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마태오
8,23-27)
"Lord, save us!
We are
perishing!"
"Why are you terrified,
O you of little
faith?"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죄로
물든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기로 결정하셨다. 아브라함의 간청으로 하느님께서는 의인 열 명이 있다면 그 도시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기억하시어 롯과 그 가족이 멸망을 피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자,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 풍랑을 가라앉히신다. 이를 본 사람들은 과연 이분이 어떤 분이신가
놀라워한다. 이 기적은 자연 질서를 총괄하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낸다(복음).
☆☆☆
오늘의
묵상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그 도시들의 멸망을 바라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침묵은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하느님께 간청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진노하실까 두려워하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하느님께 청하고,
청하고 또 간청했습니다. 그 결과에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소돔과 고모라를 내려다보러 갑니다. 아마도 밤새 노심초사했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그가 아는
이들을 모두 헤아려 보았을까요? 열 명에서 더 숫자를 줄였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께 더 애원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는가도 고민했을까요?
어쨌든 아침 일찍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자기가 주님께 매달렸던 그 자리로 가서 결과를
확인합니다. 그 장면을 보고
아브라함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기록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갔다는 것은 기록합니다.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 가서 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미 그의 몫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알았던 그의 몫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간청하는 것뿐, 그 이상은 오직 하느님의 몫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라고
해서 꼭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아무런 유보 없이 바라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은 다수의 악이 아니라 소수의 선이었습니다. 악인이 많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몇 사람 때문에 죄스러운 전체가 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인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나였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어느 오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의 원주민들이 평소에 신이라고 부르며 끔찍한 마음으로 섬겼던 석상을
밧줄로 묶어 넘어뜨리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 선교사는 ‘드디어 나의 활동이 빛을 보는가 보다. 이들이 이제는 저 우상을 버리고 내가 알려준
주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넘어뜨린 석상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글쎄
볼기짝을 몽둥이로 심하게 때리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추장은 사냥을 잘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자신의 신에게 빌었는데, 그 기도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이렇게 넘어뜨린 뒤에 정신 차리라고 볼기짝을 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을
해 주고,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하느님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원함이 채워지지 않으면 볼기짝을 때리는
앞선 이야기의 원주민들처럼 하느님께 온갖 불평불만을 던지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믿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어요. 아니 주일에 쉬지도 못하고 더 불편하기만 해요. 그럴 바에는 하느님을 믿지
않으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도구가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큰 풍랑에 예수님을 깨워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 순간 주님을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도구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중에 많은 이가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이지요. 분명 그들은 스스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주님을 굳게 믿는다면 주님과 함께 있음 그 자체로 두려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다고 주님을 간절하게
찾고만 있을 뿐이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심을 굳게 믿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주님 탓을 외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계시기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은
항상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 속에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굳게 믿으며 더욱 더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 살고 있습니까?
비가 오거나 햇볕이
쨍쨍한 날씨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날씨에 어떻게 대처할 지를 택할 수 있다. 그러니 좌절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콘스탄틴 마이클
먼티스).
내가 미루고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은
했으나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한 사업가가 고민 끝에 현자를 찾아가서 진심어린 충고를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현자는 이
사업가가 세 가지를 미루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첫째, 자네는
빚을 갚는 일을 미루고 있네. 내게 지어준 미소,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도움 갚는 일을 미루고 있는 것이지. 둘째, 용서를 구하는 일을 미루고
있네. 어떤 사람과 소원해 질 때 상대방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기 원하나 내가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하네. 셋째, 사랑을 고백하는 일을 미루고
있네. 사실 이것은 절대로 미뤄서는 안 되는 것이지.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방의 심장에 북소리 같은 강한 울림을 남기는
법이지.”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때 혹시 다른 사람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내가 미루고 있는 것을 점검해
보십시오. 힘들었던 인간관계가 해결될 수 있는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힘님
-이기정신부-
자연현상의 힘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을 지배하듯 거만하고 잘난 체 하면 꼴불견이란 생각입니다. 자연법 그리고 그
위에 신법이 있다는 걸 믿는 신앙인으로 살아야합니다.
녹조현상 태풍 가뭄
폭우 장마 전염병 같은 앞에서 맥도 못 추잖습니까. 이런 자연현상들이 겸허히 따르는 큰 힘이 있는데 바로 하늘의 힘입니다. 사람의 힘,
자연현상의 힘, 하늘의 힘 중 하늘의 힘님이 역시 최고입니다.
“그러자
그분(예수님)은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마태오 8.26)”
믿는 만큼
보게된다
-반영억신부-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보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굳센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믿음이 큰 만큼 하느님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믿고 의탁하는 만큼 강하게
만납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한 배를 탔는데 어떤 이는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이는 겁에 질려 허둥거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있었기에 무서울 것이 없으며 절박한 생존의 난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는 위기는 아예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시 하십시오.'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더해달라고 매달리면 됩니다. 그냥 덮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운 것을 보면 아직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품 안에 있었으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철저히 맡기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아마 우리도 같은 위험에 처했더라면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움에 맞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허둥대던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고, 풍랑과 파도를 지배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무서움의
차원을 넘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접하면서 커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따른다기보다 따름으로써 성장합니다.
혹 어려움에 직면할
때 아직도 허둥대고 있다면 믿음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1베드5,7).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25.3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주님께 떠맡기고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성경을 보면 롯의 가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하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민수21,9).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말입니다”(까롤로 까레또). 믿음 안에서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신부-
오랜
가뭄에 메마른 대지에 고마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니,
많은
곳의 가뭄이 해갈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나의
말과 행동이 주변에 위로와 희망을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6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정확하게
2015년도
반이 지났습니다.
지난
6개월을
돌아보면 과거와의 만남이 많았습니다.
적성
본당의 초등학생들이 어른이 돼서 찾아왔습니다.
주일학교
동창들과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제가
혼배 주례를 서주었던 부부가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추억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은 사람만의 특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성서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얻었고,
용기를
얻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욥기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저는
욥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원망과 미움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성서의
말씀 중에 하나를 삶의 기준으로 정한다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975년에
작고하신 시인 김현승님은 제가 묵상한 욥기의 내용을 아주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였습니다.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사로이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오늘
우리는 시련과 고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1독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분쟁과
다툼이 있는 사람들,
거짓과
증오가 가득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뜻합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며 해서는 안 될 일들을 거침없이 저지르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도시를 벌하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따랐던 롯과 그의 가족들은 멸망으로부터 살려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다가 거센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가
흔들리고,
사나운
파도에 곧 물에 빠질 것 같은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중에도 뱃머리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제
너무나 무서운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워 말씀드립니다.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먹느냐!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시면서
거센 풍랑을 잠잠하게 만드셨습니다.
저는
거센 풍랑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17년
전에 동창 신부와 함께 ‘백령도’엘
갔었습니다.
연안부두를
떠날 때는 날씨가 좋았는데 중간쯤 가니까 파도가 높아졌습니다.
배는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배는 앞으로 나가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배에 있던 사람들은 얼굴색이 변하고,
힘들어
하였습니다.
씩씩한
해병대 젊은 군인들도 배멀미에 괴로워하였습니다.
저도
속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백령도에 사는 주민들은 별 동요가 없었습니다.
자리를
펴더니 모두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그리고
편안히 주무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분들을 따라서 자리에 누워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속이 편안해 졌습니다.
거센
파도에 대항하면 할수록 속이 편하지 않고,
힘들었는데
오히려 파도에 몸을 맡기고 누워있으니 편안해 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놀라서 우왕좌왕 할 때,
편안히
누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랐던 롯과 가족들은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의지하였던 제자들도 거센 파도에서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길에 사나운 파도는 늘 닥쳐 올 것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사나운 인생의 파도에서 구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네.”
'살아있는
성경책' 사람
-회개의
여정-
-이수철신부-
오늘은
예수 성심 성월 6월 끝날인 6월30일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내일은
7월1일, 7월의 시작입니다.
매일이
시작이자 끝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날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런저런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강론
주제는 '살아있는 성경책, 사람'에 부제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시간되면
하루 1시간쯤 도서실 가서 책도 살펴보고 정리하며 지냅니다.
책을
많이 보는 편입니다만 도서실에는 보지 못한 책도 많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책도 무수합니다.
정말
책도 공해(公害)요 책을 내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됩니다.
아무도
찾아 열어보지 않는 책처럼 사람이란 책도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인스탄트
시대, 고전 같은 사람도 있겠고 아무도 찾지 않는 책같은 사람도 있겠고
월간지나
주간지, 일간지 같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사람이란 책보다 흥미진진한 책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책, 좋은 사람 하나 만나는 것이 수백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읽어야 할 살아있는 책이 사람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삶의 성경책'이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경우, 그대로 한권의 미완의 성경책입니다.
하루
한페이씩 써가는 성경책입니다.
형제자매들을
수시로 면담성사를 주면서 깨닫는 바도 한분한분이 귀한 삶의 성경책이라는 확신입니다.
정말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소중한 유일무이한 삶의 성경책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성경책을 깨닫게 해주는 결정적 열쇠가 하느님 믿음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성경책 문장의 주어가 될 때
비로소
은총의 역사로서 내 삶의 비밀이 환히 계시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나도 모르고 내 삶의 책의 비밀도 영원한 미궁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어느
자매의 고백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31년,
정말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지금도
어려움의 반복입니다.
31년을
살았어도 남편은 자기를 모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니 반성도 회개도 할 줄 모르고 겸손도 없습니다.“
평범한
말 같지만 얼마나 중요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지요.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내
마음도 자주 하느님 거울인 성경 말씀 거울, 기도 거울, 미사 거울에 비춰봐야
반성도
성찰도 회개도 가능하여 자기를 아는 겸손인데
도대체
이런 거울이 없으니 자기를 알길도 진정한 소통도 불가능합니다.
소통의
두요소는 하느님과의 소통인 기도요 이웃과의 소통인 대화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소통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내포합니다.
그러니
각자의 삶의 성경책도 이런 두 차원의 소통을 통해 완성됨을 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이 두 차원의 소통이 충족되는 참으로 은총의 시간입니다.
공동체
및 개인은 위로 하느님과 소통하며 옆으로 형제들과의 소통으로
온전한
일치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 향한 평생 회개의 여정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서 삶은 더욱 깊어져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되고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여정은 하느님 공부의 여정이자 자기 공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추억의 동물입니다.
삶의
성경 중 좋은 체험의 추억은 얼마나 삶에 큰 활력소가 되는 지요.
지난
밤 눈을 뜨니 37년전 제자들(당시 1978년도 초등학교 4학년, 11세, 지금은 48세의 장년)의
채팅
방 카톡에 나눈 제자들의 대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희 신우초 4학년 3반 였던 친구들예요. 아, 지금 주무실 시간이다."
"이수철쌤좋았어,
무지“
"그치“
"이수철쌤
너무 좋았지. 너무보고싶다.“
이런
추억들의 삶의 역사에 하느님이 중심에 자리잡는 다면 삶은 얼마나 풍성하겠는지요.
삶의
역사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이십니다.
요즘
계속되는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역사는 얼마나 파란만장하며 흥미진진한지요.
아브라함의
역사는 그대로 하느님 은총의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밤새 하느님과 대화의 기도를 한 아브라함이
다음
날 기도소에서 그 심판의 현장을 봤을 때 마음은 얼마나 착잡했겠는지요.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 오르고 있었다.‘
침묵
중에 바라보는 아브라함은 만감이 교차하면서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지 회개의 절박성을 통감했을 것입니다.
롯의
구원도 의인 아브라함의 기도 덕분이었음을 마지막 대목이 밝혀 줍니다.
세상을
위한 수도자들의 중재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시어,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창세19,29).
삶은
항해와 같습니다.
회개의
여정이자 인생 항해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곤경 중에 주님의 구원을 체험하며
자기들의
믿음 부족을 깊이 깨달았을 것이니 이 또한 회개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질책과
더불어 안정과 평화의 기적이요, 저절로 뒤따르는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이런
주님의 구원체험을 통해 제자들의 삶의 성경책 내용도 참으로 풍요로워졌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늘 한 페이지의 삶의 성경을 잘 읽고 쓰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 자애가 제 눈앞에 있나이다.“(시편26,3ㄱ참조)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참조).
아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마태 8,26)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무얼 믿고 있습니까? 사도신경에서
언급되는 신앙고백문을
믿고 있기에 믿음의
사람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천당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인가요? 기도를
많이하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고 믿는다는
말인가요? 착한
일 많이 하면 천국가고 죄를
많이 지으면 지옥간다고 믿는다는
말인가요?
그러면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하고 두렵고
걱정스럽나요? 내
안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나요?
우리가
믿음이 약하다고 질책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당신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고 함께
계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쓰잘
데 없는 근심걱정에 왜
사로잡혀 있느냐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엔 두려움과
근심걱정이 있나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
두려울 것 없네" 하고 한번
외쳐보세요.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자가 아니라
참 믿음의 사람이니까요.
한해의
반을 마무리 하는 오늘 감사와
찬미의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한상우신부-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사랑은 풍랑속에서도 존재합니다.
풍랑은 삶의 바깥에 있는
우리를 삶의
안쪽으로 초대합니다.
부서지는 파도를
통해 부서져야 할
대상이 바로 우리의
자아임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파도가 되기위해선 물과 바람이 있어야
하듯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그냥
이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풍랑이라는 상처없이는
결코 고요와 물의
향기를 맛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풍랑속에서
다시 내려놓는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풍랑속에서도 변치 않는 주님
사랑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파도처럼 이어지고 또
이어져 있습니다.
큰 풍랑이
있기에 큰 고요도
있습니다.
풍랑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사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큰
풍랑까지도 우리를
위한 큰 사랑이었음을
믿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는
삶이 주님께 복종하는
삶임을 알게
됩니다.
높고
낮음이라는 주도권에
묶여있는 우리들에게 큰 풍랑은
다시금 우리 삶의
주인이 바로
주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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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