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중에 매우 유명하고 유능한 부흥사가 한명있다. 부흥사가 유능하다는 기준은 교인들의 반응을 기준으로 한다. 참석자들이 만족해하고 헌금이 많이 나올수록 유능한 부흥사가 될수 있다. 유능한 부흥사는 서로 모셔가려 경쟁을 해서 촤소한도 3년치 예약이 밀려있기도 하다. 헌금을 많이 갹출하는 부흥사는 사례비도 그에 비례하여 받게 된다. 흔한말로 성공보수인 셈이다. 그러니 한달이면 시무하는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 말고도 수천만원의 부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그나마 내 친구는 그렇게 얻어진 수입을 아낌없이 주변분들과 나누기도 한다는 점이 장점이다.
내가 4년간 직장생활을 할때는 절대로 남에게 돈을 꾸어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목회하는 동안에는 늘 재정의 압박과 싸워야 했다. 오죽하면 아내는 30여년의 기간동안 제대로 사례비를 통해 생활비라고 받아본 경험은 2년정도 밖에 안된다고 하였다. 과거 한국교회가 급성장한 시기는 80년대 이후라고 말하게 되는데 산업화가 고점을 찍으면서 산업체의 필요인력들이 농촌에서 공단지역으로 유입이 되었고 아울러 이주한 인력들을 위한 주택이 필요해 자면서 신규 주택단지와 신도시가 건설되게 되었다.
신규 아파트 분양은 부동산투기로 이어지게 되고 일확천금의 꿈을 성취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주로 기회를 잡을 수 없는 힘없는 계층들의 소망은 무엇을 붙들어서라도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 교회 역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구호로 이들을 교회로 흡수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예수원공동체를 이끌던 대천덕신부는 부동산 투기는 하나님앞에서 범죄라고 부르짖었지만 교회들 조차도 그의 호소에 귀기울이지 않은 셈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6:25, 개역개정)
부동산투기의 목적은 "살았을 때 좋은 곳울 받기 위함"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 한다. 오히려 거지 나사로를 칭찬하신다.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돈이 없다는 것은 곧 불편의 생활화이다.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돈을 더 쌓으려는 이유는 자신의 편리함과 더불어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함이다.
오늘 오후 눅16장의 말씀을 묵상하며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과연 목사들은 눅16장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