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몇일 지나면 경칩이 오고 봄이 오면서 몽매에도 잊지못할 "3.1절"이 옵니다. 지금부터 93년전,1919년 기미년3월1일, 개신교는 천도교-불교와 함께 3.1운동에서 지도적역할을 담당했으며, 전국 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독립만세 시위 상당부분이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주도됐읍니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한 피해도 많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의 "제암리교회"입니다.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3.1만세운동이 벌어진것을 목격한 당시 화성시 제암리교회의 젊은 개신교 신도 몇사람은,서울에서 도보로 돌아가면서 (걸어서) 제암리 거주 집까지 수일만에 도착하여 이 사실을 몇몇 신도들과 의논한후, 3월30일 정오 (발안장날)에 발안장터에서 립만세운동을 일으켰읍니다. 만세운동은 화성시 제암리의 개신교 신도들과,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지도자 백낙렬, 향남읍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팔탄면 고주리의 천도교지도자 김홍렬 등이 계획하였고 (1) 3월30일(장날) 발안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서 시작되었읍니다. 장터에 뫃인1,000여명이 따라 만세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경찰의 위협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젔으며,이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마을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서 만세운동은 계속되었읍니다. 일본군 진압부대는 주재소 (지금의 파출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였으며, 이정근과 그의 제자 김경태,김성열(고주리)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났고. 이때 흥분한 시위군중이 일본인 가옥이나 일본인학교등을 방화, 파손하였고, 정미업자 "사사카"등 43명이 30리밖(8km) 장안면 삼괴리 지역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젔읍니다. 일본 정미업자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15일 제암리 사건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읍니다. (2) 4월1일 발안 인근의 마을주민들이 발안장터 주변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으며 (3) 4월2일 제1차 검거작전을 시작, 경기도 일본경찰 경무부에서는 헌병과 보병, 순사(경찰)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냈었으며 6일까지 이어젔읍니다.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 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였으며. (3) 4월3일 인근 화수리, 수촌리에서 만세시위가 계속 일어났고.(4) 4월5일 새벽 3시반경에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으며(수촌리학살사건) (5) 4월5일 정오, 제암리 발안리 발안장날을 맞아 또 시위가 일어났고 (6) 4월9일부터 16일까지 검거반은 제2차 검거작전을 벌였으며 (7) 4월13일 일본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읍니다. 토벌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유지가 그들의 임무였지만. 그러나 다른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작전으로 대부분 채포되지 않아 불안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티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웠으며.(8) 4월 15일(장날) 오후 2시경,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읍니다.(9)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것을 "사과하려고 왔다" 라고 거짓말하며, 제암리 주민가운데 성인남자(15세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였으며.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고.(10) 아리타 중위가 교회안에서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출입구에 못질을 하고 사격명령을 내렸고, 벽의 창문을 통해 예배당 안으로 총질을 하였으며 (11) 사격이 끝난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으며. 바람이 세게 불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에는 군인들이 다니며 방하였고 (12) 교회에 불이 붙자"홍"(홍순징으로 추정)과 "면사무소"에 다니던 사람(노경태)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사무소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사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으며 (12) 탈출하다가 사살된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 구가 교회밖에 딩굴었읍니다. (13) 마을에 불이 난것을 보고 달려온 "강"(강태성?) 의 아내 (꽃다운 19세신부)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고 (14) 홍원식 권사도 군인의 총을 맞고 죽었으며 (15) 옆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 하였읍니다 (총살 및 시신에 불을 질러 죽은을 당한 인원~23명) 이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 일대에서는 사람과 가옥, 가축, 의류, 곡식등이 불타는 냄새와 연기가 10여km 밖까지 퍼저 나갔다고 전했으며, 일제의 감시때문에 교인들은 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못내었다 합니다. 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이 사건을 전해들은 Canada 선교사 Scofield 박사 가 며칠후 불탄교회에 찾아 오셔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 입구에 묻을때까지 방치됐었다 합니다 (15)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2,023,098명, 피살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된사람46,948명,민가 방화소실 715호, 학교소실 47개소 였읍니다, 제암리 교회는 1905년 8월 마을 리장인 안종후씨 (저의 외가집 종손)에 의하여 설립되었고, 1938년에 다시 세워젔고, 8.15 광복후 1959년 4월 이곳 현장에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3.1운동 순국기념탚"을 설립하였고, 1970년 일본 기독교인 및 사회단체들이 속죄의 뜻으로 성금을 뫃아 1,000만엔(Yen) 으로 교회와 유족위로회관을 설립, 1982년9월 정부의 대대적인 유해발굴작업 후 교회옆에 안장, 1983년 7월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기념관 및 새 기념탚을 건립한 이래 국내 개신교는 물론 매년 일본인 추모 관광객3,000여명을 포함하여 약 40,000명이 방문하는 참배추모장소가 되었읍니다.교회설립자인 안종후씨의 종손인 안정순씨(전 향남읍장 역임,저의 외가종손)댁에서 900여m떨어진곳 마을에서 출생한 저는 이곳에서 자라서 국민학교와 중학교까지 다녔는데, 매년 3.1절 기념식에는 전통적으로 경기도 지사를 비롯한 기관장, 유지들, 종교인, 학생등, 3,000여명이 뫃여 기념식을 이어왔고, 이어서 도보행진(교회에서 발안 장터까지 약 1km)을 하며 두주먹을 불끈 쥐고 울먹이면서 3.1절노래를 부르던 감회가 새롭고,매년 외가집인 이지역을 찾아 추모방문하고는 하였읍니다. 이번에 소망교회 "새마음선교회"(회장 오병용 장로) 회원들께서(평균년령75세) 3월중순에 이곳 제암리교회를 찾아 순교하신 영영들을 위로하고 추모예배를 드리고 기념관을 둘러본 후,다시 평택소재 미국제7공군작전사령부(전투단 비행장)을 방문하여, 이곳 미군 RADAR 시설이 이북 땅 전체를 정밀하게 24시간 검색, 감제하며 유사시, 즉시 한.미공군이 출동하여 적과 대치하는 한국방어의 총 사령부인데,전투기와 기념관등을 관람한 후, 아산만 평택항의 해군2함대사령부에 전시되어 있는 '천안함"을 찾아가서 순국한 장병 46위를 위로추모하고 돌아올 예정입니다. 작년에는 소록도 한셈병환자위문과 소록도중앙교회에서 추모예배, 그리고 여수의 고 손양원 목사님(두아들을 인민군총에 잃은후, 총을 쏜 인민군을 교화하여 선교후 목사로 변신)님의 기념관과 묘소를 참배한바 있고, DMZ 를 방문(1박2일)하여 병사들에게 선교와 위문을 하였고, 독도를 방문하여 일본의 침략,찬탈기도를 규탄하고 온바 있습니다. 하나님 주님앞에 속죄하면서 인생의 느을을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이 겨례 잘 살게 하옵소서" 기도 하는 마음으로 한발자국씩 나아가고 있고 년로하신 회원님들의 회비로 움직이는 선교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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