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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묵상글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 겸손한 자기 관상.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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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겸손한 자기 관상
저는 지금 관상 수녀원에 와 있기에 겸손과 관상의 관점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고 나누고자 하는데
오늘은 겸손한 자기 관상에 관해서 나누고
내일은 겸손한 하느님 관상에 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관상하면 보통 하느님 관상에 관해서만 얘기하는데
온전한 관상은 하느님도 관상하고 자신과 이웃도 하느님 안에서 관상하는 겁니다.
그리고 온전한 관상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겸손과 성령입니다.
아시다시피 겸손은 자기를 정확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사람은 모름지기 국어와 산수를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국어를 잘해서 자기 주제 파악을 잘해야 하고,
산수를 잘해서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해서 주제를 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자기 주제를 잘 알고 있고,
이에 비해 오늘 독서에서 얘기되는 적 그리스도들은 주제넘게 날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얼마나 자기 주제를 잘 알고 있느냐 하면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자기를 주제 파악하는 정도가 아니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주제 파악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정확히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신앙적인 겸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낮추거나 높이지 않는 것을 뛰어넘어서,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겸손에 관해 구구절절 너절하게 얘기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닐뿐더러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오늘 독서에서 적 그리스도들은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안에 머물지 않을뿐더러
자기가 그리스도인 양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착각함으로써 그리스도 밖에 있고,
자기를 그리스로라고 함으로써 사람들을 속이고 오도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를 신이라고 하며 날뛰는 자들이 있어
우매한 백성을 속이고 오도합니다.
오도(誤導)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길을 잘못 인도한다는 말인데
하느님께 가 하느님 안에 머물도록 하지 않고
자기에게 와 자기 밑에 있으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해야 할 뿐 아니라 우매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라고
오늘 서간이 세 번이나 얘기하듯 우리는 적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말고
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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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우리의 증언
“증언자로서의 삶”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아직 구입하지 못해 작년 다산 어록을 참고하지만 다시 봐도 좋습니다. 반복되는 현자의 말씀들이지만 새로운 느낌입니다.
“결과를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시작하라. 모든 시작은 위대하다.”<다산>
“지극히 어려운 일도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세상의 큰일도 그 시작은 미약하다.”<도덕경>
현자들의 말씀이 좋은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하루하루 용기를 내어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엊그제 2025년 12월 31일은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3주기 기일이었습니다. 늘 ‘하느님의 얼굴을 찾을 것(to seek face of God)’을 가르쳤던 교황입니다. 또 영원한 삶이 하느님과의 친교로 이뤄진다면, 이미 지상 삶에서 우리 스스로 준비함이 적절함을 강조하셨고, 교황 친히 열정적인 전 삶을 통해 이 진리를 입증하셨습니다.
어제 영문주석에서 읽은, 우리가 옛 해를 보낼 때 기억해야 할 두 말마디, “Thanks and Yes(감사와 순종)”을 잊지 못합니다. 과거의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을 뒤돌아 보고(to look back) “감사(Thanks)”를, 장차 일어날 모든 일에 기대와 더불어 수용할 것을 예견하고(to look forward) “순종(Yes)”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늘 기억해야 할 “Thanks and Yes” 두 말마디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완벽하게 증언한 분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수님이 발광체(發光體)라면 세례자 요한은 그대로 주님을 반사함으로 증언한 반사체(反射體)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삿된 이단이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참으로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겸손할 때 참된 증언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라는 질문은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신원에 대한 물음입니다. 다음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증언을 통해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관계가 투명히 드러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자신의 신원을 말했지만, 적대자들이 잘 못 알아듣고 ‘왜 세례를 주느냐?’는 무지한 질문에 더 분명히 자신의 신원을 밝히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 모두를 대변한, 예수님의 증언자이자 반사체인 세례자 요한의 겸손하고 진솔한 답변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자의 신원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 해당된다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존재이유요 우리의 신원을 알게하는 거울같은 분입니다. 사도 요한의 주님 안에 머무르라는 간곡한 당부가 참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이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참된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그분의 교회 공동체 안에 항구히 머물러 정주할 때 변질되거나 부패하지 않고 참 좋은 증언자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성 아타나시오와 성 요한 크리소스 토모와 더불어 동방의 4대 교부에 속하는 두 분,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교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고대성’, ‘정통교리’, ‘생활과의 조화’, ‘교회의 승인’등 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니 교부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잘 반사하는 증언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기념하는 두 주교 학자가 그런 분이셨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절친이 되었고 아테네에서 함께 공부했으며, 둘 다 나란히 사이좋게 주교와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바실리오는 아리안 이단과 싸웠던 조직자였던 반면에 그레고리오는 더 많이 관상적이자 시적인 분이었습니다.
성인들로 가득한 명문가 출신의 바실리오는 330년경 태어났고, 그의 고향인 카파도키아의 체사레아의 주교가 되기 전에는 수도승이자 독수자였습니다. 그는 신학자였을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던 사목자 주교였습니다. 또 그는 바실리오 규칙으로 알려진 수도자 규칙서를 만들었고 동방교회 수도자들이 널리 사용했습니다. 그는 379년경 약 49세로 선종합니다.
성 그레고리오는 카파도키아의 나지안조에서 역시 330년경 주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바실리오처럼 일찍 수도생활에 합류합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고 사시마의 주교가 되고 이어 콘스틴노플의 주교직에서 물러난후 그의 남은 여생을 나지안조에서 공부와 기도가 조화된 독실한 삶을 살다가 바실리오보다 10년 늦게 389년경 선종합니다.
절친의 우정관계에 있던 두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안 이단과 치열한 싸웠고, 바실리오의 가르침은 니체아 공의회(325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참으로 두 분 모두 온힘을 다해 정통교리의 수호자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여 주님을 잘 반사하며 증언했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발광체라면 우리 모두는 그의 반사체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늘 예수님이 거울에 비춰봐야 내가 누구인지 알아 날로 주님을 닮은 주님의 참된 증언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증언의 여정>에, 사랑과 겸손의 참된 주님 증언자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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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나 자신을 외치는 이인가? 아니면 내 안에서 외치는 이를 드러내는 소리인가?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있는 화살표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보십시오!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자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21.22)
이 질문에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나는 어떤 이인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로 살고 있는 이인가?’ ‘예수님과는 어떤 결속을 맺고 살아가고 있는 이인가?’
저는 이렇게 대답해 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새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벗이요.’ 라고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주님!
당신을 향하여 있는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사랑,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 당신의 귀염둥이 아들, 당신의 사랑이니,
당신께만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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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우리는 교회의 큰 두 기둥인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를 기념합니다. 혼란스러웠던 시대 속에서 두 성인은 서로의 우정을 바탕으로 교회를 지키고, 삼위일체 신앙을 변함없이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코린토 1서에 대한 해설을 읽었습니다. 코린토 공동체는 여러 질문 속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혼인과 독신에 관한 문제, 우상에게 바친 고기, 전례와 성찬례의 질서, 영적 은사의 사용, 그리고 몸의 부활 문제에 대해 분명한 식별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혼인을 하든 독신을 살든, 중요한 것은 사라질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일임을 선언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고기는 먹을 수 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 그가 보는 앞에서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지식보다 앞서는 것은 형제에 대한 배려임을 가르칩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가 세속의 만찬과 결코 섞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찬은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신비이며, 남녀평등의 원리는 강조하되 무분별한 무질서를 경계합니다. 영적 은사는 개인의 명예나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총임을 설명하며, 그 모든 은사 위에 ‘사랑’이라는 최상의 은총을 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의 부활을 분명히 확인합니다. 썩을 몸이 불멸의 몸으로 변화할 것이며, 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얼마 전 AI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보다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웁니다. AI는 인간의 지식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인간에게서 배웁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예수님의 황금률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농업혁명 시대에도, 산업혁명 시대에도, AI 혁명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계명입니다.” 결국 시대가 변해도 신앙인의 기준은 사랑이며,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새로운 질서를 이야기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력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에게 혁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질서를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보았습니다. 신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식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없는 활동은 공허하고, 활동 없는 기도는 관념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2026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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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한 줌의 소금이 온 삶을 변화시킵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6년 1월 1일 목요일- 쉰세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우리가 ‘소금’이 될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참된 번영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 마가렛 파인버그(Margaret Feinberg)는 우리가 지닌 '소금의 맛'을 세상에 드러낼 때, 그것이 공동체적으로 모여 인류의 치유와 구원에 큰 힘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으로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인간의 참된 번영을 이루는 도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나라의 거름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썩어가는 것 위에 뿌려져 새로운 생명을 돋아나게 하는 소금입니다.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삶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꽃피고 열매 맺도록 돕기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이렇게 풍요롭게 살아가는 삶은 곧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사용하던 소금은 그 주변의 광물과 함께 채취된 것이었고, 그 미세한 성분들이 소금의 고유한 맛을 이루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신 각자의 '광물'—곧 특별한 성장 배경과 성격, 은사와 한계, 그리고 작은 기질들까지—모두를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처와 일상의 노동까지도 은총의 도구로 삼으시어, 우리를 세상 곳곳에 뿌리시며 하느님 나라의 생명을 싹트게 하십니다.
파인버그는 세상의 고통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게 느껴질 때,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전합니다:
어떤 날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필요와 요청들이 메일함과 메시지, 그리고 사회관계망을 가득 채워 저를 압도하기도 합니다. 길을 찾고자 하던 중, 저는 탈무드라 불리는 고대 유다 전승 속 지혜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의 아픔을 60분의 1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선이며, 그 도움의 부름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서—보존하고, 맛을 더하며, 생명을 키워내는 거름으로서—살아가야 함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 ‘60분의 1’이라는 작은 몫 안에는 참된 자유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오직 내게 달려 있다는 강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나의 작은 한 알의 소금은 다른 이의 소금이 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소금 알갱이가 함께 섞여 세상 곳곳에 뿌려질 때, 보존하고 맛을 더하며,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은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누구도 홀로 온 세상을 보존하고, 온 세상에 맛을 더하며, 온 인류를 번영케 할 수 있도록 부름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당신은 단순히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내가 그들의 고통을 60분의 1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이"를 떠올리게 해 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오랜 세월 동안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매일 묵상’을 접해 왔습니다. 묵상을 정성껏 읽은 뒤에는 잠시 눈을 감고, 제 마음과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하곤 합니다. 이 묵상들은 제 영혼을 살찌우는 참된 ‘영적 비타민’이 되어 하루 동안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의식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저는 이러한 은총의 선물을 날마다 나누어 주시는 리처드 신부님과 CAC 공동체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Mary W.
References
Margaret Feinberg, Taste and See: Discovering God Among Butchers, Bakers, and Fresh Food Makers (Zondervan Books, 2019), 113–11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Zach Lucero,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작은 불꽃이 또 다른 불꽃을 지피듯, 관상적 실천은 고요하면서도 힘 있게 퍼져 나가 마음을 밝혀 세상을 사랑으로 빛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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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묻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엘리야도 아니다. 그 예언자도 아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보다, 자신이 누구를 증언해야 하는 사람인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빈 땅, 하느님의 말씀만이 울려 퍼질 수 있는 공간입니다. 요한은 바로 그 광야 한가운데에서 오직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외침은 준비되지 않은 길을 깨우고, 메시아를 맞이할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요한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고백하며, 철저히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겸손한 증언의 모범이 됩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세상 속의 작은 ‘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주목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작은 친절, 침묵 중의 기도조차 누군가에게는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구원의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을 맞이할 길을 정리하고, 우리의 교만과 두려움을 내려놓으며, 주님을 중심에 모시는 하루가 되기를 청합니다.
⭐밍크 담요
사제관 장롱 한 구석에 ‘밍크 담요’가 있습니다.
80~90년 우리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밍크 담요.
촌스러운 붉은 색 바탕에 꽃이 그려져 있는 것도 있고.
누런색에 얼룩덜룩한 무늬가 들어간 담요도 있었습니다.
그 위에 누워 야식도 먹고 텔레비전도 보고 책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따뜻한 담요 위에서 스르륵 잠들었던 기분좋은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순간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한방에 옹기종기 모여 지냈던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말입니다.
밍크 담요처럼 따뜻한 겨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추억의 밍크 담요를 덮고 온기 가득한 겨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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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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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면서 이혼하겠다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혼의 이유 중에서 무엇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까요? 대부분이 ‘성격 차이’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성격이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다릅니다. 그렇다면 성격 차이라는 것은 자기 성격에 상대방이 맞춰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 성격에만 맞추길 바란다면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차라리 ‘개’를 키우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젊은이 중에는 결혼하지 않고 대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남도, 더 나아가 세상까지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제대로 알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또 세상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넓은 마음을 갖게 하는 시작이 됩니다.
자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함께 사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함을 갖게 되며 더 나아가, 이렇게 부족한 ‘나’를 사랑해 주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회개의 설교를 듣고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에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타인의 기대나 칭송에 취해 있었다면, 그리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원했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고 말하지요. 소리는 뜻을 전달하고 나면 사라지고 맙니다. 이처럼 요한은 자기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고 사라지는 도구임을 보여줍니다. 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주인의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다인 노예에게는 시키지 않는 비천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를 낮추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알고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일인데도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영역에 있는 것인데,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함부로 말합니다.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바치면서, 마치 종 부리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우리,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실천이 말보다 낮다(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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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본질적 자아와 하느님의 사랑!
어제 우리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서 성찰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또 다른 깊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관통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수도 생활의 근본적인 화두 역시 "하느님이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명 외에도 자신만의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습니다(마태 3장, 루카 3장). 그러나 요한 복음에서는 이 모든 것이 생략되고, 오직 예수님을 가리키는 그의 증언만이 강조됩니다.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모든 물음에 부정으로 답하고, 자신을 단지 "목소리"라 고백합니다. 훗날 예수님께서는 그를 '등불'이라 부르십니다. "그는 타오르며 빛나는 등불이었고, 너희는 잠시 그 빛 속에서 기뻐하였다."(요한 5,35).
목소리와 등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이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목소리와 등불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본능적으로 압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유명해지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영성의 길에서는 오히려 자신을 감추는 것이 이상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사용하신 비유도 같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소금, 누룩, 밀알—이 모두는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지면서 생명을 키워냅니다. 빛 또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밝힙니다.
예수님께는 이름 없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들 가운데서도 시몬과 유다, 그리고 안드레아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스승께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면, 제자 또한 요한 세례자처럼, 그리고 모든 제자들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자아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자기 비움을 강조하며,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내라고 가르칩니다. 작은 소금, 누룩, 밀알처럼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곧 제자의 길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겸손과 자비 비움은 자아 완성의 토대입니다. 일전에도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가장 중요한 덕 네 가지를 말하라면, "겸손, 겸손, 겸손, 겸손!"이라고 말하겠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겸손과 자기 비움은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겸손은 자기 존중과 균형을 이루며, 자기 비움은 집착을 내려놓고 삶의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 가도록 일끌어 줍니다.
그런데 우리 에고는 자신이 드러나기를 호시탐탐 노리지요.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에고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불안감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에고는 본질적 자아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자아입니다. 따라서 외부 평가가 흔들리면 곧바로 불안이 생깁니다.
에고는 끊임없이 "나는 충분히 괜찮은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은 끝없는 비교로 이어지고, 만족은 잠시뿐이며 곧 불안으로 바뀝니다.
자기 비움이 없다면 에고는 계속 자신을 중심에 두고, 불안과 집착을 키웁니다. 반대로 자기 비움은 "나는 평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 즉 하느님께서 '나'를 있는 그대로 매우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시는 본질로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한 마디로, 겸손은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을 의미하고, 자기 비움은 에고의 집착을 내려놓고, 더 큰 의미와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내면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평가와 비교에서 벗어나게 되고, 불안은 줄고, 평화와 성숙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고,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겸손과 자기 비움을 통한 진정한 자기 인식이 이루어진 뒤에 해야 할 이차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 두 가지 과정을 거꾸로 배워왔습니다. 이차적인 일이 참으로 겸손한 "경청"이 되기 위해서는 참으로 건강한 자기 인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의 요셉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여정과 우리의 자아 완성의 여정에서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 형제들의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할 위험에 놓이게 되고 결국은 노예로 팔려가게 되고 심지어는 음모에 의해 감옥에서 고통을 겪기까지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있었고,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미고 있었으며, 자신의 고통 통해 구원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자기 형님들에게 한 요셉의 말을 한 번 들어볼까요? 이것이 바로 "구원하는 고통"입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5-8).
한마디로,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한없이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시며 우리의 잘못과 어둠과 고통마저도 우리 구원을 위해 활용하시는 진정한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 일치되어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 사실을 매일 매 순간 기억하고 새길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역시도 다른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참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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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X X X X X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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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19-28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미련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뜻이지요. 과하면 모자라느니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집착이 커질수록 자기도 모르게 자꾸 무리수를 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기껏 힘들게 쌓아올린 좋은 업적과 명예마저 다 무너져버려 모든 것을 잃게 되지요. 성경에 등장하는 헤로데 대왕은 물론이고 인류의 역사 안에서 처음에는 좋은 지도자였다가 자신이 떠나야 할 때를 놓쳐서 결국 악질적인 독재자로 변해버린 수많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 이 말이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은 수많은 군중들에게서 참된 예언자로 인정받고 칭송받는 지금이 바로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명예나 인기에 집착하지 않고 미련없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 ‘신원’을,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 그 ‘소명’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구원자가 아니라 그분이 오시기 전에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준비시키는 ‘선구자’임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할 참된 가르침은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 자기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실 하느님의 뜻임을, 자신은 그저 하느님의 ‘목소리’로써 그분의 뜻을 선포해야 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랬기에 자기 앞에 성큼 다가온 죽음 앞에서 담담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핵심 제자들을 예수님께 가라고 등 떠밀 수 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 사람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요한이 그럴진데, 그 수준에 한참 못미치는, 여러모로 부족하고 약한 우리는 왜 자꾸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망각한 채 나 자신을, 내 뜻을 내세우려 들까요? 피리를 부는 것은 피리 자신이 아님을, 글씨를 쓰는 것은 붓 자체가 아님을 왜 인정하지 못하고, 내 힘과 능력으로 내가 원하는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릴까요? 데레사 성녀가 그랬듯 우리는 그저 주님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몽당연필’에 불과할 뿐인데 말입니다.
이제부터는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탐욕을 채우는 데에서 기쁨을 찾지 말고,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데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나를 드러내고 내 뜻을 내세우는 데에서 보람을 찾지 말고, 주님의 뒤를 따르고 그분 뜻을 삶으로 드러내는 데에서 보람을 찾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우리의 참된 신원은 세속적인 조건이나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소명은 내 뜻을 이루는 성취나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순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분수’를 아는 겸손한 이들을, 자기 ‘자리’를 지키는 성실한 이들을 당신 나라에서 큰 영광과 기쁨을 누릴 큰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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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김건태 신부님_예언자로 사는 한 해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여러 예언자를 만나며, 그 가운데는 예언서의 저자로 소개되는 예언자도 적지 않습니다. 흔히들 예언자(豫言者)하면, ‘미리 예(豫)’자를 쓰는 관계로, 사전적 의미와 마찬가지로, ‘앞일을 예언하는 사람’ 정도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자들은 전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대신하여 말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들이 미래를 내다볼 때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과거를 돌이켜 보는 가운데, 현재에 초점을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현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하느님 백성다운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예언자들은 이들이 제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개입하여 과거의 삶, 특별히 광야에서의 순수했던 삶으로 돌아가기를 촉구하거나, 계속 고집한다면 앞날에 하느님의 응벌이 들이닥치리라 예고했습니다. 결국 예언자들은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느님에 의해 파견되어 말씀을 전하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던 사람들입니다.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백성다운 삶을 살도록 파견된 사람들이니, 이들의 핵심 주제는 당연히 회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예언자가 참된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 가름하는 척도 가운데 으뜸은 그래서 회개입니다.
주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 오늘 복음에서 보면 당대의 사람들은 그를 예언자 이상으로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예언자 엘리야가 언급되기 때문이며, 나아가 예언자들이 한마음으로 향했던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까지 보았던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억측을 마다한 채, 자신을 가리켜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응답합니다. 순수의 땅 광야, 정의와 진리의 땅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 사실 세례자 요한은 정의와 진리로 무장하고서 당시의 지배 계급을 벌벌 떨게 했던 사람입니다. 나아가 요한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하는 고백으로 자신의 겸손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합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왕직,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직, (하느님과 세상의 화해를 이루는) 사제직을 사명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또다시 허락해주신 이 새로운 한 해, 의로운 마음과 참된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힘차게 전하며 실천에 옮기는 가운데, 말씀으로 행복하고 건강한 한 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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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믿음의 삶을 /
오늘은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미사다.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지방 카이사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은수 생활을 한 그는 학문과 덕행에서 뛰어났다.
370년 무렵 그곳의 주교가 되어 아리우스파에 맞서 싸웠다.
또 그의 많은 저서 가운데 ‘수도 규칙’은 동방 교회에서 오늘날까지도 참고한다.
그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성인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또한 그는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위해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만들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려고 그들을 파문도 하였다.
그는 학식이 깊고 정치력도 있으며 성덕이 뛰어난 사람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신학과 전례 등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인은 379년경 세상을 떠났다.
그레고리오 성인 또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교리와 설교에 탁월하여 신학자로 불렸다.
후에 그는 그곳의 총대주교가 되었지만, 교구 정리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안티오키아와 이집트의 교회가 주교좌 이전에 격렬히 반대하자,
성인은 모든 논쟁의 마무리와 교회 갈등의 평화를 위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그는 저술 활동과 수도 생활에 전념하고자 아리안주스로 가 생애를 그곳서 보냈다.
그는 신학자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해 정통교회를 수호하는데 큰 공적을 남긴 연설문으로,
니케아 신앙 고백을 해설하고 성령 신성 부인론자들을 반박하며 삼위일체 교리를 변호한 것이다.
성인은 390년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나 그 후의 교회사에도
이단이나 율법 주위에 빠져 교리의 편법 운용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당당하게 대응하시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셨다.
특히 예루살렘에 내리는 꾸지람은 물론 그들에게 닥칠 준엄한 심판의 예고는 가히 직설적이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아예 따라 하지 마라.”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그러니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처럼 힘겨웠던 박해 시기나 신앙의 불꽃이 시들어 극단적인 염세주의와 엘리트주의로 분리될 즈음,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들은 신앙의 혜안을 가져,
차분히 교리의 정립을 수도 생활을 통해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도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믿음에서,
말씀을 몸소 실천하는 신앙의 길로 나서야만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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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02.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 오직 하느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을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1월 2일
바리사이들이 보낸 이들의 물음에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가 말한 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외치는 이의 그 소리다.”
그들은 또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그가 답했다.
“나는 물로 준다.
그런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그가 머문 요르단 강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구세주로 추앙받는 걸 거부했다.
그는 주님 길을 곧게 내는 ‘광야에서 울리는 소리’에 불과하단다.
심지어 그분 신발 끈조차 감히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나.
암튼 누구나 인기를 한 몸에 받다보면 스스로 착각할 수도.
그러나 그는 성찰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흔히 샛별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새벽별로 이름을 지어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반대이기도.
그것은 가장 먼저 뜨는 게 아니라 가장 나중까지 남는 것도 되니까.
그 샛별은 그 많은 별이 하나둘 사라지는 그 밤을 끝까지 지키다,
마침내 그 하늘을 붉은 해에게 건네고 스스로 사라진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은 6월 24일이다.
때는 빛으로 어우러진 낮이 짧아지기 시작하는 그 참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긴긴밤 동지에서 낮이 점점 길 때다.
이처럼 요한의 삶도 그의 탄생시기와는 그 의미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그분 오시는 그 길을 앞서 닦고는 자신은 점점 작아졌다.
많은 이가 따랐기에 스스로를 내세울 욕망이 일만도 한데,
끝내 그 모든 영광 뒤로한 채 그분께만 드렸다.
심지어 자신은 누구보다도 가장 낮은 마지막 끝자락에도
미치지 못함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보다 더한 겸손이 어디에 또 있을까?
사실 많은 이가 대체로 자신을 낮춘다.
그렇지만 어설픈 이는 그 반대로 고개를 바짝 치켜세운다.
별 볼품없으면서도 되레 자신만을 알아주기를 겁 없이 바라는 낌새로.
때로는 못 알아준다면서 쾌나 서운해 하는 꼴불견도 드러낸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알이 꽉 찼기에.
하지만 설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숙이고 싶어도 아예 못 숙인다.
알이 덜 찾기에.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일컬어진 세례자 요한에게서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만을 드러내는 이 진리에 이르는 길을 따르자.
그의 그 겸손은 정말 우리를 감동시킨다.
사실 당대의 모든 이는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비록 그 자신은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며
메시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할지언정.
정녕 그는 예수님 앞에서 어떤 태도여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서 단지 그분 오심을 준비하는 이라고만 선언을 했다.
세례를 베푸는 것도 그분을 맞이하는 준비란다.
이렇게 그는 지극히 겸손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분 신발 끈을 감히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진솔한 고백을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메시아는 예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
스스로 자기가 마치 누구인 양 떠벌이는 이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으시고
스스로 겸손함을 통하여 나타나신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를 낮추시어 겸손하신 분으로 다가오시니까.
올 새해를 맞이하여서도 우리 모두도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으로,
오직 하느님 영광만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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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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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457
1월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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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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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김완수 페르펙토(전농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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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매질 당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여명기 우리 가톨릭 교회는 참으로 험난하게 굴곡진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4세기에 이르러 그토록 잔혹하고도 오랜 박해 시대가 끝나게 되는데, 이제야 좀 편안해지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박해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이런저런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 겨우 안정된 교회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은혜롭게도 인간이 역사 속 깊이 현존하시는 주님께서는 위기 중의 위해 그때 그때 적절한 선물을 보내셨는데, 그들이 바로 교회의 중심을 잡아줄 위대한 교부들이요 성인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대 바실리오 주교와 나지안조의 성 그리고리오 주교 학자입니다.
바실리오 성인은(330~379) 신앙이나 인성, 덕행이나 추진력이 얼마나 탁월했던지 그냥 바실리오 성인이라고 하지 않고 대 바실리오라고 칭합니다. 그의 가문은 성덕의 온상이요 학교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두분다 성인이었습니다. 조부는 순교자, 조모 역시 성인이었습니다. 누님 마크리나도 성녀, 동생 그레고리오도 성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성인의 탄생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탈리아 북쪽에 위치한 도시 토리노 같은 경우도 특별합니다. 돈보스코를 중심으로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탄생합니다. 그의 영적 지도자 요셉 카파소 신부, 그의 이웃 요셉 코톨렌고도 성인, 그의 애제자 도미니코 사비오도 성인, 그와 교육 이념을 같이한 마리아 마자렐로도 성녀, 그의 영성에 매료되어 중국까지 선교를 왔던 베르실리아 주교, 까라바리오 신부도 성인... 이렇게 한 명의 성인은 또 다른 성인의 탄생을 견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한국 교회에서 순교 성인 외 증거자 성인의 탄생이 그토록 절실한 것입니다.
탄탄한 가문,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청년 바실리오는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등지에서 깊이 있는 공부를 거듭한 끝에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높은 경지에 도달합니다. 당시 대세 학문이었던 수사학 교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의 강의실은 언제나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실리오의 마음은 광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사막 안으로 들어가 하루 온종일 하느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수도자로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홀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던 은수자들을 모아 수도회를 건립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형제들을 위한 영적 안내서를 집필했습니다. 수도원 부속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작했고 병원을 만들어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그 무렵 바렌스 황제가 아리우스파 이단으로 기울어져 가톨릭교회를 공공연하게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에 크게 분노한 바실리오는 수도원을 잠시 나와 체사레아로 갔습니다. 강력하고 설득력있는 어조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옹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근으로 힘겨워하는 시민들의 구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당시 시민들은 그를 친 아버지처럼, 참된 목자처럼 존경했습니다. 370년 대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바실리오를 후계자로 천거했습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바렌스 황제는 어떻게든 바실리오를 아리우스파로 끌어들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협박을 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재산의 몰수나 매질, 귀양이나 사형, 그중에 하나는 면하기 힘들 것이다.”라고 하며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바실리오 대주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추호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는 수도자이므로 몰수당할 재산도 없습니다. 고행 역시 몸에 밴 것이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매질 당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진정한 고향은 천국뿐이므로 저를 어디로 귀양 보낸다 할지라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사형에 처한다면 즉각 천국에 갈 수 있으므로,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바실리오 대주교의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 앞에 황제도 감탄을 하며 그의 적극적인 후원자요 지지가 됩니다. 벌을 주기보다 그가 관심을 보인 자선 사업에 힘을 실어줍니다. 체사레아 부근의 별장지를 내어주는데, 바실리오 대주교는 그 장소에 병원과 보육원, 양로원을 세워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요람으로 변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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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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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반지를 낀 손가락으로는 달을 가리킬 수 없습니다>
찬미 예수님!
한 해를 마무리하며, 저는 제가 한 일에 너무 제 자신을 드러내려 한 것은 아닌지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매번 그렇습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나도 좀 봐주소서"라고 속삭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이런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뉘우치게 합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지우고 오직 주님만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한 배우의 이야기를 통해 이 겸손의 신비를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헐리우드의 슈퍼스타 멜 깁슨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조명 뒤에 숨겨진 그의 내면은 썩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실 거짓말에 능숙했습니다.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즉 멋진 가면을 쓰고 대중을 속이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는 너무 일찍, 너무 높이 올라갔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성공의 무게는 그를 알코올 중독과 분노 조절 장애라는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 가족들에게 폭언을 퍼부으며, 그는 스스로 쌓아 올린 명성의 탑을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끼워준 '성공'이라는 금반지가 그의 손가락을 조여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연기(거짓)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 3천만 달러(약 400억 원)를 털어 영화 한 편을 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미쳤다고 말렸습니다. "누가 아람어와 라틴어로만 대사하는 잔인한 영화를 보겠어? 당신은 파산할 거야!" 하지만 멜 깁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을 철저히 지웠습니다. 그는 감독으로서 카메라 뒤에 숨었고, 심지어 영화 속에서 딱 한 장면, 예수님의 손바닥에 못을 박는 로마 병사의 손만 직접 연기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나의 죄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스타의 금반지를 빼버리고, 대신 죄인의 망치를 들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죽이고 오직 예수님의 수난만을 드러내려 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영화는 전 세계 수억 명의 영혼을 울렸고, 그 자신도 깊은 회개와 신앙 안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습니다. 지금도 그는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화려한 배우가 아닌 겸손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을 죽이자,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멜 깁슨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온 유다가 그에게 몰려들었고,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착각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요한은 시대의 구세주 행세를 하며 금반지를 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손가락에 화려한 금반지를 끼고 달을 가리키면, 사람들은 달을 보지 않고 금반지만 쳐다봅니다. 요한은 그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손가락에서 모든 영광을 빼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가리키는 투박한 표지판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반면, 자신이 가리켜야 할 소명을 잊고 자기 영광에 취해 망해버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솝 우화의 '젖 짜는 처녀와 우유통'입니다. 처녀가 머리에 우유통을 이고 시장에 갑니다. 그녀는 걷으면서 즐거운 상상에 빠집니다. '이 우유를 팔아 달걀을 사고, 병아리를 까서 닭을 팔아 돼지를 사고, 소를 사야지. 그리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가서 나에게 청혼하는 남자들에게 콧방귀를 뀌어 줄 거야!' 그녀는 상상 속에서 너무 신이 난 나머지 고개를 홱 젖혔고, 머리 위의 우유통은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났습니다. 현재의 소명(우유 운반/주님 증거)보다 미래의 내 영광(드레스/금반지)에 취해 있을 때, 지금 가지고 있는 은총마저 쏟아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작품이 자기 이름을 크게 쓰면 작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일화를 기억하십니까? 젊은 시절, 그는 '피에타' 상을 조각하고 나서 사람들이 작가를 몰라보자 밤에 몰래 들어가 성모님 어깨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자신의 금반지를 끼워 넣은 것이지요. 하지만 나중에 그는 깊이 후회하며 그 이후로는 어떤 작품에도 서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도 어디에도 서명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보잘것없는 내가 내 이름을 자랑하려 했구나."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오직 작품 속의 영성만을 드러내는 진정한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나를 지울 때, 하느님이 드러납니다. 내 손가락의 반지를 뺄 때, 사람들이 비로소 내가 가리키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오늘 하루, 내 말과 행동에서 '나'라는 이름을 지우는 연습을 해봅시다. 내가 사라진 그 자리에, 주님의 영광만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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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우리는 교회의 큰 두 기둥인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를 기념합니다. 혼란스러웠던 시대 속에서 두 성인은 서로의 우정을 바탕으로 교회를 지키고, 삼위일체 신앙을 변함없이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신앙인은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코린토 1서에 대한 해설을 읽었습니다. 코린토 공동체는 여러 질문 속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혼인과 독신에 관한 문제, 우상에게 바친 고기, 전례와 성찬례의 질서, 영적 은사의 사용, 그리고 몸의 부활 문제에 대해 분명한 식별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혼인을 하든 독신을 살든, 중요한 것은 사라질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일임을 선언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고기는 먹을 수 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 그가 보는 앞에서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지식보다 앞서는 것은 형제에 대한 배려임을 가르칩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가 세속의 만찬과 결코 섞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찬은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신비이며, 남녀평등의 원리는 강조하되 무분별한 무질서를 경계합니다. 영적 은사는 개인의 명예나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총임을 설명하며, 그 모든 은사 위에 ‘사랑’이라는 최상의 은총을 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의 부활을 분명히 확인합니다. 썩을 몸이 불멸의 몸으로 변화할 것이며, 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얼마 전 AI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보다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웁니다. AI는 인간의 지식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인간에게서 배웁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예수님의 황금률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농업혁명 시대에도, 산업혁명 시대에도, AI 혁명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계명입니다.” 결국 시대가 변해도 신앙인의 기준은 사랑이며,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새로운 질서를 이야기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력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에게 혁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질서를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보았습니다. 신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식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악의 세력을 따르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식별하기 어려운 안개가 끼게 됩니다.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이 함께 할 때는 식별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것 중에서 가치 있는 것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만 가치가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가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은 식별하기가 쉽습니다. 당연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기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없는 활동은 공허하고, 활동 없는 기도는 관념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2026년에는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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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23)라고 말합니다. 저는 ‘광야’라는 낱말을 보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앞섭니다. 광야에 서면 나 자신의 모든 것이 그대로 다 드러나고, 나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마주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삶의 어떤 조건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그곳은, 내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욕심에 가득 차 있는지를 깨닫게 할 것 같아, 할 수 있는 한 광야보다는 세상이라는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광야는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1,27)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당당히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은수자가 광야에서 주님을 찾았듯이, 우리도 광야에 서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는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자연스럽게 겸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 ‘광야에 선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앞길을 준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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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9-28: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1. 세례자 요한의 증언
오늘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우리에게 전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와 삶을 보고 혹시 그가 메시아가 아닐까, 또는 엘리야나 모세가 약속한 예언자가 아닐까? 물었다. 그러나 요한은 단호하게 “나는 아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사 40,3)라 밝히며, 오히려 이미 와 계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초대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요한 1,27)이라고 말하며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주님을 드러낸다.
2. 참된 겸손과 증언
요한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된다. 우리는 작은 일 하나에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때로는 과장하고 포장하고 싶어 한다. 흔히 말하는 ‘백마병’에 걸려, 마치 모든 영광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듯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빛으로 착각하지 않고, 빛을 드러내는 증인이었다.(요한1,8 참조)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겸손은 하느님을 닮는 길이다. 교만은 하늘에서 떨어지게 하지만, 겸손은 하늘로 들어 올린다.”(De Humilitate, 20)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또한 가르친다.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이다. 내가 증언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드러나는 말씀이다.”(Oratio 37, 13) 이처럼 교부들은 요한의 겸손한 증언을 우리 신앙의 모범으로 보았다.
3. 교부들의 모범과 오늘의 과제
오늘 기념하는 성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역시 요한 세례자처럼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증언한 주교들이었다. 성 바실리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바실리아스’라 불린 구호 단지를 세워,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증거했다. 성 그레고리오는 교회의 일치를 지키고, 삼위일체 신앙을 수호하며, 자신의 말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려 했다. 그들의 겸손과 증언의 삶은 오늘 우리의 삶을 비추는 등불이다.
4. 우리에게 주는 초대
우리의 사명은 요한처럼, 또 교부들처럼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다.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언행과 선택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증언이다. 오늘 우리는 기도하자. “주님, 저희가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처럼 겸손히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의 말과 행실이 저희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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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아니기에>
요한 1,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는 아니기에>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요한 1,20)
나는 빛이 아니기에
빛을 머금어야 하고
빛을 머금을 수 있으니
오롯이 빛을 머금을 따름입니다
나는 길이 아니기에
길을 따라나서야 하고
길을 따라나설 수 있으니
기꺼이 길을 따라나설 따름입니다
나는 믿음이 아니기에
믿음을 보듬어야 하고
믿음을 보듬을 수 있으니
마음껏 믿음을 보듬을 따름입니다
나는 희망이 아니기에
희망으로 물들어야 하고
희망으로 물들일 수 있으니
깨끗이 희망으로 물들일 따름입니다
나는 사랑이 아니기에
사랑에 사로잡혀야 하고
사랑에 사로잡힐 수 있으니
송두리째 사랑에 사로잡힐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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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지금 무엇을 메시아께 바라고 있는가?”>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요한 1,19-28)
1)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메시아로 오신 분이 누구인가?”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면,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것에 반발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져가고 있었고, 실제로 여기저기서 독립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에 독립을 가져다 줄 정치적인 지도자였고, 그들이 생각했던 ‘구원’은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것과 다윗 왕국이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칭 메시아’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그런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 있습니다.(사도 5,36-37)> 당시에 많이 나타났던 ‘자칭 메시아’들은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기득권층 세력들에게는 ‘골칫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최고의회에서는 요한이라는 사람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2)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말한 ‘그리스도, 엘리야, 그 예언자’는 모두 ‘메시아’를 뜻하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그들의 질문들에 대해서 모두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는 말은,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서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의 일을 미리 준비하려고 온 사람’일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메시아처럼 세례를 주는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는, “나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일 뿐이다.”인데, 이 말에는, “메시아께서 주시는 세례는 ‘구원의 세례’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라는 말은, “너희는 지금 모르고 있지만, 메시아께서는 이미 너희 가운데에 와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말은, “나보다 훨씬 더 높으신(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은, “그분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은 자기를 낮춘 말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 그대로 나타낸 말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무턱대고 자기를 낮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3)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이미’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는 상관없이, 예수님 부활 후에 이루어진 사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무렵에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중요했지만, 오늘날에는 사도들의 증언이 더 중요합니다. <아직 안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믿은 신앙인들의 증언이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메시아를 찾고 있는가? 내가 지금 메시아께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8,36)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예수님을 믿어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들 가운데에도, 사이비 종교나 이단 종교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하늘에 속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 것’만 생각할 때 그런 일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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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전하는 이의 태도>
가끔 ‘주객이 전도되었다.’ 는 말을 쓴다. 경중이나 선후가 서로 바뀌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전하는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요한은 서슴지 않고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엘리야인지 묻는다. 이 질문에 역시 “아니다” 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다시 ’예언자‘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 곧 메시아가 계시는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을 한껏 낮추며 곧 다가오실 예수님의 신원을 알린다. 만약 요한이 인기에 영합하여 자신을 내세웠다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고 있었기에 항상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켰다.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요한의 모범은 감동을 준다. 겸손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주님께 대한 갈망과 사랑이 커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 전해야 할 분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뿐이다. 우리가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면서도 내심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모습들을 본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그것으로 만족하여 감사할 수 있길 바란다. 나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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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예전과 달리 현대 교회에서는 청소년 사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하겠다. 오늘의 청소년들은 학교교육과 입시경쟁, 사회생활과 취업난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교회 안에서 신앙을 키우고 친교(Koinonia)를 체험하는 기회가 더욱더 적다.
그러나 청소년들과 직접 만나보면 이들 안에 하느님을 알고 체험하고자 하는 열망이 크고, 또 이를 그 바쁜 생활 가운데 실현하려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톨릭 대학교 성심교정 교목실의 증언에 따르면 매일 천여 명 이상 되는 학생들이 고된 수업 사이의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학교 성당에 와서 기도하고, 정원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눈다고 한다.
내가 동반하는 가톨릭 노동청년회(TOC) 한 팀에서 팀 이름을 정할 때 한 여학생이 ‘아뉴스 데이(Agnus Dei)’로 하자고 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뜻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다.
나는 25년간 이 모임을 동반하지만 이런 종교적 표현을 팀 이름으로 정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몹시 놀랐다. 그런데 다른 팀 이름을 보니 ‘예사모’(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임) ·‘마닮모’(성모 마리아를 닮아가는 모임)· ‘포도나무’ ·‘사람 낚는 어부’ 등이었다.
현재 동반하고 있는 ‘포도나무’팀은 간호 대학생들의 모임이다. 한 번은 이들에게 ‘어째서 백의의 천사들은 이렇게 아름다운가?’를 넌지시 물었더니, 그들은 정색을 하며 “아마도 우리가 고통 받는 환자들에 대한 동정심, 연민의 정이 없으면 이 직업을 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렇다! 본래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특별히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살게 되어 있다. 이 ‘자기 증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존재가 되기 위한 관건인 것이다.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 자기만의 이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심인 죄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죄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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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주영길 토마스 신부님]
<어린양>
어릴 적 아무 뜻도 모르고 부르던 성체성가가 생각난다. ‘천주의 고양이며 인자하신 예수`….’
그때는 막연히 하느님도 애완용으로 고양이를 키우시는가 생각했다. 참으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발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양(羔羊)은 ‘어린양’을 뜻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고쳐 부르니 아이들이 혼동할 일이 없으리라.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을 전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한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혜안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1,33)
여기서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을 앞두고 잡아먹었던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탈출 12,5 참조)을 뜻한다. 그때 어린양의 피는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열 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아들을 구해 냈다. 그리고 어린양의 고기는 광야를 여행할 이스라엘 사람들의 양식거리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파스카 어린양을 잡으며 하느님께서 베푸신 크신 은총을 새로이 기념하였다. 이제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을 살리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내다보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영성체 전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을 고백한다. 이는 우리가 받아 모신 하느님의 어린양처럼 우리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는 어린양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는 누구라도 피하고 싶고, 하기 싫은 역할일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자리에서 어린양의 역할을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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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합니다. 백성들은 환호하며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고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러자 놀란 어린 나귀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요. 더구나 지나야 할 길마다 사람들은 옷을 벗어 깔아놓기까지 합니다. 겉옷을 직접 밟은 어린 당나귀는 백성들의 열광에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야, 내가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네, 내가 이렇게 높은 존재였었나?’
나귀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우쭐대며 앞발을 들고 ‘히히잉’ 소리로 환대에 응답합니다. 안타깝지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자기를 향한 것으로 착각한 어린 당나귀의 뻐기며 으스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오로지 하느님과 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데에만 자기를 쏟아 부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낮춤으로써 주님을 높인 인물, 세례자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채 모든 것을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 모습 속에 인간으로서는 보여줄 수 없는 신적인 권위가 느껴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게 합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1,19)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1,20)
세례자 요한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대답했다고 복음이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요한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요한1,21)
"그러면 그 예언자요?"(요한1,21)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요한1,22)
계속 다그쳐 묻는 사람들을 향해 요한은 그제야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3-27)
자신의 모든 것을 낮추어 오로지 오실 예수님만을 높이고자 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낮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반대로 살아갑니다. 나를 높이기 위하여 이웃을 깎아 내리지요. 나의 잘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을 험담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남을 좋지 않게 평가하여 자기를 돋보이려는 행동들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높아지면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높아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중심을 잃기가 쉽고 평화가 깨지며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에도 수시로 흔들리지요. 사람에게 기대를 두고 살면 쉽게 상처를 받고,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하며,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게 됩니다.
마음의 중심을 바르게 잡고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참 기쁨과 고요 속에 편안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내 중심에 하느님이 자리잡으셔야 합니다.
이는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면 힘들어집니다. 입고 먹고 마시고 꾸미는 세상일에 흔들리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빚어지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은근히 남보다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어느 때는 하느님보다도 나를 더 앞세우기도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만을 높이기 위하여 일생을 낮추며 절제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본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높일 때 나도 높아지는 지혜도 함께 배워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높여드리며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평화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길이 남는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나를 낮추고 하느님과 이웃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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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면서 이혼하겠다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혼의 이유 중에서 무엇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까요? 대부분이 ‘성격 차이’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성격이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다릅니다. 그렇다면 성격 차이라는 것은 자기 성격에 상대방이 맞춰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 성격에만 맞추길 바란다면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차라리 ‘개’를 키우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젊은이 중에는 결혼하지 않고 대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남도, 더 나아가 세상까지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제대로 알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또 세상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넓은 마음을 갖게 하는 시작이 됩니다.
자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함께 사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함을 갖게 되며 더 나아가, 이렇게 부족한 ‘나’를 사랑해 주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회개의 설교를 듣고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에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타인의 기대나 칭송에 취해 있었다면, 그리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원했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고 말하지요. 소리는 뜻을 전달하고 나면 사라지고 맙니다. 이처럼 요한은 자기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고 사라지는 도구임을 보여줍니다. 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주인의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다인 노예에게는 시키지 않는 비천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를 낮추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알고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일인데도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영역에 있는 것인데,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함부로 말합니다.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바치면서, 마치 종 부리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우리,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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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나 자신을 외치는 이인가? 아니면 내 안에서 외치는 이를 드러내는 소리인가?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있는 화살표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보십시오!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자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21.22)
이 질문에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나는 어떤 이인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로 살고 있는 이인가?’ ‘예수님과는 어떤 결속을 맺고 살아가고 있는 이인가?’ 저는 이렇게 대답해 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새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벗이요.’라고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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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주님!
당신을 향하여 있는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사랑,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 당신의 귀염둥이 아들, 당신의 사랑이니, 당신께만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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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겸손한 자기 관상>
저는 지금 관상 수녀원에 와 있기에 겸손과 관상의 관점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고 나누고자 하는데 오늘은 겸손한 자기 관상에 관해서 나누고 내일은 겸손한 하느님 관상에 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관상하면 보통 하느님 관상에 관해서만 얘기하는데 온전한 관상은 하느님도 관상하고 자신과 이웃도 하느님 안에서 관상하는 겁니다.
그리고 온전한 관상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겸손과 성령입니다.
아시다시피 겸손은 자기를 정확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사람은 모름지기 국어와 산수를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국어를 잘해서 자기 주제 파악을 잘해야 하고, 산수를 잘해서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해서 주제를 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자기 주제를 잘 알고 있고, 이에 비해 오늘 독서에서 얘기되는 적 그리스도들은 주제넘게 날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얼마나 자기 주제를 잘 알고 있느냐 하면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자기를 주제 파악하는 정도가 아니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주제 파악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정확히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신앙적인 겸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낮추거나 높이지 않는 것을 뛰어넘어서,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겸손에 관해 구구절절 너절하게 얘기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닐 뿐더러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오늘 독서에서 적 그리스도들은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안에 머물지 않을 뿐더러 자기가 그리스도인 양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착각함으로써 그리스도 밖에 있고,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함으로써 사람들을 속이고 오도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를 신이라고 하며 날뛰는 자들이 있어 우매한 백성을 속이고 오도합니다.
오도(誤導)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길을 잘못 인도한다는 말인데 하느님께 가 하느님 안에 머물도록 하지 않고 자기에게 와 자기 밑에 있으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해야 할 뿐 아니라 우매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라고 오늘 서간이 세 번이나 얘기하듯 우리는 적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말고 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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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나는 누구인가?>
오늘 복음(요한1,19-28)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유다인들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습니다. 이 물음에 요한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분명한 신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3.26-27)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신원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이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이제와 영원한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 분, 땀 흘리신 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삽시다! 그리스도인 척하지 말고, 그리스도인답게 삽시다!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사람들은, 생각과 말과 행위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충실하게 따라가지 못했다고 넘어져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주님께 부족함을 내어 맡기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제인 척하지 말고 사제답게 삽시다! 수도자인 척하지 말고 수도자답게 삽시다! 그리스도인 척하지 말고 그리스도인답게 삽시다!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1요한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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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리스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바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일상과 생활 속에
구현되어야 할
우리의 신앙입니다.
겸손 이전에
정직입니다.
정직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자리를
정확히 압니다.
진실성은
자기를 부풀리지
않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렇듯 깨달음은
새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가로막지 않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앞에
설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계시는
사람을 통해
말해지지만
결코 사람에
머물지 않는
은총을 보여줍니다.
비움으로써
참된 중심을
드러내는 것이
참된 열림의
길입니다.
그는 오실 분을
준비할 뿐,
그분의 자리를
결코 차지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아니다”라고
고백함으로
참된 길을 밝힙니다.
메시아 역할을
붙잡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중심에 두는
어리석은 집착에서
우리는 벗어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본다는 것은
삶의 중심이
나에게서
그분으로
옮겨지는
체험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시는 사랑을
알아보는 기쁜
하루 되십시오.
그리스도를
알아본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마음을 여는
우리 생활의
참된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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