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음주(1)
정약용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니 모두 좋아하지
거문고를 다시 비스듬히 안네
홀로 천년의 벗을 생각하고
권세가의 집에는 가지 않네
만물이 어찌 변함이 없으리오만
어이하여 우리 인생 끝이 아닌가
한가롭게 바라보는 뜰에 해 그림자 옮겨 가니
꽃 그림자 몇 가지로 갈라지네.
飮酒(一)음주(일)
麴米醺皆好(국미훈개호) 雲和抱更斜(운화포갱사)
獨思千載友(독사천재우) 不向五侯家(불향오후가)
物態寧無變(물태영무변) 吾生奈有涯(오생내유애)
閒看庭日轉(한간정일전) 花影幾枝叉(화영기지차)
[어휘풀이]
-麴米(국미) : 누룩을 넣어 담근 술. 醺(훈) : 술에 취하다.
-雲和(운화) : 원래 산 이름인데, 그곳에서 거문고 만드는 재목이 나와
거문고의 이칭으로 쓰인다.
-思千載友(사천재우) : 상우천고(尙友千古:천년을 거슬러 옛사람과 벗함)의 의미이다.
[역사이야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자 시인이며 실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다산(茶山)은 근기지방(根器地方)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 때 주요 관직에 있었으나 청년기에 접한 서학(천주교)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 기간 중 학문을 연마해 6경 4서에 대한 연구와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심서(欽欽新書)』 등 500여 권의 저술을 남기고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현상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 질서를 새롭게 강화기키려는 뜻을 가졌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쟁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된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통치 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 등이 중시한 성리설과는 달리 선징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대략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출생 이후 과거 준비를 하던 22세까지 부친 정재원(丁載遠)의 임지인 전남 화순, 경상도 예천, 진주를 따라 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를 배우며 과거시험을 준비하였으며, 서울에 살 때 문학으로 이름을 날린 이가환(李家煥)과 매부 이승훈(李承薰)을 통해 근기학파의 중심인물인 이익(李瀷)의 학문을 접하게 된다.
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1801년 발생한 신유박해로 체포되기까지 이후 10여 년간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 여러 관직에 종사하였으며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했다. 이 무렵에 이벽(李檗), 이승훈(李承薰) 등과 접촉하여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자긴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게 된다. 1791년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했으나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정조 사후 1801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일어난 신유박해로 유배를 당하면서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된다. 다산은 먼저 유배지인 장기(長鬐 경북 포항)로 떠났으나 곧이어 발생한 ‘황사영 백서 사건’으러 다시 문초를 받고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학문 연구에 매진하며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講學)과 연구, 저술에 매달리어 실학의 학문을 완성시키게 된다. 1818년 57세 때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와 1836년까지 500여 권의 저서를 제자들과 함께 정리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편찬했다. 다산은 유배 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 서학에 접근했다. 다산은 선진 유학을 비롯하여 여러 사상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는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학자이며 시인이었다.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