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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혼으로 신라 최고의 왕을 낳다
지소부인과 입종
1988년 1월 20일 무렵,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의 한 주민이 논에서 객토 작업을 하다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박혀 있던 커다란 돌 하나를 마침내 포클레인으로 들어내어 동네 개울가에 내다 버렸다. 논바닥에 뒹구는 돌은 농사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가량 지난 같은 해 3월 20일 무렵, 이 돌이 쓸 만하니 마을 숲에 옮겨다가 조경석으로 쓰는 게 어떻겠느냐는 마을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돌은 마침 마을 앞을 지나던 포클레인에 옮겨 실려 마을 성황당 옆 빈 터로 옮겨졌다.
그런데 우연히 이 돌에 신라시대의 글자가 새겨져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사학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게 된다.
'울진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라고 하는 이 비는 변성화강암을 네 면에서 대강 다듬고는 그 전면에만 촘촘히 총 398자를 새겨넣은 것이다. 높이는 204cm로 현역 프로농구 선수 중에 최장신 센터인 서장훈의 키와 거의 같다. 하지만 너비는 좁은 편이라 비석 위쪽이 32cm, 가운데가 36cm, 아래쪽이 54.5cm가량 된다.
현재는 이 비가 원래 발견된 장소에서 50m가량 떨어진 곳에 어엿한 비각을 세워 그 안에 보존하고 있다. 전면에서만 확인된 398자는 10행에 걸쳐 기록되어 있으나, 각 행마다 글자수는 들쑥날쑥이다. 논에서 포클레인으로 이 비석을 캐내어 냇가에 버렸다가, 다시 포클레인을 이용해 성황당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비문 중간쯤이 손상되는 바람에 일부 글자를 읽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이에 더해 건립 이후 1,500년에 달하는 장구한 세월에 많은 글자가 닳아버리고, 나아가 당시 사정에 대한 정보가 매우 불충분하므로 글자별 정확한 판독이라든가, 그에 대한 해석이 구구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이 비문에 거벌모라(居伐牟羅) 남미지촌(男彌只村)이라는 곳에서 발생한 어떤 사건에 대해 신라 조정이 내린 결정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만은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나아가 비문 그 자체 기록에 의해 이 비가 세워진 때는 갑진년(甲辰年) 정월 15일이라는 사실도 확인된다.
또한 비문에 신라 법흥왕(514~540)임이 분명한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과 그의 동생 '사부지(徙夫智) 갈문왕(葛文王)'이라는 존재가 함께 보인다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갑진년이 법흥왕 재위 12년째이면서 서기로는 524년임이 밝혀졌다.
거벌모라 남미지촌이 어느 곳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이 비가 발견된 지금의 울진군 봉평리 일대를 말할 가능성이 크다. 신라 조정까지 나서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던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비문 자체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등의 이유로 인해 확실히 알 수 없다. 구구한 설명이 있기는 하나, 한결같이 추정이라는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 사건이 도대체 무엇이었건, 신라 조정이 내린 판결을 비문 자체는 '교(敎)' 혹은 '교사(敎事)'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또 비문에는 판결(판정)을 내리는 데 관여한 신라 조정의 군신 14명이 실명으로 죽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는 모즉지 매금왕이 맨 먼저 나오고, 사부지 갈문왕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봉평비문은 이 군신들을 표기할 때 거주지를 먼저 밝힌 다음에 이름을 거론하고, 다시 그의 현재 관위(벼슬의 등급)를 덧보태는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예컨대 현재 직책이 매금왕(즉, 왕)인 모즉지와 그 친동생인 갈문왕 사부지는 각각 '탁부(啄部) 모즉지 매금왕'과 '사탁부(沙喙部) 사부지 갈문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모즉지와 사부지는 그들의 실제 이름이며, 매금왕과 갈문왕은 그들의 현 직책이고, 탁부와 사탁부란 그들의 현재 거주지를 말한다.
봉평비문에 의하면, 신라 왕과 그 신하를 합쳐 모두 14명이 공론(共論), 다시 말해 함께 토론해서 거벌모라 소속 남미지촌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판결한 셈이 된다. 이들 14명을 편의상 '공론자 집단'이라고 할 때 그들을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이름 | 주거지 | 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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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즉지(牟卽智) | 탁부(啄部) | 매금왕(寐錦王) |
사부지(徙夫智) | 사탁부(沙喙部) | 갈문왕(葛文王) |
□부지(□夫智) | 본피부(本彼部) | 간지(干支) |
미사지(美斯智) | 잠탁부(岑啄部) | 간지(干支) |
이점지(而粘智) | 사탁부(沙喙部) | 대아간지(大阿干支 ⑤) |
길선지(吉先智) | 사탁부(沙喙部) | 아간지(阿干支 ⑥) |
일독부지(一毒夫智) | 사탁부(沙喙部) | 일길간지(一吉干支 ⑦) |
물력지(勿力智) | 탁부(喙部) | 일길간지(一吉干支 ⑦) |
진육지(愼宍智) | 탁부(喙部) | 거벌간지(居伐干支 ⑨) |
일부지(一夫智) | 탁부(喙部) | 대나마(大奈麻 ⑩) |
일이지(一尒智) | 탁부(喙部) | 대나마(大奈麻 ⑩) |
모심지(牟心智) | 탁부(喙部) | 나마(奈麻 ⑪) |
십사지(十斯智) | 사탁부(沙喙部) | 나마(奈麻 ⑪) |
실이지(悉尒智) | 사탁부(沙喙部) | 나마(奈麻 ⑪) |
그렇다면 사부지 갈문왕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에 대한 탐구에 앞서 우리는 봉평비보다 18년 전에 발견된 또 다른 신라시대 금석문을 찾을 필요가 있다. 여기에도 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당시 신라 왕실과 조정을 주름잡은, 신라의 측천무후를 마주하게 된다.
1970년 12월, 황수영(黃壽永) 교수와 문명대(文明大)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佛蹟)조사대'가 경남 울주군 천전리라는 심산유곡 마을을 관통하는 강가의 한 바위 면에서 상징문자로 생각되는 무수한 그림과 1,000자 이상을 헤아리는 많은 글자를 발견했다. 새겨진 명문은 특정 시기에 한꺼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구역별로 각기 시대를 달리하고 있음이 분석 결과 밝혀졌다.
다양한 명문 자료 중에서도 명문 자체 분석에 의해 소위 을사년(乙巳年)에 처음으로 작성되었음이 밝혀져 나중에 학자들이 '을사년 원명(原銘)'이라고 이름 붙인 명문과, 이것과 연속되는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을사년보다 시간이 흐른 다음인 기미년(己未年)에 추가 작성되었다고 해서 '기미년 추명(追銘)'이라 명칭이 붙은 두 가지 명문은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두 명(銘)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정확히 어느 시점에 작성되었고, 또 서로 어떤 관계에 있을까?
두 명문을 간단히 비교하면 '을사년 원명'은 을사년이라는 해에 실제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갈문왕이 그의 우매(友妹), 즉 친구와 같은 누이동생인 어사추(於史鄒)와 함께 지금의 울주 천전리 일대에 '유래(遊來)', 즉 놀러 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이 명문은 갈문왕 일행이 이 계곡에 아무런 이름도 없음을 발견하고는 이 일대에 '서석곡(書石谷)'이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서석곡'은 글자 그대로는 '글자를 새긴 바위가 있는 계곡' 정도라는 뜻이다.
반면 '기미년 추명'은 '을사년 원명'에 기록된 과거 갈문왕과 어사추 일행의 서석곡 행차를 회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때 행차한 주인공은 앞선 을사년에 행차한 사부지라는 갈문왕의 정비인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이며, 아울러 이 행차에는 무즉지태왕(另卽知太王)의 비(妃)인 부걸지비(夫乞支妃)와 사부지왕의 아들인 심□부지(深□夫知)가 동행했다.
우리가 이들 명문이 작성된 정확한 연대와 서석곡에 동행한 인물들이 『삼국사기』라든가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에 등장하는 누구에 해당하는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두 명문 중에서도 나중에 작성된 '기미년 추명'을 통해서였다.
무즉지태왕이란 이름이 무즉지인 태왕이란 의미로서, 태왕은 왕이란 존칭을 더욱 높인 것이다. 무즉지란 사람은 봉평비문에도 등장하는 '모즉지'와 같은 발음을 글자만 약간 다르게 표기한 것으로 바로 신라 법흥왕의 이름이다. 아울러 무즉지태왕비인 부걸지비가 법흥왕의 정비(正妃)로서 이름이 부걸지라는 의미가 되므로, 바로 『삼국사기』라든가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에서 법흥왕의 부인으로 '보도(保刀)' 혹은 '파도(巴刀)'라고 기록한 여인임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기미년 추명'에 보이는 갈문왕 사부지(徙夫知)는 누구인가? 그에 앞서 우리는 우선 이 천전리 각석(刻石) 명문에 새겨진 이 사부지가 524년 건립된 울진봉평신라비에서 보이는 갈문왕 '사부지(徙夫智)'와 동일인임을 직감하게 된다. 신라 남자 인명이면 으레 붙는 글자가 각각 '지(知)'와 '지(智)'로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두 글자의 발음이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뜻도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울진봉평신라비와 천전리 각석 명문에 모두 보이는 갈문왕 사부지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확정하기에는 아직까지 정보가 부족하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미년'에 서석곡이라는 계곡으로 행차한 주인공 갈문왕 사부지의 비, 즉 첩이 아닌 정식 부인인 '지몰시혜비'와 그의 아들로 기록된 '심□부지'(深□夫知)가 누구인지를 밝혀내야 한다.
천전리 각석 명문 중에서도 기미년 추명에 등장하는 사부지 갈문왕의 아들은, 그 이름의 중간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워 편의상 '심□부지'라고 처리했으나, □라는 부분은 자세히 보면 '맥(麥)'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글자가 무엇이건 천전리 각석 명문에 의해 심□부지는 아버지가 갈문왕 사부지이며, 어머니는 지몰시혜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심□부지는 큰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인 법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는 진흥왕(540~576)임이 확실하다. 그의 본명이 바로 '삼맥종(三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진흥왕에 대해 "이름은 삼맥종이라고도 하고 심맥부라고도 한다"고 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삼맥종이라고도 하고 심□(深□)라고도 한다"고 했다. 현존 『삼국유사』 판본에는 '심□(深□)'이라고 해서 글자가 지워졌으나 『삼국사기』를 아울러 참조할 때 '심맥(深麥)'임에 틀림없다.
고려시대 승려인 각훈(覺訓)이 쓴 삼국시대 승려 열전인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서는 진흥왕에 대해 "속명(俗名, 출가 이전 세속에서 쓴 이름)을 삼맥종이라 한다"고 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진흥왕은 본래 이름이 삼맥종 혹은 심맥부였을 것이다. 삼(三)과 심(深)의 발음이 지금은 약간 다르나 옛날에는 같았다. 아울러 신라시대의 인명 끝에 흔히 붙는 종(宗)이라는 글자도 일종의 접미사이며, 부(夫)라는 글자도 그런 면모가 농후하다는 점에서 진흥왕의 본래 이름은 삼맥 혹은 심맥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문헌에서 보이는 진흥왕의 본래 이름이, 천전리 각석 명문에서 보이는 '심□부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은 그의 어머니이자, 천전리 서석 명문에 기록된 지몰시혜라는 여인을 검토할 때 명백해진다. 그는 '심맥부', 즉 진흥왕의 어머니였다. 이를 염두에 두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을 검토하면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먼저 전자에서는 진흥왕 어머니의 실명을 전혀 공개하지 않은 반면에, 후자에는 그 실명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이 명백한 대비를 이룬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의 계보에 대해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다"고 했다. 이는 『삼국사기』가 각 왕에 대해서는 부모가 누구인지, 그 계보는 물론이요, 그 실명도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국사기』가 진흥왕의 어머니가 누구의 딸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실명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데는 모종의 의도가 작용할 결과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어머니가 누구의 딸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힘들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진흥왕 어머니의 이름을 알고서도 빼버렸다고 봐야 한다.
이는 『삼국사기』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편찬된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대비할 때 명백해진다. 즉 『삼국유사』에서는 진흥왕에 대해 "아버지는 곧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 입종이고, 어머니는 지소(只召) 부인인데, 식도(息道) 부인이라고도 한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는 갈문왕 입종과의 사이에서 진흥왕을 낳은 여인이 '지소'라는 이름으로 분명히 보이고 있다.
아울러 우리는 이 '지소'가 천전리 각석 명문에 보이는 '지몰시혜'라는 여인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헌에는 보도 혹은 파도라고 기록된 법흥왕비가 부걸지로 기록되어 있듯이, 문헌에는 지소라고 보이는 진흥왕 어머니는 금석문에서는 지몰시혜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후대 문헌 기록과 신라 당대에 작성된 금석문을 비교할 때 인명의 첫 글자만 같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즉, 보도(保刀)의 보(保) 혹은 파도(巴刀)의 파(巴)와 부걸지(夫乞支)의 부(夫)는 같은 발음임이 명백하며, 같은 논리로 지소(只召)와 지몰시혜(只沒尸兮)의 지(只) 또한 상통하고 있다.
아울러 천전리 각석이라는 금석문에 보이는 지몰시혜비가 다름 아닌 진흥왕의 어머니요, 갈문왕 입종의 부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됨으로써 우리는 더욱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게 되었다.
첫째, 지몰시혜비, 즉 지소는 법흥왕(모즉지 혹은 무즉지)과 보도부인(파도 부인 혹은 부걸지비)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그녀가 남편으로 삼은 갈문왕 입종은 삼촌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여러 기록에서 보았듯이 갈문왕 입종은 법흥왕의 친동생이었다. 그러므로 입종 또한 부모는 법흥왕과 보도 부인임을 알 수 있다. 입종과 지소의 결혼은 삼촌과 조카딸 사이의 이른바 근친결혼이었던 것이다.
셋째, 기미년이라는 해에 지몰시혜비가 서석곡이라는 계곡에 행차했을 때 그와 동행한 부걸지비, 즉 법흥왕비와 지몰시혜비는 다름 아닌 모녀 관계라는 사실도 캐낼 수 있다. 지몰시혜비는 어머니인 부걸지비와 함께, 아울러 그의 아들인 심맥부지(진흥왕)를 데리고 서석곡에 행차했던 것이다. 이런 고찰을 통해 자연히 심맥부지의 아버지요, 지몰시혜비의 남편인 갈문왕 사부지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보이는 갈문왕 입종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나아가 울진봉평신라비에 보이는 갈문왕 사부지 역시 갈문왕 입종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를 발판으로 천전리 각석 명문 중에서도 원명이 작성된 '을사년'이 법흥왕 재위 12년인 525년이며, 추명이 완성된 '기미년'은 을사년보다 14년이 지난 뒤인 법흥왕 재위 26년(539)이라는 사실도 밝혀내게 되었다. 두 명문을 비교할 때 또 하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은 525년 당시에 갈문왕 사부지, 즉 갈문왕 입종이 살아 있었으나 그보다 14년이 지난 539년에는 이미 그는 죽고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기미년 추명'에서 지몰시혜비가 죽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다만 갈문왕 입종이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천전리 각석 중 을사년 원명에는 실명 없이 그냥 '갈문왕'이라고만 보이다가 14년 뒤, 법흥왕 26년(539)인 기미년 7월 3일 무렵에 작성된 추명에서야 비로소 사부지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갈문왕 입종은 각종 문헌 자료에서도 적지 않은 흔적을 남기고 있으니,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입종은 지증왕과 그의 정비인 연제(延帝)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중의 하나로서 원종(原宗)이라고 일컫는 법흥왕의 동생이다. 그는 조카딸이자 법흥왕의 딸인 지소와 결혼해 그 사이에서 아들 진흥을 낳았다. 뿐만 아니라 입종은 만호(萬呼)라는 딸을 두니, 이 딸이 진흥왕의 아들인 동륜태자와 혼인해 진평왕을 낳았다. 나아가 입종은 숙흘종(肅訖宗)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숙흘종은 정식 부인인 지소가 아니라 후첩에게서 난 아들임이 거의 확실하다. 숙흘종은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른 자매 만호와의 사이에서 김유신의 어머니가 되는 만명(萬明)이라는 딸을 낳기도 했다. 나아가 울진봉평신라비라든가 천전리 각석과 같은 금석문 기록을 종합할 때, 입종은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왕에 못지않은 위세를 생전에 누렸으며, 사후에는 그 아들 진흥왕을 필두로 그 직계 후손들이 신라 왕위를 독점하게 됨으로써 그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후손들이 대를 이어 신라 왕이 된 입종이지만, 부인 지소보다 먼저 죽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정확한 사망 시점을 알 수 없으나, 그가 540년에 사망한 형 법흥왕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입종의 죽음과 더불어 당시 신라 지배계층 내부에서는 법흥왕 후계자를 둘러싸고 권력 투쟁의 일대 회오리가 몰아쳤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법흥왕이 정비에게서 아들을 두지 못한 데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를 해명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료는 없으나, 아마도 부녀(婦女)간 권력 투쟁이었다고 생각된다. 투쟁에서 승리한 지소는 권력까지 움켜쥐게 되었다.
540년 진흥왕이 즉위할 때의 나이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15살이었다고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7살이었다는 『삼국사기』 쪽이 사실에 더욱 가깝다. 진흥왕은 즉위 초반기에는 어린 나이 때문에 직접 통치를 하지 못했다. 이럴 경우에는 섭정(攝政)이라고 해서, 왕실의 어른 중 명망이 높은 사람이나 왕의 어머니인 태후가 왕 노릇을 대신하기도 한다. 왕실 여인 중 어른이 왕 노릇을 하는 일을 흔히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 했다. 수렴 너머로 신하들의 의견을 물어 통치했다는 의미다.
진흥왕 즉위 초반기에는 그의 어머니 지소가 태후로서 정권을 농단했다는 흔적이 기록에서 보인다.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즉위년조에서는 "(진흥)왕이 어리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했다"고 기록되었고, 『삼국유사』 기이편 진흥왕조에서도 "진흥왕이 즉위할 때 15살이므로 태후가 섭정했다"고 했다.
실제적인 통치자로서 지소가 남긴 행적으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화랑도 창설이다.
『삼국사기』라든가 『삼국유사』와 같은 기록들을 보면, 신라에 화랑도가 설치된 시점이 대단히 불명확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 설치 주체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편찬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라든가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는 그 설치 시점이 진흥왕이 즉위한 해(540)이며, 이에 더해 화랑도 우두머리를 풍월주(風月主)라고 불렀다는 기록까지 명확히 보이고 있다. 나아가 이들 문헌은 화랑도를 설치하고 풍월주를 둔 주체가 진흥왕 자신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화랑도를 설치한 이가 진흥왕이라는 기록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7살(혹은 15살)에 지나지 않는 꼬맹이 왕이, 더구나 실권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린 왕이 도대체 무엇을 직접 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진흥왕 즉위년에 화랑도가 설치됐으며 나아가 그것이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다면, 적어도 그 설치를 최종 허락한 최고 책임자는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지소태후였음이 확실하다. 이런 점에서 지소태후가 540년에 화랑도를 창설했다는 기록은 주목받을 만하다.
창설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인재 선발을 위한 것이었다고 강조하는 반면 『삼국유사』는 진흥왕이 신선술(神仙術)을 매우 숭상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를 존중한다면 화랑도는 대학과 같은 일종의 교육기관이 되는 셈이며, 『삼국유사』의 기록을 존중한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 신선이 되고자 열망하는 도교라는 종교 집단의 조직 혹은 교단이 되는 셈이다. 또한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화랑도는 도교의 교단이면서 아울러 인재를 길러내는 조직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 여러 기록을 참조할 때 화랑도는 도교 교단이면서 교육기관이기도 했음이 명백하다.
화랑도가 신선이 되기 위한 끊임없는 내외적 수양을 강조하는 도교 교단이라는 측면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도교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얻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이른바 방중술(房中術)이라고 해서, 섹스를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이 방중술의 구체적 실태에 관한 언급은 생략하지만, 요점을 추린다면 남자와 여자는 각각 젊고 싱싱한 여자와 소년들과 되도록 많은 섹스를 해야 신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대목이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에 대한 각종 기록에서 한결같이 그가 미소년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미소년과 화랑도의 관계가 밀접할까? 그것은 미소년으로 조직된 화랑도 구성원, 특히 그 우두머리인 풍월주가 적어도 지소태후 집권 시절, 혹은 진성여왕 재위 당시에는 태후와 왕을 위해 성적으로 봉사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후대 기록들은 이들 여인이 성적으로 문란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신라사회 저변을 관통하던 종교사상이 도교였고, 도교에서 방중술을 유난히 강조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하등 이상할 것도 없는 전통이다.
남편이 일찍 죽는 바람에 팔팔한 나이에 과부가 된 지소는 다른 남편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젊고 잘생긴 청년들을 잠자리에 끌어들이기는 했으나, 이것이 신라 당시에는 통용될 수 있는 관습이었다고 인정한다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자유부인'이었다는 관점으로 지소를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입종과 지소부인. 이들은 삼촌과 조카딸이었으나 근친혼에 의해 진흥왕이라는 신라 역사상 손꼽히는 걸출한 군주를 배출해냈다. 이들의 사랑은, 그 형적이 천전리 각석 명문에 미미하게 보이고 있으나 생전에 금실이 간단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핵심 권력 지소부인의 계보]
지증왕 + 연제(延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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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原宗) / 법흥왕 입존(立宗) + 지소 부인 + 후처(後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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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지소(只召) 진흥왕 딸 만호(萬呼) 숙흘종(肅訖宗)
↓ ↓
동륜태자 + 만호 딸 만명(萬明) ※김유신 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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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지소는 숙부와, 만호는 조카와 결혼했다
[출처] 근친혼으로 신라 최고의 왕을 낳다 |작성자 곡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