했었고, 후금은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며 군사적 도발을 해왔다. 더구나 내부적으로는 수 많은 역모, 반란이 일어났다.
7) 이괄의 난(李适 亂)
이괄은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신경유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23년 음력 3월에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반정 후 두달이 지날 쯤에 이괄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후금을 방비하기 위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평안도 영변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사에 대한 불만이 컸다.
반정 막바지에 누설에 대해 겁을 먹고 집을 나오지 않았던 김류나 자신보다 역활이 작았던 이수일등이 자신보다 상위의 공신이 된것을 아마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또다시 변방으로 나간 것도 불만이었다 .
하지만 이괄이 평안 병사 및 부원수가 되어 군사력을 통솔하게 되자 조정에 남은 반정 공신들 중에 이괄은 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자인데 그가 군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껄끄러워 했다.
그러던 중 1624년 음력 1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이괄에 대한 불편함을 가진자들이 주축(김류와 이수일)이 되어 인조에게 이괄이 북인계 인사들과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고변을 하게 된다.
하지만 조사에도 불구하고 이괄의 역모에 대한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압송하여 조사를 하기로 결정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괄은 논공행상의 불만뿐 아니라 자신을 제거하려는 반정 세력들에게 분노했다. 이로 인해 이괄은 정말로 반역을 일으키게 된다.
이괄 역시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 선조와 온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선조의 10남)을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괄의 아들인 이전을 압송하러온 사령들을 죽이고 항왜(降倭: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왜군) 100명을 선봉으로 삼아 1만 2천명의 군사로 한양으로 진격한다.
반군은 관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개성을 지나 임진강에 이르렀다. 이 소식에 놀란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급히 화성(수원)으로 피신하였다가 천안을 거쳐 공주까지 피난을 간다. 인조는 이괄의 난과 앞으로 일으날 두번의 호란(胡亂) 때도 도성에서 버려두고 도망을 치는 치졸함과 자신만을 위한 행보를 계속한다. 인조 정권 내내 백성들의 평범한 삶의 정치와는 완전 단절되었다. 인조와 함께한 서인정권들은 앞으로도 계속 잘못된 선택을 한다.
1624년 이괄은 3월 29일 한양에 입성하여 흥안군을 왕으로 세운다. 이처럼 승승 장구하던 이괄은 같은날 '장만'과 '임경업'이 지키는 길마재(무악재)를 포위 공격하다가 패배하여 그 기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광주로 이동하던 그의 군세는 관군의 추격으로 와해 되었고, 달아나던 이괄은 부하들에게 살해 당하게 된다. 왕으로 추대되었던 흥안군은 국문도 없이 살해당했고 이로서 이괄의 난은 3일 만에 완전히 진압되어 버린다.
이괄의 난은 이후 이괄의 부하였다가 살해된 한명련의 아들 한윤, 한택 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강홍립 휘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정묘호란의 불씨가 된다.
더구나 인조는 한양에서 피난 전에 김류의 주장으로 이미 무고가 밝혀진 북인계 인사들을 모조리 죽였버린다. 죄가 없는 사람들을 왕인 인조가 죽여버린 것이다.
단지 당파가 달라서 죽임을 당한 피의 숙청이었다. 이처럼 인조는 서인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이일로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한양으로 돌아온 인조와 서인 집권층에 대해 백성들이 철저히 외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8) 서인을 견제
인조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 세력은 수시로 자신들이 공을 세워서 인조가 즉위할 수 있었음을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떠벌였다. 서인 공신 세력의 이같은 행위에 인조는 분노하면서도 힘을 쓸 수 없었것을 새로운 인사를 대거 등용시켜 서인들을 견재하려 했다. 인조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의 산림 학자들과 김육 등 비공신 계열 서인 세력을 기용하였다.
또한 반정 초기 왕족 출신 남인계, 정승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기용한 것을 비롯, 남인 계열의 정치참여를 확대시켜 이들을 통해 서인 공신 세력을 견제한다.
서인들은 이괄의 난이 진압되면서부터 계속하여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성균관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건의한다. 하지만 남인계 성균관 유생들은 이이가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것과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가마를 보고도 호종하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서인의 이념이 국시가 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인조는 이이와 성혼의 의혹들을 언급하며 문묘배향을 거절하였다. 이후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여론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9) 인조의 정통성 강화를 위한 꼼수 작전
인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 정원군은 대원군으로 추존하여 정원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고,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들 또한 선조->정원군->인조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구성하여 자연스러운 계승 순서와 인조의 정통성 강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서인계 예학자(禮學者)인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김장생의 아들)과 송시열(宋時烈,)과 남인계 허목(許穆) 등은 인조가 선조의 후사를 계승하였으므로, 선조를 아버지라 하고 정원군은 황숙부나 황백부로 불러야 된다고 고집하였다. 인조는 머리가 아팠다. 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고, 아버지를 숙부라고 하려니..
인조는 꼼수를 써기로 했다. 예학자(禮學者)들의 말을 듣는 것 처럼 액션을 취하고, 반정 공신인 이귀, 이정구 등을 중심으로 아버지 정원군의 추존 작업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이중적 액션을 각기 다르게 하였다. 예학자(禮學者)들의 중론을 듣는 것처럼 여론을 각색한 후 결론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원종이라 하였다.
인조의 꼼수에 예학자(禮學者)들의 반발은 계속되어 정원군의 추존에 반대하여 김장생, 김집 등은 사퇴, 낙향하였고, 허목(許穆)은 이를 비판하다가 불이익을 받고 관직 임용이 금지당하기도 했다
10) 백성들에게 인정 받지 못한 왕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한양을 떠나 피난하던 날, 한강변에서 도강을 하려고 배를 타려 했을때 백성들이 인조가 탈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을 정도이고, 이괄의 반란군이 한양 입성에 열렬히 환영을 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인조는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왕이었다.
백성들은 철저히 인조와 서인정권에 대한 높은 반감을 보였다. 이는 후에 임진왜란 때의 자발적인 의병 봉기와 달리 정묘호란시 강화도에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했을때 인조를 구하려는 백성들이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철저히 외면을 당하는 인조의 조정이였다.
물론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선조의 조정을 백성들이 기억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조와 서인정권의 행보가 그들이 말한 대의와 명분 보다는 당파의 이익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게 가장 큰 이유였다.
11) 인조 조정의 외교적인 무능과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
광해군 재위기간에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그래도 가장 인정할만 한 부분은 전란을 치르면서 생긴 국제 정세와 외교에 대한 감각으로 이를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그가 취한 실리적인 외교 정책은 후금과의 충돌이나 전란을 미연에 막기도 했다. 반면 인조와 서인 집권층은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급박하게 흘러가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철저히 무시하였다..
반정 후 인조와 서인은 척화파를 중용하여.. 광해군의 밀명으로 청과 싸우는척 하다가 투항한 강홍립의 일가와 친척을 모두 몰살 시켰 버린다. 이 결과가 훗날 정묘호란을 발생하는 또다른 불씨가 타오르게 된 것이다.
인조와 서인 집권세력의 무지와 외교적 무능은 정묘호란시 후금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겠다는 화평안을 보낼 때.. 그 문서에 명의 연호를 써서 보내 버렸다.
조선에서 온 조서를 받아 보니 강력한 힘을 가진 후금을 자극한 것이었다..
이에 분개한 후금의 사신은 이 조서로 인해 옷감 4만필과 소 4천마리를 추가로 요구 하였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빛도 갚는다는데...
글 한자 한자가 국가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과 한 것 같다. 단지 무식한 오랑케를 일게워주는 듯한 모양이다.
특히 중요한 시기에서 외교전에 좋은 표본은 광해군이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 대한 지원으로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때 누르하치에게 "조선 국왕이 대금국 칸 전하에게 드립니다" 라고 적어 국서를 보내 후금과의 전란을 막은 것과는 참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수 없다.
이런 일은 또 한번 겪게 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의 일이다.
후금은 인조에게 "조선국왕의 아우와 대신들을 인질로 보내면 항복으로 인정하겠다"라는 요구에..
인조 조정은 다른 사람으로 꾸며서 냈다.이는 곧 탄로가 나 버렸다. 결국 본인들이 아님이 들통나자 후금에서는 조선을 믿을 수 없어 더 큰 요구를 하게 된다.
"조선의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 라는 추가 요구를 받게 되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가게 된 이유가 된 것이다.
보다 가볍게 넘어갈수 있는 일에도 얕은 수를 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꼭지를 돌게하는 이른게 바로 오랑케 같은 생각이며 행동이 아닐지 반정에 승공한 인조와 서인들은 누가 누굴 보고 오랑케라고 하는지..
이괄의 난 이후 후금에 투항한 한윤, 한택 형제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청태종)를 만나 인조반정의 부당성과 광해군의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명나라에 사대주의로 일관하는 인조와 서인정권의 태도에 후방의 위협을 느끼던 후금의 홍타이지는 결국 1627년(인조5년 정묘년) 1월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후금의 군.. 길안내 역활로 선봉에선 이가 바로 강홍립 이었다.
12) 병자호란 전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에 정세
1619년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하였을 때는 그 요청에 못 이겨 광해군은 강홍립으로 파병군 장군으로 삼아 조선파병군 1만여명을 원조케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그들에 전쟁에 결코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고 정쟁의 판도에 따라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주었다.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명은 후금에게 대패를 하였고... 《아부달리(阿布達裡) 전투》에서도 명군은 또다시 패한다.
<사르후와 아부달리의 위치>
명군이 불리한 상황에서 《부차 전투(富車戰鬪) -> 위 지도에서는 부찰(富察)》에 참여한 강홍립의 조선 파병군은 후금에게 포위 공격을 당하자 강홍립은 후금에 적각 항복하였다. 이 때문에 후금은 조선에 대한 보복적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양국 간에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본래 홍타이지(청 태종)는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평 방침에 반대하여 주전론을 주장하여 왔는데, 이는 후금의 남진 정책에 대한 배후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재위하고 있는 동안은 조선에는 전의가 없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광해군의 권유로 평안북도 철산의 가도에 주둔하여 요동의 회복을 획책하며 후금을 자극하였다
<평안북도 철산군 가도의 위치>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으났을 때 누르하치의 후금은 만주에서 명군을 힘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명의 힘도 아직은 만만치 않아서 산해관 밖 영원성<寧遠城)의 전투:1626년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과 후금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영원성(寧遠城)을 놓고 벌인 공성전이다.
홍의포(紅夷砲:네덜란드에서 중국 청나라를 거쳐 유래된 대포)로 중무장 명나라의 2만 군대가 16만의 후금의 군대를 밀어내는 데는 고작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이틀 동안의 공성전에서 후금군은 적에게 전혀 타격조차 주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결국 후금군의 사기는 모조리 바닥이 났고, 누르하치는 후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16만의 군대가 후퇴를 시작하자, 2만의 군대는 이를 추격하여 30여리를 뒤?아 더욱더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에서 누르하치의 후금은 대패배하고 만다. 누르하치는 홍의포 부상으로 인해 전사하고 만다.
하지만 후금에는 누르하치(努爾哈赤: 청 태조)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皇太極)가 있었다. 광해군의 집권시에는 조선이 뚜렷한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전화를 피할수 있었으나 이제 인조의 정권은 아에 대놓고 명에게는 무조건 사대를 하고 홍타이지(皇太極)의 후금에 대해서는 오랑케라며 적대적인 모습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정묘호란(1627년)에 대해서는 당시 후금에 대한 명나라의 교역중단 조치와 그동안의 급격한 팽창에 따른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지만 명나라와 전력을 다해 겨루고 있던 후금 입장에서는 후방에 있는 명나라의 우방을 자처하는 조선과 조선 정부의 적극적으로 지원을 받은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은 조선국경 안에서 머물며 후금의 뒤를 공격하는 게릴라 전을 펼치며 치고 빠지는 전술을 폈고 있는 신경에 거슬리는 존재임이 분명 하였다.
모문룡은 평안도 앞바다의 가도에 머물면서 병력은 1만 정도였다. 모문룡의 명군은 적극적으로 후금을 공격하는 대신 명나라와 조선을 오가는 무역선을 대상으로 밀무역과 통과세로 부를 쌓으며, 조선 정부에는 식량지원을 요청하고 식량이 제때에 도달하지 않으면 주변 부락을 약탈하는 패악을 부리고 있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 폐해가 엄청났지만 어찌 할 수 가 없었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영원성 전투의 패배와 명나라 모문룡의 후방 교란으로 인한 문제로 명나라의 전쟁 보다 우선 후방 안정에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인조에게 반란을 일으켜 실패한 이괄의 잔당 중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단점과 주둔한 위치를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지졸(烏合之卒)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계속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홍타이지에게는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13) 정묘호란
결국 1627년 3월 1일 정묘년에 홍타이지는 슈르하치(누르하치의 동생)의 아들 아민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광해군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후금군의 길 안내를 맡은 것은 앞서 언급한 강홍립이었다. 후금군의 일부는 모문룡을 공격하고 주력부대는 3월 3일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약 일주일 후인 3월 11일에는 평양을 함락시켰다. 평안도 안주성에서 남이흥, 전상의,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전사했고. 평양을 거쳐 3월 12일(음력 1월 25일)에는 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로 피신을 한다. 인조와 서인들은 오판을 하고 만다. 바로 믿었든 명나라의 배반이다. 인조와 서인은 급하게 조선의 사정을 설명하고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해준 군을 보내 주리라 생각했지만 명나라는 이미 제 코가 석자인 상태였다.
또 인조와 서인들이 오판한게 있다. 의병들이었다. 나라가 힘들 때 임진왜란 때 처럼 각지에 의병이 일어나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의 일반 백성인 이립과 정봉수의 의병들이 후금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후금군에 타격을 주기에는 미비했었다. 하지만 후금은 조선이 결사 항쟁하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후금 역시 조선을 점령하려는 것보다 굴복시켜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에 조선과 후금이 형제 관계를 맺는다는 화친 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 하려고 했다.
1627년 음력 3월 강화도에 있는 인조와 서인들은 화전(和戰)의 양론이 분분하던 중 후금이 강화를 제의해 오자 인조는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主和論)을 채택, 후금과 교섭하여 정묘약조를 체결하였다.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가 성립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1. 후금군은 평산(平山) 이남으로 더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할 것 2.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3.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 화약은 두 나라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관계가 굴욕적인 데다가 막대한 세폐(歲幣)와 수시로 요구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으로 더욱 배금의 길을 걷게 되었다.
후금도 경제적 이익은 취할 수 있었으나 모문룡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에 더욱 팽창된 후금이 조선에 대한 강압적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어 결국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4) 병자호란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최근에는 인조와 서인정권에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전쟁이었다. 사실 인조는 정묘호란이후 국호를 바꾼 청나라에 대해 납작 업드린 상태로 사실상 많은 양보를 했었고, 청의 계속되는 심한 요구를 더이상 들어 줄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조와 서인들의 머리속에는 여전히 명에 대한 사대라는 명분에 얽매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불러왔다는 생각이 더 맞다고 생각하면 된다.
청의 군신관계 요구에 대해 존명사대의 명분에 갇혀있지 않고 실리적인 판단을 내릴수 있었다면 굴욕은 있었더라도 전쟁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격렬하게 반발하지는 않았을듯 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칭제(청나라로 국명을 바꾸고 황제라 칭함)를 결심하고 조선에 의견을 구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조정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이 홍타이지에게 배례하지 않는 등 친명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였다. 실제로 홍타이지는 조선에게 선전포고에 가까운 최후 통첩후 7개월 동안 입장표명을 기다렸다. (물론 군사적 준비와 압록강이 얼어붙기를 기다린 이유도 있었다.)
홍타이지가 이런 생각을 하는 시간에 인조와 서인 정권은 싸울 것이냐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를 가지고 끝없이 대립 했었고 결국 인조는 어떤 군사적인 역량에 대한 판단이나 준비도 없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교서를 내린다. 조선의 최종 의사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면전에 앞서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결심했다.
1636년 병자년 12월2일 12만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약속을 지키지 않는 조선으로 또 한번 진격한다. 청나라와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정묘호란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전략적인 전쟁이었다면 이번 병자호란은 명백하게 명나라로 편을 정한 조선을 징벌하기 위한 전쟁이인 것이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 논과 들을 깨끗이 비워 군량미를 조달하게 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성벽을 튼튼히 하여 수비에 치중하는 작전 )"으로 기병력이 강한 청군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청군의 침공로 주변의 성에 아군들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써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체화 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 본 경험이 있는 청군은 또다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작전을 달리한다.
한편 수성 작전을 펴는 조선군에 청군은 별도로 인원만 남겨두고 평안도와 황해도를 지나 무조건 한양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인조를 목표로 남하하여 한양에 도착했을 때 조선의 봉화로 소식을 들은 것은 그들 도착 하루 전이었다. 청군은 완벽히 인조와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즉, 봉화를 통한 소식을 한양에 있는 인조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고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날이 12월 14일이었다. 그때 인조는 급히 한양을 버리고 또 파천에 나섰다.
(말이 좋아 파천이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이괄의 난 때 도망, 정묘호란 때도 도망, 그리고 병자호란 때도 또 도망..무슨 일이 나면 무조건 도망.. 이런 왕을 누가 따르겠는가? 진짜 무능고 대책 없는 왕이다.)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청군의해 차단당한 소식을 접한 인조는 부랴부랴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로 보낼 잔 글씨로 쓴 격문은 벌의 분미물로만 볼 수 있다. 이러한 뭉친 글을 몰래 성 밖으로 보내 근왕군을 모으려고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국도인 한양과 조선 왕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전개했으므로 한양과 그 주변을 제외한 지역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
특히 삼남 지방(경상,전라,충청)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勤王軍)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근왕군(勤王軍)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勤王軍)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게 각개격파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14-1) 근왕군(勤王軍)의 동향
가장 먼저 12월 17일, 강원감사 조정호가 근왕군(勤王軍) 약 7000여 명을 조직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000여 명이 12월 24일 남한산성 근처의 검단산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튿날 청군의 별동대에게 격파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勤王軍)은 토붕와해(土崩瓦解)했다. 조정호는 잔여 군사를 이끌고 가평으로 퇴각하여 다른 근왕군과의 합류를 꾀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7일 근왕군 7000여 명을 규합하여 진군했으나 북병사 서우신과 함경감사 민성휘이 지휘권을 놓고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고 복잡하게 다퉜다.
서우신은 곧장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자고 주장했지만, 민성휘는 양평의 김자점과 합류한 후에 세력을 키우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민성휘의 의견을 좇아 함경도 근왕군은 양평으로 향했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북방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2만 3천에 달했지만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서 전쟁에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충청감사 정세규는 12월 18일에 인조의 격문을 받아 즉시 7,000명의 근왕군을 규합하였고, 좌영장 최진립(崔震立), 우영장 심일민(沈逸民), 별장 황박(黃珀), 중군 이건(李楗), 참모관 이경선(李慶善), 방량차사원(放粮差使員) 이상재(李尙載), 군기차사원 김홍익(金弘翼), 심약(審藥) 이시량(李時亮) 등이 참전을 했다.
12월 25일 공주를 출발하여 12월 27일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과 용인시 수지구의 경계를 이루며 탄천으로 합류하는 동막천)에 당도해 화전(火箭)을 이용해 남한산성에 신호했지만 성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온다는 첩보를 받은 청군은 청나라 태종의 매부인 양굴리(揚古利)가 조선 근왕군 진압 장군으로 별동대 이끌고 험천 일때에 매복을 하고 있었다. 이를 모르는 충청의 근왕군을
청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것으로 시작하여 청군의 공격을 10여 차례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근왕군의 기력이 다 해 충청감사 정세규는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다가 부하들에게 구출되었지만 최진립(崔震立) 이하 모두 진중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원으로 퇴각하였다.
청군이 처음 압록강을 건너 한성으로 남하하면서 평안도를 통과한다. 당시 평안감사 홍명구는 청군의 압록강 도하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조직 후 평양성 북(北)에 있는의 자모산성에 들어가 청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진(南進)하였으므로 아무것도 대처할 수 없었다.
평안감사 홍명구는 평안병마사 유림 휘하의 5,000명의 관군 병력을 합세하여1636년 12월 18일 평양을 출발해 남하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 이들의 진격을 막고자 주둔한 청군의 별동대에 가로막혀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지휘관의 의견분열로 조선의 정예군 5,000명의 군대는 평안감사 홍명구는 관군 2,000명과 평안병마사 유림 휘하 3,000명으로 나워진다.
1637년 1월 26일 홍명구는 새로 합류한 의병 300명을 이끌고 강원도 김화 탑동에 진을 친다. 하지만 그의 군은 청의 별동대와 분전하지만 평안감사 홍명구와 순안현령 허노를 포함한 조선군 1,000명이 전사한다
평안병마사 유림은 김화 백동 고지에 진을 쳐 주둔하였다. 1,000명의 탑동전투 패잔병들이 몰려들며 다시 진을 짰다. 근왕병도 4,000며이나 되니 청의별동대와 해 볼만 하였다. 그들이 보유한 우수한 화기를 살려 청군과 맞서 싸운다.
유림 장군의 분전으로 그들은 1선 살수의 진격으로 시작하여 돌격한다. 2선 사수와 3선 포수의 일제사격은 위력적이었다.
마지막까지 포와 조총을 쏴대며 지원한 어영청 소속 포수들이 승리를 이끌었다. 조선군은 청군 수천명을 전사시키며 승리를 거두지만 이내 남한산성에서 청과 강화소식을 듣고 그들은 평양으로 돌아간다.
전라감사 이시방은 12월 20일 근왕(勤王)하라고 명령받았다. 12월 29일 병력 6000여명을 모은 이시방은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전주 군영을 출발해 북상했고 이어 화엄사의 승병 2000여 명이 이에 합류하였다.
선봉을 맡은 김준용은 1월 4일 광교산 부근까지 진출했으나 이틀 전 충청도 근왕군을 격파한 청군과 만났다.
1월 5일 김준영은 청군의 돌격을 막아내고 다음날은 청군 장수 양굴리를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역시 물자가 부족하여 인해 더는 진군하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수원으로 퇴각하였다. 이시방이 이끄는 근왕군 본대는 광교산 전투에서 김준영이 수원으로 퇴각 소식을 접하자 패배로 오인하고 근왕병을 안전한(?) 공주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14-2) 경기 광주의 쌍룡전투의 대패..
최신 조총으로 무장한 경상 근왕병 8,000명VS 기마병 300기와 재래식 칼로 부장한 보병 1,000명 청군과의 전투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경상도의 근왕군은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총 규모 약 4만(?)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병력 8,000여 명 이상은 1637년 1월 3일 경기도 광주의 쌍령근처까지 진출했다.
경상 근왕군을 저지하려고 인근 불당리에 매복하였던 청군은 기병대 3백 기(騎)와와 보병 1,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청군의 병력으로 보아 소규모 부대였다.
경상 근왕병의 대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조총을 다루는 훈련도는 매우 낮았고, 전투 중에 청군 기병 3백 기가 칼을 빼어 들고 용감하게 돌격하자 8천여 경상 근왕병은 겁먹은 채 거리조차 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사격한 끝에 화약과 화살을 모조리 소모한다.
청군은 일단 후퇴하고 나서 조선군이 화약을 소모한 상황을 확인하고 재차 돌격을 감행하여 허완이 이끄는 좌군을 완벽히 궤멸시키고 적장 허완을 잡아 참수시킨다..
민영이 이끄는 우군은 좌군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싸웠으나 화약이 떨어져 이를 재보급하던 도중에 화약이 폭발하여 군사 수십이 그 폭발로 말미암아 죽고 전선이 무너졌다. 이를 틈탄 청군 기병대가 총돌격하자 우군도 완벽히 붕괴했고 민영도 이 와중에 죽었다.
경상도 근왕군은 청군의 수십 배에 이르는 우월한 병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 채 결국 참패해버린다.
(진짜 웃낀다.. 적군이 많으면 중과부족으로 인해 패하고, 전투 인원이 많아도 이런 저런 핑게로 패하고, 임진란에 왜군이 신무기인 조총으로 자죽지세로 한양에 진군했지만, 청군이 올 당시 최신 무기를 가지고 전투에 임했으도 불구하고 칼든 적군과의 그것도 몇명 되지 않는 쪽수의 적군에게 완패하고.. 청군으로 볼 때는 광주 쌍령전투는 청나라의 대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게 무슨 조선의 정규군인가?
진짜 웃낀다..)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었던 심연은 선봉 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팔도의 근왕군이 전부 청군에게 격파당하여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고 근왕군은 더 조직되지 못하였다.
인조와 서인들은 엄청난 잘못된 판단을 한다. 병자호란 중에 무수한 잘못된 판단을 하였지만 이것보다 더 큰 잘못된 판단은 없다. 바로
강화도로 세자빈과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를 피난 시킨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썰물 처럼
진군을 청주까지 왔을 때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 갔을 때 광해를 세자로 임명하고 조선 왕실의 신주를 주어 조정을
두개로 분리시킨 바가 있다.
혹시 왜의 침공으로 인한 선조가 요동으로 피신 할 때를 대비한 포석인 것이다. 이런바 분조(分朝:조정을 분리하는 것)이다. 인조도 선조를 따라 신주를 아들이 모시게 함으로 혹시 모를 대비를 하게 하였다.
인조와
조정은 수전의 경험이 적은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청군도 이러한 조선 정부의 계획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그들은 명나라 수군 출신인 공유덕과 경중명 등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먼저 한양에 도착하여
한강 일때 조선인들을 모아 소규모 배를 건조하여 수레에 싣고 꽁꽁 언 한강을 따라 강화도 인근으로 집결하여 강화 상륙작전을 조선군
모르게 준비를 단단히 했다..
청군은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왕자들을 인질로 잡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개성을 지나 파주로 들오온 청군은 군을 둘로 나눠 일군은 강화도로 진군을 하였고 이군은 인조를 잡으로 도성으로 진군을 하였다.
뒤이어 인조도 남한산성의 물자와 인력 부족으로 인해 장기간 항전을 할 수 없어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청군의 남진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인조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조선군의 방비도 문제가 있었지만, 청군이 속전속결로 한양을 점령하기 위하여 중간 중간에 있는 조선 산성과 도성은 공략하지 않고, 곧장 한양으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선의 봉수 체계가 이를 빨리 한양으로 알렸으면 되었을 텐데, 이나마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아 인조는 강화도로 갈 수 없었던 것이 되어 버렸다.
15) 인조의 잘못된 선택으로 피바다가 된 강화도
인조는 왕족들을 강화도로 들여보내면서 이들을 호위하고, 강화도 방어를 책임질 검찰사를 물색하였다. 이때 영의정 김류가 자기 아들 김경징을 추천한다. 인조는 사람 됨됨이 나 자질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아부를 하는 사람말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강화 검찰사로 인명을 한다. 인조는 이 선택으로 인해 강화도를 피 바다로 만들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김경징은 아버지를 닮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이익만 챙긴다. 우선 강화도 들어가는 것만 해도 그렇다. 당시는 겨울이라 바다에 얼음이 많아 배가 하루에 한 번 밖에 뜰 수 없었다.
그러면 이럴 때 누굴 먼저 배에 태워야 하겠는가? 조선의 세자빈과 원손 그리고 봉림대군을 먼저 태워야 하는 것 원칙이다, 하지만 김경징은 자신의 가솔을 먼저 강화마루에 와서 자신의 가족과 재물을 먼저 배에 싣고 강화로 들어가 버린다.
뒤 늦게 강화마루에 도착한 세자빈인 강빈은 추위에 떨면서 “경징아! 경징아! 네가 그럴 수 있느냐!”고 바다를 향해 원망의 소리를 쳤다고 한다. 김경징이 인조반정 최고 1등 공신의 아버지의 뒷 배경을 믿고 왕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
김경진의 활약(?)은 강화도에 들어가서는 더 가관이었다. 김경징은 겨울에 청군이 감히 바다 건너오지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광성진 부근에 약간의 수군만 배치했을 뿐, 강화 수비는 손을 놓고 있었다. 수비만 소홀히 했다면 그래도 나을 줄 모르겠다. 김경징은 날마다 술독에 빠져 산다. 보다 못한 신료들이 뭐라고 말을 하여도 그는 듣지도 않는다.
1637년 1월 21일 새벽 청군은 1만6천명의 군사를 소형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했다. 청군이 한양에서 강화도로 오고 있다는 것을 통진가수 김적이 강화검찰사 김경징에게 알렸으나 김경징은 "한강 물이 모두 얼었는데 어떻게 청군이 오느냐?"라고 하며 오히려 김적에게 군율을 물어 목을 베려까지 하였다.
마침 갑곶을 지키는 장수로부터도 똑 같은 보고가 들어온다. 그때서야 김경징은 다급해진다.
청군이 갑곶으로 상륙하려고 하니, 뒤늦게 허둥대는 김경진은 주사대장 장신에게 수군을 갑곶으로 이동시키라고 명을 내린다. 이 때 갑곶에는 충청수사 강진흔이 이끄는 병선 7척과 수군 200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충청 수사 강진흔은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접근해오는 청군을 연이어 격퇴하였다.
그래도 강진흔은 중과부적인 상태에서도 열심히 싸웠는데, 뒤늦게 도착한 장신은 청군 함단이 몰려오자 강진흔이 도와달라는 호소도 외면하고 도망을 가버린다. 결국 강진흔의 충청 수군 방어선을 뚫고 청군의 배가 강화도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런데 청군은 처음에는 당연히 해안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조심스레 척후병만 내보냈다, 척후병으로부터 특별한 방어군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상륙을 하였다. 그리고 곧장 청군은 진해루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만약 조선 강화도 지상방어군이 대포로 대응을 하고 청군의 상륙을 못하도록 하였다면 청군도 쉽게 강화도에 발을 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경징은 이런 유리한 지세를 포기하고 가족과 강화 부사 이민구와 함께 강화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을 가버렸다.
이 대목에서 임진왜란 당시 신립의 방어군이 왜군을 문경 새재와 탄금대 중 지리적 유리함을 버린 탄금대를 선택하여 왜군에게 대패 한 것이 생각난다.
당시 왜군은 문경 밑까지 거침없이 진격한 후, 문경 새재와 같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형에는 당연히 조선군이 매복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이동을 하였지만.신립은 이런 유리한 지세를 포기하고 나름 기마병으로 왜군을 상대하겠다고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지만 결과는 처참한 패배....
김경징이 그나마 신립 장군처럼 자기 목숨을 걸고 강화성을 지켰으면 그나마 뭐라 하지 않겠다. 그러나 김경징은 가족과 함께 나룻배로 장신의 배로 옮겨 타고 도주한다.
이게 왕족과 역대 임금들의 신위를 지키는 총사령관이 짓이다.
천총 구일원(具一元)은 김경징과 장신의 행태에 격분하여 차마 상관을 죽이지는 못하고, 자신은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다. 이런 상관 밑에 있어보았자 앞날이 뻔하다고 생각하여 몸을 던진 것이다.
청군은 텅텅 빈 강화산성을 단숨에 함락하였다. 이때 주전론자(主戰論者)인 김상헌(金尙憲,)의 형인 김상용(金尙容)은 절대로 오랑케인
청나라에 굴복 할 수 없다며 문루에 화약을 쌓고 불을 붙여 자폭하고. 이에 몇몇 사대부들은 김상용 처럼 자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강화의 많은 백성들이 청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강화 곳곳에서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때 봉상시정 이시직도 자결하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글을 보낸다. 내용은 이러하다.
<<장강의 험함을 잃어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술 취한 장수는 겁이 나 떨며 나라를 배반하고 목숨을 지키려 드는구나. 파수가 무너져 만백성이 어육이 되었으니 하물며 저 남한산성이야 조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결하려 한다. 살신성인하려 하니 땅과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아! 내 아들아. 삼가 생명을 상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 내 유해를 장사 지내고,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거라. 그리고 깊숙한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구구한 나의 유원(遺願)을 잘 따르기 바란다.>>
인조 정권이 하는 것이 오죽했으면, 아들 보고 세상에 나오지 말고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가라고 하였을까? 이시직의 아들이 실제 산으로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동계 정온 선생의 경우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처음에 할복자살을 시도하였고, 이나마도 마음대로 죽지 못하자, 덕유산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백이숙제처럼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지내다 죽었다..
강화도에는 피난 온 왕족과 대신들과 군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기에서 뿌리를 내려 사는 이들이 있었고 또 그들의 가족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있었다.
더구나 강화도가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고 육지에서 건너온 백성들도 많았다. 이들을 보호해줄 관료와 군인들이 없어진 이상, 이들은 이제 청군에 의해 ‘도마 위의 고기’가 되었다. 전쟁중에는 불변의 진리는 정복자는 전리품으로 특히 아녀자들을 취한다. 아녀자들의 경우에는 약탈 + 겁탈의 1순위 대상이다.
그래서 많은 아녀자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하였다. 이중에는 스스로 자결한 여인네들도 많았지만, 지아비와 아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목숨을 끊은 여인들도 많았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들이 강화도 여기저기서 펼쳐진다.
사서(史書)에는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눈 위를 기어 다니거나, 죽거나, 이미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만약 김경징이 자기 목숨을 걸고 강화도를 지켰다면 과연 이랬을까? 설혹 끝까지 항전은 하지 못하더라도 청군이 강화도를 피의 섬으로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6) 인조의 항복과 강화도 전투의 수습..
1월 22일 강화도를 함락한 청군은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붙잡고 인조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강화도 함락은 인조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쌍령 전투의 패배와 함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다.
그럼 도망간 김경징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전란 후 조정에서는 강화도 전투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였고 신하들은 패배의 원흉인 김경징의 목을 베기를 원하였으나 그런데 인조는 오히려 강화도가 함락된 것은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가 적었기 때문이며, 수군대장 장신도 조수 때문에 배를 통제할 수 없어서 그랬다며, 사형은 지나치다고 유배형을 내렸다. 인조의 잘못된 선택은 쉼없이 계속 된다.
인조는 김경징과
강화부사 이민구를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김경징을 사사하라는 여론이 들끓자 그제서야 인조는 여론에 굴복하여 그를 죽이지만, 그나마도 김경징을 대우하여 참수형은 하지 않고 사약을 내려 그를 죽였다.
또 충청 수사 강진흔을 귀양보내고 '장신'은 자결하게 하였다. 하지만 충청 수군들과 장수들은 애통하게 강진흔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음에도 인조는 강진흔에게 강화부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참형한 뒤 효수하였다. 강화도 총 책임자인 김경진에게는 병사가 없어 청나라에게 패한 것이 괜찮다고 한 인조가 목숨을 걸고 청군과 전투를 해 인과부족으로 전투에 패한 장수에게는 목을 매 죽이는 효수형을 내렸다..
인조의 정신 상태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청군 홍타이지에게 삼전도의 굴욕까지 맛 본 인조는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잘못된 선택은 계속 된다.
나의 사전에는 실패란 없다 다만 잘못된 환경만 있었뿐이라며 힘든 환경만 탓하면서 말이다.
17) 청군의 홍이포 VS 조선군의 천자총통
김자점은 전투경험이 풍부한 정예포수 5,000명을 이끌고 한양 근방에서 청군에 맞서 싸운다. 처음 전투에서 청군 장수를 죽이고 군졸 수천명을 쏴 죽이는 전과를 거두지만, 청 태종의 친병이 돌격해 오자 5,000명의 병력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김자점은 2,000여명과 함께 도주한다.
김자점은 다른 수령들의 정병과 만나 미원(양평)에 진세를 형성하였지만 청군을 두려워해 공격을 지연하다 결국 인조를 구원하지 못한다. 김자겸 뿐만 아니라 수만명의 근왕병이 모여들지만 청군이 두려워 제대로 진격하지 못한다. 충청도의 근왕병 7,000명은 이미 청군에게 격파당하고, 다른 조총으로 무장한 정예군들도 주저하면서 남한산성은 철처히 고립되어 갔다.
쌍령전투 이후 남한산성은 완벽히 고립되었으므로 더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된 데다가 겨울철의 추위 탓에 수많은 사람이 얼어죽었다.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인조조차 결국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굶어 죽는 사람이 결국 속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권을 유지하려는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였고 1월 10일 종전을 위해 청군과 협상을 시작했으나 내부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청군은 남한산성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반격을 시도 천자총통을 이용해 홍이포가 설치된 포대에 포격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총신이 짧아 그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병참의 물자 부족 탓에 계속 대응할 수 없었다.
홍이포의 215Cm 포신과 10Cm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벽을 타격했지만 직접적인 피해는 적었으나 산성을 둘러산 대포 소리는 메아리로 더 울려 퍼지고 포탄에 파편들이 공중에 흩어져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니 대포의 위력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산성안에 인조와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1월 22일,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를 청군이 함락했다는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이 일로 조선군은 항전 의지가 완전 꺾였다.
인조는 항복하기로 결심했고 1월 28일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1637년 1월 28일(인조15년) 병자호란 발발 45일에 인조는 청에 대한 항복을 결정하고 그동안 항전을 해 왔던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잠실)에서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했다.
국왕은 곤룡포 대신 평민이 입는 남색옷을 입고 세자를 비롯한 대신들과 함께 청태종의 수항단(受降壇)이 마련되어 있는 잠실나루 부근 삼전도에 도착해 어가에서 내려 2만명의 청군이 도열하고 있는 사이를 걸어 청태종에게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라는 항복례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1부분의 항복에 조건을 달았다.
18) 조선의 11개 항복의 조건
1.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하의 예(禮)를 행할 것. 2. 조선은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헌납할 것. 3. 조선은 왕의 장자(長者)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4. 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5. 내외 여러 신하와 혼인하고 사호(私好)를 굳게 할 것. 6.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얻을 것. 7. 황금 100냥, 백은 1,000냥을 비롯한 물품 20여 종을 세폐(歲幣)로 바칠 것. 8. 성절·정삭·동지·경조 등 사신은 명 구례(舊例)를 따를 것. 9. 가도(假島: 명나라 모문룡이 주둔하고 있는 평안 철산 가도)를 공격할 때는
병선(兵船) 50척(隻)을 보낼 것.
10. 포도(逋逃: 포로로 잡혀갔다가 조선으로 도망친 사람)를 숨기지 말 것. 11.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할 것.
조선에 대한 항복의 예(禮)를 청이 많이 봐준것이다. 원래는 중국의 항복 방식은 항복자의 입에 옥구슬을 물고 망자(죽은 사람)의 옷차림으로 항복의 예를 치루는 것이다. 하지만 청태종은 간략하게만 인조의 항복예(禮)를 받았다.
후대에 우리는 인조의 항복을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모르고 그냥 조선의 왕이 오랑케의 왕에게 싸움에 져 항복을 한 것으로만 절을 올린 것에 대한 치욕이라 하지만 과정을 살펴보면 치욕은 무능한 인조와 서인 정권의 패배라 생각한다.
결코 조선인 전체가 아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다시 역사적 신판대에 올려 재판을 해봤으면 좋겠다.
인조는 항복을 할 때도 꼼수를 부린다. 청태종제에게 절을 할 때 땅에 이마를 땅에 약하게 부딛쳤다는 것이다. 이를 본 청태종의 빈정섞인 비난에 인조는 다시 절을 수십번 머리를 부딛쳐 이마에서는 피가 흘렸다.
이 지경을 당하고도 인조는 알량한 자존심에 또 꼼수를 부린다. 남한산성을 나와 자신이 항복한 사실을 기록할때는(훗대 자신을 평가할 때 부끄러운 사실을 숨기로자) 영(令)을 내려 "항복(降伏)이라는 단어 대신 하성(下城: 성에서 나와 내려감)"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했다.
19) 병자호란의 결과
청군이 머물렀든 약 한 달간 한양의 종로와 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그밖에 수많은 마을이 약탈과 방화로 아수라장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려는 노력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1637년 2월 2일 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 태종는 먼저 청을 향해 출발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이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떠났다. 이들과 같이 조선 백성들이 포로(피로인)로 수백명이 끌려가기 시작하여 계속해서 청으로 끌려간 피로인들은 노예로 팔리기 시작했다.
조선 백성은 심양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60만명 이상이 거래되었다. 또척화파 강경론자인 이른바 삼학사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참형되고, 주전파인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왜로 끌려간 조선인이 수십만이 왜, 중국, 유럽으로 팔려갔는데 또 이런 사항이 벌어진다.
하물며 왜는 바다가 있어 조선으로 가기가 힘들었다고 하지만 청에서는 노예의 신분에서 운 좋게 풀려 고향에 몇달을 걸려 고향에 돌아 온 여인들은 부모 친척의 환영 받지 못했고 도려 조선의 상류(양반)사회는 그녀들을 천대하였다.
양반의 여식과 평민 여식을 가리지 않고 환향녀(還鄕女)들을 너무 과혹하게 몰아갔다. 양반들의 생각은 청으로 끌려간 그녀들이 오랑케들에게 몸이 더렵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청나라에서 어쩔 수 없게 몸을 허락할 수 밖에 없지 않았겠냐? 전쟁이 나면 승패의 향방에 따라서 정복군은 점령지에서 제일 먼저 여자와 개를 찾는다고 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시절에도 수 많은 사람들을 일본에 산업 시설에 노동과 군 징병으로 끌려 갔었고, 또 나이 어린 수많은 여자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 갔다..
어째든 부모들 찾아 겨우 고향에 돌아 온 환향녀들은 조선의 사회는 그녀들을 몸파는 창녀 취급 했다. 그리고 환향녀는 화냥녀라고 변해 몸가짐이 단정치 못하는 여인들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청의 사신 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龍骨大)가 조선에 수시로 와서 수많은 여인과 여러 관리와 대신의 많은 자녀가 붙잡혀갔는데 한번씩 올 때마다 그 수는 약 200명 이상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명을 침공해 점령지에 인구 확보를 위해서 조선에 수 많은 백성을 끌고가 점령지 인구확보에 주력했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700만에서 900만 사이로 추정됨으로 수치가 사실이라면 조선인 10명중 1명에 가까운 비율로 청나라에 끌려간 셈이다.
무능한 인조와 서인 정권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고한
조선의 백성들과 여인들도 엄청난 박해를 당한 셈이다. 그 후 이 원한을 씻고자 사사로이 북벌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다. 임경업이 명과 연락하여 청을 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도 북벌 계획을 세우지만 그렇게 저렇게 끝나버린다.
조선의 인구에 반도 안되는 여진족들은 조선을 굴복시키고 명을 꺽고 광활한 대륙에 청나라 깃발을 꽂은 것이다. 여진인 모두의 목표과 비젼을 하나로 모아 행동으로 옮길 때는 안될 것도 가능하게 만들지만, 무엇이든 핑게가 우선이 되어 버리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걸 여진이 보여줬다. 여진이 후금에서 청나라로 크져 가면서 끝내는 조선과 명을 굴복시며 그들의 꿈을 기필코 달성 한 것을 만 천하에 보여줬다.
20)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의 귀환
병자호란 8년후 말기를 향해가던 명나라는 결국 이자성이 일으킨 농민 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당하고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결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게된다..
산해관에서 끝까지 저항하며 청의 진입을 막고 있던 명의 신하 오삼계는 이자성에 굴복하지 않고 결국 청에 투항하여 청군을 화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는 길을 열어주게만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겨우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풀려나 8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는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게 된다.
특히 소현세자의 경우는 청에서 카톨릭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서구문명을 접하고 청의 선진적인 모습을 보게되면서 반청에서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친청적인 입장으로 전환한다.
그는 몽골어를 배우고 서역원정에 출정하여 군사적인 경험도 쌓았으며 서양과학과 카톨릭을 들여오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소현세자의 모습이 용렬한 인조에게는 수치를 상기시키는 존재이면서 친청적인 모습에서 형언할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는 껄끄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정묘호란과 병자 호란은 먼 과거의 이야기로만 치부해 버릴수 없는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당시와 비슷한 실정이다. .
솔직히 보면 당시 청과 명의 명백한 국력의 차이(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기 전까지도 청의 객관적인 국력은 명과 비교 할수도 없을 정도였다. 후금은 인구적인 면으로도 병자호란 당시에는 조선보다도 총 인구수가 적은 나라였다.) 보다 현재의 미국과 중국의 국력 격차가 훨씬 더 적다. 한반도는 어쩌면 가까운 시일내에 다시 한번 미국이냐? 중국이냐? 양대 강대국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당하는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게 어찌 과거의 일이겠는가? 역사는 돌고 돈다.. 다만 주체만 조금씩 바꼈을 뿐이지만..
21) 인조의 잘못된 선택의 끝판.. 장남 소현세자의 살해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후 심양에 머물면서, 강대국 명이 망해가는 것을 생생히 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나라가 조선을 많이 핍박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함께 끌려와 재판을 받은 반청파 김상헌 등과 조선 백성 보호에 많은 힘을 썼다. 몽골어를 배우고 서역원정에 출전하기도 했다.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세자빈 강씨와 함께 일군 밭에서 난 많은 곡물들을 심양의 시장과 청나라의 전쟁 군량미로 납품해서 받은 대금으로 청나라에 잡혀온 조선백성들을 다시 사들여 귀국시키려는 노력도 하였다.
청나라의 도르곤이 명나라 장군 오삼계가 만리장성의 첫 관문인 산해관 빗장을 푼 것으로 청군이 대대적으로 중원 땅으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차지해 나갔다.
그도 도로곤과 함께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면서 서양문물과 국제 정세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천주교 선교사인 아담 샬을 만나면서 천주교와 서구의 과학기술에도 눈을 떴다. 무엇보다 그는 볼모 생활 중에도 청나라의 핵심 인사들과 교분을 가지고 청나라 조정에도 인맥을 만들었다.
하지만 세자의 청나라의 행동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인조와 조정 대신들(주전파)은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고, 못 마탕하게 생각해 왔다.
1644년 음역11월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귀국 하긴 전 청의 황제에게 인사들 드리려 갔다. 황제는소현세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었는데 소현세자는 황제 청태종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다. 황제도 기꺼이 벼루를 내어주었다. 소현세자는 귀국 선물로 인조에게 줄 요령으로 받아 온 것이다.
1645년 음력 2월에 8년만 세자빈 강씨와 함께 소현세자는 고국으로 돌아와 기쁜 마음에 아버지 인조에게 청나라의 발전상과 가톨릭과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진언하였으나 인조의 화만 불러오게 되었다. 화가 난 인조는 청 황제의 선물인 벼루를 소현세자에게 집어던졌다고 한다
귀국 날 부터 아버지 인조는 소현세자 가족을 철처히 감시하고 박대한다.
소현세자는 귀국 후 실리적인 사고와 친청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아버지 인조에게는 심히 거슬리는 행동들이었다
인조는 청나라에 두번이나 굴복하고, 백성을 전쟁에 휘말리게 하고서야 정신을 차려 청나라에 납작 업드려 머릴를 쪼아리는 삼전도의 굴욕도 당했지만, 아직도 인조 자신을 비롯한 조정은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라 여겼고, 청나라로 인해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인조는 뭇 신하들을 거느리고 상복을 입고 슬퍼 했을 만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사대주의에 찌든 반청노선을 표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자간의 사고의 차이는 인조와 소현세자간의 언쟁을 불러 왔고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구나 청나라의 환대를 받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를 볼 때마다 인조 자신이 죽는날 까지 잊지 못한 오랑케에게 삼배구고두를 한 굴욕적인 과거가 떠올라 자신도 모르는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껄끄러운 부자지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현세자가 귀국한지 두달여가 지난 1645년 4월 23일 인조의 어의인 이형식의 시침을 받은 건강하던 34세의 소현세자는 3일만인 4월 26일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아들이, 더구나 자신의 뒤를 이를 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 했는데도 인조는 진상조사를 바라는 세자빈 강씨와 대신들의 청을 뿌리치고 장례일을 앞당겨 서둘러 입관을 진행했고 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장례 절차를 밟게 하였다. 인조는 참관 인원도 종실로 제한하고 어의를 처벌하라는 논의 자체를 금한다.
1645년 공신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인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임금)도 알지 못했다. --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6월 27일 ->
이러한 시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로 인하여 인조가 아들을 또는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설이 큰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소용조씨의 독살설을 채택한다 하더라도 인조의 묵인이 없다면 그러한 행위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수 없다.
1645년 음력 8월 강빈의 동생 강문성이 장사 날짜가 불길하다고 지관인 최남을 찾아가 항의하였는데, 인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해서 강문성과 문명, 문두, 문벽 4형제를 먼 고을에 유배시켰다.
그 뒤 세자빈 강씨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고, 조소용은 세자빈 강씨가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고 무고하였다
1646년 세자빈 강씨의 궁녀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옥에서 죽었다. 이 혐의로 강씨는 별궁에 유치되었으며, 강씨가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김자점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다. 강빈의 죽음으로 친정 노모와 유배간 강빈의 4형제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강빈이 억울하게 죽고 난뒤에 남겨진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에 첫째 석철은 12살이었고, 둘째 석린은 8살이었으며, 셋째 석견은 4살이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장남 석철을 아깝게 여겨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했지만, 석철은 결국 1648년 11월 2일(음력 9월 18일) 제주도에서 장독으로 죽었다.
둘째 석린은 같은해 음력 12월 23일(양력 1649년 2월 4일) 병으로 사망했다.
셋째 경안군 석견은 효종의 즉위 후 복위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인조 실록 49권 26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적에 석철을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석철이 역강(逆姜: 세자빈 강씨)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장독(?毒: 풍토병)이 있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다 장사지낸들 또한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실록을 기록한 사관의 한탄에서 인조가 행한 행위에 대한 당시의 여론을 알수 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데려 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인조는 손자가 자라서 아버지와 어머니(소현세자와 세자빈)의 복수를 하겠다며 청나라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켜 조선으로 오면 인조를 비롯하여 여기에 연루된 많은 이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거라는 예측에서 인조는 손자 석철의 병에도 약을 쓰지않고 죽게 내버려 둔 것이다. .
개인적으로는 풍토병(말라리아)으로 죽었다는 소현세자 두 아들의 죽음에도 많은 의심이 간다. 무슨 11월과 2월에 말라리아가 있겠는가? 풍토병도 박테리아가 왕성할 때 이야기지 추운 겨울에 박테리아가 기승한 한다는게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죽음에 대해 흔히 소현세자의 일가를 법살 했다고 표현을 한다. 즉 인조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살해를 저질렀다는 뜻의 완곡한 표현인 것이다
1645년 음력 6월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자 본인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세자에 책봉시켰다. 친아버지 인조는 장남인 소현세자를 폐위시키고 '폐세자'로 불렀다. 고종때 소현세자는 다시 '세자'로 복권되었다.
어떠한 일의 결말이나 역사에는 만약이란게 없지만, 소현세자가 광해의 아들이고, 인조 반정이 없이 광해에서 소현세자로 자연스럽게 왕위를 물려주었더라면? 그럼에도 2백년 뒤에 일제에게 조선을 식민지배를 했을까? 우리끼리 싸우는 6.25가 일어 났을까? 우리나라의 현제의 상황은 어찌 되어있을까?
광해군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소현세자가 인조의 다음 왕이 되었더라면 후대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한번쯤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