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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0 : 10 - 11 입에는 꿀 같으나
계 10 : 10 입에는 꿀 같으나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
책을 취하여 먹는다는 것은 종말 예언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뜻할 것이다.
성경은 영의 양식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힘써야 한다. 모든 성도는 성경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이것은 성도에게 거룩한 의무요 복된 특권이다.
입에 단 것은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의 즐거움을 말할 것이다.
시편 119: 92, 143,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그러나 배에 쓴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의 내용을 음미할 때 오는 마음의 고통과, 이 말씀을 지키며 전하려 할 때 예측되는 고난을 나타낼 것이다.
10) 실천.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 천사의 손에서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본문은 겔 2: 8 – 3: 3과 비교되는 구절로 에스겔처럼 요한은 말씀이 적힌 책을 취해 먹도록 명령받는다.
이것은 그 책이 요한이 선포해야 할 말씀임을 시사한다.
* 겔 2: 8-10 – 8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 겔 3: 1-3 - 1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① 출처
천사의 손에서
② 주체
내가
③ 대상
작은 책 두루마리인 요한계시록을 말한다.
④ 방법
갖다 먹어버리니.
본인 스스로 먹고 소화 시켜야 한다.
남이 대신 소화해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
(2) 결과 -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꿀 같이 다나 배에는 쓰더라.
① 입
꿀 같이 달다.
② 배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선포해야 할 메시지를 취하여 먹을 때 나타난 현상.
즉 '입에는 꿀같이 다나...배에서는 쓰게 되더라.'는 요한뿐만 아니라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도 겪었던 공통적인 현상이다. (Ladd, Mounce).
* 렘 15: 16, 19 –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 겔 3: 3 -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입에 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일이 기쁜 일임을 나타낸다.
'배에 쓰다'는 것은 그 메시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고통을 느끼게 됨을 상징한다(Ladd, Kraft, Morris). 즉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는 것은 큰 기쁨이 되지만 그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담고 있으므로 전파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요한은 계시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의 상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을 다 겸비하였다(Hendriksen, Ladd, Kraft, Mounce, Morris).
* 엡 5: 9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선지자 예레미야의 마음 속에는 그런 고통이 있었다.
* 렘 4: 19-20 – 19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20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계 10 : 11 다시 예언하라 -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
사도 요한은 이제까지 예언하였지만, 다시 온 세계의 나라들과 백성들에 관하여 예언해야 했다.
요한이 먹은 종말 예언의 말씀들은 책에 기록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말씀들이다.
11) 목적 -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1) 전할 대상.
'저가 내게 말하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구신'(*)은 문자적으로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단수로 언급된 반면에 본 절에서는 복수로 언급된다.
이에 대해 세 견해가 있다.
Ⓐ 지금까지 한 천사가 말해 왔으므로 복수로 보는 것은 오역이다 (Morris, Kraft).
Ⓑ 하늘로부터의 음성이나 천사나 천둥들의 소리이다 (Charles).
Ⓒ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자주 발견되는 숙어로서 3: 16에서처럼 불확정 복수를 표기하여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Ford).
세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 계 3: 16 -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2)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에게'의 헬라어 '에피'(*)는 '대항하여'(against), '전에'(before), '관하여'(about) 등을 의미한다.
본 절의 '에피'는 히브리어에서 '많은 백성들에 관하여'로 자주 번역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경우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들에 관하여'로 번역될 수 있다. (Swete, Ladd).
이것은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에 의해 전해지고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선포될 예언의 말씀이 장차 될 사건들과 종말에 대한 구체적 계시이며 그 예언의 대상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전 인류임을 시사한다.
① 많은 백성
민족을 초월하고 사회적인 신분을 초월함을 의미한다.
② 나라
국가를 초월한다.
③ 방언
언어를 초월하고 문화를 초월함을 의미한다.
④ 임금
정치와 사상을 초월하고 계급을 초월함을 의미한다.
(3) 명령의 내용 - 다시 예언하라.
요한계시록의 특징 중의 한 요소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나타난 계시의 말씀이 아니다. 이미 계시가 되었던 말씀이다. 그러므로 종말이 되었을 때 다시 예언되어야 한다.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확정된 것을 되풀이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
* 마 24: 14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본 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사도 요한을 통해 주셔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종말 사건들에 대한 예언은 봉인된 내용이 아니고 세상에 공개된 내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이 책의 말씀을 읽고 듣고 이해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둘째, 이 세상과 역사의 대종말이 곧 올 것이다.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며 시간이 더 이상 없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그런 종말 의식이 필요함을 교훈한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모든 사람은 종말 의식을 가져야 한다.
누가복음 21: 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셋째,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종말 예언은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즉 그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소식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하며 그 내용 중에는 이 세상과 역사의 종말과 심판에 대한 진리도 포함된다.
사도행전 17: 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회개와 천국을 선포하셨다.
마태복음 4: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또 회개와 죄 사함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증거하셨다.
누가복음 24: 47-48.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확정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죄인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분명하게 증언한다.
힘센 천사와 작은 두루마리 ( 박 조준 목사 ) - 저자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첫 아홉 장은 환난기의 중반부까지 펼쳐지게 됩니다. 일곱 인의 심판은 첫 사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곱째 인은 그 다음 사분의 일을, 다시 말해서 나팔 심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본문 10장과 11장 14절까지는 환난기 후반부에 관한 예언이 나오기 전에 삽입된 장면입니다.
여기 본문 첫 절에 “힘센 다른 천사”가 나오는데 이 천사에 대해서는 여러 성경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구약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자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주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사자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로 나타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이후로 예수님을 사자로 표현한 것도 한 번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의 죄를 담당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로 그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로 칭함을 받았습니다.
이 천사가 약간은 하나님 비슷한 면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 천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는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본문에 “이 천사는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친다”고 했습니다.
계시록 18장 1절에도 바벨론의 운명을 선포하는 또 다른 천사 역시 큰 능력과 영광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천사를 예수님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본문에 기록된 모습을 가진 천사를 두셨다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힘센 천사는 그 손에 작은 두루마리를 가졌고 그 내용은 본문 8절에 연결이 됩니다. 이 천사의 오른발은 바다에 그리고 왼발은 땅에 딛고 서 있는데, 이것은 그가 온 땅과 바다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는데 이것은 일곱 우뢰의 소리를 발하게 합니다.
계시록에서 우리가 보는 대로, 천사들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퍽 흥미롭습니다. 이 천사들은 언제나 수종드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창조하는 일은 할 수 없지만 인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천사의 이름은 이미 생각한 계시록 5장 2절에서도 이와 똑같은 말로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단지 “힘있는 천사”라고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그 우뢰와 같은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기록하려고 했을 때, 그는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물론 이 우뢰소리는 자연적인 우뢰소리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소리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29절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 드리며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했습니다.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했으므로 요한은 그 내용을 알았겠지만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고 있는 요한은 더욱 확신을 가지고 열의를 가지고 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목소리는 우뢰와 비슷한 큰 목소리를 내는 다른 천사의 목소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성경에는 특별히 그 주인공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이상 추측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하지 말라 했으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하지 말라 했을까 해서 이렇게 저렇게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위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그 목소리가 말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그 말한 것을 “인봉하라”는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 이상 추측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힘센 천사가 그의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서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힘센 천사가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 천사는 확실한 보증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3절에서는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기에서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했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는 자신보다 더 큰 이를 향하여 그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어서 창조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맹세했던 것이며, 그분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맹세하였습니다. 미국 표준판 성경에서는 이것을 “지연되다, 연착되다”는 뜻인 ‘delay’란 말로 번역했는데 더 이상 지체하지 않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연장해 주신 수백 년의 시간 속에서 살아왔는데, 이 천사는 하나님이 이제 모든 것을 끝내려 하시고 있음을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들의 반역을 오래 참아주시던 그 인내가 끝나고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닥쳐올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이제 그 인내가 끝날 때가 옵니다. 지금까지 참으신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안타깝고 간절한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까?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했습니다. 여기 “비밀”이란 말은 여러 번 성경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진리를 내보이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하나님의 비밀”이란 “구원”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은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사 그 죄를 대속하시려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비밀입니다. 이것은 신약뿐만 아니라 그의 선지자들과 종들을 통해서 구약 시대에도 알려진 사실입니다. 인류는 수천년 간 하나님의 비밀 속에서 살아왔으며 죄에 빠져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믿음으로 하나님의 한 권속이 되고 중생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비밀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비밀”이란 복음을 말하는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성경을 보아도 바로 이해 못합니다. 이 말은 글자의 뜻을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세오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가장 훌륭한 고전으로 읽었습니다. 철학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부터 위대한 철학 사상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심령이 새로 거듭나고 구원받는 일은 저희 눈에 가리워졌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우수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해도 저희에게 구원이 완전히 비밀로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기독교 복음의 진리는 비밀입니다.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전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 복음을 맡았습니다. 천사에게도 맡기지 아니한 복음입니다. 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10장 37절에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했습니다. 그 날,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 그때가 되기 전에 어서 돌아와야 합니다. 더구나 이 복음은 심판과 함께 그 내용이 완전히 실현되기 전에는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 이 비밀인 복음이 그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대로 곧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심판의 역사가 있고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복락이 있는 복음 역사입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 8절 이하를 보십시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왜 이런 말씀을 하게 되었을까요? 예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해야지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예레미야서 23장 2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이 맑아야 합니다. 맑은 호수, 잔잔한 호수에 얼굴이 비칩니다.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작은 두루마리는 무엇입니까? 이 작은 두루마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두루마리가 원래 하나님의 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힘센 천사의 손에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 말대로라면 이 두루마리는 이 땅에 보내는 명령서일 것이고 한 면에는 그 제목이 적혀 있고 다른 한 면에는 일곱 인의 심판이 적혀 있게 될 것입니다. 일곱 인은 떼어졌기 때문에 그 속에 기록된 내용도 이미 밝혀졌으므로 그 책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책을 먹으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견해는 이 작은 두루마리가 이 시점으로부터 계시록 19장까지 나타날 사건들을 요한에게 계시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든 간에 이 책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힘센 천사가 한 발은 바다에 또 한 발은 땅 위에 딛고 서 있다는 것으로 보아 요한은 이제 하늘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기 위해서 이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앞으로 이 땅에 일어날 일과 관련이 있는 책임이 틀림없습니다.
요한이 그 두루마리를 천사들로부터 받은 후 그것이 그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쓰리라는 경고와 함께 그것을 먹으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두루마리를 잘 소화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서 15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내 기쁨이요, 마음의 즐거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두루마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부터 보내 온 편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만 보아도 상대방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읽고 또 읽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읽습니까?
에스겔서 3장 1~3절에 보면 주님으로부터 이 구약의 선지자에게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훈계가 내려서 먹었는데 그의 입에 달기가 꿀 같다고 하였습니다. 책을 먹은 후 그는 이스라엘 앞에 나가 말하라는 명령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이 상징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저희가 학교에 다닐 때 영어 단어를 따로 외우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어 사전을 첫 장부터 외우는데 그것을 한 장 외운 다음에는 잊지 않으려고 사전을 아예 찢어서 먹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집념입니다. 정성입니다. 간절한 노력입니다.
그런데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말은 성경책을 뜯어먹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먹어,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먹어서” 살과 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먹어서 궤휼이 없는 순전하고 신령한 도의 젖을 만들어 나눠주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의 수가 많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맥을 못쓰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기는 많이 하는데, 먹고 소화시켜 살과 뼈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귀만 높아지고 입만 살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말만 합니다. 내 마음속에 사랑이 충만하면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 “냉랭하다”는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힘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소화시켜 그 말씀이 살과 뼈가 된 사람은 교회를 섬겨도 말없이 자기의 일을 합니다. 다른 사람을 간섭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 두루마리가 “입에는 꿀같이 달다”고 했는데 말씀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을 누리기 때문에 그것이 달고 기쁜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체험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루마리가 “배에서 쓰다”고 했습니다. 예언자가 말씀을 받은 후 그대로 예언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그리스도와 박해하는 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수난이 따릅니다.
옛날 선지자들이 다 그런 고난을 당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랬고, 미가 선지자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고난 당하기가 힘에 겨워서 하나님의 말씀 받은 대로 예언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사야는 신랄하게 말씀했습니다. 이사야서 56장 10절을 보세요.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개는 낯선 사람, 안 좋아 보이는 사람을 보면 짖어야 하는데 짖지 못하면 벙어리 개가 아닙니까? 오늘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가슴이 아픕니다. 참으로 쓰디 쓴, 어려운 사명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말씀을 받아 그것을 지켜 행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을 말합니다. 말씀 따라 사는 것은 주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지는 성화의 생활인데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받았으니 이제는 전파할 의무가 남았습니다. 말씀은 간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요한이 두루마리를 먹자 힘센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이 사명 잘 감당하는 우리 하나 하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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