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규모를 결정한 것
로마 시대의 전쟁(戰爭)을 블록버스터[Blockbuster, 영화 매표 매출액(映畫賣票賣出額)이 4억 달러 이상 넘어간 영화들을 말한다. 혹은 제작 비용(製作費用)이 많이 들은 영화를 말하기도 한다]라 한다면 중세(中世) 유럽의 전쟁은 무협영화(武俠映畫)에 가깝습니다.
이토록 차이(差異)가 나는 이유는 봉건제도(封建制度) 때문입니다.
실제로 무력(武力)을 동원(動員)할 수 있는 영주(領主, feudal lord)는 왕(王)에게 충성(忠誠)을 맹세(盟誓)했지만 자신의 영역(領域)을 간섭(干涉) 없이 다스릴 권리(權理)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이 영주를 참전(參戰)시키려면 충분(充分)한 명분(名分)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무력 동원(武力動員)이 쉽지 않아 전쟁의 규모(規模)가 고대(古代)에 비해 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주가 영주의 무력을 전쟁에 동원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영주의 실질적(實質的)인 권력 기반(權力基盤)은 자급자족(自給自足)이 가능(可能)한 경제(經濟) 단위인 장원(莊園)과 이에 속한 노동력(勞動力)이었습니다.
경제적(經濟的)으로 이득(利得)을 취(取)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지키려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어서 영주는 장원(場院)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位置)에 성(城)을 쌓았습니다.
처음에는 거처(居處) 주변에 목책(木柵)을 설치(設置)한 수준이었으나 점차 돌(石)을 사용하면서 육중(六衆)한 성으로 발전(發展)했습니다.
따라서 비슷한 것 같아도 서양과 동양의 성은 차이(差異)가 많습니다.
↑장원은 중세 경제의 기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성(城)은 도성(都城)이나 읍성(邑城)처럼 마을 전체를 감싼 방벽(Wall)의 개념(槪念)이지만 중세 유럽의 성은 영주의 거처(Castle)만을 의미(意味)합니다.
경우에 따라 장원 외곽(場院(外廓)에 성벽(城壁)을 쌓기는 했어도 디즈니랜드(Disneyland)의 상징물(象徵物)이 된 노이슈반슈타인성(Schloss Neuschwanstein)처럼 요새(要塞) 같은 독립 건축물(獨立建築物)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은 유사시(有事時) 성안에 있는 이의 안위(安位)를 지키기 위한 용도(用度)이므로 순전히 군사적 건축물(軍事的建築物)입니다.
↑유럽의 성은 군사적 목적에 충실합니다
중세에는 대규모 병력(大規模兵力)의 동원(動員)이 힘들었으므로 성(城)의 크기는 소수(小數)의 병력(兵力)으로도 적(敵)의 공격(攻擊)을 물리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적이 달라붙어도 일거(一擧)에 싸움이 벌어지기 힘들 만큼 좁고 높았습니다.
전투(戰鬪)에 사용되는 무기도 이에 적합(適合)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를 진화(進化)라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나 기본적(基本的)으로 전쟁의 스케일이 작아지다 보니 고대(古代)에 비해 전쟁의 기술(技術)이 발전(發展)하지는 못했습니다.
↑망루(望樓)와 해자(垓字/垓子)가 갖춰진 전형적(典型的)인 중세의 성
중세 후기로 갈수록 전쟁의 규모가 점차 확대(廓大)되었지만 대체로 기사(騎士, Knight), 용병(用兵)처럼 교전(交戰)을 벌이는 주체(主體)는 극히 제한적(制限的)이었습니다.
프랑크(Francia)의 칼(Carolus) 대제(大帝)처럼 중장기병(重障騎兵, Heavy Cavalry)을 운용(運用)한 예외적 사례(例外的事例)마저도 동시대(同時代) 비잔틴(Byzantine) 제국(帝國)의 중장기병 부대인 카타프락토스(Cataphract↓
)에 비교(比較)하면 민망(憫惘)한 규모(規模)였습니다.
더구나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화약(火藥)의 등장 전(登場前)에 사용한 무기(武器)는 이전과 크게 차이(差異)가 없었습니다.
↑프랑크군을 이끌고 투르-프와티(Battle of Tours/Poitier, 732년,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궁재(Mayor of the Palace} 카롤루스 마르텔이 프랑스의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에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에서 이슬람의 북상을 저지한 칼 마르텔
즉, 고대부터 사용되어 온 칼(道)이나 활(弓) 같은 무기가 적합(適合)한 형태(形態)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먼저 로마 시대에 사용된 글라디우스(Gladius)처럼 숏소드(Short Sword)가 대표적(代表的)인 중세 부병용 무기(中世步兵用武器)였습니다.
작아서 휴대(携帶)가 편리(便利)하지만 갑(鉀)옷도 뚫을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워 주로 근접전(近接戰)에서 위력(爲力)을 발휘(發揮)했습니다.
반면 롱소드(Long Sword)는 체격(體格)이 좋아야 다룰 수 있어 전투용(戰鬪用)으로 그다지 효율적(效率的)이지 않았지만 위력(威力)이 커서 기사(騎士)의 상징(象徵)으로 여겨졌습니다.
↑숏소드, 즉 단검은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보병용 무기입니다
롱소드 중에서도 날이 넓은 검을 브로드소드(Broad Sword)라고 통칭(統稱)하며 이보다 더 발전(發展)한 것이 베기는 물론 찌르기도 가능한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입니다.
대형화(大型化)에 정점(定點)을 찍은 것이 말 그대로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크고 무거운 투핸디드소드(Twohanded Sword)입니다.
이처럼 검이 대형화된 이유는 제련 기술(製鍊技術)의 발달(發達)에 힘입어 갑(鉀)옷의 방어력(防禦力)도 함께 커졌기 때문입니다.
더욱 강력(强力)한 공격력(攻擊力)이 필요(必要)해진 것이었습니다.
↑다루기 어려워 롱소드는 기사들의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중세 유럽이 아무리 암흑기(暗黑期)여도 주변(周邊)과 담을 쌓고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날이 반달처럼 휘어 베는데 뛰어난 시미터(Scimitar)는 페르시아(persia)에서 유래(流來)되어 사라센(Saracen)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습니다.
기병(騎兵)이 사용했던 사브르(Sabre)도 이와 유사(類似)한 형태(形態)입니다.
시미터와 사브르 같은 곡도(曲刀)는 아니지만 스코틀랜드(Scottland)의 하이랜더(Highlander)들이 사용한 클레이모어(Claymore)도 베기용으로 대단한 위력(威力)을 발휘한 검(劍)입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