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4일 수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루가 1,57-66.80 )
He asked for a tablet and wrote, “John is his name,” and all were amazed. Immediately his mouth was opened, his tongue freed, and he spoke blessing God.
말씀의 초대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에 관한 둘째 노래이다. 예언자는 모태에서부터 주님께 부름 받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이름이 지어졌다. 그 사명은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고 회복시키고자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동포에게 세례자 요한의 사명에 관하여 연설한다. 세례자 요한은 사명을 다 마쳐 갈 무렵,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은 인물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였다는 것이다(제2독서). 요한은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이다. 믿음이 부족해 벙어리가 되었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서판에다 ‘아기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는다. 이로써 아기와 아기의 사명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입니다. 그 의미대로 세례자 요한은 수많은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께 인도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들이 “당신은 엘리야이시오?” 하고 물으면,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또 “그러면 오실 그분이시오?” 하고 물어도 마찬가지로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을 묻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러면서 그는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라고 자신을 낮춥니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고 준비하는 주님의 종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종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주님과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자신을 낮출 줄 압니다. 오랜 시간 동안 숱한 유혹을 다 견디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 속에 머무를 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 삶에서 ‘믿음의 향기’가 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한평생 그 믿음의 향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그 향기를 주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마지막 예언자이며 진리의 증인이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고백하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인 세례자 요한의 인도를 따라, 유일한 빛이요 구원이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 남궁영미 수녀-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변화하도록 이끌어 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또 예수님의 길을 닦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런 세례자 요한의 삶과 역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의 여러 문제 중 우리 삶의 태도와 습관의 변화가 가장 절실한 부분은 생태계가 파괴된 현실일 것입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연 재앙과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은 우리를 향한 생태계의 경고로 느껴집니다. 올 초 많은 사람이 영화 <아바타>와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보며 생태계 파괴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문명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잃어버린 우리 삶의 소중한 것들에 관심을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삶은 그런 생태적 감수성을 잃고 그저 편리함과 소비와 낭비를 좇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이미 시작된 4대강 사업의 심각성에 대해 염려하면서도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그리운지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 각자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는지도 모릅니다.
자극이 오면 반응을 하다가 다시 그 자극에 익숙해지면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진정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우리 삶이 다르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모든 삶의 시작은 나부터입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모임에, 미사에 참여하면서도 일상의 나에게 작은 변화가 없다면 결국 그 반대조차 대안 없는 명분의 싸움이 되고 말 것입니다. 몇 년 전 타계하신 권정생 선생의 말씀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승용차를 버려야 이라크 파병도 막을 수 있다.’ 는 그 말씀을요. 핵폐기장을 짓지 않으려면 ‘한 집에 한 등 켜기, 겨울에 18도 이상 난방 안하기’ 등 처절한 실천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어느 분의 말씀도 기억하고 싶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현재의 에너지 소비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재의 쓰레기 배출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재의 물 사용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재의 편리함과 소비양식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내 지역, 내 동네만은 안 돼 !’ 라고 이야기하거나 단지 대의명분만을 부르짖는 것은 극단적 이기주의와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싸움은 이렇듯 안팎의 이중 싸움이고 그래야만 세상은 올바르게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런 싸움을 시작하라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겸손의 영성 -김민수 신부- “내가 커지면/ 주님이 오실 자리가 없어지고 내가 아우성치면/ 주님의 작은 음성 들을 수 없으니 작아져 비로소 향기로 남은/ 그 사람처럼/ 나도 자꾸 낮아져 거친 들판에 작은 들꽃으로/ 피어 있고 싶습니다.” 어느 시인이 세례자 요한을 묵상하며 지은 시의 일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의 영성’을 실천한 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두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하며”(요한 3,30)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루카 3,16)고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밝힙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제자들이 그분을 따라가도록 인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영성은 소화 데레사 성녀의 ‘모래알 영성’과 ‘무화의 영성’으로 꽃을 피웁니다. 성녀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바닷가에 있는 보잘것없는 작은 모래알로 비유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아무것도 없는 무의 존재로 고백합니다. 성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웠기에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기쁨과 환희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심력과 구심력의 사랑 관계 -김찬선신부- “나는 그분이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없다.”
“나는 그분이 아니다.”라는 말을 “나는 그가 아냐!”로 바꾸면 그와의 관계성을 차단하거나 강하게 부정하는 말로 들리며 “나는 그가 아니고 나야.”라는 매우 도도한 말로도 들립니다.
그런데 건강하고 성숙한 관계, 곧, 높은 차원의 사랑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있어야 합니다. 天上天下唯我獨尊과 같이 굳건히 홀로 서는 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내가 있게 되고 상대편 입장에서는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뚜렷이 있게 됩니다. 헤프고 도대체 자기가 없어 보이는 여자보다 도도한 여자에게 더 끌리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진정 나 없이는 사랑 받을 수 있는 나도 없고 사랑할 수 있는 나도 없으니 나는 모든 관계의 중심으로서 제일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는 관계의 완전한 단절이 아닙니다. 무관계의 외톨이가 아닙니다. 너의 나로서, 비유하자면 성자의 성부로서 관계와 사랑의 주체가 되는 것이고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는 성령적인 分化입니다. 그리고 원심력(遠心力)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랑의 한 현상이 分化이고 사랑의 한 힘이 원심력이라면 사랑의 다른 현상은 無化이고 사랑의 다른 힘은 구심력(求心力)입니다. 끊임없이 너를 향하며 너 안에서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성자의 성부로서 관계와 사랑을 완성하고 하나를 이루시는 성령적인 무화입니다. 끊임없이 너를 향하고 너 안에서 내가 없어지나 “우리”가 태어남과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늘 제 1독서의 말씀처럼 주님의 종이고 말씀의 소리로서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힘을 다 써버리는 것처럼 보이나 주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민족들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나는 그분이 아닙니다.”는 관계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리매김이며 역할안음입니다. 나는 나인 존재가 아니고 그분의 나인 존재로서 비록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고 소리에 불과하지만 말씀을 이루는 소리입니다.
저도 요한처럼 소리입니다. 그런데 잡소리도 아니고 헛소리도 아닌 말씀이 육화하는데 쓰이는 소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나지르인 -전삼용신부-
우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도 ‘삼손’이란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지르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 선택된 사람을 ‘나지르인’이라고 합니다. ‘나자렛 사람’이란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이기에 태어날 때부터 선택된 분입니다. 나지르인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삼가다’ 또는 ‘스스로를 봉헌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Nazar’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삼가해야한다‘는 의미를 함께 포함하고 있는 이 말은 우리에게 큰 묵상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몸에 칼을 대지 않아 수염과 머리를 자르지 않았고, 포도주와 같은 술을 마시지 않아야 했으며, 시체를 만지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즉, 태어날 때부터 ‘삼가’ 혹은 ‘절제’ 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가장 유명한 나지르인은 물론 삼손입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었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비밀을 데릴라라는 여자에게 말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의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도 뽑혀서 더 이상 봉헌된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무리 하느님께서 태어나기 전부터 뽑아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끝까지 그 봉헌 의무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부르심도 소용없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손도 결국 다시 회개하여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게 됩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만나는 장면에서 세 명의 나지르인의 놀라운 만남을 보게 됩니다. 즉, 처음부터 주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선택되어 원죄 없이 잉태되셨던 마리아와, 인류의 구원자로 그 태중에 계신 예수님, 또 메시아와 그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한 소명을 지니고 태어날 요한이 함께 만나는 것입니다. 이 세 분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들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끝까지 봉헌생활을 완수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삼손과 구약의 다른 나지르인들에 비해 완전한 봉헌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아기는 자랐고 또 ‘영’으로 굳세어졌다.” (루카 1,80)라고 합니다. 즉 ‘성령님’이 세례자 요한과 처음부터 함께 하셨다는 뜻입니다. 원죄가 있는 인간은 세례를 통하지 않고서는 성령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즉, 세례자 요한도 어느 순간에 세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언제일까요?
바로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만날 때입니다. 이 때 성모님의 태중에 계시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엘리사벳에게 부어주시고 그 성령님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뱃속의 아기는 그래서 기쁨에 뛴 것입니다. 기쁨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원죄 없이 태어난 사람이 셋 있는데, 마리아, 예수님, 세례자 요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여자의 몸에서 난 이 중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이는 없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성모님과 예수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시기도 하고 원죄 없이 태어나시기도 한 분들입니다.
보통은 성인들이 순교하신 날이나 돌아가신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하느님나라에서 빛나는 별과 같은 영혼으로 새로 태어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세례자 요한만 탄생일을 순교일보다 더 크게 기념하고 대축일로 지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렇게 그분의 탄생 자체가 그분의 순교만큼 신비로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성령님을 충만히 유지하기 위해 나지르인으로서 ‘삼가는’, 즉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삼손처럼 중간에 삼가는 삶을 살지 않을 때는 더 이상 봉헌생활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영과 육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르면 영적인 생활은 포기하는 것이고 육체의 욕망을 절제한다면 그만큼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이라고 불렀지만, 예수님도 공생활을 하시기 전에 40일간 단식하고 밤새워 기도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인간이 육체로 짓는 죄를 보속하시기 위해 육체로 받아야 하는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은 이미 당신 안에 당신 육체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성령님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절제’조차도 성령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죽이는 삶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그를 본 사람들이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게 합니다. 즉, 지금까지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벙어리가 되었던 아버지 즈카리야의 입을 열어준 것입니다. 즈카리야는 입이 열리자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봉헌한다고 해서 신학교나 수도원에 입회하였다가 가정에 자신이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다시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봉헌은 요한처럼 가족에게까지 생명을 전해주게 되어있습니다. 가족을 돌보겠다고 걱정하는 것보다 온전히 봉헌생활을 하는 것이 가족을 위해서도 더 낫습니다.
그리고 가족만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사람들의 마음을 메시아에게 돌려놓습니다. 예수님의 첫 두 제자가 요한의 제자들이었음을 상기하면 이미 메시아에게 잘 준비된 제자들까지 봉헌한 셈입니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과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리자 “신부를 차지하는 것은 신랑이다. 그러나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쁨에 넘친다.”(요한 3,29)고 하며 예수님이 커지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순교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강한 햇빛으로 나오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것처럼 태양은 새벽의 여명을 미리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태양이신 예수님은 당신을 감당할 수 없는 우리의 눈을 위해 여명인 세례자 요한을 미리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뜨면 여명은 더 이상 존재 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자신은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점점 커져야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가고 자신은 칼에 순교하여 사라지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사라짐으로 그 뒤에 계신 분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성령의 힘이 아니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죽이는 순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기름이 채워져야 자동차가 가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 힘으로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도 어느 의미에서는 부름 받은 나지르인이고 그렇게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로서 당연히 세례자 요한의 절제와 봉헌의 삶을 본받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아기는 날로 몸과 마음이 굳세게 자라났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양승국신부- <사제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 전통적으로 저희 살레시오회는 매년 6월 24일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에 사제 및 부제 서품식을 갖습니다. 내일도 6명의 사랑스런 후배들이 사제, 부제로 서품됩니다. 저도 사제로 서품된 햇수가 어느새 10손가락을 다 사용해야될 정도로 세월이 흘렀습니다. 돌아보니 요란스럽기만 했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내일 서품식을 앞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래 전 제가 사제서품을 준비하던 피정 때 두고두고 묵상하던 시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김용석 시인의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였습니다. "나는 꽃이예요. 잎은 나무에게 주고 꽃은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게예요. 가을이 오면" 철저하게도 자신을 내어놓은 후에 미련 없이 떨어져 내리는 꽃잎들! 바로 우리 사제들이 추구해야할 삶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사제직의 본질은 세상으로부터의 죽음을 바탕으로 한 자기 희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 여름 탄생될 모든 사제들이 강렬한 예수님 체험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세상에 죽고 그 세상 한가운데서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 같은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새사제들의 삶이 예수님 그분으로 인해 행복한 삶, 예수님 그분만을 선택함으로 인해 행복한 삶이 되길 기원합니다. 예수님 그분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확연히 깨달았기에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모든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삶의 중심을 옮겨가는 새사제들이시길 기원합니다. 한 야생오리의 이야기는 우리 새사제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가을이었습니다. 지중해 해변에 살고 있던 한 떼의 야생오리들이 북쪽으로 날아가던 중에 네덜란드 상공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오랜 비행으로 인해 한 야생오리가 완전히 지치고 말았습니다. 날개는 아프지, 삭신은 쑤셔오지, 배는 고파죽겠지... 그런 야생오리 눈앞에 아주 황홀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저 아래, 한 마당 넓은 집 안에서는 한 떼의 집오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평화롭게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힘이 빠져버린 그 야생오리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무리를 떠나 그 집 마당에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딱 하루만"하고 맹서했었는데,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었습니다. 사흘은 또 일주일, 한달, 두달, 세달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야생오리는 집오리들의 환대 속에 너무도 잘 먹고 잘 쉬면서 아쉬움 없이 잘 지냈지요. 그렇게 계절이 흘러서 어느새 이듬해 가을이 돌아왔습니다. 작년처럼 한 떼의 야생오리들이 해질 무렵 빨갛게 물든 가을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북쪽으로 날아갔습니다. 그 순간 야생오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날아오르려고 했지만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웠지만 그냥 한평생 집오리로 살게 되었습니다. 사제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사제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성무일도서요 성서, 묵주입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 지속적으로 성화된 삶을 사는 것, 그 이외의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주어진 여건이 호화로우면 호화로울수록 버리고 떠나기가 힘들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인 능력, 경제적인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느님께 의탁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제들이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그 빈자리에 하느님이란 새로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로서의 인생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자기 자신에 완전히 죽을 때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떠날 때입니다. 그래서 그 떠난 자리에 하느님 그분께서 머무르실 때입니다. 새사제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그릇된 집착에서 떠나며,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을 사는 사제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제서품식의 핵심에 바닥에 엎드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몸짓이지요. 성인호칭기도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모든 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에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겠다는 장엄한 약속이지요. 결국 사제생활의 묘미는 쌓아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허물어트리고 바닥으로 끊임없이 내려가는데 있음을 모든 새사제들이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어제 아침 아침기도 전이었습니다. 시간이 꽤 남아서 묵주기도를 하면서 신학교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지요. 도시와 달리 맑은 공기를 마실 수가 있었고 인위적인 소리가 아닌 맑고 깨끗한 자연의 소리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상태에서 묵주기도를 하며 걷고 있는데 반대쪽에서 은퇴를 하신 노(老) 신부님께서 묵주기도를 하시면서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둘의 간격이 가까워졌을 때 저는 고개를 숙이며 “안녕히 주무셨어요?”라고 인사를 했지요. 바로 그 순간 그 신부님께서는 “아~~ 조명연 신부구나. 반가워. 우리 악수나 할까?”라고 말씀하시면서 제게 손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감동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었지요. 저와 나이차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자그마치 35년 차이입니다. 저보다 10년 아래의 신부님들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자그마치 35년의 차이가 나는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그러면서 반성을 하고 다짐하게 됩니다. 저 역시 이제는 후배들의 이름을 외워주고 후배의 손을 잡아주는 선배 신부가 되겠다고 말이지요.
사실 주님께서는 그 원로 사목자 신부님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요. 그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모두 기억하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계십니다. 즉,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것은 물론 우리의 손을 꼭 잡아서 용기와 힘까지 불러 일으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주님께 감사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바로 주님을 내 삶에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보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선이 주님께로가 아니라 세상에 맞추어 있으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을 태어나기 전부터 느꼈던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방문 소리를 듣고 태중에서도 즐거워 뛰놀았다고 성경은 말하지요(루카 1,44). 그리고 이렇게 주님께 시선을 맞추고 있는 세례자 요한과 함께 그의 부모도 역시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주님의 뜻에 따라 ‘요한’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우리 역시 나의 모든 시선을 이제 주님께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일상 안에서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따뜻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주님께서 반갑다고 내미는 손에 악수를 하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항상 무엇인가를 배워라. 이것이 참된 삶의 방식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배우지 않는 자는 인생을 살 자격이 없다.(아서 헬프스)
위기와 기회 -정명숙 수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신의 전존재를 통해 터져나오는 감사와 찬미를 하느님께 드리는 한 인간의 모습을 만납니다. 그 기쁨의 찬미는 마치 온 세상 구석구석 퍼져나가 모든 우주 만물을 하느님께로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즈카르야는 사제 직무를 수행하러 성전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나온 후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죽음과도 같은 어둠의 순간을 보냅니다. 무엇이 즈카리야의 입을 막고 혀를 묶어 놓았을까요? 사제로서 그 누구보다 하느님 뜻대로 살아왔고 신앙인으로서 누구보다 바르게 살아왔는데…. 우리도 살면서 즈카리야처럼 신앙의 위기를 겪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는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하느님, 하느님을 자기 뜻에 맞추려는, 하느님 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신앙의 길에서 돌아서는 정화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즈카르야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겠다는데 믿지 않았습니다. 왜?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러니 참된 하느님에 대해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믿을 때 즈카르야처럼 비로소 혀가 풀리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그 찬미는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현상을 경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루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 - 김현정- 요한은 성경에서 ‘주님보다 먼저 올 사람’,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 17) 라고 예언했다. 유다 백성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메시아’ 는 아니지만 요한은 주님이 오시기 전 백성들이 주님을 알아보고 맞이할 만한 상태가 되도록 준비시켜야 하는 예언자의 사명을 받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성적순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주인공 아니면 1 등인 사회. 그러나 그 뒤에 있는 이들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연 없는 주인공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다. 나는 교사라는 직업을 택할 때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거나 주인공이 되는 것과 거리가 먼 삶을 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내가 교육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 단번에 “실망이다. 꿈이 그 정도밖에 안 되냐? 너는 조금 더 큰 사람이 되고 싶어 할 줄 알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즘 교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아이들 키우다 안 되면 선생이나 시키지, 뭐’, ‘초등학생 가르치는 거 나도 하겠다.’ 심지어 ‘교사 밥통 철밥통’ 이란 말까지 한다. 일일이 붙잡고 설득할 수도 없어 나는 언제부턴가 밖에선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 일을 사랑한다. 아버지의 실망도 사람들의 편견도 상관하지 않고 교사의 소명에 충실할 뿐이다. 한마디로 교사는 세례자 요한을 본받아야 한다. 교사는 주인공이 아니라 아이들 하나하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그 주인공들이 훗날 하느님 나라를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도우미다. 그만큼 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열등감 -김찬선신부- 지금도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는 열등감이 아주 심했습니다.
사춘기 들어서면서부터 열등감이 생겼는데 그 대상은 저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헤르만 헷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같은 사이로 사랑하고 좋아하면서도 그 친구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너무 감성적인 저에 비해서 합리적인 그에게 열등감을 느꼈고, 아버지의 뒷받침을 받는 그에 비해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난한 저에 대하여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탄 때 친구들끼리 술 한 잔을 했습니다. 술을 마신 경험이 없었기 때문인지 저도 취하고 그 친구도 취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저에게 한 말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저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을 토로하는 얘기였습니다. 성격과 저의 가난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한 계기였습니다.
저는 모차르트 때문에도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는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건반을 처음 만져보았는데 복 4중창 단 활동도 하였지만 자꾸 작곡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습작을 하였지만 다 모방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모차르트와 나를 비교하며 나는 음악 재능이 없다 생각하곤 작곡을 때려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어떻게 모차르트와 나를 비교를 하였는지........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자신을 깨닫게 된 것은 달란트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섭니다. 제가 모차르트만 못한 것이 전혀 저의 탓이 아닙니다. 저의 부모 탓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달란트를 그것밖에 안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구 때문에 열등감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잘 나고 못 남이 저나 부모의 탓이라면 제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겠지만 저나 부모의 탓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만드셨으니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고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하느님께 따질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질문을 합니다. 아니 하느님께 따지는 것이지요. 모차르트는 누구이고 저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아드님이니 예외로 치고 세례자 요한은 누구이고 저는 누구입니까? 왜 이들은 특출하게 만드시고 저는 평범하게 만드셨습니까? 누구는 구원사에 꼭 필요한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시고 왜 저는 그럭저럭 만드셨습니까?
이 질문에 주님께서는 되물으십니다. 특출하게 만들었건 그럭저럭 만들었건 그것이 너에게 무슨 상관이냐? 잘 나고 못 난 것은 너의 소관이 아니다. 잘 났다고 너의 영광 아니고 못 났다고 너의 부끄러움 아니다. 그러나 잘 하고 못 함은 너의 소관이다. 무엇이 잘 하는 것이냐는 저의 질문에 주님은 또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잘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리지 않고 하느님의 빛을 잘 반사하는 것이다. 큰 별은 큰 빛을 반사하고 작은 별은 작은 빛을 반사하는 것, 그것이 잘 하는 것이다.
그런데 큰 만큼 더 가리지 않을까? 작은 것이 덜 가리지 않지 않을까?
이 새벽, 가리지 않으며 큰 빛을 반사하는 모범을 요한에게서 본다. “당신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저는 갈수록 작아져야 합니다.” 순교와 선교 -전삼용신부- 보통은 성인들이 순교하신 날이나 돌아가신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하느님나라에서 빛나는 별과 같은 영혼으로 새로 태어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세례자 요한만 탄생일을 순교일보다 더 크게 기념하고 대축일로 지냅니다. 그 이유는 그분의 탄생 자체가 그만큼 신비로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 마리아께 나타나기 6개월 전에 성전 성소에서 향을 봉헌하고 있는 사제 즈카리야에게 나타납니다. 즈카리야는 그 늦은 나이에 아기를 갖게 된다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바로 오늘 즈카리야는 10개월 동안의 벙어리 생활을 청산합니다. 사람들이 아기의 이름을 즈카리야로 부르려고 하자 즈카리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요한은 천사가 일러준 이름입니다. 즈카리야는 비로소 천사의 말을 믿고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때 그의 혀가 풀리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이 사건을 본 이들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는 것이 순교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 안에는 자신을 죽이는 비움과 순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즈카리야는 처음에 자신의 뜻을 버릴 수 없었으나 요한의 탄생 때야 비로소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름을 줍니다. 이렇게 자신을 죽이는 순종적인 믿음으로 하느님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이 자기 비움을 통한 계시의 완전한 모델은 물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게 해 줍니까? 바로 아버지의 사랑을 보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돌아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까요? 바로 인간의 죄에 대한 보속을 당신 아들이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당신 외아들을 죽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는 아들의 동의가 있어야 했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며 죽기까지 순종하셨기에 우리는 그 아들의 죽음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위해 당신 뜻을 버리시고 아버지께 순종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셨듯이, 즈카리야도 자신의 뜻을 죽여 하느님의 뜻을 보여주어 모든 사람이 놀라서 요한과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곧 자기 비움의 순교이고, 순교란 곧 하느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계시이고 이렇게 하느님을 보여주는 계시가 곧 선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처음부터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끌었습니다. 왜냐하면 보통사람처럼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따듯하게 입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육체의 욕망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도 있지만 ‘절제’도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육체의 욕망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찼고 태중의 아이는 기쁨으로 뛰었습니다. 어머니가 성령으로 가득 차니 그와 한 몸인 태중의 요한도 성령으로 가득 찬 것이고 예수님은 이렇게 태중에 계실 때부터 당신의 ‘선지자’를 미리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가 없이 태어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이는 없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오게 하였지만 자신이 메시아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가게 하였습니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강한 햇빛으로 나오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것처럼 태양은 새벽의 여명을 미리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태양이신 예수님은 당신을 감당할 수 없는 우리의 눈을 위해 여명인 세례자 요한을 미리 준비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뜨면 여명은 더 이상 존재 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자신은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점점 커져야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가고 자신은 칼에 순교하여 사라지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사라짐으로 그 뒤에 계신 분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비움, 즉 순교로 하느님을 계시하는 것은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성령의 힘이 아니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죽이는 순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가 가지 않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 힘으로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자기 비움으로 당신을 증거한 이들을 하느님나라에서 얼마나 높이 올리시겠습니까? 지금 세례자 요한은 당신의 소명을 완성한 이유로 하늘에서 가장 큰 별들 중의 하나로 빛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늘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죽여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그분 탄생 축일에 우리도 성령 충만한 영혼으로 새로 태어나는 하루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희아는 6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습니다. 선천성사지기형 1급 장애인으로 양 손에 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습니다. 무릎 아래로 다리도 없고, 지능도 낮습니다. 거기에 희아는 악보를 읽지 못했습니다.
피아노 선생님들은 희아가 재능이 없다며 포기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희아가 피아노를 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강행군이 시작됐습니다. 어머니는 희아에게 하루 10시간 이상씩 배운 것을 반복해서 연습시켰습니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을 모두 내던진 채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희아의 피아노에 걸었습니다. 희아가 피아노를 거부한 적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정신과 치료까지 받을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습니다. 피아노를 보기만 해도 경기를 하고, 피아노 선생님을 보면 숨을 쉬지도 못했습니다. 희아는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도 자신의 욕심이라며 피아노를 닫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희아를 찾아 온 작은 만남이, 병상의 희아를 벌떡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렇게 거부하던 피아노 앞에 행복한 얼굴로 앉게 되었습니다. 5년 동안 고통스럽게 연습했던 곡, 이제는 희아의 타이틀곡이 된 ‘즉흥환상곡’을 선보이며 사람들에게 뜨거운 용기와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희아는 마침내 세계에서 유일한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이제 희아는 장애인들에게는 희망이, 비장애인들에게는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살아있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피아노 연주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나누며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넘어져 울고 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웠고 세상을 향해 밝은 웃음을 활짝 웃게 해 준 피아노! 그 아름다운 사랑의 선율을 다시, 삶의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과 친구 여러분들께 돌려 드립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이 글은 이희아(히아친타) 자매의 공연 전 본인 소개 글입니다. 지난 토요일, 우리 성당에서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는 희아 자매의 공연이 있었거든요. 이 공연을 보기 위해서 오신 분이 1250명 정도. 따라서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공연 전에 희아 자매와 대화를 나누면서, 지금 이대로의 모습과 환경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는 말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남들처럼 되려는데 그리고 남들과 비교하는데에서 불행이 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희아 자매는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함으로써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준비하신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로,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때의 일이 나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정하는 시간에,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했으나 어머니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라고 답변을 하고,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 역시 글 쓰는 판에다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지요. 그러자 즈카르야는 곧바로 혀가 풀려서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즈카르야는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믿지 않았거든요. 그 결과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순간,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때 행복은 저절로 주어진다는 것을 희아 자매를 통해서 그리고 복음에 등장하는 즈카르야를 통해서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십시오. 행복의 시작이 여기에 있습니다. †♡†♡†♡†♡†♡†♡†♡†♡†♡†♡†♡†♡†♡†♡†♡†♡†♡†♡†♡†♡†♡†♡† 이름에 담긴 의미 -김대선 신부- 얼마 전 방영한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김삼순’이라는 이름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며 우는 삼순이에게 택시기사는 “이름이 삼순이만 아니면 되지!”라고 말합니다. 결국 주인공은 개명 신청을 하게 됩니다. 이 드라마 이후 많은 사람들이 개명 신청을 하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름은 우리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그래서 자녀의 이름을 짓는 부모님은 매우 신중합니다.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일을 할 사람이었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름 말고 세례를 받을 때 얻은 세례명이 있습니다. 주보성인을 정하고 그 성인의 삶을 본받겠다는 뜻으로 세례명을 정합니다. 세례명은 신앙인인 우리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는 우리의 의지입니다. †♡†♡†♡†♡†♡†♡†♡†♡†♡†♡†♡†♡†♡†♡†♡†♡†♡†♡†♡†♡†♡†♡† 광야 - 전봉순 수녀- 붐비는 도시에 소유한 땅이 없는 내게 광활한 광야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유혹받으셨다는 광야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가야만 했던 광야는 꿈에도 그리운 곳이었다. 광야가 어떠한 곳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토록 불평을 늘어놓았던가? 간혹 복잡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강할 때 광야는 더욱더 매력적으로 상상이 되었다. 드디어 지난해 여름 성경의 땅을 찾아 성지순례를 떠났다. 광야를 직접 체험해 보고 사진도 많이 찍어 오겠다는 꿈을 안고 사뭇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 평소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는 복음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온갖 상상을 다 했다. 그런데 막상 시나이 반도의 광야를 지나면서 열풍과 뜨거운 햇빛에 내 몸을 드러냈을 때, 가장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못살겠다고 불평한 것이 뭐가 잘못인가? 이런 조건에서 불평을 안 하면 그게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또 얼마나 목말랐을까? 그런데 이 광야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이 크게 들려오는 곳임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히브리말로 ‘광야’를 뜻하는 ‘미드바르’와 ‘말씀’을 뜻하는 ‘드바림’이 같은 자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광야!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조건이 전혀 채워질 수 없는 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선포 활동을 준비해 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도 모든 일에 앞서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들으며 준비해야겠다. †♡†♡†♡†♡†♡†♡†♡†♡†♡†♡†♡†♡†♡†♡†♡†♡†♡†♡†♡†♡†♡†♡† 어린 양을 가리키는 손 가락 -김찬선신부-
고승이 온다는 말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절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찼습니다. 마침내 스님이 와 자리를 잡았는데 밤이 되도록 아무런 설법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도 가르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스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만을 참고 기다렸습니다. 밤이 되고 달이 뜨자 스님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달을 쳐다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봤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자 지어낸 불교 우화입니다. 인간은 쉽사리 이런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어느 유명한 설교가가 오면 구름같이 몰려들어 그 설교에 넋을 잃을 정도로 감탄을 하지만 정작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집중하지 않고 그 사람의 말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때 설교가는 자기가 정말 잘 나서 그런가 하고 우쭐할 수 있고 겸손하게 하느님을 드러내기보다 사람들을 자기에게 향하게 하는 엄청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세례자 요한은 자기를 향해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어린 양”을 분명히 가리키며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의 소리에 불과하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고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자기는 갈수록 작아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연이 되시도록 그는 철저히 조연을 합니다.
저는 종종 반성을 합니다. 강론이나 강의를 열심히 준비하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내가 칭송 받기 위한 것인가,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기 위한 것인가? 정말로 많은 경우 저는 제가 칭송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향해야 할 사랑을 저에게 향하게 합니다. †♡†♡†♡†♡†♡†♡†♡†♡†♡†♡†♡†♡†♡†♡†♡†♡†♡†♡†♡†♡†♡†♡†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드러내는 요한 - 경규봉 신부- 예수님의 탄생축일을 12월 25일로 정한데 반해 세례자 요한의 탄생축일을 6월 24일로 정하여 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태양과 같은 분이시고 점점 더 커지셔야 하기에 옛사람들이 동지라고 생각했던 12월 25일을 탄신일로 정한 것이다. 반면에 요한은 점점 더 작아져야 하기에 하지라고 생각했던 6월 24일을 탄생축일로 정했다.
복음 안에서 세례자 요한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다. 루가 복음에서는 요한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까지 기록될 정도로 요한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그는 하느님 앞에서 의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 정도로 금욕생활을 하며 율법을 충실히 지켰다. 그는 불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불의를 보고 넘기지 못하였기에 목숨을 잃으면서도 당시 왕이었던 헤로데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고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통렬히 질책하였으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마르 1,5). 많은 이들이 그를 추종하였고,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기도문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꽤 커다란 종교집단을 이루었고, 대단히 열심한 생활을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안드레아 같은 이들은 요한의 제자였다(요한 1,40)고 한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 예수님을 가리켜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훌륭한 예언자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 앞에서 참된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람이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8-30참조) 하고 말했다.
바벨탑의 이야기를 보면 사람들이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창세 11,4) 하고 말한다. 바벨탑을 쌓는 목적은 어떤 재난을 당하더라도 끄떡없을 정도로 높은 탑을 세워 자신들의 이름을 날리고자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기들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이러한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자선을 했고, 선행과 희생을 했으며, 이런 업적을 쌓았다.’ 하고 말하면서 자신을 내세우고자 한다. 자신에게 빠져 있다.
그러나 요한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설득력,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열심히 살았지만,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백성은 그를 그리스도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마르 1,7)라고 말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요한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 어떤 사람보다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오직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그분을 드러내는 삶에 충실함으로써 신앙인의 참된 자세를 잘 보여주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덕행, 자비심과 용서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하느님 앞에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먼지요 티끌에 불과하다. 하느님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서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자비를 간청하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요한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을 맞이하여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준 요한을 바라보며, 우리도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새벽을 열며 어제 저녁 학생 미사 때 강론을 시작하면서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제가 강론을 두 가지 준비했는데 어떠한 것을 할까요? 첫째는 길지만 재미있는 강론이고, 둘째는 재미는 없지만 짧은 강론입니다. 자~~ 어떤 강론을 할까요?”
과연 학생들은 어떤 것을 선택했을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두 번째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학생들은 미사를 그렇게 재미있게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두 번째 비록 재미는 없지만 짧은 강론을 선택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반응은 전혀 없음이었습니다. 그냥 고개만 숙이고서 ‘떠들어라. 나는 관심 없다.’라는 식이었지요. 저는 그 썰렁한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 얼른 다른 이야기로 화재를 바꾸고 말았습니다.
저에게는 뜻밖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의 관심 없는 그 모습이 문제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저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학생들을 좀 더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라고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그 결과에 학생들을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을 간직했던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내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인양 어떤 결론을 미리 내리고 그 결론에 다른 것들을 맞추려고 하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 과정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했으며, 그들의 아픔과 상처는 어쩔 수 없는 과정 속의 하나일 뿐이라고 치부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이기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을 맞이하여 복음은 주님의 뜻에 따르는 그의 부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을 낳게 되리라’는 말을 믿지 않아서 귀가 멀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기의 이름을 결정짓는 명명식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결정하지요. 그리고 엘리사벳은 여자의 권위가 그렇게 높지 않던 그 사회에서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유로 힘 있게 앞으로 나와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모습이 세례자 요한에게도 전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따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종종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더 따르고 싶어 합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더욱 더 좋아 보이고 관심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 뜻을 따를수록 주님과는 멀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 인해서, 다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즈카르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려 할 때, 우리의 입도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뜻만 옳다고 박박 우기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찬미의 의미 - 박영봉 신부-
찬미는 하느님께서 진정 하느님이심을 한결 더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기도의 형태입니다. 찬미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기리는 것입니다. 또한 찬미는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은, 영광 중에 하느님을 뵙기 전에, 믿음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누리는 참 행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찬미를 통하여 우리의 정신과 일치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며, 그 외아들을 증언하십니다. 그 외아들 안에서 우리가 양자로 받아들여지고, 그 외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찬미는 기도의 다른 형태들을 통합하여, 만물의 근원이시며 목표이신 그분께 인도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1코린 8,6). 신앙은 청원과 전구를 통하여,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고, ‘모든 완전한 선물을 내려주시는 빛들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순수한 찬미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이회진신부-
오늘 우리가 읽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일화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느님의 천사와의 만남 이후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 혹은 성령의 말씀을 주의 깊게 알아듣기 위해서 외적 침묵에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요한의 탄생과 함께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첫 번째로 자신의 입술 위에 올려놓은 말은 하느님의 찬미하는 찬양의 기도였습니다.
즈카리야의 10달 동안의 침묵은 그에게 그 자신의 침묵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그가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었다면 이제 그는 정확히 하느님의 뜻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즈카리야가 글 쓰는 판에 썼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의 10달간의 긴 외적 침묵은 그가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준비하는 시간이었던 것이죠. 즉 그는 침묵을 통해 이제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루가 복음 1장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써 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며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만 이렇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의 이름이 요한”이라는 선언하도록 이끄는 즈카리야의 침묵과 찬미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듯이, 하느님의 은총과 이끄심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의 침묵과 찬미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에 신뢰를 두고 침묵 가운데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하느님의 뜻을 전하길 기다릴 때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이에게 공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며, 우리 입술 위에 올려지는 소리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엘리사벳과 즈카리야와 세례자 요한에게서만 일어나는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다른 이들의 모습과 말 가운데서 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만들며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그분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손길, 즉, 성령과 함께 살아감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놀라움은 바로 침묵과 묵상과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세례자 요한이라는 위대한 예언자가 있기 전 그렇게 우리들 가운데는 침묵과 묵상과 기도가 함께 했습니다.
“주님, 타인의 마음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저의 눈과 마음을 열어 주소서. 아멘.”
세례자 요한 -조욱현신부-
구약성서에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낳은 경우를 볼 수 있다. 이사악을 낳은 사래, 야곱과 에사오를 낳은 리브가, 삼손의 어머니, 사무엘을 낳은 한나 이 모두가 엘리사벳과 같이 아이들을 낳지 못하던 여인들이었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도 열심하고 하느님 앞에 흠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슬하에 아이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개입으로 잉태를 하였고 마침내 세례자 요한을 낳았던 것이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은 평소 하느님을 두려워하던 사람들로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에 이르렀는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요한을 얻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의 탄생과 여드레만에 치르는 할례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주변의 사람들은 두려워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가리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시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다. 오늘 복음과 같이 요한은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탄생했지만, 주님의 모습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됨을 볼 수 있다. 결국에는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이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삶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이었음과 같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죽음의 의미 - 유영봉 신부- 묵상 길잡이: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 탄생과 생애와 죽음이 예수의 전형(前型)이라 할 수 있다. 요한은 자신의 백성을 만들지 않고 모든 이를 예수께로 인도했다. 참으로 모든 신앙인이 가야 할 모범이시다. 1.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예수 탄생의 전주곡이다 세레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리고 오래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일출을 알리는 새벽빛처럼 오신 분이다. 오랜 침묵의 기다림,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며 참고 기다려 온 밤의 끝자락에서 동트는 해와 같이 오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열강들의 쉴 새 없는 세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참으로 고달프게 살아왔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할 그 때에도 로마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며 메시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예언자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마태3,4)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여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3,2)외치자 백성들의 시선은 일제히 요한에게로 쏠렸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야 그분이 오시는가 보다"하며 긴긴 기다림의 한(恨)이 한꺼번에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요한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희망이었다. 2. 요한은 자신의 백성을 만들지 않았다. 가뭄에 단비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눈이 번쩍 뜨일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마태3,5-6)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다.(마태3,3,13이하) 그만큼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 가끔 등장했던 가짜 메시아들은 "나를 따르라"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를 메시아로 알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 나보다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르1,7-8)고 선언하였다.
남의 입에 들어간 것도 빼앗아 먹으려고 혈안이 된 듯한 세상에서, 자기를 메시아로 여기며 모여드는 백성들을 그대로 예수님께로 돌려보내기란 분명 쉽고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지 않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한 것이다.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일',사목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일찌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세례자 요한을 격찬하셨다.
3. 예언자는 죽음으로 말한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죽음(마르6,14-29참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예수님이 그렇게 극찬한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시숙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사는 여자 헤로디아의 욕심과 원한의 희생물로 어이없이 죽고 만다. 딸의 춤사위를 보고 기분이 좋아 딸에게 내 뱉은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마르6,22-23)는 한마디의 허풍 가득한 맹세. 이 기회를 놓칠세라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시켜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가져다 주십시오."(마르6,23)하고 청한다. 참으로 기쁨을 나누는 생일날에, 초청한 귀빈들 앞에서, 그것도 어린 딸을 시켜 청할 수는 없는 끔찍하고 사악한 발상이 아닌가? 그러나 왕은 그 헌신짝 같은 맹세를 지켜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고 만다. 어찌 하느님의 예언자가 이렇게 파리 목숨처럼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종으로 열심하게 살았다면, 죽음을 맞을 그 순간에는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가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람, 대 예언자가 이렇게 개죽음을 하다니!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가끔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가?"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묵상해 봐야 한다. 예언자 중의 대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어떠했는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15,34)하며 인간들뿐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도 버림받은 것 같은 극도의 고독 중에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은 결코 평화와 위로 가득한 가운데 숨을 거두시지 않았다. 링컨도, 마르틴 루터 킹도, 마하트마 간디도 모두 괴한이 쏜 총탄에 맞아 비명에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한다. 예언자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세상에 외친다. 그러나 예언자의 가장 힘있는 외침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서 울려 퍼진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외치다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할 때 진정한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고, 그 정의를 외치다 죽음을 당했기에 참 예언자가 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언자의 사명을 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못지 않게 '무엇을 위해 죽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축일에 깨닫자. -김명선신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 축일을 맞으신 모든 분께 사랑과 축하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라고 요한에 대해서 증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마르, 1,7) 라고 자신을 낮추십니다. 종들이 하는 일, 그것도 주인의 모든 일을 의무로 해야 하는 종들에게 유일하게 의무로 하지 않아도 될 조항의 일조차 할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신 세례자 요한의 삶을 닮아가도록 노력한다면 세상은 온통 겸손의 미덕으로 가득 차리라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로 아들을 얻게 된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의 집에는 기쁨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기의 할례식이 있던 날 사람들은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즈가리야’로 결정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다인들이 이름을 지을 때,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지어주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의 어머니는 “안 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여야 합니다.” 라고 주장하자 사람들은 “당신의 집안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아기의 아버지에게 한번 물어보는 것이 좋겠구려.” 하고서는 아기의 아버지에게 이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보자 작은 서판에 “아기 이름은 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즈가리야는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위에 모여 있던 친척들과 사람들은 놀라움과 더불어 주님의 손길이 머물고 있는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 마음속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즈가리야가 벙어리가 되었던 부분을 잠시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제였던 즈가리야는 성소에서 분향을 드릴 때 주님의 천사를 만나고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때 “ 저는 늙은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라고 불신을 합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함으로서 생기게 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실천하는 순간 하느님의 축복이 내려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주님의 섭리 속에서도 이루지 못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아무리 추악하고 피폐한 곳에도 당신의 사랑이 머물러 있으며 그 사랑의 힘으로 빛이신 하느님의 놀라운 힘을 드러내 보일 수 있으며, 그 빛을 통하여 세상의 어두움을 밝혀 환하고 밝은 세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정상천신부- 오늘은 대림 시기 때, 복음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그 어떤 예언자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세례자 요한은 겸손과 구원계획에 대한 순명을 겸비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요한은 해로데 임금에게 그 동생 아내와 사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 강직함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례자 요한의 성품 외에도 요한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가 떠올려집니다. 그중 오늘 묵상한 주제는 ‘주님의 마음으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6월을 예수성심성월로 보내고 있으며, 요한은 주님의 마음으로 움직인 분이십니다. 구원 계획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말하것도 없이,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님의 길을 닦고, 그분이 오실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반성과 아울러 다짐을 하게 합니다.
저는 지체, 맹인, 농아인 선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간혹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주님께서 지체장애인이 되셔서 재림 때 휠체어를 타고 소문도 없이 불시에 각 성당을 방문하신다고 가정한다면, 우리 성당은 모두다 휠체어가 미사가 거행되는 성전에까지 잘 올 수 있도록 길을 닦는데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시각장애인이라면 길을 헤매고 있는 그들을 나 몰라라 하지도 않을 것이며, 듣지 못하는 장애를 가졌다면 대화가 힘든 주님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면서 대화를 시도해볼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속에서 그분의 모습을 한 두 번 쯤 생각해보게 됩니다. 좌판대를 통해 물품을 판매하는 상인의 모습, 점심 때 한창 바빠 끼니 제 때 챙겨먹지 못하고 손님이 오면 먹다가도 중간에 나가 손님을 맞이하는 식당 종사자의 모습, 사고가 나 보험사 직원이나 경찰을 기다리면서 안절부절하고 있을 모습 등, 각자 자신이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의 모습을 반영시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 속에서 과연 주님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정답은 없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오실지에 대해서 궁금해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분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저런 타인의 행위를 통해 이것이 주님의 뜻일까? 주님의 모습일까? 라고 단정 지을 노력이 허무하리라 봅니다.
주님께서 하자는 대로 그저 할 뿐, 그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순명과 겸손 때로는 강직함을 가진 그런 분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듣지는 않았지만 1독서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에서처럼 “주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주님께서 요한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 그런 분”입니다. 복음에 요한을 보고서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도 보살피고 계십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각자 몫에 맞는 그러한 공간과 시간에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보살피고 계십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함께 나눌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무엇인가 나눌 수 있게 작은 것이든지 큰 것이든지 나를 보내신 분이 곧 나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배터리가 다 닳아져 가는데도 -양승국신부-
돌아보면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수도회 연례피정이나 세미나에 참석하면 당연히 공동침실을 사용했었고, 또 식사시간만 되면 어떻게 해서든 어르신들이 계시는 메인테이블에 안 앉으려고 하고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어디 모임에만 갔다하면 늘 독방신세이고, 초기 양성자들은 어떻게 하면 제 옆자리에 안 앉으려고 기를 씁니다.
이 말은 저도 슬슬 한 물가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이제 슬슬 노년에 대해서 신경을 쓸 때가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자주 죽음에 대해서 생각도 해봅니다. 어떻게 죽어야 잘 죽나? 자주 생각합니다.
‘노년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직면해야할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입니다. 사회인들에게 있어 그 정답은 너무나 확연합니다.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그 나름대로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부부생활의 영속성은 행복한가? 불행한가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노인들의 뇌리 속에는 경제력 있고 효심 지극한 자녀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과 독립성은 노년기 행복의 중요한 척도입니다. 건강 여부 역시 노인들에게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행, 불행의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심신이 모두 건강한 노인,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행복한 삶의 기준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자기초월의 길을 걷고 계시는 분들이지요. 비록 늦었지만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깨달은 분들, 그래서 그 깨달음에 투신하는 분들의 모습 참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지나온 인생을 조용히 되짚어보면서 비록 늦었지만 자기 정화의 길을 시작하는 분들, 비록 험난한 여정이지만 영적 쇄신의 길을 시작하는 노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우리의 노년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가 비록 노년의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무대 뒤로 물러서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이미 충만한 영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무대 뒤로 사라짐이 결코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란 존재가 점점 작아지고 예수님이 점점 커지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기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추는 일, 영적인 눈을 뜨는 일, 그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입니다. 배터리가 다 닳아져 가는데도, 이 세상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철저하게도 육적으로만 사는 분들, 철저하게도 세속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 세상을 초탈하려는 분들 앞에는 새 세상이 펼쳐집니다. 주어지는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목숨 걸고 싸울 일도 없습니다. 편안해집니다. 소화도 잘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 안에서 세상 것들로부터 이탈해서 주님을 향해 영적 여행을 시작하는 전환점을 마련하는 인생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생이며 의미 있고 새로운 인생이며, 영적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한때 빗나갔던 우리 자신의 인생을 겸손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떤 원인으로 인해 방향이 틀어졌는지 철저하게도 자신의 인생을 분석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시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확실하게 영적인 삶에로의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길 기원합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노년을 위하여>
아름답고 향기로운 노인이 되고 싶다. 젊었을 때의 그 순수함과 다감한 마음씨를 간직했으면... 점점 더 심해지는 아집과 집착, 그리고 편견 같은 것을 버렸으면... 아흔아홉 가지의 만족함을 팽개치고, 한 가지의 부족함에 목매는 어리석음도 놓아버렸으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으로, 하느님에게는 당신에 대한 그리운 가슴으로 살아가는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속에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되어 여름철 뜨거운 햇볕을 막아 주고 사람들이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늘이고 싶다.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이기양신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모든 성인의 축일을 탄생한 날이 아니라 돌아가신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돌아가신 날이 천상에서 다시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지상에서의 탄생 날을 축일로 기념합니다. 이렇게 탄생일을 대축일로 지내는 분은 예수님과 성모님, 세례자 요한 세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축일은 12월 25일이고, 성모 마리아님은 9월 8일이지요. 이 축일만 봐서도 교회 안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와 같은 비중으로 존경을 받고 있을까요? 복음을 보면 하느님의 사람이었던 세례자 요한은 잉태되고 태어나 자라서 죽을 때까지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만 살펴보아도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탄생했음을 알 수 있지요. 성모 마리아를 찾아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던 천사 가브리엘은 주님의 탄생 예고 6개월 전에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1,13-14)
즈카리야는 믿을 수가 없었지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1,18)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1,19-20)
하느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고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는 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던 날 아기의 할례식을 하던 성전에서 사람들이 아기 이름을 묻자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63)이라고 하느님의 섭리를 그대로 고백하고 나서야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자체가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으며 구세주의 탄생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알아들을 수가 있지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준비했던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난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구세주 예수님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었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놀라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사람들은 하느님의 손길이 세례자 요한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루카1,80)습니다. 그 후 세례자 요한의 놀라운 언행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요.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루카3,21-22)
그런데 아직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이전이라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구세주로 확신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많은 예언자들과는 달리 요한에게서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써의 표징이 곳곳에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당신이 그리스도냐?고 묻고 따르자 세례자 요한은 증언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3,16)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자기의 입장을 표명하지요. 과연 놀라운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인기가 올라가면 부화뇌동하듯이 주변의 상황에 휩쓸려 자기가 뭐라도 된 듯이 경거망동하기 쉬운 것이 우리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지요.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대중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고 ?당신이 구세주가 아니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기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얼마나 큰 분인지를 미리 준비시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향하는 모든 시선을 단호하게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만들지요. 이러한 세례자 요한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7,28)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하느님께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고백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예수가 누구이시고 또 자신이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깨달음이지요.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원만한 관계도 있지만 많은 경우 크고 작은 불화를 겪게 되지요.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과 정반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더 커지셔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크고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나를 강요하기 때문에 문제들이 생기는 것이지요. 우리 시대는 그 어떤 때보다도 세례자 요한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3,16)는 말씀에서 보이듯 나를 낮추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요즘 많은 가정이 상처를 입고 안타까운 파경을 맞고 있지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만을 크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소리를 높이고 엄마가 높이며 심지어는 아이들까지도 자기 주장만을 앞세우지요. 그 결과는 관계의 단절과 그칠 줄 모르는 파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강요하면 원만해질 수 없을 뿐더러 어떤 단체도 불화에 시달리지 않을 수가 없지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모든 것을 오직 주님을 증언하고 고백하는데 다 바친 사람입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그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가정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싸움이 있을 수가 없지요. 주님이 들어서지 않고 그 자리에 내가 들어서면 아무리 조용한 곳에서도 평지풍파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내면서 이렇게 한번 살아볼 것을 여러분께 권합니다.
?나는 당신의 신발 끈을 풀어줄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세로 한번 살아보지 않겠습니까? 구두에 신발끈이 없다고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말고 내가 커지기보다는 상대방이 커질 수 있는 기회를 서로가 제공한다면 참으로 원만하고 복음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씀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7,12)하신 예수님 말씀과 맥을 같이 하지요. 우리 시대가 시끄러운 이유는 세례자 요한 같은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닮은 삶을 살아서 많은 사람들이 나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뜻 깊은 하루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아이의 탄생의 비밀 -김지영신부- 한 생명의 탄생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기대를 갖게 합니다. 한 생명이 자라서 어떤 인물이 되며,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아기가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준비할 뿐입니다. 전에 제가 혼인 주례를 했던 부부가 예쁜 아이를 낳아서 돌잔치에 초대를 했습니다. 한 아이의 돌잔치를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으로 참 많은 사람의 위상이 바뀌는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남으로 신랑은 아빠가 되었고, 신부는 엄마가 되었고. 장인·장모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었고, 누구는 삼촌이, 누구는 이모가 되었습니다. 본인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고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거저 얻어진 위상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아이의 탄생은 이 아이와 관련된 주변의 모든 사람의 위상을 바꾸어 놓는 놀라운 힘을 가졌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한 아이의 탄생은 세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 아이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때가 시작됩니다. 또한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경계선이 생기며,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를 마감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는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탄생을 두고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태 11,9)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이 사람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극찬하셨습니다. 이 아기의 이름은 ‘요한’으로 그 뜻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의미로 아기와 그 아기의 사명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는 표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이사 49,1)고 하듯,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이름 ‘요한’의 탄생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 구원의 서막이 시작됨을 알리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요한은 태어나기 전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루카 1,44). 그래서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자로 간택되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시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모두가 ‘요한’이란 이름으로 불림을 받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보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세례자 요한의 신앙 고백처럼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삶 안에서 그리스도만이 커지실 수 있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 성인들의 축일은 대개 돌아가신 날로 지내는데, 세 분은 탄생일도 축일로 지냅니다. 바로 예수님과 성모님,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분들의 탄생이 그만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성무일도 독서기도 찬미가는 그의 역할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세상의 죄 없애는 거룩한 분을` `성 요한은 손으로 가리키셨네.”
아침기도 찬미가에서는 “한 개의 화관으로 장식된 성인` `또 다른 성인들은 두 개의 화관` `요한은 더욱 많은 꽃이 꽂혀진` `세 개의 화관으로 장식되도다.”
세 개의 화관이란 ‘눈처럼 깨끗하게 죄 없으시며’에서 동정의 화관, ‘사막의 개척자요, 크신 예언자’의 화관 그리고 ‘훌륭히 믿음 지킨 순교’의 화관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태 11,9)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극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구조를 살펴보면, A 57절 엘리사벳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음은 A`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심(66ㄴ)과 맥을 이룹니다. B 58절과 B` 65-66ㄱ절의 이웃의 반응이 한 조를 이룹니다. C 59절과 C` 64절이 아버지 즈카르야와 연관이 됩니다. D 60절과 D` 62-63절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61절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란 구절이 한가운데에 남습니다. 왜 이 구절이 중심에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웃들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의아해했지만 실로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란 뜻으로 아기와 그 아기의 사명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는 표지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요한은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경계선입니다. 주님 친히 이것을 증명하십니다. ‘요한까지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요한은 구약을 대표하고 신약을 예고합니다. …`요한은 태어나기 전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자로 간택되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시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미약한 이해력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하느님이 주신 아기이기에 ‘에드워드 1세, 2세’ 하듯 혈육에 의한 이름이 아니라,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ㄷ)고 하듯 하느님 뜻에 의한 이름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바야흐로 은총과 자비의 때가 시작됨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리는 전주곡 같습니다.
첫 서원을 하면서 수도생활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물론 상황이 나쁘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을 찬미로 풀어내야 하는 삶이라고. 수도자들은 밤 대침묵 후 아침 시간경을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라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입을 여는 이유는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 기도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한 즈카르야가 맨 먼저 한 말도 하느님 찬미였습니다(1,64). 그런데 그가 하느님의 일을 찬미하기까지는 열 달이라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야곱의 우물」 3월호 ‘장자 읽기’에 의하면 ‘심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으라.’고 하였지요. ‘귀는 소리를 듣는 데서 멈추고 심은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여 머무를 뿐. 기는 비어 있어서 온갖 것을 다 받아들이는’ 그런 들음이 되라고 합니다. 이렇게 들을 줄 알 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과 달리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의심하고 벙어리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운명처럼 어머니의 기도로 태어난 구약의 첫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도 세 번째 부르심에서야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라고 합니다. 그 사무엘은 자라서 자기 뜻대로 한 사울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1사무 15,22)라고 질책합니다. 다윗은 “당신께서는 희생과 제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주셨습니다.”(시편 40,7)라고 노래합니다. 신명기 6장 4절 “이스라엘아, 들어라!”에서부터 집회서(3,1)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당신 말씀을 제대로 듣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셨지만 제자들과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듣지 못하고, 또 듣지 않는 사람들인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공자님도 나이 육십에 이순(耳順)이라 하셨으니 제대로 듣는 일이 분명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는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이사 50,4)는 마음으로 살지 않았을까요? 잘 들을 때 잘 말할 수 있게 되며, 잘 들음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좋은 터전입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는 데서 일치를 이룹니다.
아버지를 들을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든 이 축복받은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지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으로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기 위하여.
† 세례자 요한 :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 † -박상대 신부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함께 살아간다. 부모를 잃고 피를 나눈 형제도 없는 혈혈단신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없어 봉양을 받지 못하는 독거 노인이라 할지라도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또 살아가야 한다. 이 땅에서 아무도 홀로 살지 않는다. 누구나 아이로 태어나지만 시간이 흐르면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며, 노인이 된다. 주어진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모르는 사람이라도 길가를 서로 스쳐가며,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쉬며 살아간다.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람과 친분을 쌓으며, 이럴 줄 알았던 사람의 또 다른 저런 면을 체험하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기도 하며, 속이고 죽이기도 한다.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
그러다가 삶의 실존과 진면목을 깨달을 때면 원하든 않든 하나씩 순서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뜻하지 않는 불의의 사고로 선뜻 가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은 실로 크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며, 다 똑같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재물이 좀 있고, 권력이 좀 있다하여,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하여 자신의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생명과 삶을 가볍게 여겨 무참히 짓밟고 앗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사람의 마지막은 모두 다 같다. 그래서 사는 동안 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덕을 발휘해야 한다.
세상의 사람이 모두 다 같다고 했지만 유독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를 두고 하느님이신 예수께서는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마태 11,11)고 말씀하셨다. 세례자 요한이 이 세상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큰 인물이라는 말이다.
왜 세례자 요한만이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홀로 가장 위대한 사람인가? 오늘 그의 축일을 맞아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12월 25일 예수님의 성탄대축일을 정확히 6개월 앞두고 교회는 오늘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대축일로 기념한다. 교회의 공식 전례에서 성모 마리아(9월 8일)를 제외하고 지상 탄생을 경축하는 성인은 세례자 요한뿐이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러한 대우는 방금 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합당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례자 요한의 놀라운 탄생예고 또한 하느님의 구원역사 안에 자리 잡은 요한의 무게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울러 요한은 탄생이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예수를 잉태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인사를 통하여 거룩함을 영접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구원사적 역할은 우리가 그의 탄생을 경축할 만큼 중요하다. 첫째로 요한은 옛 계약과 새 계약의 연결역할을 담당한다. 요한의 출현으로 구약(舊約)은 중지되고 신약(新約)이 시작된다. 둘째는 요한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자(使者)로 파견되어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예수님 스스로도 그에게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하였으나, 요한은 자신을 이미 도래한 메시아에 비하여 그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비천한 존재로 소개하였으며, 말씀이신 성자에 비하여 자신은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단식과 참회, 금욕과 기도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의 사람들과는 달리 살았던 것이다. 많은 보통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았으며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사람들을 예수께 넘겨준다. 이 사람을 두고 예수께서는 모든 예언자를 능가하는 훌륭한 사람이며,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엘리야가 바로 요한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왜 세례자 요한만이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홀로 가장 위대한 사람인지가 밝혀졌다. 그러나 아직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도 그 한 부분을 말해준다.
루가복음사가는 다른 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탄생 범주 안에서 요한의 탄생예고, 탄생, 할례식(루가 1장),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전도(루가 3장)를 독자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두고 기뻐하는 부모와 그 이웃과 친척들의 모습과 율법에 따른(창세 17,9-27) 아기의 할례식을 들려준다. 아기의 탄생과 할례(割禮)는 이름을 짓는 명명(命名)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 순간 10달 동안 벙어리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즈가리야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양하게 된다.(루가 1,67-79)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는 뜻을 가진 ‘요한’의 이름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들은 요한의 탄생을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 아이를 통하여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단지 그들은 무엇인가 대단한 것의 서곡(序曲)이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그것은 무언가 가까이 계신 하느님의 숨결이 오늘 이 작은아이의 탄생 안에서 경이로운 기쁨으로 채워지고 있음이다.
오늘 태어난 이 작은아이가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사람이 하느님의 오실 길을 고르고 닦으며 준비하고 있는 바로 이것이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만이 홀로 위대한 이유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유독 요한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세례자 요한의 의로운 삶 †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오늘복음 묵상은 대부분 강론들이 루가복음을 중심으로 한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련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그 내용을 중복하여 묵상하는 것 보다는, 탄생부분은 앞의 강론들을 참조하시고,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정체와 사명을 중심으로 묵상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예수보다 한 걸음 앞서서 등장합니다. 거의 모든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활동에 앞서 요한의 출생과 그의 활약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그를 뒤따라 올 메시아 예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서 보냄을 받은 메시아의 선구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을 말할 때 요한부터 말하기 마련입니다.
요즘 정치현실로 말한다면 세례자 요한은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하기 전에 현 정권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정권인수위원장에 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요한의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선포이고 둘째는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은 뒤에 올 메시아에 관한 예언자적 선포 또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요한의 설교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임박한 메시아 심판의 경고, 윤리적 혁신,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 이렇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정체와 사명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말하지 않고는 요한의 정체를 규정하기 불가능하고 그 반대도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I. 세례자 요한의 정체와 사명
우선 루가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할 때 다음의 이사야서 구절을 인용하여 선포한 세례자 요한의 말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가 3,4-5)
이 귀절은 이사야 40장 3-5절의 인용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세례자 요한 자신이 밝힌 그의 정체(요한 1,23)와 관련된 말이기도 합니다.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우리 말 공동번역성서, 요한 1,23)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목소리"라는 것이 바른 번역입니다.
요한이 목소리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라는 목소리였다는 말인데 메시아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메시아를 보내신 하느님의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목소리 자체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 목소리가 전파한 것은 길을 고르게 하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리고, 굽은 길을 곧게 하며, 험한 길을 고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시 왕이 행차할 때 그 선발대가 앞서 가서 백성들에게 길을 보수하고 청소하게 하는 동양의 군주정치 하에서의 관례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도 대통령이 행차할 때 경찰 기동대가 요란하게 출동하는 것과 같고 대통령이나 판사가 들어 올 때 외치는 소리이고 이 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는 것과 비슷합니다. 메시아가 그의 선구자를 앞서 보내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라고 권유하는 역할을 위해 세례자 요한이 보냄을 받아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준비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라고 요구했습니다. 토목공사와 관련된 말이기는 합니다만, 이사야서의 인용인 이 말씀은 물론 단순한 도로공사나 도로 청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불평등한 제반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평등하게 바꾸라는 사회정의의 수립과 평화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 오심을 준비하는 길은 개인의 내면적, 종교적인 사적(私的) 차원에서의 "마음"의 준비는 물론 사회적 삶의 실천적 차원에서의 준비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요한의 말을 뒤집으면 "주의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메시아가 오시지 않고 하느님의 구원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세례자 요한이 한 것은 세례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교활동 중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례였습니다. 그는 예언자였지만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례는 그에게 아주 중요했습니다. 세례란 말은 "씻는다," "깨끗이 한다"는 희랍 말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루가는 세례란 말로 죽음의 경험(루가 12,50)과 성령을 받은 경험(3,16)을 말하고는 있으나 요한이 베푼 세례의 성격은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보는 종교적인 세례와는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18절까지 다 읽어야 합니다만, 오늘 본문의 길이 관계로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6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 사실이나 예수님이 과연 세례를 베풀었는가? 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고 신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문제를 놓고 해석이 분분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기서 성령이라고 번역한 것은 희랍어의 '바람'과 같은 말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바람과 불을 동반하는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사막의 종파로 탈세계적이었던 엣세네 파도 세례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엣세네 파에서 전수한 것이 아닌가 라고 보는 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은 고아로서 아주 어릴 때부터 엣세네 파에 의해 입양되고 양육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엣세네 파의 세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 있다고 나는 봅니다. 즉 엣세네 파의 세례는 탈 정치적이지만, 요한의 세례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종교적 의미보다도 정치적 의미가 더 중요하고 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의 세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하는 교회 내에만 국한하고 있는 종교적 의식(儀式)의 차원보다도 더 광범하게 사회적-정치적 운동의 차원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거짓말을 한다거나 도덕적-종교적 계율을 어기는 것이나 좁은 의미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죄를 의미함은 물론이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예수만이 개인과 민족을 해방하는 힘이 있다는 메시아의 통치 아래에서의 삶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을 죄로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요구, 이렇게 죄에 대한 광범한 이해는 유대사회, 특히 상류계층인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준 것 같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요한은 굉장한 카리스마적 설교자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회개의 증거를 보이고 그 징표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루가복음은 이러한 요구로 도전한 세례자 요한에게 수많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요한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각각 그 직업에 따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의 사회 윤리적인 질문하였고 또 요한의 요구에 따라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무엇을 회개할 것인가에 대하여 요한은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사회적 삶에서의 신의와 정의를 세우라는 것, 평화를 도모하라는 것, 민족자주를 세우라는 것 등이었음이 주목스럽습니다.
회개가 무엇인가? 일반적인 이해입니다만, 하느님에게 돌아서는 것, 그리고 잘못된 일에 대하여 통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던 일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회개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직업은 세리들, 군인들로 되어 있고 일반 군중들도 요한에게 나와서 무엇을 개혁하고 회개할 것인가를 물었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청중들은 군중들인데 이들은 한결 같이 그 사회에서 억압을 당하던 민중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군중들이 무엇을 가진 게 있다고 그들에게 요구할 것이 있는가? 라고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절대 다수의 군중들이 헐벗었고 굶주렸다면 그래도 입을 것이 있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이거나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분명히 부자하고 할 수 없을지 모르나 나은 사람을 의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라고 하였고, 군인들에게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3,12-14)고 말하였습니다. 외세의 억압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사회에서 로마식민당국에 의해 고용된 세리는 경제적으로 민중을 착취하고, 군인은 권력으로 민중을 위협하고 억압하고 재산을 갈취하는 등 권력남용을 자행하였고 이에 민중들이 얼마나 고생을 당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고 예수님은 이렇게 고난 당하는 민중들의 삶과 고달픔을 옹호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군인과 세리를 거명하여 고치라고 요구한 것은 권력자들에게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와 착취와 억압을 중단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곧 민중 해방적인 성격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들은 물론 인간 사회의 직업의 전부를 말하는 것도 모든 부류의 인간을 다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그 당시 사회에서는 가장 주목을 받았고 지탄을 받고 있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컨데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세례를 통한 메세지는 구태의연한 마음가짐과 생활태도, 그리고 사회적 현실로는 새로 동터오는 메시아 시대를 맞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하늘나라의 정의는 당시 세상의 권력자에 의해 좌절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II. 세례자 요한의 순교(마태 14,1-12)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증거 했듯이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으므로 당연히 그의 죽음도 가장 위대한 죽음이어야 했습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죽음은 순교입니다. 그는 메시야가 아니기에 십자가에서 죽으면 안 됩니다.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유사점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가 불의를 질책하다가 헤로데왕에게 순교를 당한 것은 선각자다운 순교이며 사명자로서의 훌륭한 죽음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1. 헤로데왕의 인간성
신약에는 헤로데라는 이름이 여려명 있습니다. 마태 2장에서 베들레헴 지역의 어린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헤로데왕 혈통의 제1인자로 그의 이름을 대 헤로데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아래로 아들들과 손자들로 6명의 헤로데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유대 지역에 있는 여러 지방의 분봉왕직을 나누어 누리며 권세를 잡았던 자들입니다. 그 중에도 베들레헴 지역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대 헤로데라는 자는 뇌물을 주고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왕으로 임명받은 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동안 퇴락한 즈루빠벨의 성전을 재건하기로 하여 이 대공사를 주전 19년에 시작하여 주후 64년경에 마무리졌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헤로데왕이 건설 중에 있는 성전에 출입하셨으며 완공을 보지 못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대 헤로데는 난폭한 성격과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집념으로 그가 사랑하던 아내 마리암메와 그의 아내의 조부인 힐키너느, 부인의 동생 아리스토불러스 그리고 자기의 아들까지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이 헤로대의 아들로 사마리아 여인 말다게 사이에서 태어나 갈릴래아, 티베리아의 분봉왕으로 헤로데 안티파스란 이름을 가지고 행세했던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를 일컬어 여우라고 부르신 일도 있으며 헤로데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일도 있으십니다. 이 헤로데왕은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늘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이 유다에 퍼지자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착각하리만치 정신적으로 혼미한 착란상태에 있었습니다.
2. 헤로데 안티파스 죄악
헤로데 안티파스는 혈통적으로 부전자전의 유전을 받아서인지 그의 생활면이 도덕적으로 패륜했습니다. 그가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들은 것은 하느님의 질책이었건만 그는 오히려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고 그를 목을 베어 죽임으로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의 패륜적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가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은 도덕적으로 질책 받을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네 형제의 아내의 부끄러운 곳을 벗겨도 안 된다. 그것은 곧 네 형제의 부끄러운 곳이다."고 하셨습니다(레위 18,16).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무력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2)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무시했습니다. 헤로데의 인물됨은 다윗과는 천양지차였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이유로 질책을 들었을 때에, 담요가 젖도록 밤새 회개하는 통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그를 옥에 가둔 것입니다.
(3) 헤로데는 경솔한 맹세를 하므로 인생 일대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맹세는 모든 일의 최종적 결정이기 때문에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는 헤로데는 맹세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고 함부로 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석에서 그 마음이 흥겨운데다가 헤로디아의 춤에 매료되어 "무엇이든지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는 약속을 맹세로 한 것입니다. 그 맹세가 올무가 되어 의인의 목을 베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4)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정신적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서도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 세례자 요한이 살아나 다시 활동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더욱 그의 생애는 정신적으로 극한의 불안과 두려움 상태로 살게 됩니다.
3. 세례자 요한의 순교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 대하여 몇 가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요한은 불의한 일을 질책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에게 찾아가 그 앞에서 그의 패륜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야를 증거한 후, 그의 사명을 마치면 순교로서 하느님께 갈 줄로 아셨습니다. 순교는 요한에게 합당한 죽음이며 영광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순교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것은 그 인도하심이 하느님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와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의뢰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은 한낱 부도덕한 폭군에 의해 비록 짦은 생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그는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전부다 끝내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늘나라를 세우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거룩한 임무를 완수하고, 주님을 위해서 이 세상을 물러간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세상 권세의 죽음을 통하여 소망을 이루었으니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려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한 말씀을 그대로 이루고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