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전쟁에 지친 그들의 '귀환'을 바라며
연합뉴스 2023. 2. 26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그림보다 제목에 먼저 눈이 갔다. 제목을 본 이후엔 등장인물들에게 빠져들었다. 러시아 회화사 불후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일리야 레핀(1844~1930)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1888)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이 대단히 사실적이다. 집에 막 들어선 남자, 놀라 벌떡 일어나는 남자의 어머니, 피아노 앞에 앉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살피는 부인, 남자를 처음 보는 듯한 딸, 남자를 기억하며 웃음 짓는 아들, 무뚝뚝한 가정부 등. 연극처럼 펼쳐지는 각각의 표정 묘사가 놀랍다.
그림에 집중하니 마차가 도착하는 소리, 발걸음 소리, 문을 여는 소리, 한탄하는 소리 등이 들리는 듯하다. 가장인 아버지는 어디에서 '귀환'하는 것일까? 전쟁터? 유배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을지 모르나, 그는 한시도 가족을 잊지 못했으리라. 바로 이 순간을 꿈꾸며….
레핀은 러시아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다. 러시아 민중의 삶과 역사를 레핀만큼 더듬어 본 작가도 드물다. 러시아 사실주의를 확립한 화가들을 '이동파(移動派)'로 부른다. 광활한 러시아 지역 곳곳을 열차나 마차를 이용해 이동하며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림을 전시한 작가들이다.
이동파를 대표하는 레핀이 잊지 않은 주제는 '자유'였다. 그는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에 회의적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 이후 당국자들이 여러 차례 귀국을 권유했지만, 레핀은 거절하고 사망할 때까지 핀란드에 머물렀다.
고국을 떠나기 전 그린 그림인 아래 그림은 레핀의 자유주의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1903년에 그린 '오! 자유'다. 넘실대며 휘몰아치는 급류가 불안하지만, 그 속에 선 한 쌍의 남녀는 자유를 만끽하듯 손을 잡으며 활짝 웃고 있다. 혼란스러운 러시아 정세를 벗어나고 싶었던 레핀 속마음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오! 자유' 예르미타시 박물관 소장
현장성이 뛰어난 다른 작품의 주제는 '삶의 고단함'이다. 앞서 소개한 그의 대표작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가 '감동'이라면, 이 작품은 '고통'이다. 전자가 '혁명의 예고'라면, 이 그림은 '혁명의 이유'다. 1873년에 완성한 '볼가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이다.
'볼가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국립 러시아 미술관 소장
11명의 노동자 표정 하나하나가 고통과 고됨의 현실이며, 여유와 휴식의 외면이다. 절규하거나 반항하지 않는 육체노동으로부터 폐허 같은 절망이 느껴진다. 배가 체제라면, 노동자들은 수레바퀴다. 저렇게 그들은 팔을 늘어뜨리고 다만 한 끼의 '밥'을 희구하는 듯하다.
푸른색 하늘과 붉은색 모래사장이 대비돼 주제를 강조한다. 마치 이상과 현실의 대비 같다. 레핀은 이들 모델을 위해 많은 사람을 직접 만나 스케치했다고 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레핀이 전성기에 도달한 40대에 그린 작품이다. '볼가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은 그가 고작 스물아홉의 나이에 그렸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레핀의 이름에 따라붙는 예술가는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다. 레핀은 1880년 자신의 화실을 찾은 톨스토이와 처음 만난 뒤 30여 년간 우정을 유지하며 그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톨스토이 사상의 본류인 비폭력과 사회비판 정신은 그의 붓에서 농밀하게 무르익었다. 각각 1887년 그린 초상과 1891년 작품 '숲속의 톨스토이'다.
톨스토이 초상과 '숲속의 톨스토이'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서양 회화 역사에서도 대가의 위치에 오른 레핀은 이른 나이부터 사람과 역사와 세계를 이렇게 조망했다. 그건 결국 '애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과 역사와 세계에 대한 애정.
레핀은 지금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는 우크라이나 북동부 추위브(Chuhuiv) 출신이다. 전쟁 발발 만 1년이 지났다. 그의 그림처럼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 평화를 얻고, 크게 외치는 자유를 누리기를 기원한다. 대표작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를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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