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도 4장 15 - 17절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구약 성경에 보면 금식을 하며 기도하는 장면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 종류들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를 할 때 금식하여 기도를 했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었지만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이세벨이 음모를 꾸며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여 남편 아합에게 주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합이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았지만 욕심 때문에 그 포도원을 받았고 하나님은 이런 아합에 대해서 진노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전하자 아합이 금식을 하면서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아합에게 내리셨던 진노를 거두셨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금식 기도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니느웨성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에 대한 예언을 듣고 금식하며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회개조차도 들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을 때 금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가게 되는데 무려 사십 일 동안 금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8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들어야 할 때 구별된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 금식함으로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육신의 정욕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를 기뻐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슬픔을 표현할 때 금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길보아 산에서 사울과 그 아들들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죽게 되자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사울과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를 치르고 칠 일 동안 금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슬픔을 금식을 통해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기도할 때, 간구할 때 금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을 해서 낳은 아이가 하나님의 치심을 통해 심히 앓게 되는데 다윗이 금식을 하면서 간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아이가 죽게 되지만 금식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 기도인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식기도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오늘 우리가 묵상한 말씀 속에 나오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잘 느끼면서 이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런 금식의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보니까 금식이 보편적 관행이 되어서 자기 자랑을 위해 금식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금식 기도에 대해서 매우 따끔하게 지적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6절 말씀에 보면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17, 18절에 보면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렇게 가르쳐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받는 칭찬과 인정이 큰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은혜가 큰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한 것인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금식 기도는 절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금식 기도할 때 자기 부정을 하면서 해야 제대로 된 금식 기도라고 할 수가 있지 오히려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기 위한 기도가 되면 그런 기도는 절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에스더가 금식 기도를 시작하면서 뭐라고 고백을 하고 있냐면 “죽으면 죽으리이다” 지금 에스더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금식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금식 기도 때문에 자신은 위험에 쳐할 수 있고 왕에게 금홀을 받지 못하면 죽게 되는 신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랑을 위해서 금식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부인하며 금식 기도를 했기 때문에 이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 - 25절 말씀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금식 기도뿐만 아니라 모든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영적 원칙에 따라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런 각오와 결단으로 살아가면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영적 원리와 정반대로 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살면 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치는 것이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습관을 가지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로지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고쳐지지 않으면 사십 일, 그 이상을 금식하며 기도할지라도 그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금식 기도가 굉장히 중요하고 유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금식 기도나 금식을 통해 유익을 못 누리고 있다면 우리를 부인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중요한 문제만 놓고서 금식 기도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금식해야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금식하면서 살아야지 자기를 부인하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런 영적인 자세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면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서 에스더처럼 죽으며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세요.