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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이지 않는 자유.. 일본의 와비 사비와 하이쿠
타네다 산토카(種田山頭火)의 일생과 그의 하이쿠의 개념.
alwa****2014.05.21. 22:20조회 830
(타네다 산토카의 사진)
승려인 산토카 타네다(種田山頭火1882-1940)의 삶과 시에 관한 일본 국내외의 엄청난 관심이 존재한다. 일본에선 다른 현대 일본 시인들보다 책으로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해외에선 그의 작품들은 폭넓게 중국어로 포함하여 외국어로 번역되고 출판 되었다. 어떻게 이 특이하고 애주가인 하이쿠 시인이 높게 평가되었을까? 문학적 관점에서, 산토카의 시들은 꾸밈없는 스타일로 칭찬받았었다, 그는 “새로운 하이쿠 운동(new haiku movement)의 대표자였다.
하지만 이것은 시인들과 학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 의한 인기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의 작품의 문학적 가치가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특별하고 순박한 불교의 본질이다. 소박함(わび 侘 wabi). 고독(さび 寂 sabi), 그리고 덧없음( むじょう 無常 mujo)은 그의 하이쿠로 인해 현대적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다수 시인에게 시는 즐기기 위한 취미에 불과했다. “가난,” “고독” “외로움” 기타 등등은 단지 문학적 전통에 불과 했다. 하지만, 산토카의 경우 주제들은 절대적인 사실이었다. 더 가난하거나, 더 외롭거나, 더 고통스러운 이가 없었다. 거기엔 시와 시인, 삶과 감정의 이분법적 구분이 없었다.
산토카의 삶은 3가지 방식의 불교(선종)의 개념으로 표현된다.
첫 번째로 그의 삶과 시가 하나가 된 이후로, 그는 “이중성 없음(no duplicity)”을 표현했다. 어떠한 예술이나 규칙에서도 사유(思惟)와 말, 그리고 행동을 일체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두 번째로 산토카는 다른 이들을 흉내 내지 않았다. 일본에서 방랑하는 시인(혹은 승려)은 제일로 쓸모없고 비정상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의 추구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것은 물질적 소유, 정신적 개념, 사회적인 기준 같은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운 삶이다.
세 번째로 산토카의 단순한 표현이다.
그의 시에서는 어떠한 추가적인 꾸밈이나 가식이나 인공적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명확하게 우리는 그의 하이쿠를 보자마자 분석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
분명하고 직접적인 산토카의 하이쿠는 순수한 경험과 지적인 분내(粉)로부터의 자유로움 같은 불교적 방식의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지금은 하이쿠와 불교를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부한다.
20세기의 한 사람인 산토카는 생각하는 것과 성격적 부분에서 우리와 가깝다.
전 세계인들은 산토카의 인간의 깊은 마음속으로 향했던 여행(journey into the depths of the human heart)에 감사할 것이다.
타네다 산토카의 일생
산토카(본명 쇼이치)타네다는 1882년 12월 3일에 야마구치현 호푸라는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크고 인상적인 풍채를 지닌 그의 아버지는 지주였으며 지방 정치에서 활동 했으나 그다지 그의 사업과 사생활에서 좋지 못했다. 산토카는 둘째로 태어난 첫 아들이었다. 산토카의 출생 후 몇 년 사이에 한명의 여동생과 두 명의 남동생이 태어났다. 산토카는 공부를 썩 잘했고 초등학교 시절에 문학에 관심을 표했었다. 불행히도 그의 아버지는 한 번에 여러 명의 정부(情婦)를 둔 굉장한 바람둥이였다. 여자들과 놀지 않을 때는 정치 운동을 했기 때문에 집에 거의 있지 않았었다. 아버지가 산으로 그의 정부 중 한명과 소풍을 갔을 때, 어머니는 가문의 소유지에 있는 한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져서 자살을 해버렸다.
산토카의 어머니는 33살이었고 산토카는 겨우 11살이었다. 그 후에 그는 어머니였던 생기 없는 시체가 우물에 떠있는 것을 보았던 충격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사건 이후에 그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1896년에 산토카는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전통적 스타일의 하이쿠를 쓰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동경의 와세다 대학의 문과에 진학했다.
산토카는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고, 신경쇠약에 의한 고통을 호소했으며, 그의 대학교 1학년 생활을 망쳐버렸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에게 심각한 재정적 문제가 생겨서 더 이상 산토카의 등록금을 내줄 형편이 되지 못하게 되자, 산토카는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산토카는 1904년 7월에 귀향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문의 사유지를 팔아치워서 사케 양조장을 구매하였고, 1907년에 양조장을 산토카와 함께 열었다. 2년 후에, 아내가 산토카의 음주량을 줄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강요 아래에, 이웃 마을에서 온 아름다운 사키노 사토와 중매결혼을 하여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은 처음부터 음을이 끊이지 않았고, 산토카는 결혼생활에 적응하려 하지 않았다. 다음 해에 부부의 독자인 켄이 태어났다. 1911년에 산토카는 오기와라 세이센스이(荻原井泉水, 1884-1976)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기와라 세이센스이는 지유리쯔(자유율 自由律)파 창시자였다.
하이쿠에 활기를 되찾아주고 변혁을 일으킨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의 죽음 이후로, 하이쿠에는 두 가지의 주요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전통적인 5-7-5 음절의 방식을 사용하지만 현대적 주제들을 쓰고, 다른 하나는 신케이코(신경향 新傾向)라 불리는 기존의 음절 패턴과 의무적인 키고(季語 계어)의 사용을 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이다.
1911년 4월, 세이센스이는 소은(層雲 층운)라는 잡지를 출판했고, 그 잡지로 시인은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 그대로 그의 언어로 어떤 고정된 형식과 상관없이 표현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이론을 자세히 설명했다. 세이센스이는 하이쿠에서는 시인의 독특한 상징주의가 제일 중요하고 시인이 내면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이센스이는 그의 새로운 하이쿠 이론을 위해 지유(자유 自由), 지코(自己 자기), 그리고 시젠(自然 자연)을 강조 했다. 세이센스이는 유럽 문학에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나 괴테와 쉴러에게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필연적으로 일본적 감성과 서양의 표현주의의 조합이었다.
이 하이쿠 이론은 단순한 문학이나 예술이기보다는 한 방식이었다. 이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론은 많은 전통주의자들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산토카에게는 흥미를 주었다.
1913년 초에 산토카는 자유율 파와 소은 잡지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1913년에 산토카의 7개의 시가 실렸다. 다음해에 산토카는 세이센스이를 처음으로 시 모임에서 만났다. 산토카는 그 후로 몇 년간 시와 수필을 활동적으로 썼다. 1916년에는 소은의 편집자 중 한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사케 양조장은 재앙이 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계속 여자와 놀아났고, 아들인 산토카는 계속해서 양조장이 가끔 내는 이익들을 모조리 술에 써버렸다. 계속해서 가문의 재산은 양조장을 지원하기 위해 팔려나갔다.
1915년에는 모든 재고 술이 부패해 망가지고 다음해 4월에 양조장은 부도가 났다.
타네다 집안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아버지는 어느 날 밤에 그의 정부 중 한명과 야반도주를 했고, 산토카와 가족들은 산토카 친구 중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가 사는 쿠마모토시로 이사를 갔다.
산토카는 원래 중고서점을 열 계획을 짰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아내가 사진틀을 판매하는 가게를 인수하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산토카는 계속해서 폭음을 했고 결혼 생활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1918년 그의 남동생인 지로가 자살했다. 이것은 매우 예민한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또 다른 충격이었다.
산토카와 아내는 별거를 했고, 1919년 그는 일자리를 위하 동경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의 첫 번째 직업은 한 시멘트 회사의 시간제 일자리였다. 그 다음 히토쓰바시 도서관의 임시 직원으로 일했다. 산토카와 아내는 1920년 법적으로 이혼을 했다.
사키노는 계속해서 가게를 운영했고 아들을 키웠다. 다음해에는 산토카의 아버지가 죽었다.
산토카는 도서관 정규직을 제의 받았었고, 받아드렸다. 불행히도, 그는 이 일이 양조장 일보다 좋은 점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또 다시 신경쇠약에 고통 받았으며 1년 반 뒤에는 퇴사하라고 압력을 받았다. 1923년 9월 1일에 관동 대지진이 동경을 강타했고 많은 부분을 파괴시켜버렸다. 산토카는 멀쩡했지만 그의 하숙집은 잔해로 변해버렸기에 전 아내의 가게를 같이 도와줄 수 있는 쿠마모토시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1924년 12월 말쯤에 산토카는 취한 채로 자살을 시도하려고 차가 다니는 도로 위에 섰었다.
가까스로 차는 멈춰 섰고 산토카는 자해를 못하게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그는 인근의 훈지라 불리는 불교 사찰에 맡겨졌다. 그곳의 주지 스님은 지안 모지츠키였는데 산토카한테 질문을 하거나 질책하지도 않았다. 그는 심지어 산토카의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이 스님은 산토카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그에게 사찰에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산토카는 불교에 오랜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유명한 불교 스님인 사와키 코도(澤木興道 1880-1965)의 강연에 여러 번 참석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동경의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불교에 관한 책들을 읽는데 사용했었다.
지안스님의 가르침 아래에 산토카는 좌선을 하기 시작했고, 경전(수트라)를 암송했으며 사무(社務)를 했다. 1925년, 42세의 나이에 산토카는 “자신의 마음을 경작하는 이”라는 뜻의 코호라는 스님이 되었다. (타네다는 種田 종전, 밭에 씨를 뿌린다는 뜻이다.)
산토카의 전 아내인 사키노는 감리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산토카가 사찰에 들어간 이후 열성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았으며, 산토카는 남은 인생동안 계속 그녀와 만나고 그녀의 가게도 가끔 도와주기도 했다.
산토카가 스님이 된 후에, 지안스님은 쿠마모토시 변두리에 위치한 미토리 카논도(Mitori Kannon-do)라는 작은 사찰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산토카는 이웃들에게 타쿠하쯔(托鉢 탁발)를 해서 의식주를 해결했으며, 가끔 인근의 친구들을 보러 여행을 가기도 했다. 1년간 사찰에서 혼자 산 뒤에 산토카는 순례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첫 목표는 소토(曹洞宗 조동종)의 최고 사원인 에이헤이지(永平寺 영평사)라는 곳이었다. 그러나 곧 그는 그가 42살로 대부분 자기 가문의 사찰을 물려받기 위해서 시간을 쏟고 있는 20살 초반의 수도승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산천초목들이 산토카의 사찰임이 밝혀졌다.
1926년 4월 그는 그의 첫 번째 순례를 시작했다.
그의 소유는 검은 법복, 발우, 그리고 여행하는데 햇빛과 비를 막아줄 삿갓뿐이었다.
4년 동안 산토카는 계속해서 남부 혼슈지방, 규슈지방, 시코쿠지방을 여행했다. 그는 셀 수 없게 많은 사찰에서 기도를 했고, 명승지도 방문했으며, 친구들도 만나기도 했고 시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5년에 가까운 의 공백 후에 그의 시들은 다시 소은 잡지에 보이기 시작했다. 1930년 12월 그는 쿠마모토시로 돌아왔고 셋방에서 하숙했다.
출판업계에서 일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삼바쿠‘라고 그의 하숙집의 이름을 따서 불리는 조그마한 잡지를 3호까지 발행했다. 6개월 후에 그는 공공장소의 음주로 인해 감금당했었다.
(이 제도는 일본인들이 폭음에 매우 관대했기에 필요 했다.)
그는 아내의 가게에서 몇 달 머물다가, 또 다른 여행을 시작했다. 1932년 한 친구가 야마구치현 산기슭에 있는 오고리 마을에 있는 작은 오두막을 그를 위해서 주었다.
그는 그것은 고츄안이라고 불렀는데 법화경의 구절을 딴 것이다.(이 구절은 구원자인 관세음보살의 열성 신도의 능력에 관한 것이다.) 오두막은 낡았지만 넓었고 세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우물과 다양한 과일 나무가 있는 땅이 붙어있었다. 산토카는 이 문구를 적어놓았다.
모든 방문자에게
-만약 당신이 좋아하는 새콤달콤한 음식을 가져와 낙담하거나 무거운 분위기 없이 봄바람과 가을의 시냇물과 거리낌 없이 춤추고 노래한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 해에 처음으로 그는 그의 하치 노 코(はちのこ 발우)이라 불리는 하이쿠 시집을 조그만 출판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출판 했다.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산토카는 여행과 고츄안에서의 시간으로 보냈다. 그는 히로시마, 고베, 교토, 나고야를 여행했다. 1934년에 그는 매우 아팠고 그의 은둔처인 고츄안으로 돌아왔다. 질병과 가난은 그가 자살을 결심하게 했지만, 그가 병이 나은 후에는 이 생각을 버렸다. 그 후에 8개월 동안의 혼슈의 북쪽을 오쿠노호소미치(奧の細道)에서 나온 대로 매우 유명한 하이쿠 시인인 바쇼(松尾宗房 1644-94)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삼바쿠를 계속 발행했고, 게다가 추가적으로 그의 4가지 시집을 출판했다. 소모쿠토(Somokuto, 草木塔 초목탑), 산교 쉬교(Sangyo suigyo, 山行水行 산행수행, 1935), 자쏘 푸케이 (Zasso pukei, 雑草風景 잡초풍경 1936), 카키 노 하(Persimmon leaves, 柿の葉 감잎 1938)등이다.
산토카가 고츄안에 머무를 때에 그는 자주 지방 구석구석을 돌아 다녔는데, 가끔 고츄안에서도 시모임이 열렸었다. 그러나 1938년 고츄안은 말 그대로 폭삭 무너져버렸고, 산토카는 13킬로쯤 멀리 있는 야마구치시 유다 온천 지역에 있는 작은 임시가옥으로 이사 갔다. 몇 개월간 머물다가, 그는 여행을 다시 다녔다. 여기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가도 계속 여행을 했다. 1939년 12월, 그는 오랫동안 하이쿠와 관련 되었던 에히메현 마쓰야마에 있는 이쇼안(Isso-an, 一草庵 일초암)이란 정착했다. 1940년에는 소쿠모토 시집에 그의 예전 작품들인 코칸(고독)이라 이름 붙여진 6번째 시집을 포함해서 출판 되었다. 그의 7번째이자 마지막 시집인 쿠라수(Kurasu, からす 까마귀)가 1940년 소모쿠토 시집 출간 후 몇 달 뒤에 나왔다. 1940년 10월 초에 이쇼안에서 시모임이 열리기로 했는데, 모인 이들은 산토카가 매우 취해 있던 것을 발견했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참가자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귀가하기 전에 산토카에게 잠시 들렸더니 그는 조용히 자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했던 친구의 아내 중 한명이 다음 날 아침에 산토카를 확인하러 갔지만 그녀는 산토카가 1940년 10월 11일. 이른 아침에 그가 그의 마지막 여행을 떠난 것을 보았다.
방랑하던 탁발승
산토카는 2만8천 마일(45,061.632km)이상을 탁발승으로 여행하면서 걸었다고 말했었다.
그의 여행초기에, 특히 시코쿠에 있는 코보 다이시(弘法大師 空海, 774~835)와 연관된 88개의 사찰을 방문 한 것은 어머니의 영면을 위한 기도를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의 여행 중 많은 여행들이 아무런 목적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까?
바람 흐르는 대로…….
속세를 버리고 여기 저기 유랑하고,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고, 정착했다가 은둔하고,
조용히 살다 가는 것은 특히나 일본인들에게 높게 평가 받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시인들, 종교인들, 예술가들 중 많은 이들이 방랑했었다. 예를 들어 사이고(西行法師), 잇펜 쇼닌(一遍上人), 바쇼(松尾宗房), 셋슈(雪舟), 엔큐(円空)이 있다. 모든 것을 저버리고 떠나는 삶은 안정적이고 영원해 보였다. 삶은 필수적인 요소만 가진 것으로 축소되었고, 지금 현재를 중시하고 와 속세의 규제와 제한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산토카가 정착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그는 몇 달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 했다.
그는 “사람들과의 많은 접촉들이 갈등과 증오, 집착을 가져온다. 내 자신 속의 갈등과 증오를 없애기 위해 나는 걸어야만 한다.” 라고 적었다.
진흙탕물이 흐르는 것처럼
결국엔 맑아지리…….
산과 바다를 나비들과 잠자리를 벗삼아 걷는 것과 그가 걸음걸이에 리듬을 지닌 건 그가 더욱 하이쿠를 쓰기 쉽게 해주었다. -호흡 하나, 걸음 하나 , 시구 하나.
다른 한편으로, 여행은 우리의 진정한 안식처를 계속해서 찾는 것이었다,
푸루사또(ふるさと 고향)를 산토카는 자주 그의 시에서 말하곤 했다.
산토카는 자유를 찾아 다녔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안하는 것.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다.”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비극 속에 있었고, 정부는 모든 신민들의 복종을 요구했다. 산토카는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방랑함으로 소극적으로 반항한 것이다. 한번은 산토카가 그의 시인 친구 중 한명에게 알리지 않고 갔었을 때 한 기자가 친구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기자는 산토카에게 말하길 “만약 모두가 당신같이 산다면 사회에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산토카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확실히 사회의 혹같은 존재입니다. 얼굴에 있는 검고 큰 혹은 매우 흉측스럽지만, 작은 혹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그들의 작은 흠집에 애정을 가지죠.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랍니다.” 바쇼와 유사하게, 산토카는 “당신이 여행을 한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인간과 시 그리고 자연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산토카는 바쇼보다 더 심했었다. 완전히 그는 그 자신을 스스로 고독(さび 寂 sabi), 그리고 덧없음(無常 むじょう mujo)에 내던졌고, 산토카는 혼자 여행하는 탁발승이었으며, 자신을 구름 따라 물 따라 흘러가게 했다. 산토카는 보통 매일 3시간 정도 탁발을 했었다. 집 앞에서 경전을 읽지 못하도록 제재당하거나, 더 많은 때에 그는 쫓기거나 말 그대로-어떨 때는 육체적으로- 모욕당했다.
보통 그는 하루에 15가구에서 20가구들을 방문 했는데 그 숫자로는 하루를 충족하게 보낼 수 없었다. (우울함이 그를 30가구 이상 방문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하루 동안의 양식과 방값을 위한 쌀과 돈을 받을 때면, 그는 보통 탁발을 멈추고 그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싼 여관을 찾아갔다. 그는 보통 내일을 쓰기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한 탁발을 하지 않았다. “여윳돈이 있다면 어떻게 거지인가?”라고 말했다.
산토카는 그의 발우에 양과 질을 떠나 무엇이 들어오든 감사하게 받았다.
“감사함과 존경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하는 탁발로 나는 무한한 삶과 빛의 세계를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의 신전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 탁발은 서로 간의 감사와 적선이며, 사회의 기본이다.”
산토카의 탁발은 에치고의 유명한 탁발승이자 시인인 료칸(1758-1831)과는 조금 달랐다. 료칸은 자주 그의 발우를 길 주변에 놓고 마을 아이들과 공놀이를 했으며, 게이샤들과 구슬치기를 하기도하고 꽃을 따기도 했다. 누가 료칸과 산토카를 대조하는 말을 하자, 그는 대답하길 “나의 열정은 그런 짓을 하기에는 너무 깊습니다. 만약 내게 발우가 없다면,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 제 발우를 깜빡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산토카가 그의 오랜 탁발 여행에서 무능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가 아플 때는 어떻게 나을 수 있었을까? 한번은 그가 높은 열에 시달릴 때에, 그는 탁발을 멈추고 길가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한 늙은 비구니가 갑자기 나타나 그에게 말하길 “네가 만약 나를 위해 수트라를 암송해준다면, 내가 너에게 뭔가를 주마.”
라고 했다. 산토카는 비틀거리는 발로 일어나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가 완전히 수트라의 암송에 열중하자, 그는 늙은 비구니를 잊어버렸고, 그의 아픔을 잊어버렸고, 비구니가 무언가 준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40분 후에 암송이 끝나자, 그는 완벽히 나았었다.
또 몸서리치게 추운 날에, 그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사케를 계속 몸을 데우려고 먹었고 그건 파괴적인 질병이 돼 버렸다. 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는 들것에 실려서 병원으로 이송 되었고, 병원에서는 쓴 약과 금주를 명령했다. 산토카는 그 명령을 신경도 쓰지 않았고, 병원에서 탈출하여 가장 가까운 가게에 달려가서 두 컵의 사케랑 유도푸(Yudofu)를 마시고 먹더니 완전히 회복되었다.
여행에서 산토카는 새벽 4:30시에 일어나 씻고 아침 근행(勤行)을 하고 소박한 아침상을 먹고 탁발 여행길에 올랐다. 그가 충분한 양을 적선 받으면, 그의 기분에 따라 여관으로 돌아가거나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장소가 좋으면 한 달 정도 머무르기도 했다.
그에게 좋은 장소란 밝고 명랑한 인물들을 찾을 수 잇거나 음식이나 여관비가 싼 곳이었다.
산토카는 보통 탁발해서 35~50센을 받았는데 여관에서 방을 빌리려면 25~40 센을 내야 했다.(여관은 보통 간단한 음식들을 제공했다.) 남은 여윳돈은 사케, 담배, 친구에게 보낼 우편 값으로 사용되었다. 자주 그는 그의 하찮고 빈약한 것들도 다른 거지들과 공유를 했다. 산토카는 그가 좋아하는 한 장소를 이렇게 묘사했다. “여기서 음식은 매우 싸서 이 늙은 부랑자(산토카)의 구원이다. 날 생선은 한 에 5센이고 튀김은 5센, 유도푸는 2센이다. 나 같은 주정뱅이도 30센이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는 그의 가장 큰 행복을 “방 하나, 사람 하나, 전구 하나, 책상 하나, 욕조 하나, 사케 한잔.”이라고 묘사 했다.
매일 저녁 그는 그의 여행일지에 머물렀던 여관이름, 그가 본 것들, 탁발해서 받은 돈, 그 날 그의 경험들, 그가 쓴 하이쿠를 적었다. 그것들은 모여서 그의 상(像)이 되었다.
그의 여행일지는 그의 자상화였다. 그의 여행에서 그는 “일지에 어떤 것을 느끼고 그 사물 자체와 마음이 변하는 것을 표현했다.”
그는 그의 삶을 그의 하이쿠와 그의 친근한 생각들과 스스로 갈등하는 여행 일기에 쏟아 부었다. 가끔 그는 그의 일지에 너무 집착했었는데, 그렇게 되면 그는 일지를 던져버리거나 불태워버렸다.(그래서 그는 고츄안을 떠나기에 앞서서 그의 몇 가지 물건들을 불태워버렸다.)
그의 마지막 일지에서 우리는 그의 인생을 스스로 총합해 평가한 두 가지를 찾을 수 있다.
“이 길은 내가 반드시 가야하는 길. 이 길 외에는 내가 걸을 수 있는 길이 없다.
이 길은 기쁨과 고통을 둘 다 향유한다. 확실히 아직까진 잘못 되진 않았다. 이 길은 매우 좁고 험하다. 하지만 또한 순백의 순수함이고 놀랍고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찼다. 이것은 춥거나 죽어버린 삶이 아니다.
“나는 다른 탁발승과 다를 것이 없다. 당신은 나를 평생을 방랑한, 마치 부초마냥 이리저리 떠내려간 멍청한 방랑자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말로 설명할 수 없다. 한심하기도 하지만, 나는 궁핍하고 조용한 삶에서 행복을 찾았다.
물은 흐르고, 구름은 움직인다. 절대 멈추거나 정착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낙엽은 떨어진다. 물고기가 수영하거나 새가 나는 것처럼, 나는 걷고, 걷는다. 계속, 계속. “
산토카가 죽은 전 날에 그는 친구를 방문해서 그에게 말했다. “내일 열리는 시모임이 끝난 후에 하는 여행을 떠날 거야. 나는 마지막으로 스스로 나를 자연에 던져버리고 싶네. 나는 오래 살 수 없어, 나는 들판에서 조용히 죽어가는 참새나 야생 코끼리가 되고 싶네.”
사케, 불교 그리고 하이쿠
내가 즐겁지 않았던 나날들:
내가 걷지 않았던 날들
내가 사케를 마시지 않았던 날들
내가 하이쿠를 쓰지 못했던 날들
사케, 불교 그리고 하이쿠는 산토카의 인생에서 3가지 주요 요소를 보여준다. 이것들은 대개같이 표현되었고, 서로 교체해서 쓸 수 있었고, 따로 구분가 되지 않았다.
산토카의 불교는 좌선이나 화두를 사용하는 간화선도 아니었다. 산토카의 불교는 “걷는 불교.”였다. 산토카는 좌선하거나 자연 산속에 있는 사찰들을 오랫동안 순례해서 깨달음을 얻기보다 계속해서 걸었던 늙은 중국의 수도승과 매우 닮았다.
이 수도승들은 고독한 인물들이었고, 어떠한 불교 교육기관이나 스승을 찾지 않았다.
걷는 것은 그들의 좌선이었다.
분노 없이, 말이 없게, 욕심 없게…….
천천히 걷고 꾸준히 걷자!
동시에 탁발은 자신의 욕심을 죽이는 훈련이었다.
가장 가난한 이의 가난을 꿰뚫어 너 스스로를 가장 어리석은 어리석음으로 내던져라.
너와 함께 태어난 자연을 이용하는 이들을 따라 하기보다는
그의 여행에서 산토카는 그와 다른 이들의 생각에 연연하지 않고 그의 여행길에 오는 모든 것들을 받아드렸다. 진실과 거짓, 좋고 나쁨, 삶과 죽음. 이것은 쉽지 않다. “물질에 집착하는 것은 영적으로 나를 바람과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내가 떨쳐버리지 못하는 마음의 앙금들,
그래서 앞뒤가 무겁구나.
지안은 소토(曹洞宗 조동종)의 승려였고 이 종파는 좌선과 세부적인 것들에 대한 세심한 집중을 강조했지만, 그는 산토카의 성격을 이해했으며 산토카를 공식적인 방법이나 연습으로 지도하지 않았다. 그는 산토카에게 무몬칸(無門関 무문관) 한 질을 여행길에 공부하라고 주었다. 공부는 산토카가 그에게 많은 불교에 관한 질문을 한 많은 이(그가 아팠을 때 그가 경전을 암송하게 만든 비구니를 포함하여)들을 만나면서 계속 되었다.
“목적지가 어디지? “ 같이 여행길에 오른 여행자가 말했다.
“네 발아래에 쭉 뻗어있지. 너는 지금 거기에 서있어.” 산토카가 대답했다.
“마음(내면)은 어디에 있는 거지?” 여행자가 말했다.
“매일 마음(내면)은 행위의 목적이지.” 산토카가 말했다. “차를 제공해줄 때, 마실 때; 밥을 받고 먹을 때. 너의 부모를 존경하고 자식들을 보살필 때. 마음은 안에도 바깥에도 존재하지 않아. “
산토카는 다음의 목록들을 만들었는데 “내 종교”라고 이름 붙여도 될 것이다.
나의 세 가지 규칙
어떤 것도 낭비하지 말라.
화내지 말라.
불평하지 말라.
나의 세 가지 맹세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지 말라.
과거를 후회하지 말라.
누구도 질책하지 말라.
나의 세 가지 기쁨
공부.
명상.
하이쿠.
한 전통적인 불교의 공부 방식으로 산토카는 어떠한 양(amount)에도 만족하는 것(사케를 제외하고는)을 조심해 했으며,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았다. 산토카 시집의 편집자이자 전기 작가이고 친한 친구인 수미타 오야마에 의해 잘 알려진 이 원칙을 가진 산토카의 삶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오야마가 소은에서 산토카의 시들을 보자마자 그는 산토카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오야마는 계속 여행길에 있어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오야마가 산토카가 고츄안에 머문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산토카에게 편지를 쓰고 방문을 준비했다. 곧 고츄안에 오야마가 도착하자 산토카는 그에게 “무척 배고프겠군, 자 여기 있네. 자네를 위해 점심을 준비했네.”라고 말했다. 산토카는 그에게 고추를 넣어 양념한 죽을 주었다. 산토카는 오야마에게 먹으라고 했다. 오야마가 산토카에게 같이 먹자고 하자 산토카는 “한 밖에 없네.”라고 했다. 요야마가 다 먹고 난 후에, 산토카는 남은 것들을 먹어 치웠다. 그리고서 물동이에 있는 물로 을 씻고는 입구 쪽에 뿌렸다. 그리고서 정원에 가서 식물들에게 물을 주었다. “양파들아! 시금치들아! 너희들이 영양 있는 것들을 먹은 지 오래되었구나. 자 여기 너희들을 위한 비료가 있단다.”
다른 날에 요야마가 고츄안에서 밤을 지냈었다.
자연스럽게 거기에는 잘 때 덮는 이불이 하나 밖에 없었다.
“자네는 나의 손님이니, 자네가 이불을 쓰게. 나는 밤을 세겠네.”
라고 산토카가 고집을 부렸었다.
이불은 너무 작아서 겨우 어린이들이 입을 만한 헤진 옷조각보다 작았다.
벽과 천장에 뚫린 구멍들을 통해 겨울바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야 마는 계속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산토 카는 그의 법복과 여름 기모노 그리고 여러 옷가지들을 요야마에게 덮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추웠고 마침내 산토카는 그의 오래된 잡지들과 책상 까지 그의 떨고 있는 친구에게 덮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오야마가 일어났을 때 산토카는 여전히 좌선 중이었다.
산토카는 그가 가진 모두 나누곤 했다. 어느 날밤에 산토카가 또 저녁밥 없는 저녁을 준비할 때에 한 큰 개가 그의 집 문으로 다가와 물고 있던 큰 떡을 놓았다. 산토카는 개나 떡이 어디서 왔는지 추측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떡을 집어서 두 개로 쪼개 하나는 개에게 주었다. 개는 받자마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개가 사라지자 고양이가 산토카에게 다가와 떡을 달라는 모양새를 취했다. 산토카는 또 고양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을밤에-
나는 개에게 받았고
고양이에게 주었지.
두 게타(揭頌 게송)이 산토카의 불교를 묘사한다.
봄 바람, 가을 비
꽃은 만발하고 풀들은 시드네.
자성(自性)은 스스로의 멍청함이다.
불자의 나라에서 계속해서 걷는구나.
취기가 내가 돌베개 위에 누운 것처럼 만드는구나.
저 계곡물 흐르는 소리는 절대 멈추지 않겠지.
사케와 함께라면 모든 것은 완벽하게 쓰이는구나.
나도 없고(無我), 부처도 없다!
사케는 산토카의 화두였다. 그는 “사케의 진정한 맛을 이해하는 것은 나에게 사토리(悟り 득도)를 준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술을 마심으로서 완벽히 지우려고 시도했다. 이 공부는 승려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수도원에서 앉아서 몇 시간 좌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아마 돈과 음식 없이 이 마을 저 마을 유랑하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몸과 마음을 앉아서 화두를 풀며 지우는 것은 힘든 공부지만 사케와 함께라면 모든 것은 완벽하다. “내가 사케를 마실 때면 나는 내 마음과 함께 마신다. 나는 스스로 사케 속으로 아랑곳하지 않고 집어 던진다.” 산토카의 알콜 중독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지만 그는 이 문제를 평생에 걸쳐 해결하려 했지만 그의 화두는 절대 풀린 적이 없다. 그의 가까운 아는 몇몇 이들은-산토카의 고귀한 정신을 찬양했던 오야마와 다른 이들과 다르게- 산토카의 생각을 비웃었다. 한 명은 “나에게 그는 나에게 많은 빚을 진 술 주정뱅이이다,”라고 적었다. 여러 번 산토카는 공공음주로 체포되었고 친구들이 보석금을 내주었다. 그러나 폭음과 다른 모든 그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의 깨우침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그의 시에서 깊이와 명확함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약한 자신감을 가져서 이것은 마지막이자 가장 큰 사토리에 대한 장애물이었다.
산토카는 그가 오직 3가지만 할 수 있는 것을 인정했는데 바로 ‘걷기’ ‘사케 마시기‘ ’하이쿠 쓰기‘이었다. 사케와 하이쿠는 거의 정체성에 가까웠다.
몸을 위한 사케, 마음을 위한 하이쿠;
사케는 몸의 하이쿠요
하이쿠는 마음의 사케다.
더욱이 산토카를 위한 하이쿠는 글로 적힌 불교였다-자발성,날카로움,명료함,단순함,직접적임. 전혀 추가적이거나 인공적이거나 거스르는 것이 없었다. 하이쿠는 키아이(기합)을 닮았다. 바쇼는 “시를 쓸 때 감정과 네가 쓰는 것을 분리하지 말라. 시작(詩作)은 즉심에서 나와야한다. 마치 나무꾼이 큰 나무를 순식간에 쓰러트릴 때처럼, 사무라이가 위험한 적을 베러 달려갈 때처럼.”라고 적었었다.
하이쿠가 한 존재의 깊이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왜 미리 구조화된 방식이나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가? 산토카의 하이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기표현이다. “하이쿠는 비명이나 울부짖는 소리나 하품도 아니다. 그것보단 삶의 정수이다. 시에서 우리는 즉흥적으로 인생을 살피는 것이다. 가끔 외치지만 절대 신음하지 하지 않는다. 가끔 눈물을 흘리지만 땀에 젖기도 한다. 모든 순간에 우리는 각각의 경험을 향유하고 맛보고 상황에 의해 가려진 다른 경험을 향해 가야한다.”
“진정한 하이쿠는 시의 영혼이다. 시를 쓸 때 시인의 마음에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은 하이쿠가 아니다. 달이 뜨고, 꽃이 만발하고, 곤충들이 울고, 물이 흐르는 것. 그곳에서 우리가 꽃을 찾거나 달을 생각할 수 없는 곳이란 없다. 그것이 하이쿠의 정수다. 니 시대의 제한을 뛰어 넘어, 목적이나 의미를 잊고, 너와 과거의 규제들을 분리하라 - 그럼 너는 진정한 예술과 종교 그리고 과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위의 본문에서 다른 이들이 하이쿠를 문학이나 예술로 생각할 때 산토카는 하이쿠는 삶 그 자체로 여겼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시에 새겼다. 하이쿠를 쓰는 것은 그의 사마디(三昧)였다.
“나는 맑을 때도 있고 흐릴 때도 있다 하지만 맑으나 흐리나 나는 그 상태에 있는 몸과 마음을 지우고 시를 쓴다. (shinjindatsuraku, 身心脱落)”
그가 죽기 직전 쓴 글에서 “매일 나는 내가 큰 곤궁에 처해있음을 느낀다. 나는 내가 오늘 먹을 수 있을지 없는지 모른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하이쿠를 쓰는 것이다. 내가 먹거나 마시지 못하더라도 나는 하이쿠를 계속해서 쓸 것이다. 나에겐 사는 것이란 하이쿠를 쓰는 것이다 하이쿠는 내 삶이다.”
물, 산천초목, 산
산토카의 하이쿠 중에서 10% 이상 정도가 물에 관한 것이다-물에 젖는 것, 물과 함께 흘러가는 것, 씻는 것, 듣는 것, 마시는 것. 일본은 매우 습기가 많은 나라이다. 더운 날씨와 바다가 둘러싸여있다. 비는 일본 여행자들의 헤어질 수 없는 동료이다. 산토카의 시 중에서 많은 부분이 다양한 비에 젖을 확률을 묘사한다. 산토카의 여행 중에서 대부분이었던 눈은 일본 남부에서는 희귀했지만 겨울에 내리는 비는 차가웠다.
(겨울날의)물은 순수하고 맛이 좋았고 풍부했다. 산토카의 가장 큰 기쁨은 신선하고 차가운 물을 하루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마시고 밤에는 따듯한 사케를 마시는 것이었다.
잠시나마 그는 그가 사케보다 물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의 식단들-물, 쌀, 사케, 우메보시(매실장아찌), 다꾸안(단무지), 요도푸(두부)-는 가장 간단하고 보편적이고 싼 일본 음식들이었다. 제대로 먹을 줄만 알면 영양가 있고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물은 그의 삶과 시의 상징이다. -끊임없이 흐르고, 숨김없이 간단하고 복잡하지 않은.
목적 없이 쾌활하게,
여기 저기로 흐르는,
순수한 물을 맛보자.
산토카의 두 번째로 좋아하는 주제는 잡초들이었다. 그는 자주 그를 (그리고 일반적인 인간 존재를) 잡초에 비교했다. "싹이 나고, 자라고, 만개하고, 씨 뿌리고, 저버린다. 더 할 것도 필요 없이, 잡초처럼 사는 것이 좋은 것이다.
잡초는 어디에나 있고, 재배한 것이 아니다. 잡초들은 시들어 죽기 전까지 살 것이고, 내년 봄이 다시 오면 필 것이다.
내가 죽을 때:
잡초들, 내리는 비.
잡초가 인간의 존재를 나타낸다면, 산은 부처의 세계를 나타냈다. - 거대하고, 멀고, 숭고한. 물과 풀은 우리에게 가깝고 만질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산은 불가사의하고 잡아채기 어렵다.
깊숙이 가자.
여전히 깊구나. -
푸른 산으로 가자.
산이 꿰뚫어 볼 수 없게 높고 넓지만 산토카는 산의 깊이에 자신을 맡겼다. “서양인들은 산을 정복하길 좋아하고, 동양인들은 산을 생각하기 좋아한다. 나로서는, 산을 맛보는 것이 좋다.”
천국에서 온 음식
“오늘의 여행길은 놀라웠다. 나는 산에게, 바다에게, 하늘에게 외치고 싶었다. 메아리 소리가, 새들이, 순수한 물이 기억들이, 다리들이, 사찰들이, 그리고 절벽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모든 것에 감사한다. 태양은 밝게 빛났고 순례자들은 증가한다. 밥이 마치 천국에서 온 음식 같았다.”
산토카는 그의 삶은 그의 앞에 직면한 것들에 집중했다. “평범한 것들에서 찾는 새로움이 진실이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라. 현재에 있는 숨겨진 보물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그는 “쌀은 취하게 만들지 않지만, 쌀의 본질은 취하게 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간단하고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에 집중했다. 산토카에게 어떤 주제도 시에 알맞앗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의 시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 사회, 삶과 죽음, 잡초들, 섹스, 인간의 몸과 기능, 물의 맛, 사케의 맛, 음식의 맛. 과거를 제외한 모든 것.” 과거에 집착하거나 미래를 기다리지 마라. 매일 감사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미래의 세상을 믿지 않는다. 나는 과거에 얼빠진 놈이 아이다. 나는 현재의 전체를 믿는다. 너의 몸과 마음을 영원한 현재 속에 흐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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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White Pine Press 출판사의 “Mountain Tasing"의 번역이며 출판사의 허락을 맡고 번역한 글을 기본으로 추가적 정보를 찾아내어 쓰게 되었습니다. 번역하게 된 계기는 유명 시인인 타네다 산토카에 관한 정확한 정보와 하이쿠의 번역이 국내에 미비해서 저같이 짜증나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수 아마추어의 번역이기 때문에 상당부분 오역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만 최대한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길 때 늬앙스를 한국어에 맞추어 번역하였습니다. 제가 일본어를 모르는 관계로 음을 듣고 정확한 뜻을 알 수가 없어서 (Ex: Mitori kannon-do, 고츄안, 삼바쿠 Etc...) 적지 못한 것도 있지만, 최대한 자료를 찾아서 본음과 일본어 그리고 한국말로 번역하였습니다. 타네다 산토카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서 전문 번역가에 의한 제대로 된 일본어의 원문 번역과 그의 하이쿠에 대한 번역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