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3월19일 월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수도회] 하느님 뜻을 따라 책임지는 의로운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2사무 7,4-5ㄴ.12-14ㄱ.16
○ 제2독서 로마 4,13.16-18.22
† 복음 마태 1,16.18-21.24ㄱ
◈ [인천] 넓은 마음을 가져야
2018년 나해 3월19일 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루카 1,32 참조)."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4-5ㄴ.12-14ㄱ.16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22
복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6.18-21.24ㄱ
영국에서 실시한 연구 결과를 보면 아주 인상적입니다. 우선 10대에게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약 75%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단 41%만이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바를 들으려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실 부모가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면 아이는 자존감이 높아질
뿐 아니라 독립심이 강해져서 사회적인 능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부모들은 아이들의 말과 생각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부모 자신의 말과 생각에 자녀들이 무조건 귀 기울이고
따르기를 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또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분명 한쪽에서는 아픔과 상처를 안게
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고 할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아마 늘 주님께 대한 불평불만만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요셉 성인을 떠올려봅시다. 그는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즉,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약혼한 마리아가 같이 살기도 전에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인간적인 판단을 하게 되면 자신의
아기가 아니니 파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에게 알려서 공개적인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듣고 또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꿈에서 들은 주님의 천사의 말씀을 듣고는
이해해서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들으려고 하지 않고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면 꿈에서 들은
메시지를 따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기준보다는
하느님의 기준을 늘 이해하려고 했기에 꿈에서 들은 메시지라도 소홀히
하지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준에 따라서 듣고 이해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넓은 마음이 하느님의 아드님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어떻게든 듣고 이해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정문정).
성 요셉과 어린 예수님.
나의 관심은?
여행 관광 가이드를 만나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신부님, 제가 가이드를 잘 하기 위해 제일 많이 보는 책이 무엇인지
아세요?”
“관광 가이드 책이나 역사책이 아닐까요?”라고 답하니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식물도감’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그 지역에 대한 질문이나 유적지에 대한 질문보다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나무나 꽃을 가리키면서 이름이 무엇이냐고 너무 자주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 지역에 오래 살았어도 그 나라를 대표하는 나무나 꽃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겠지요. 저 역시 갑곶성지에
있는 모든 나무와 꽃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나무와 꽃을 가리키며 물어보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관심 있는 것이 궁금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관심이
없으면 질문도 있을 수 없으니까요. 즉, 질문이 있는 곳에 나의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께 관심은
있는 것 같습니까? 주님께 대한 질문이 없다면 그만큼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네요.
◈ [수도회] 하느님 뜻을 따라 책임지는 의로운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3월19일 월.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마태 1,16.18-21.24ㄱ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대로 하였다.”(마태 1,24)
하느님 뜻을 따라 책임지는 의로운 삶
예수님께서는 양아버지 요셉을 통하여 법적인 다윗의 후손
(마태 15,23)이 되었고 메시아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22,42).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같이 살기 전에 그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음을 알게 됩니다(마태1,18). 율법에 따르면 약혼녀의
부정행위는 간음으로 여겨져 돌로 쳐 죽이든가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신명 22,23-24).
이 당혹스런 상황에서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먼저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의인이란 신심 깊고,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의로운 요셉은 자신이 겪게 될 난처한 상황과 고통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겨 파혼하기로 한 것입니다.
또 그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태 1,19). 그는 율법을
뛰어넘어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생명이 인간에 의해 침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그 일을 세상에 드러내는 그 자체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걸림돌이 됨을 알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혼전임신으로 자신 안에 일어난 당혹감과 배신감과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이는 타자의 고통을 대신 지는
행위입니다. 그는 파혼으로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거나, 관계 단절로
모든 것을 끝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파혼이라는
십자가를 침묵 가운데 짐으로써, 마리아와 태중의 생명을 지켜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파혼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잉태한 아이가 백성을
구원해주실 메시아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1,20-23) 하는 말을 꿈에서 듣습니다. 그는 그 말을
순순히 따릅니다. 그렇게 그는 예수님의 양부가 되고, 나아가 우리
모두의 어버이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마리아의 생명을 지켜준
의인입니다. 그는 구원의 길을 가야하는 마리아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 침묵 가운데 받아들인 참 의인입니다. 그는
당혹스런 상황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며, 믿음 안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세상 구원의 길이 열린 셈입니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고,
생계유지를 위하여 몸소 목수 일을 했습니다. 그는 사랑과 침묵 가운데
온갖 어려운 상황을 감내하며 가정 안에 하느님의 빛을 밝혔습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짓고(1,21. 25), 성전 정화 예식에도 데려갑니다
(루카 2,22). 그는 이렇듯 하느님의 성실한 종이자 가정의 책임자로서,
마리아와 예수의 여정에 말없이 동반합니다.
우리도 요셉을 본받아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성실히
실행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대해 믿음과
사랑으로 책임을 질 줄 알아야겠지요. 매일의 삶에서 다가오는 고통과
분노, 배신과 당혹스러움을 성 요셉처럼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요셉과 더불어 하느님의 의로움을 살아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 1,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19일 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 1, 24)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과 아픔은 늘 함께 갑니다.
아파하지 않는 삶이란 없습니다.
아픔과 두려움을 믿음으로 헤치며 나간 요셉성인의 축일입니다.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사는 것이 무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요셉 성인은 사람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사랑을 깨어나게 하는 것은 분명 믿음입니다.
평탄한 믿음은 없습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비탈길도 위험한 길도 마리아를 힘껏 떠받치며 함께 걸어갑니다.
가장 믿음직한 모습으로 동행하고 있는 요셉 성인입니다.
우리또한 소중한 누군가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그의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순시기가 아름다운 삶이 정녕 무언지를
다시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길 희망합니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며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믿음이 만들어내는 축복입니다.
먼저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요셉 성인이시여, 삶의 가혹한 시간까지
견딜 진정한 믿음을 위해 빌어주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기억나지 않는 사람/오늘의 능력말씀
기억나지 않는 사람
오늘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 말씀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세미나에서 강사와 수강생들 간에 오고 간 대화 내용입니다.
“여러분, 발명왕 에디슨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실패를 많이
했습니까? 하지만 그가 포기했나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행기를 처음 만든 라이트 형제도 실험에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포기했습니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멕키스트가 포기했을까요?”
“강사님, 멕키스트가 누구입니까?”
“멕키스트는 포기한 사람입니다.
역사는 포기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포기한 사람은 세상의 역사만 기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사탄의 공격에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포기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사명,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그 사명 담당하시고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기억나지 않는 포기하는 사람 되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수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3월19일 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이다. 우리는 성 요셉을 성가정의 수호자,
보편교회의 수호자이시며, 노동자, 가정, 동정자, 환자, 임종자의
주보로 공경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서에서는 ‘의인’,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이며 ‘충실하고 현명한 종’이다. 원죄 없이 잉태
되신 동정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시다.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성령께서 감추시어 눈에 띄지 않는 성사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를 죽음에
내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파혼하려 했을 것이다.
이때에 꿈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또한 요셉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아는 아무 죄가 없으며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를 위해,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라고 했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즉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
(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이사 49,1)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천사의 말은 동정 어머니를 그의 아내로 부를 자격을 갖도록 하였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1독서에서도 보면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이었다. 다윗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상급을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과의 약속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튼튼히 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2독서에 나오는 말씀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자세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여야 한다. 우리 인간의 나약한
면만을 생각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의
경중보다도 나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자비를 베풀어주시며 당신 앞에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도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아브라함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즉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그 삶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요셉 성인이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도 하느님 앞에 무슨 능력보다도 믿음으로, 신앙으로, 참된 삶으로
그분이 의롭게 여기시는 나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의 조그마한 행위 하나 하나가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2018년 나해 3월19일 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마태 1,16.18-21.24ㄱ
예전에 성당 마당에 식당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가건물이었지만 그래도
식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먼저 땅을 파고, 바닥을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바닥이 견고하지 않으면 건물이 제대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처음 바닥에 시멘트를 부울 때만 보았지 나중에
건물이 세워진 뒤에는 땅에 묻힌 바닥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건물이 튼튼하게 설 수 있는 것은 바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식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주방 설비도 마련하였고, 책상과 의자도 준비했습니다. 선풍기도
달았고, 창문도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들은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바닥은 여전히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바로 볼 수 있는 얼굴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바쁘게 움직이는 손과 발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의 얼굴과 손과 발을 보면서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루를 살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고마운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양분을 전해주는 혈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영양분으로 만들어 주는 소화기관이
있습니다. 언제나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골격이
있습니다. 관찰하고 판단하여 행동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뇌가
있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운전 중에 타이어가 파손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하였고,
주변에 차량이 없었기 때문에 타이어를 교체하였습니다. 차에는
스페어타이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2007년에
차를 구입했습니다. 다른 타이어들은 모두 2017년의 타이어였습니다.
작년에 새롭게 교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페어타이어는 여전히
2007년도 타이어였습니다. 차의 트렁크 밑에서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바깥을 보지 못했습니다. 스페어타이어는 단 한번 사용되기
위해서 10년 동안 어두운 트렁크에 있었던 것입니다. 파손된 타이어는
새것으로 교체하였고, 스페어타이어는 다시금 트렁크 아래에
두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스페어타이어는 깊은 영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만 알아주신다면, 한 번도 세상에 나오지
못해도 만족해하는 신앙, 단 한번 세상을 구경하고 다시금 어두운
곳으로 가게 된다 할지라도 만족해하는 신앙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은 건물의 바닥과 같은 분이 아닐까! 요셉 성인은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혈관과 같은 분이 아닐까! 요셉
성인은 단 한번 세상에 드러나지만 위기의 순간에 꼭 필요했던
스페어타이어와 같은 분이 아닐까? 요셉 성인은 오늘도 말없이
우리들에게 깊은 영성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에게 ‘시련은 있어도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아 이집트로 보낸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욥은 재물, 건강, 자녀들을
잃어버린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신분으로 살았는지, 어떤 피부색으로
살았는지, 어떤 성별로 살았는지, 얼마나 큰 업적을 쌓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충실하게 살았는지 일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들은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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